국가신토

 


國家神道[1]
국가신도
1. 개요
2. 설명
3. 소멸
4. 관련 문서


1. 개요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의 권위 향상을 위해 일본의 전통문화인 신토를 국가가 조직적으로 개량해 만든 종교 혹은 사상이다.
명목상으로는 1945년일제가 패망하면서 중단되고 GHQ신도지령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소멸하였으나, 신사본청은 민간종교법인으로 분리되어 개개별로 신사를 관리하며 지금도 존재한다.

2. 설명


전범 합사 논란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
과거에는 국가신토적 행정 아래 면세와 보조금 등 혜택을 받았다.
원래 토착적인 애니미즘 신앙이였던 신토메이지 유신 이후 중앙정부에 충성하도록 만들어낸, 그 특유의 종교성의 껍질을 벗긴 사상. 여기서 '종교성의 껍질을 벗겨온'이라는 표현이 중요한데, 메이지 정부나 당대 일본 지식인들은 국가신토를 신앙이 아니라 그저 야마토의 문화일 뿐이라고 주장했고,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쿄대학의 종교학자 야나가와 케이이치(柳川啓一) 등은 국가 신토가 교리(dogma)적 형태를 표방하고 있다[2]고 논증하였으며, 실제로도 천황의 불가침성과 신성성을 강조하는 제정 말기의 사회상, 전쟁 수행에 있어서 군종 프로파간다 역할을 수행한 점으로 미루어봤을 때 하나의 정신적 지배체계로 작용했음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메이지 정부에서 국가신토를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 데에는 법률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일본제국헌법은 서양의 헌법을 모방하여 정교분리를 표방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신토를 종교라고 주장한다면 정부 차원에서 헌법을 어기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헌법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개개인이 따르는 종교와 상관없이 (당시 식민지 조선인, 대만인 등을 포함하여) 모든 일본인들에게 국가신토를 따르도록 강요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신토를 종교를 넘은 것, 즉 초종교(超宗敎)라고 주장하며, 국가신토와 불교[3]가 아닌 다른 이유로 국가신토를 거부함을 죄악시하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비국민이라 하여 탄압하기 일쑤였다.
원래 만세일계 개념은 '한 가문에서 나온다.'는 혈통 문제만이 아니었다. 역대 천황들은 대대로 즉위식을 거행하고 몇 년 뒤에 아마테라스 앞에서 음식을 차려놓고 같이 먹는 의식을 거행해 왔다. 이때 '역대 천황들에게 깃들여 왔고', '아마테라스에게서 유래한' 신적인 혼이 깃든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천황들은 여럿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라는 것으로, 이러한 사고는 고대 사제왕 신화에서는 형태를 바꾸어 여러 문화에서 나타난다. 심지어 야마토에 복속된 이즈모에서도 발견될 정도.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만세일계의 이러한 고대적 개념을 무시하고 국가 이데올로기에 부응하게 바꾸어 왔다. 하나의 혈통에서 내려오는 신성한 절대군주의 표상으로 간주한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의 일서에 기록된, 이른바 '천양무궁의 신칙'을 공교육으로 가르쳤다. 천양무궁의 신칙이란 아마테라스가 손자 니니기를 지상으로 보내면서 '저 아래 땅이야말로 너와 네 자손들이 만대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다스릴 땅' 하면서 축복한다는 내용인데, 일본서기 편집 당시만 하더라도 뒤늦게 나타난 소수 전승이었다. 일본서기 본문이나 다른 일서를 보아도 그런 말이 없다. 일본서기 내용 중 일본 민족주의의 입맛에 맞는 전승만 골라 조합한 것이다.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로 나선 이후부터는 식민지에 신사를 세우고 식민지인들에게 국가신토 사상을 강요했다.

3. 소멸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과 함께 미국에 찍혀서 금지되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적극적으로 일본기독교를 전파하였다. 다만 신토 자체는 군국주의의 산물이 아닌 일본 토착 신앙이기에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국가신토 자체가 일본의 근대 민족주의에 의해 개조된 것이니 어떻게 보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다.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저서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1권에서 국가신토 몰락이 일본의 정신적 방향상실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는데, 패전 후 민주주의가 꽃피자 국민들이 각기 다른 지향점을 제시하면서 공동의 가치관이 결여되어 정신적으로 국가를 표류케 만들었다고 한다.
신토가 '문화'의 개념으로 정착되면서 고대적 개념과 근대적 내용을 뒤섞어 꼬아 버렸다. 이러한 일은 근대의 국민개념을 천황 일가에 충성하는 신민개념으로 바꾸어서 중세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의 이행을 꾀하는 시도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천황의 인간선언과 함께 사실상 폐기된 사상이지만 극우 중 일부는 아직도 국가신토를 신봉한다. 또한 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절정을 달리던 때에는 '국가신토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했고 원본 신토도 현대에 와서 종교라기보다는 전통 문화의 하나로 변모하는 인식이 강하므로, 폐기된 종교란 표현 자체가 이상할지도 모른다.
국가신토를 제정하면서 전국의 신사를 관공서화했다. 그리하여 신사의 관리체계가 만들어져 수많은 와패니즈오덕 및 일본 문화에 관심이 있는 자들의 돈을 끌고 있기는 하지만, 천황 조정에 저항하다 패배한 반역자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는 신격이 격하되거나 아예 폐지당했다. 국가신토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전통적인 신토의 교리가 무시당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심지어 '''천황 관련 예식에서도 종교적 논리가 무시당하여 신토주의자들이 발끈하곤 했다.'''
GHQ가 없애긴 했지만 그 영향력은 신사본청이라는 모습으로 상당부분 살아 남았다. 저 신사본청의 고위직 간부 몇몇은 일본 불교계 인사 몇 명과 더불어 극우단체인 일본회의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새역모 찬동자이기도 하다. 신사본청에 등록된 신사 또한 국가신토 설립시 등록된 신사들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다. 제정 당시 논리로 인하여 폐지당하거나 격하된 신사의 복권은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신사본청에 등록을 거부하는 신사들이 소수 존재하는 것도 이런 전력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후 복권된 신사의 신도들은 국가신토를 상당히 싫어한다. 관련 주제가 나오면 대놓고는 말은 못해도 "그딴 족보도 짧은 잡것들과 우리는 다르다" 풍의 뉘앙스로 돌려서 깐다.
지배자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는 의미에서는 스탈린주의와 비슷하다. 아돌프 히틀러가 부러워했다고 한다.

4. 관련 문서



[1] 신자체로는 国家神道[2] 戦後の宗教と世界, 1976[3] 그나마 신불습합 때문에 일제 측에서 비교적 참작한 듯. 사실 신불습합 현상을 차치하면, 신토와 불교의 관계는 일본사 내내 좋다고 보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