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바투틴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Вату́тин
Nikolai Fyodorovich Vatutin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바투틴
1901년 12월 16일 ~ 1944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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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틴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활약한 소련군의 장군이다. 독소전쟁시 소련군 지휘관중에서는 가장 상상력이 풍부했다고 평가받는다.
바투틴은 보로네시 근처의 체푸히노 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에 붉은 군대에 들어가 적백내전에 참여했다. 1926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과 보로실로프 참모대학에서 수학해 참모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숙청 기간에 상관들이 숙청당함에 따라 바투틴은 쾌속 승진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38년에는 소장으로 승진하고 키예프 특별 군관구 참모장이 될 수 있었다.
1939년에 바투틴은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 과정에서의 군사작전을 계획했으며 게오르기 주코프의 지휘 아래 베사라비아 점령에도 참여했다. 스탈린은 바투틴의 공적을 인정하며 그를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총참모부에서 일하게 했다. 하지만 바투틴은 너무 젊었고 경험이 많지 않은 편이라서 총참모부에서 일하며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응할 작전 수립 과정에서 오판을 여럿 범하고 말았다. 총참모부의 참모로 일하는 와중에 바투틴은 작전 과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신임을 받고 그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바투틴은 6월 30일에 북서 전선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그곳에서 활동했다.
소련 북서 전선군은 에리히 회프너의 제4 기갑 집단을 선봉으로 한 독일 북부집단군에게 패하여 레닌그라드로 밀려나고 있었다. 제4 기갑 집단 소속인 그 유명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제56 기갑 군단은 빠른 속도로 진격하며 레닌그라드를 위협하고 있었다.
바투틴은 노보고로드 근처에서 제56 기갑 군단을 포위할 작전을 입안하고 실행을 명령했다. 만슈타인은 이 공세에 제법 놀랐지만 만슈타인답게 적절히 대처하며 군단이 포위당하는 걸 막았다. 하지만 바투틴의 공세 작전으로 독일군의 진격은 주춤했고 레닌그라드를 하계 기간 동안 점령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비록 전략적으로 소련군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사실 바투틴의 공세 작전은 작전적으로는 실패였다. 바투틴은 아군의 공세력을 지나치게 높게 잡았으며 너무 야심찬 목표를 설정했다. 그의 작전 조정 능력은 아직 형편없는 시절이었으며 그의 하급 제대 지휘관들은 너무 무능했다. 이 시절 바투틴은 당시 제28 전차 사단장으로 북서전선군 지휘관들 중 가장 유능했던 이반 체르냐호프스키 대령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와 급속히 가까워졌다.
1942년 동계 공세가 시작되자 바투틴은 데미얀스크 포위 작전을 입안했고 데미얀스크 일대의 독일군을 포위망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데미얀스크 포위망은 너무 약했고 공군력의 부족으로 인해 포위망 안의 독일군은 공중보급으로 버티며 포위망을 계속 위협했다. 결국 바투틴의 포위망은 독일군의 반격에 뚫리고 말았다.[1]
1942년 6월에서 7월 독일군의 청색 작전이 개시될 동안 바투틴은 총참모부로 돌아와 있었다. 1942년 7월 1일에 바투틴은 보로네시 전선군과 위험에 처한 브랸스크 전선군을 통합 지휘하는 스타프카 대리로 임명되었다. 한편 체르냐호프스키가 제18 전차 군단을 이끌고 독일군의 공세에 붕괴 위기에 처한 보로네시 전선군을 구원하러 제때에 달려오자 바투틴은 체르냐호프스키를 제60 소총군 사령관으로 승진시킬 것을 스탈린에게 건의해 승인받았다. 독일군은 보로네시를 점령했지만 보로네시 전선군의 방어선은 붕괴되지 않았다.
한편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한창일 때 천왕성 작전이 입안되자 총참모장 바실렙스키 대장은 바투틴을 새로 창설된 남서전선군 사령관에 임명해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돈 전선군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역포위 작전인 천왕성 작전에 참여하여 로코소프스키와 협격해 스탈린그라드를 역포위할 것을 명령했다.
아직 지나치게 젊은 장군이었던 바투틴에게 그런 중책을 맡기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지만 바실렙스키는 끝내 바투틴에게 임무를 맡겼다.[2] 바투틴은 로코소프스키와 함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독일 제6군을 파멸로 몰아넣는데 큰 기여를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로 소련군 전체가 낙관적인 분위기에 젖었고 바투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바투틴은 소련군의 공세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독일군의 작전 능력을 너무 얕본 나머지 무리한 갈로프 작전을 시행해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자포로제까지 진격하려 했다. 결국 만슈타인의 책략에 걸린 바투틴은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포포프 전차군을 비롯한 3개 야전군을 날려먹고 하르코프를 다시 뺏기게 되었다. 바투틴으로서는 다행히도 스탈린은 바투틴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그를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바투틴은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이 되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결과로 탄생한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의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바투틴은 스타프카의 명령에 따라 깊고 빽빽한 종심 방어진을 돌출부 남쪽에 건설했고 쿠르스크 전투 동안 위기 상황에 여러 번 처하면서도 만슈타인의 치열한 공세를 받아넘기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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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 쿠르스크 만슈타인 대 바투틴의 대결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DVD 커버.
쿠르스크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은 돌출부 남쪽에서 루미얀체프 작전을 개시했고 바투틴의 보로네시 전선군은 하르코프를 재탈환했다. 바투틴은 이후 키예프 탈환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드네프르 강 도하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비록 몇번 만슈타인의 반격에 많은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바투틴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작전을 완수할 수 있었다.
1943년 말에 바투틴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겨 이반 코네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함께 주코프의 지휘 아래 코르순-세브첸코 작전을 개시해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의 막을 열었다.
바투틴의 기동 부대인 안드레이 크랍첸코의 제6 전차군의 활약으로 포위망이 완성되었지만 바투틴은 제6 전차군을 공세종말점의 한계 이상으로 진격시키는 실수를 범했다. 결국 제6 전차군의 느슨해진 포위망이 뚫리고 바투틴이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함에 따라 체르카시 포위전은 소련의 완승으로 끝나지 못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바투틴을 크게 질책하며 그의 원수 승진을 보류했다.
1944년 2월 바투틴은 다시 코네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의 협격을 통해 카메네츠-포돌츠크 일대의 독일 제1 기갑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이 한창이던 그때 슬라브타 일대를 시찰하던 바투틴은 우크라이나 반 소련 분리주의자 게릴라[3] 들의 공격을 받았다.
바투틴은 게릴라의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키예프의 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4] 바투틴은 6주간 상처와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944년 4월 15일 43세 나이에 전사했다. 그의 형제인 아파나시와 세묜도 1944년 2월과 3월에 전사하는 바람에 바투틴의 어머니 베라는 두 달 사이에 세 아들의 장례식을 치러야 햐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독소전쟁 중 바투틴의 활약은 적지 않았으며 그의 활약을 기려 키예프에는 바투틴의 동상이 있다. 참모장교 출신이라서 처음에는 지휘에 조금 서툴렀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작전을 입안하는 공을 세웠다. 바실렙스키와 주코프의 구상으로 알려진 천왕성 작전(스탈린그라드 반격)도 사실은 그의 아이디어였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몇번이나 낙관론에 빠져 작전을 시행하다 패배를 당하고 체르카시 포위전에서 완승을 놓쳐 버리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조금 보이고 있다.
Nikolai Fyodorovich Vatutin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바투틴
1901년 12월 16일 ~ 1944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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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틴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활약한 소련군의 장군이다. 독소전쟁시 소련군 지휘관중에서는 가장 상상력이 풍부했다고 평가받는다.
1. 출생과 전쟁 발발 전
바투틴은 보로네시 근처의 체푸히노 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에 붉은 군대에 들어가 적백내전에 참여했다. 1926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과 보로실로프 참모대학에서 수학해 참모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숙청 기간에 상관들이 숙청당함에 따라 바투틴은 쾌속 승진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38년에는 소장으로 승진하고 키예프 특별 군관구 참모장이 될 수 있었다.
1939년에 바투틴은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 과정에서의 군사작전을 계획했으며 게오르기 주코프의 지휘 아래 베사라비아 점령에도 참여했다. 스탈린은 바투틴의 공적을 인정하며 그를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총참모부에서 일하게 했다. 하지만 바투틴은 너무 젊었고 경험이 많지 않은 편이라서 총참모부에서 일하며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응할 작전 수립 과정에서 오판을 여럿 범하고 말았다. 총참모부의 참모로 일하는 와중에 바투틴은 작전 과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신임을 받고 그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바투틴은 6월 30일에 북서 전선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그곳에서 활동했다.
2. 북부 전선에서의 활동
소련 북서 전선군은 에리히 회프너의 제4 기갑 집단을 선봉으로 한 독일 북부집단군에게 패하여 레닌그라드로 밀려나고 있었다. 제4 기갑 집단 소속인 그 유명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제56 기갑 군단은 빠른 속도로 진격하며 레닌그라드를 위협하고 있었다.
바투틴은 노보고로드 근처에서 제56 기갑 군단을 포위할 작전을 입안하고 실행을 명령했다. 만슈타인은 이 공세에 제법 놀랐지만 만슈타인답게 적절히 대처하며 군단이 포위당하는 걸 막았다. 하지만 바투틴의 공세 작전으로 독일군의 진격은 주춤했고 레닌그라드를 하계 기간 동안 점령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비록 전략적으로 소련군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사실 바투틴의 공세 작전은 작전적으로는 실패였다. 바투틴은 아군의 공세력을 지나치게 높게 잡았으며 너무 야심찬 목표를 설정했다. 그의 작전 조정 능력은 아직 형편없는 시절이었으며 그의 하급 제대 지휘관들은 너무 무능했다. 이 시절 바투틴은 당시 제28 전차 사단장으로 북서전선군 지휘관들 중 가장 유능했던 이반 체르냐호프스키 대령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와 급속히 가까워졌다.
3. 중부 전선의 활동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활약
1942년 동계 공세가 시작되자 바투틴은 데미얀스크 포위 작전을 입안했고 데미얀스크 일대의 독일군을 포위망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데미얀스크 포위망은 너무 약했고 공군력의 부족으로 인해 포위망 안의 독일군은 공중보급으로 버티며 포위망을 계속 위협했다. 결국 바투틴의 포위망은 독일군의 반격에 뚫리고 말았다.[1]
1942년 6월에서 7월 독일군의 청색 작전이 개시될 동안 바투틴은 총참모부로 돌아와 있었다. 1942년 7월 1일에 바투틴은 보로네시 전선군과 위험에 처한 브랸스크 전선군을 통합 지휘하는 스타프카 대리로 임명되었다. 한편 체르냐호프스키가 제18 전차 군단을 이끌고 독일군의 공세에 붕괴 위기에 처한 보로네시 전선군을 구원하러 제때에 달려오자 바투틴은 체르냐호프스키를 제60 소총군 사령관으로 승진시킬 것을 스탈린에게 건의해 승인받았다. 독일군은 보로네시를 점령했지만 보로네시 전선군의 방어선은 붕괴되지 않았다.
한편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한창일 때 천왕성 작전이 입안되자 총참모장 바실렙스키 대장은 바투틴을 새로 창설된 남서전선군 사령관에 임명해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돈 전선군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역포위 작전인 천왕성 작전에 참여하여 로코소프스키와 협격해 스탈린그라드를 역포위할 것을 명령했다.
아직 지나치게 젊은 장군이었던 바투틴에게 그런 중책을 맡기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지만 바실렙스키는 끝내 바투틴에게 임무를 맡겼다.[2] 바투틴은 로코소프스키와 함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독일 제6군을 파멸로 몰아넣는데 큰 기여를 했다.
4. 하르코프의 패배와 쿠르스크의 승리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로 소련군 전체가 낙관적인 분위기에 젖었고 바투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바투틴은 소련군의 공세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독일군의 작전 능력을 너무 얕본 나머지 무리한 갈로프 작전을 시행해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자포로제까지 진격하려 했다. 결국 만슈타인의 책략에 걸린 바투틴은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포포프 전차군을 비롯한 3개 야전군을 날려먹고 하르코프를 다시 뺏기게 되었다. 바투틴으로서는 다행히도 스탈린은 바투틴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그를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바투틴은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이 되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결과로 탄생한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의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바투틴은 스타프카의 명령에 따라 깊고 빽빽한 종심 방어진을 돌출부 남쪽에 건설했고 쿠르스크 전투 동안 위기 상황에 여러 번 처하면서도 만슈타인의 치열한 공세를 받아넘기는 데 성공했다.
[image]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 쿠르스크 만슈타인 대 바투틴의 대결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DVD 커버.
5. 우크라이나 해방
쿠르스크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은 돌출부 남쪽에서 루미얀체프 작전을 개시했고 바투틴의 보로네시 전선군은 하르코프를 재탈환했다. 바투틴은 이후 키예프 탈환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드네프르 강 도하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비록 몇번 만슈타인의 반격에 많은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바투틴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작전을 완수할 수 있었다.
1943년 말에 바투틴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겨 이반 코네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함께 주코프의 지휘 아래 코르순-세브첸코 작전을 개시해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의 막을 열었다.
바투틴의 기동 부대인 안드레이 크랍첸코의 제6 전차군의 활약으로 포위망이 완성되었지만 바투틴은 제6 전차군을 공세종말점의 한계 이상으로 진격시키는 실수를 범했다. 결국 제6 전차군의 느슨해진 포위망이 뚫리고 바투틴이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함에 따라 체르카시 포위전은 소련의 완승으로 끝나지 못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바투틴을 크게 질책하며 그의 원수 승진을 보류했다.
6. 최후
1944년 2월 바투틴은 다시 코네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의 협격을 통해 카메네츠-포돌츠크 일대의 독일 제1 기갑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이 한창이던 그때 슬라브타 일대를 시찰하던 바투틴은 우크라이나 반 소련 분리주의자 게릴라[3] 들의 공격을 받았다.
바투틴은 게릴라의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키예프의 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4] 바투틴은 6주간 상처와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944년 4월 15일 43세 나이에 전사했다. 그의 형제인 아파나시와 세묜도 1944년 2월과 3월에 전사하는 바람에 바투틴의 어머니 베라는 두 달 사이에 세 아들의 장례식을 치러야 햐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7. 평가
독소전쟁 중 바투틴의 활약은 적지 않았으며 그의 활약을 기려 키예프에는 바투틴의 동상이 있다. 참모장교 출신이라서 처음에는 지휘에 조금 서툴렀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작전을 입안하는 공을 세웠다. 바실렙스키와 주코프의 구상으로 알려진 천왕성 작전(스탈린그라드 반격)도 사실은 그의 아이디어였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몇번이나 낙관론에 빠져 작전을 시행하다 패배를 당하고 체르카시 포위전에서 완승을 놓쳐 버리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조금 보이고 있다.
8. 기타 매체
- 장군의 영광에서 전차4성장군으로 나온다. 체력도 적고 다른 능력은 없지만 그로인해 5성장군들중 가장 좋은 가성비를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