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스크 전투
러시아어 : Курская битва
독일어 : Unternehmen Zitadelle(성채 작전), Die Schlacht bei Kursk(Schlacht am Kursker Bogen)
영어 : Battle of Kursk, Operation Citadel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43년 7월부터 8월까지 쿠르스크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독일군 간의 전차전. 점차 소련군의 우세로 흘러가던 동부전선의 전세를 완전히 확인시킨 전투로서 이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동부 전선의 기갑전력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게 된다.
이 전투의 일부인 프로호로프카 대(大)전차전은 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자 최대의 전차전이기도 하다.[3] 또한 1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단일 전선에서 양 군 합계 병력 약 200만, 전차 약 6,000대, 항공기 약 4,5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한 전투였다.
흔히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인류역사상 최대의 전투라고 알려져 있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시가전이라는 특성상 보병 위주의 면대면 전투, 그리고 천왕성 작전으로 독일군을 역포위한 양상을 보였지 기갑과 항공 전력의 대규모 충돌은 없었다. 물론 두 전투 중 어느 전투가 더 거대했느냐는 외국에서도 논쟁의 대상이다. 또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주도권 전환의 시작이라면, 이 전투는 완전히 전쟁에서 소련군이 우위를 차지하였음을 확인한 전투였다.
당시 소련측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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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겨울, 러시아 남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던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중심지 하르코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독일군은 과감한 반격을 개시하여 하르코프를 재탈환했다.
그 결과 동부전선에는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돼 양쪽 수뇌부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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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동부전선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
한편 이 무렵 독일군은 이 거대한 전쟁을 수행하기엔 자신들의 역량이 충분치 않음을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이제 거대한 괴물로 성장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에선 에르빈 롬멜 원수의 아프리카 기갑집단군은 연합군의 공격에 섬멸당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영토 어딘가에 연합군이 대규모의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고스란히 재현한 듯한 본격적인 양면 전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게되고, 그러한 상황은 독일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이런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독일군은 쿠르스크 돌출부에 협격을 가해 전선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가능한 많이 소련군의 전략 예비대[4] 를 섬멸해 동부전선을 안정시키며 독소전의 주도권을 되찾는 골자의 성채 작전을 입안하게 된다. 아프리카 기갑군이 패배한 지금 연합군이 유럽 어딘가에 제2전선을 형성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따라서 동부전선을 안정시켜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이 무렵 많은 독일 장성들은 이미 소련군이 더 이상 쉽게 볼 상대가 아니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비롯한 몇몇 장군이 선공에 나서는 것보다는 소련군의 공격을 일단 방어한 뒤에 공세를 추진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주장했고, 기갑총감인 하인츠 구데리안과 전차 생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알베르트 슈페어도 '동부전선에서의 공세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며 성채 작전 자체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선제 공세를 고수하였고, 구체적인 작전안은 총통의 제안에 열렬히 동의한 쿠르트 차이츨러 참모총장이 맡았다.[5]
이에 만슈타인은 공세를 취한다면 하르코프에서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지금이 적절한 시점이며, 5월 초에는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히틀러는 기갑부대의 보충이 끝나는 6월 12일로 공격을 연기했다.[6][7][8] 그러나 그는 완벽한 전력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며 다시 작전을 연기시킨다. 물론 맨 위의 개요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전력우위를 점한답시고 이렇게 끌어모은게 소련군의 절반 수준이었다. 수비군도 아니고 공격군 주제에!
한편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클루게 원수는 히틀러가 주관한 작전 회의에서는 성채 작전에 적극 찬성했다고 하지만, 항공 정찰로 쿠르스크 방면의 두터운 소련군 방어 진지와 오렐 돌출부 주위에 100만 소련군이 집결하는 것을 파악한 발터 모델은 성채 작전에 회의적이었고, 클루게 또한 이에 동의하여 모델이 제안한 오렐 돌출부 후방의 방어진지 구축을 허락한다(이는 히틀러가 명시적으로 금지시킨 사항이었다). 특히 모델은 '치타델(성채)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오렐 방면에 위치한 소련군의 위협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도 낮은 치타델 작전을 '''아예 완전히 포기하여 오렐에 집중된 중부집단군을 동부전선의 전략적 예비대로 가용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6월 중순이 되어 치타델 작전을 포기할 가능성이 제로가 되자 9군을 완전히 공세 작전 위주로 훈련하여 재편성하였다.[9]
그리하여 독일군은 쿠르스크 일대에 50개 사단으로 편성된 병력 '''90만''', 전차 및 자주포 '''2,700대'''(전차만 3,000대에 이른다는 설도 있다), 비행기 '''2,000대''', 야포 '''10,000문''' 이상이라는 엄청난 전력을 집결시켰다. 히틀러는 드디어 전력 우위를 갖췄다고 판단했고 작전 개시일은 7월 5일로 결정됐다.
한편 소련군은 첩보전으로 인해 독일군의 공세목표가 쿠르스크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내기 위해 가공할 규모의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사실 쿠르스크 지역이 돌출부로 남았다는 것은 사실상 적의 선제 공격 목표가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의 승리와 스탈린그라드 승리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독일군에게 대규모 선제 공격을 할 생각을 또 품었지만,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와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등이 겨우겨우 설득하여 이전같이 쓸데없는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방어전의 주력인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중앙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보로네즈 전선군에는 엄청난 전력이 보강되기 시작했다. 쿠르스크 일대에는 민간인 30만명을 동원하여 총 3,000마일이 넘는 참호와, 종심이 175km에 달하는 6중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무려 40만 개가 넘는 지뢰매설, 가짜 공군기지 50개와 비행장 150여 곳 건설, 그리고 말뚝 전차 장애물도 구축되었으며 포병의 우세를 중시하는 소련군답게 야포가 약 '''13,000문''', '''920대'''의 카츄사 다연장 로켓을 배치했다.
또한 독일군에 공세를 저지한 후 역습을 가할 주력으로 선정된 스텝 전선군에도 40만명의 병력과 1개 기갑군을 배치하는 등 강한 전력이 집결되었다. 이렇게 동원된 소련군의 총 전력은 병력 '''약 170만''', 야포 '''19,000문''', 전차 및 자주포 '''3,600대'''(8,000대로 추산하는 설도 있다[출처] ) 항공기 '''3,100대'''에 이르는 대규모였고 이는 당시 소련군 '''전체 병력의 40%''', '''기갑부대의 75%'''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었다.
독일군이 일대 공세에 나선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거였다. 소련군은 5월 초에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것이라고 파악했지만, 독일군의 성채 작전이 연기되면서 소련군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선 장군들에게 비상이 걸렸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스탈린은 대규모 공세를 주장한 적이 있었고, 이를 주코프와 바실렙스키가 설득하면서 겨우 포기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영웅인 주코프라 할지라도 말 한마디에 쳐내버릴수 있는 최강 권력자의 심기가 뒤틀렸을 경우에는 계속 이 방어전을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당시 소련군은 첩보전에 있어 상당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잠깐의 혼란함이 지나가고 5월 중순이 되자 독일군의 공격이 6월 12일로 연기됐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성채 작전이 또다시 연기되자, 슬슬 소련군 내부에서도 사기저하나 병사들의 경계 태세 약화 등의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우려했듯이 점차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였지만, 다행히 42년도의 그와는 다르게 끈기를 보이며 방어전의 준비는 계속 진행시켰다. 일본에 있던 소련군의 첩보망은 연기사실을 즉각 전달했지만, 점차 독일이 흘린 공격이 취소됐다는 역정보를 보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영국에 있던 '다섯번째 사나이'가 활약하게 된다.[10]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소련 정보기관이 포섭한 5명의 대학생이 있었는데, 이 중 영국 정보부에 들어간 '다섯번째 사나이'를 통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쿠르스크 전투 개시 전에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다. 어쨌거나, 영국 정보부의 정보 수집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소련군은 정확한 정보들을 받을 수 있게 된다. 7월 4일에는 투항한 독일 병사가 7월 5일 새벽 3시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이어 7월 5일 오전 2시에 소련군 진지에 침투해 지뢰밭을 개척하던 독일군 공병대원을 생포하여 한 시간 후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소련군은 애초에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 선제 포격을 가해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주코프 원수는 항공 폭격과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기습적인 포격에 독일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는데 독일군 대부분이 공격출발선에 도착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의심했으나 더이상 포격이 없자, 독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 원수는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독일 9군에 공격을 명령했다. 드디어 두 달의 대치 기간은 끝나고 쿠르스크의 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7월 5일 오전 5시 30분, 포병의 사격을 등에 업고 독일 9군이 소련 13군의 정면을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은 두터운 소련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6항공군에 폭격을 요청했고,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면 기갑부대를 선두로 손쉽게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1943년의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이 무시할 상대가 아니었다. 'Ju87 - 급강하 폭격기'의 맹폭이 채 끝나기도 전에 400여 대의 소련군 전투기가 독일군을 향해 접근했고 곧바로 항공전이 시작됐다. 비록 독일 공군이 여전히 개별 기체의 성능과 조종사의 기량에서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세는 소련 공군의 수적 우세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을만큼 소련 공군의 기량 또한 성장해있었고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결국 방어선 정면을 향해 돌격하던 독일군 23군단과 47기갑군단은 엄청난 숫자의 대전차 호와 강철 피아노 줄[11] 지뢰와 기관총 진지가 끝없이 배치된 방어선을 돌파하는 동안 눈에 띄게 전투력이 감소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 23군단과 47기갑군단이 소련군의 저항에 막혀 고전하는 사이 41기갑군단과 46기갑군단이 각각 소련군 방어선의 우익과 좌익을 압박하며 진격을 시작했다. 41기갑군단은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해 우익을 방어하던 소련 81보병사단을 격파했으나 신속한 소련군의 증원에 저지 당하며 진군을 멈췄고, 46기갑군단은 소련 15보병사단과 132보병사단을 격파하며 포니리를 향해 맹렬하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46기갑군단의 맹공에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한 소련군은 2개 보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하며 필사적인 방어를 시작했으나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방어선은 돌파 당하고 말았다. 독일군은 힘겨운 사투 끝에 소련군 제1방어선을 돌파하고 포니리 북쪽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지만 도저히 승리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거에 투입 했음에도 하루 내내 겨우 6.5km를 전진했을 뿐이었고, 투입된 전력의 거의 20%를 상실하고 있었다.
7월 6일 새벽에 독일군을 향해 가해진 소련군의 반격을 완벽하게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소련군의 2차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진격이 저지당하고 말았다. 소련군은 거의 300여 대의 전차를 상실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급해진 발터 모델 대장은 7월7일 가용 가능한 모든 기갑 전력을 끌어모아 400여 대의 전차와 10개 보병사단을 동원해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를 잇는 철도선에 공세를 개시했다.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는 오렐과 쿠르스크를 잇는 철도선의 중심으로, 이곳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쿠르스크 북부 전선의 공세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요충지였기에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불과 10km 정도에 불과한 전선에서 양군 합계 40만에 가까운 대 병력이 충돌하는, 역사상 유례가 없던 대혈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폭격기와 전차를 동원해 맹공을 펼쳤지만 소련군의 격렬한 방어에 저지당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공세는 날이 바뀐 7월 8일에도 계속돼 필사적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강철 같은 소련군의 방어 진지는 도저히 무너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중구축전차인 페르디난트 구축전차도 2개 대대 90대가 투입되었고 원거리 전차전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보였으나 야지(野地)기동시에 엔진이 과부하되었고 지뢰로 인해 총 수의 절반 가량이 손실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소련군의 병력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증강되고 있었고, 독일군은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여주며 선전하고 있었지만 전력 차이는 오히려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불과 3일 만에 쿠르스크 북부 전선 독일군의 공세는 한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7월 8일 저녁, 모델 대장은 야전 작전 회의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소련군의 방어선은 그야말로 강철 같았고, 믿었던 공군마저 제공권 장악에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한다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클루게 원수는 모델 대장에게 공격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고, 모델 대장은 지쳐가는 병력을 다닥다닥 긁어 모아 다음날 공세를 재개했지만 결국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7월 10일 모델 대장은 중부집단군에 강력한 소련군의 방어선을 향해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한 소모전만을 강요당할 뿐이며, 획기적인 전술적 보완이 있거나 공세를 유지할 만한 전력이 보충되지 않는 이상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고했다. 히틀러는 공세를 계속할 것을 명령했지만 모델은 더 이상의 공세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 휘하 부대에게 휴식을 명령하고 공세를 중단했다.
하지만 클루게 원수는 아직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2개 사단을 보충하여 7월 11일 밤에 올호바트카를 점령하기 위해 야습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소련 70군을 향해 11일 밤 공세를 시작했지만 이 역시도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제 공세를 가할 힘을 완전히 상실한 독일 9군은 완벽히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성채 작전이 시작된 지 불과 5일 만에 쿠르스크 북부 전선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쿠르스크 남부 전선에서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남부집단군의 7월 5일 일제 공세가 시작됐다. 독일군은 남부 전선의 초기 공세는 북부 전선에 비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는 소련군이 독일 중부집단군을 공세의 주공으로 판단, 남부 전선에 비해 더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 탓도 있긴 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독일 남부집단군은 160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장비해 북부 전선의 중부집단군에 비해 월등한 타격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2]
독일 남부 집단군의 주공은 4기갑군 예하 48장갑군단으로, 독일 국방군 최정예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GD)사단[13] 과 제3, 제11기갑사단 및 최신예 전차인 판터를 무려 194대나 장비한 10기갑여단을 예하에 두고 막강한 기갑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 남부집단군은 48기갑군단이 파울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과 함께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을 강타함과 동시에, 베르너 켐프 중장의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 동쪽에서 공격을 가하며 일제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48기갑군단의 공세는 당초 기대와는 다르게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 대장은 10기갑여단의 5호 전차 판터 초기생산분량 전부인 194대를 GD사단에 배속시켜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는데, 이러한 조치로 GD사단은 350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장비한 막강한 타격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GD사단의 이러한 기갑 전력은 무장SS 2기갑군단의 전체 기갑 전력과 맞먹는 것으로, 독일군은 소련군이 GD사단을 저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다. GD사단은 3기갑사단과 11기갑사단이 측면을 엄호하며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GD사단은 소련 67근위소총사단과 3기계화군단의 강력한 저지선에 가로막혔고, 소련 공군 전폭기의 폭격에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판터 전차의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고장이 속출하면서 전체 판터의 거의 1/3이 기동 불가능 상태가 되는 불운까지 겹쳤다. 또한 GD사단의 대규모 전차를 통제하기위한 10기갑여단의 임무도 GD전차연대장의 비협조, 판터의 기계고장에 따른 불신이 겹쳐 유명무실화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측면의 3기갑사단이 소련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며 성공적으로 진격했고, 이에 힘입어 48기갑군단은 적의 제1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각 부대들이 입은 피해는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이렇게 독일 남부 집단군의 주공이었던 48기갑군단의 이렇게 꺾여가면서 쿠르스크 남부 전선의 공세 또한 초반부터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는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편 제2SS기갑군단은 48기갑군단에 비해 한결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48기갑군단의 우익을 엄호하며 공격을 시작한 제2SS기갑군단은 소련 6근위군의 방어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오보얀-쿠르스크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만약 6근위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지고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을 따라 계속 진격하여 독일 4기갑군과 합류하게 된다면, 쿠르스크 남부 전선은 전면적으로 붕괴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었기에 보로네즈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 대장은 곧바로 증원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방어선의 곳곳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 7월 7일에는 이틀만에 쿠르스크 방어지대의 핵심지역인 '쿠르스크-오보얀 도로'를 향해 20마일(30km)이나 전진하였다. 그러나 이날을 기점으로 제2SS기갑군단은 점점 힘에 부쳤고, 결국 소련 제1전차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7월 9일, 호트의 4기갑군은 기갑사단을 한데 모아 전선에 뚫고 나아가, 토텐코프 사단을 선두로 하는 독일군과 쿠르스크 사이에 있는 마지막 장애물인 프숄 강을 뚫고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는 참호를 파 들어갔다. 하지만 이후로 북서쪽인 쿠르스크쪽으로 진격은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주코프는 로트미스트로프에게 T-34가 6호 전차 티거에게 화력에서는 제압당하지만[16][17] 기동성이 앞서니 '기계화 부대의 백병전'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7월 12일 아침, 제2SS기갑군단 소속의 294대 가량의 독일군 전차와 790여대의 소련군 전차가 대치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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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아침 7시, 대규모의 독일 폭격기 부대가 소련군 진영을 맹렬히 폭격하였고 이에 맞서 소련 전투기들이 출격하였다. 폭격기들이 돌아간 후, 소련군은 대지공격기와 카츄샤 로켓을 동원하여 인근을 쑥대밭을 만들었다. 오전 8시 30분, 로트미스트로프는 강철이란 뜻의 '스탈'이라는 암호로 공격 명령을 내렸고 곧이어 독일 쪽에서도 LSSAH의 전차들이 몰려나왔다. LSSAH는 수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소련군보다 앞서 전장에 도착하여 해당 지역에 구축되어 있던 대전차참호와 회랑을 선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날, 겨우 3제곱 킬로미터에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의 전차들이 뒤엉켰다.[19]
공격해오는 소련군을 독일군은 월등한 교환비를 보이며 격퇴하였으나 소련군은 전차를 잃을때마다 병력을 재편성해서 끈질기게 공격했다. 전투 과정에서 소련군 170전차여단장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옥챠브리스키에서는 미하일 비트만이 소속된 티거 전차 4대가 소련군 전차 100대중 수십대를 격파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독일군 격퇴 시도는 실패하였고 엄청난 손실을 입어야 했다. 전투 결과 독일군은 제4기갑군 전구에서 약 프로호로프카에서 4대의 4호 전차 손실을 포함해 43~80대의 기갑차량을 손실했고 소련군은 약 300~400대의 기갑차량을 손실했다. 독일군 측의 전과 주장으로는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이 244대를 파괴한것으로 집계되었다. 투입된 소련군의 3개의 전차군단중 1개의 전차군단이 사라졌다. 소련군은 70대의 티거를 파괴하였다고 선전하였으나 실제로는 옥챠브리스키와 프로호로프카 근방에서 완파된 1대를 빼면 없다. 즉 전술적으로는 독일군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월등한 교환비에도 불구하고 공세탄력을 크게 상실한 독일군은 더 이상 결정적인 진격이 불가능해졌고, 소련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어 추가적인 반격이 전혀 불가능하였다. 7월 13일, 로트미스트로프에게는 5근위군 등에서 증원군이 계속 도착하긴 했지만 5근위 전차단의 기동 가능한 전차의 수는 50대 밖에 없었고 병력은 반으로 줄어있었다. 다음날도 계속 전투가 진행되었지만 이는 소규모에 불과했으며, 독일군의 진격은 소련군의 방어선에 막혀 돈좌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만 따져 봤을때는 독일 기갑군의 전술적 승리에 가깝지만,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로 인해 소련군의 돌출부를 제거하려는 최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전략적으로는 소련의 승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전투가 실제로는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대패했고, 대패를 감추고 싶었던 소련에 의해 독일군의 손실이 부풀려진 전투라는 주장도 있다. 소련측 논리는 본인들이 SS기갑군단의 전차 300대를 격파했다고 주장하는데 SS기갑군단이 보유한 전차수가 352대 정도이며 다스라이히와 토텐코프는 프로호로프카에 있지도 않았다.
훗날 바실렙스키는 이 전투를 회상하면서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고 회고했으며, 한 종군 기자에 따르면 이 지역은 전투가 끝난지 수십주가 지날 동안 끔찍하고 황량한 사막으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7월 10일, 서방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히틀러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귀중한 병력을 남부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7월 13일, 성채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고, 2SS기갑군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호트 장군을 비롯한 휘하 장군에게는 성채작전 이전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만슈타인 원수는 작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돌려진 히틀러의 관심을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히틀러의 공세 중지 결정은 이탈리아의 연합국 상륙보다는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으로 인하여 돌출부가 남부 집단군 전력만으로 돌출부를 끊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장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 설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만슈타인 주장대로 공세를 지속했으면 역시나 발리는 쪽은 독일군이였다.왜냐면 스텝 예비군은 전투에 참가를 안해서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48 기갑군단과 SS 2기갑군단은 이미 지속적인 전투로 인해 만신창이와 전투 피로가 쌓일데로 쌓여서 이대로 공세를 유지했다가는 군단 자체가 와해되는 결말 밖에 없다.
결국 독일군의 쿠르스크 공세는 7월 15일에 끝났으며 이탈리아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히틀러는 8월 1일 동부전선의 길이를 단축하여 유럽으로 돌릴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오룔 돌출부로부터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7월 12일, 쿠르스크 북쪽에서는 오룔(오렐이라고도 한다.)과 브랸스크를 탈환하여 독일 중부 집단군을 무너트릴 계획으로 쿠투조프 작전이 개시되어 독일 9군의 후방을 위협했다. 처음에 3개군으로 공격을 시작했던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은 작전 초기엔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전진이 힘들었지만, 추가로 3개군을 더 투입하여 독일군의 한쪽이 뚫리면서 소련군은 물밀듯이 쳐들어가 8월 5일에 오룔이 함락되고, 8월 18일에는 브랸스크 시가 소련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독일군은 얌전하게 후퇴하지 않았다.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만 2천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60,804명,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거기에 독일군은 특히 소련군 포로 11,732명까지 데리고 하겐 라인으로 무사히 퇴각한다. 클루게와 모델은 쿠르스크 방면의 공세를 준비하면서도 오렐 전투를 예상하여 방어에 용이한 예비 전투 지구를 확보해 두었고, 9군 사령관 모델이 제2기갑군의 사령관을 겸임하며 지휘 체계를 통일시켰다. 결과적으로 중부집단군은 퇴각했음에도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의 전력을 보존하여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쿠르스크 남쪽에서의 반격은 한참 후인 8월 3일에 주코프 장군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개시되었다. 이 작전의 이름은 루미안체프 작전으로, 목표는 하르코프의 탈환이었다. 이 공격은 주로 쿠르스크 후방에 있던 이반 코네프의 초원(스텝) 예비 전선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만슈타인의 독일군 기갑부대가 자리를 잠시 비운 직후인, 8월 3일 주코프가 보르네즈 전선군과 스텝 예비 전선군, 그리고 남서부전선군의 우익을 동원해 반격 작전을 개시하자 독일군은 완전히 허를 찔리게 되어 소련군이 결국 8월 5일에 벨고로드 시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후 중부집단군으로 부터 차출된 증원부대와 루미안체프 작전 저지를 위해 파견된 기갑부대 일부가 서둘러 돌아오면서 독일군은 일시적으로 소련군을 저지하였다.
히틀러는 어떻게든 하르코프와 도네츠강 유역만은 지키고 싶어 했지만 8월 7일에 서부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의 좌익은 11개군과 기타 군소대를 동원해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8월 13일 마침내 스텝전선군이 하르코프에 돌입하여 10일간 치열한 시가전 끝에 8월 23일에는 하르코프 시도 점령함으로써 독일군은 도네츠강 유역을 포기하고 드네프르강 서쪽으로 후퇴함으로써 쿠르스크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된다.
비록 소련군의 병력 손실은 독일보다 훨씬 많아서 인명피해가 독일의 4배가 되었고, 전차 같은 경우는 독일군에 비해 거의 7배의 손실을 입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에도[20][21] 승리는 소련의 것이었다. 당연히 소련의 승리고 이 점에 대해서 모든 전쟁사가의 견해가 일치한다. 만슈타인 역시 후에 자신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작전이 잘 안 풀렸던 상황은 인정했다.
이후 독일은 이탈리아에 서방 연합군이 상륙했기 때문에 더 이상 동부전선의 소련군만 상대할 수 없었고, 전력의 상당부분을 서부전선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1944년 중반까지는 서유럽 전체의 공업지대(+추축국을 도왔던 중립국 스웨덴)와 자원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던 나치독일이 소련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이나 공업력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나치독일은 이런 공업력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는 독일에게 대단히 나쁜 소식이었다.[22]
소련군도 쿠르스크 이후 반격부터 해서 드네프르강을 완전히 뚫어버리기까지 200만 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지만 1941년 독소전 직전 인구 2500만 명은 족히 넘던 드네프르강 서안 서부 우크라이나를 탈환해서 인구 밀집지대에서 징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손실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군사적인 면'''만''' 본다면 동부전선 > 이탈리아가 맞기는 했다. 지형적으로 봐도 이탈리아 북부는 알프스 산맥으로 제대로 막혀있고 중부에도 아펜니노 산맥 + 많은 강들로 지연전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어차피 뚫릴 이탈리아 남부로, 동부전선의 정예기갑 병력을 뺀 것은 아무리 봐도 전략적 미스다. 더군다나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드네프르 강이 뚫리고 서부 우크라이나를 스탈린이 확보하면 거기서 또 보충할 수 있는 규모도 상당할 것이며 이는 독일에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편적인 견해일 뿐이다. 이탈리아는 1943년 연합국이 상륙하자마자 추축국의 대열을 빠르게 탈퇴했고,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연합국 편을 들어 독일군의 이탈리아 반도 축출을 거들었으므로 이탈리아의 중요성에 대한 히틀러의 판단은 그른 게 아니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급히 이탈리아 국왕에 의해 체포된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괴뢰국인 살로 공화국을 만들어 이탈리아 북부를 맡겼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가 연합국의 공세를 잘 막아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은 독일군과 연합국이 대치상태로 있다가 독일이 멸망해서 별로 중요성이 없다고 간주되곤 하지만, 만약 이탈리아가 통채로 연합국으로 넘어갔다면 멀리 있어서 도움 안되는 일본을 제외하면, 군사적으로 의미있는 추축국 중 가장 먼저 항복했다는 점에서 독일 국민이나 다른 추축국 루마니아, 헝가리, 핀란드, 크로아티아 등 지도자에게 줄 수 있는 충격은 상당했다. 즉, 이탈리아의 군사적 가치는 동부전선보다는 훨씬 낮았지만 추축국의 안정화를 위해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의 안정을 위해 작전을 취소한 히틀러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보는건 근시안적인 견해다.
독일에선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실시한 대규모 기동훈련에 터키군 수뇌부를 초청, 참관케 하고 히틀러와 접견하게 하는 등 터키에 호의를 보이려 애썼다. 당시 친독 성향의 중립국이었던 터키를 끌어들이면 고착된 동부전선의 전세를 유리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일은 소련군의 연료를 책임지고 있다 생각한 캅카스 지역의 유전을 터키가 공격해주기를 바랐고 실제로 독소전쟁 초반부터 독일은 터키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과거 1차대전에서도 터키와 독일은 같은 동맹국이었고 러시아는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총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터키는 전신인 오스만 제국이 1차 대전에 독일 편으로 참전했다가 결국 패배하여 공중분해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신중했다. 1차대전 패전의 대가로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고 아나톨리아 이외의 모든 영토를 잃어버렸으니까. 그나마 남은 영토도 케말 파샤로 대표되는 터키인들의 강력한 저항끝에 영국과 프랑스가 포기하고 끝까지 물고늘어졌던 그리스도 나가떨어지면서 겨우 지켜낸 것이다. 1차 대전 당시 같은 아군이던 불가리아나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많은 영토를 잃은 것과 달리 그래도 상당수 영토(그리스가 그리도 노리던 아나톨리아 지역까지)라도 스스로 지켜냈다.
결국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의 전략적 패배로 귀결되었고 터키는 전쟁 막판까지 중립을 지키다가 1945년 2월 23일에서야 줄서기식으로 연합군에 참가하여 추축진영에 선전포고했다. 터키가 비겁하다느니 기회주의적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터키는 당시 미국과 연합이던 소련군을 가장 견제했다. 당시만 해도 소련과 국경을 맞닿은 데다가 1920년대에 스탈린이 카르스를 비롯한 북동쪽 땅을 소련에게 넘기라는 요구를 하자 터키는 20만이 넘는 군대를 배치하면서 전쟁 준비를 했고, 미국이나 영국이 놀라서 터키를 지원하기로 함에 따라 스탈린도 포기하고 물러난 바 있었다. 이러니, 2차대전 당시 터키는 소련이 폴란드를 쳐들어오자 다음은 우리일것이라고 소련 쪽을 예의주시했다. 그런 소련과 손잡은 연합군에 대하여 여러 모로 의견이 오고가던 점도 컸다. 게다가, 또 다른 터키 전쟁학자의 의견도 있는데, 이미 독소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터키는 독일의 패배를 직감하고 독일에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는 설도 있다. 이게 가능성이 있는 게 터키 건국자인 아타튀르크는 1930년대, 살아 생전에 히틀러를 미쳤다고 봤으며 2차 대전을 예측하고 미국이 필연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것이고 미국으로 인해 승전할 것이라는 소름돋는 예언 수준의 예상까지 했으며 2인자인 이스메트 이뇌뉘(2차 대전 당시 터키 수상)에게 히틀러를 편들지 말라고 충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목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는 옆나라인 그리스가 맥없이 떨어지는걸 보고 나름대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징병령을 확대하고 사실상 1942년부터 총동원 체제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이 불과 20여년 전에 벌어졌으니 그리스에 살고있지만 과거 터키땅에 거주했고 여전히 일가친척이나 옛 이웃들이 남아있던 그리스 주민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터키로 피난 오는것도 승인했고 특히 테살로니키의 유대인들은 대부분이 터키로 피난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이 터키를 통하여 유럽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이 컸기에 미국이 엄청난 지원을 하고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도 덮어버렸던 걸 봐도 당시 터키에 대하여 뭐라고 따질 겨를도 없었다.
이 전투에는 한 여성이 개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여인은 바로 올가 체코바이다. 독일에서 영화 배우로 활동하며 히틀러의 환심을 샀는데 이렇게 해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소련 정보부에 올가가 감사를 표한 서신이 남은 걸로 보면 첩자였던 건 분명한 듯하다. 어차피 이 무렵은 스타브카는 NKVD의 '붉은 관현악단'으로 대표되는 첩보전의 압도적 승리로 인해서 독일 야전 제대들보다 먼저 작전 명령서를 받을 정도로 소련의 정보력이 우세했고 심지어 독일군 내에 친공 성향 장성이 20여 명에 달했다는 소리 까지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한 개인이 결정적 제보를 했다고 보긴 힘들다.
독일어 : Unternehmen Zitadelle(성채 작전), Die Schlacht bei Kursk(Schlacht am Kursker Bogen)
영어 : Battle of Kursk, Operation Citadel
'''이제 우리 독일군과 소련군은 완전히 동격이다. 우리만 할 수 있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은 한 가지도 없다.'''
― 독일 제6보병사단장 '호르스트 그로스만(Horst Großmann)'
'''이제 독일군은 패배의 쓴 잔을 맛보게 되었고, 강력한 적을 무너뜨리는 소련군의 용맹성을 알게 되었다.'''
― 게오르기 주코프, 내셔널 지오그래픽 "전쟁의 대가들" 중에서
1. 소개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43년 7월부터 8월까지 쿠르스크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독일군 간의 전차전. 점차 소련군의 우세로 흘러가던 동부전선의 전세를 완전히 확인시킨 전투로서 이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동부 전선의 기갑전력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게 된다.
이 전투의 일부인 프로호로프카 대(大)전차전은 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자 최대의 전차전이기도 하다.[3] 또한 1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단일 전선에서 양 군 합계 병력 약 200만, 전차 약 6,000대, 항공기 약 4,5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한 전투였다.
흔히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인류역사상 최대의 전투라고 알려져 있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시가전이라는 특성상 보병 위주의 면대면 전투, 그리고 천왕성 작전으로 독일군을 역포위한 양상을 보였지 기갑과 항공 전력의 대규모 충돌은 없었다. 물론 두 전투 중 어느 전투가 더 거대했느냐는 외국에서도 논쟁의 대상이다. 또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주도권 전환의 시작이라면, 이 전투는 완전히 전쟁에서 소련군이 우위를 차지하였음을 확인한 전투였다.
당시 소련측 영상
2. 1943년 동부전선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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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겨울, 러시아 남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던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중심지 하르코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독일군은 과감한 반격을 개시하여 하르코프를 재탈환했다.
그 결과 동부전선에는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돼 양쪽 수뇌부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3. 성채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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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동부전선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
한편 이 무렵 독일군은 이 거대한 전쟁을 수행하기엔 자신들의 역량이 충분치 않음을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이제 거대한 괴물로 성장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에선 에르빈 롬멜 원수의 아프리카 기갑집단군은 연합군의 공격에 섬멸당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영토 어딘가에 연합군이 대규모의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고스란히 재현한 듯한 본격적인 양면 전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게되고, 그러한 상황은 독일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이런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독일군은 쿠르스크 돌출부에 협격을 가해 전선을 축소시킴과 동시에 가능한 많이 소련군의 전략 예비대[4] 를 섬멸해 동부전선을 안정시키며 독소전의 주도권을 되찾는 골자의 성채 작전을 입안하게 된다. 아프리카 기갑군이 패배한 지금 연합군이 유럽 어딘가에 제2전선을 형성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따라서 동부전선을 안정시켜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이 무렵 많은 독일 장성들은 이미 소련군이 더 이상 쉽게 볼 상대가 아니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비롯한 몇몇 장군이 선공에 나서는 것보다는 소련군의 공격을 일단 방어한 뒤에 공세를 추진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주장했고, 기갑총감인 하인츠 구데리안과 전차 생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알베르트 슈페어도 '동부전선에서의 공세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며 성채 작전 자체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선제 공세를 고수하였고, 구체적인 작전안은 총통의 제안에 열렬히 동의한 쿠르트 차이츨러 참모총장이 맡았다.[5]
이에 만슈타인은 공세를 취한다면 하르코프에서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지금이 적절한 시점이며, 5월 초에는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히틀러는 기갑부대의 보충이 끝나는 6월 12일로 공격을 연기했다.[6][7][8] 그러나 그는 완벽한 전력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며 다시 작전을 연기시킨다. 물론 맨 위의 개요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전력우위를 점한답시고 이렇게 끌어모은게 소련군의 절반 수준이었다. 수비군도 아니고 공격군 주제에!
한편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클루게 원수는 히틀러가 주관한 작전 회의에서는 성채 작전에 적극 찬성했다고 하지만, 항공 정찰로 쿠르스크 방면의 두터운 소련군 방어 진지와 오렐 돌출부 주위에 100만 소련군이 집결하는 것을 파악한 발터 모델은 성채 작전에 회의적이었고, 클루게 또한 이에 동의하여 모델이 제안한 오렐 돌출부 후방의 방어진지 구축을 허락한다(이는 히틀러가 명시적으로 금지시킨 사항이었다). 특히 모델은 '치타델(성채)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오렐 방면에 위치한 소련군의 위협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도 낮은 치타델 작전을 '''아예 완전히 포기하여 오렐에 집중된 중부집단군을 동부전선의 전략적 예비대로 가용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6월 중순이 되어 치타델 작전을 포기할 가능성이 제로가 되자 9군을 완전히 공세 작전 위주로 훈련하여 재편성하였다.[9]
그리하여 독일군은 쿠르스크 일대에 50개 사단으로 편성된 병력 '''90만''', 전차 및 자주포 '''2,700대'''(전차만 3,000대에 이른다는 설도 있다), 비행기 '''2,000대''', 야포 '''10,000문''' 이상이라는 엄청난 전력을 집결시켰다. 히틀러는 드디어 전력 우위를 갖췄다고 판단했고 작전 개시일은 7월 5일로 결정됐다.
4. 소련군의 방어
4.1. 사상 최대의 방어 작전
한편 소련군은 첩보전으로 인해 독일군의 공세목표가 쿠르스크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내기 위해 가공할 규모의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사실 쿠르스크 지역이 돌출부로 남았다는 것은 사실상 적의 선제 공격 목표가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의 승리와 스탈린그라드 승리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독일군에게 대규모 선제 공격을 할 생각을 또 품었지만,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와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등이 겨우겨우 설득하여 이전같이 쓸데없는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방어전의 주력인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중앙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보로네즈 전선군에는 엄청난 전력이 보강되기 시작했다. 쿠르스크 일대에는 민간인 30만명을 동원하여 총 3,000마일이 넘는 참호와, 종심이 175km에 달하는 6중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무려 40만 개가 넘는 지뢰매설, 가짜 공군기지 50개와 비행장 150여 곳 건설, 그리고 말뚝 전차 장애물도 구축되었으며 포병의 우세를 중시하는 소련군답게 야포가 약 '''13,000문''', '''920대'''의 카츄사 다연장 로켓을 배치했다.
또한 독일군에 공세를 저지한 후 역습을 가할 주력으로 선정된 스텝 전선군에도 40만명의 병력과 1개 기갑군을 배치하는 등 강한 전력이 집결되었다. 이렇게 동원된 소련군의 총 전력은 병력 '''약 170만''', 야포 '''19,000문''', 전차 및 자주포 '''3,600대'''(8,000대로 추산하는 설도 있다[출처] ) 항공기 '''3,100대'''에 이르는 대규모였고 이는 당시 소련군 '''전체 병력의 40%''', '''기갑부대의 75%'''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었다.
4.2. 정보전의 승리
독일군이 일대 공세에 나선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거였다. 소련군은 5월 초에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것이라고 파악했지만, 독일군의 성채 작전이 연기되면서 소련군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선 장군들에게 비상이 걸렸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스탈린은 대규모 공세를 주장한 적이 있었고, 이를 주코프와 바실렙스키가 설득하면서 겨우 포기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영웅인 주코프라 할지라도 말 한마디에 쳐내버릴수 있는 최강 권력자의 심기가 뒤틀렸을 경우에는 계속 이 방어전을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당시 소련군은 첩보전에 있어 상당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잠깐의 혼란함이 지나가고 5월 중순이 되자 독일군의 공격이 6월 12일로 연기됐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성채 작전이 또다시 연기되자, 슬슬 소련군 내부에서도 사기저하나 병사들의 경계 태세 약화 등의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우려했듯이 점차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였지만, 다행히 42년도의 그와는 다르게 끈기를 보이며 방어전의 준비는 계속 진행시켰다. 일본에 있던 소련군의 첩보망은 연기사실을 즉각 전달했지만, 점차 독일이 흘린 공격이 취소됐다는 역정보를 보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영국에 있던 '다섯번째 사나이'가 활약하게 된다.[10]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소련 정보기관이 포섭한 5명의 대학생이 있었는데, 이 중 영국 정보부에 들어간 '다섯번째 사나이'를 통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쿠르스크 전투 개시 전에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다. 어쨌거나, 영국 정보부의 정보 수집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소련군은 정확한 정보들을 받을 수 있게 된다. 7월 4일에는 투항한 독일 병사가 7월 5일 새벽 3시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이어 7월 5일 오전 2시에 소련군 진지에 침투해 지뢰밭을 개척하던 독일군 공병대원을 생포하여 한 시간 후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소련군은 애초에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 선제 포격을 가해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주코프 원수는 항공 폭격과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기습적인 포격에 독일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는데 독일군 대부분이 공격출발선에 도착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의심했으나 더이상 포격이 없자, 독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 원수는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독일 9군에 공격을 명령했다. 드디어 두 달의 대치 기간은 끝나고 쿠르스크의 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5. 독일군의 공세
5.1. 쿠르스크 북부 전선 - 독일군의 초기 공세
7월 5일 오전 5시 30분, 포병의 사격을 등에 업고 독일 9군이 소련 13군의 정면을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은 두터운 소련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6항공군에 폭격을 요청했고,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면 기갑부대를 선두로 손쉽게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1943년의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이 무시할 상대가 아니었다. 'Ju87 - 급강하 폭격기'의 맹폭이 채 끝나기도 전에 400여 대의 소련군 전투기가 독일군을 향해 접근했고 곧바로 항공전이 시작됐다. 비록 독일 공군이 여전히 개별 기체의 성능과 조종사의 기량에서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세는 소련 공군의 수적 우세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을만큼 소련 공군의 기량 또한 성장해있었고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결국 방어선 정면을 향해 돌격하던 독일군 23군단과 47기갑군단은 엄청난 숫자의 대전차 호와 강철 피아노 줄[11] 지뢰와 기관총 진지가 끝없이 배치된 방어선을 돌파하는 동안 눈에 띄게 전투력이 감소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 23군단과 47기갑군단이 소련군의 저항에 막혀 고전하는 사이 41기갑군단과 46기갑군단이 각각 소련군 방어선의 우익과 좌익을 압박하며 진격을 시작했다. 41기갑군단은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해 우익을 방어하던 소련 81보병사단을 격파했으나 신속한 소련군의 증원에 저지 당하며 진군을 멈췄고, 46기갑군단은 소련 15보병사단과 132보병사단을 격파하며 포니리를 향해 맹렬하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46기갑군단의 맹공에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한 소련군은 2개 보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하며 필사적인 방어를 시작했으나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방어선은 돌파 당하고 말았다. 독일군은 힘겨운 사투 끝에 소련군 제1방어선을 돌파하고 포니리 북쪽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지만 도저히 승리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거에 투입 했음에도 하루 내내 겨우 6.5km를 전진했을 뿐이었고, 투입된 전력의 거의 20%를 상실하고 있었다.
5.2. 쿠르스크 북부 전선 - 포니리 공방전
7월 6일 새벽에 독일군을 향해 가해진 소련군의 반격을 완벽하게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소련군의 2차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진격이 저지당하고 말았다. 소련군은 거의 300여 대의 전차를 상실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급해진 발터 모델 대장은 7월7일 가용 가능한 모든 기갑 전력을 끌어모아 400여 대의 전차와 10개 보병사단을 동원해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를 잇는 철도선에 공세를 개시했다.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는 오렐과 쿠르스크를 잇는 철도선의 중심으로, 이곳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쿠르스크 북부 전선의 공세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요충지였기에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불과 10km 정도에 불과한 전선에서 양군 합계 40만에 가까운 대 병력이 충돌하는, 역사상 유례가 없던 대혈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폭격기와 전차를 동원해 맹공을 펼쳤지만 소련군의 격렬한 방어에 저지당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공세는 날이 바뀐 7월 8일에도 계속돼 필사적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강철 같은 소련군의 방어 진지는 도저히 무너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중구축전차인 페르디난트 구축전차도 2개 대대 90대가 투입되었고 원거리 전차전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보였으나 야지(野地)기동시에 엔진이 과부하되었고 지뢰로 인해 총 수의 절반 가량이 손실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소련군의 병력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증강되고 있었고, 독일군은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여주며 선전하고 있었지만 전력 차이는 오히려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불과 3일 만에 쿠르스크 북부 전선 독일군의 공세는 한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7월 8일 저녁, 모델 대장은 야전 작전 회의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소련군의 방어선은 그야말로 강철 같았고, 믿었던 공군마저 제공권 장악에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한다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클루게 원수는 모델 대장에게 공격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고, 모델 대장은 지쳐가는 병력을 다닥다닥 긁어 모아 다음날 공세를 재개했지만 결국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7월 10일 모델 대장은 중부집단군에 강력한 소련군의 방어선을 향해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한 소모전만을 강요당할 뿐이며, 획기적인 전술적 보완이 있거나 공세를 유지할 만한 전력이 보충되지 않는 이상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고했다. 히틀러는 공세를 계속할 것을 명령했지만 모델은 더 이상의 공세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 휘하 부대에게 휴식을 명령하고 공세를 중단했다.
하지만 클루게 원수는 아직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2개 사단을 보충하여 7월 11일 밤에 올호바트카를 점령하기 위해 야습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소련 70군을 향해 11일 밤 공세를 시작했지만 이 역시도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제 공세를 가할 힘을 완전히 상실한 독일 9군은 완벽히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성채 작전이 시작된 지 불과 5일 만에 쿠르스크 북부 전선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5.3. 쿠르스크 남부 전선 - 독일군의 초기 공세
쿠르스크 남부 전선에서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남부집단군의 7월 5일 일제 공세가 시작됐다. 독일군은 남부 전선의 초기 공세는 북부 전선에 비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는 소련군이 독일 중부집단군을 공세의 주공으로 판단, 남부 전선에 비해 더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 탓도 있긴 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독일 남부집단군은 160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장비해 북부 전선의 중부집단군에 비해 월등한 타격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2]
독일 남부 집단군의 주공은 4기갑군 예하 48장갑군단으로, 독일 국방군 최정예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GD)사단[13] 과 제3, 제11기갑사단 및 최신예 전차인 판터를 무려 194대나 장비한 10기갑여단을 예하에 두고 막강한 기갑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 남부집단군은 48기갑군단이 파울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과 함께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을 강타함과 동시에, 베르너 켐프 중장의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 동쪽에서 공격을 가하며 일제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48기갑군단의 공세는 당초 기대와는 다르게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 대장은 10기갑여단의 5호 전차 판터 초기생산분량 전부인 194대를 GD사단에 배속시켜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는데, 이러한 조치로 GD사단은 350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장비한 막강한 타격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GD사단의 이러한 기갑 전력은 무장SS 2기갑군단의 전체 기갑 전력과 맞먹는 것으로, 독일군은 소련군이 GD사단을 저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다. GD사단은 3기갑사단과 11기갑사단이 측면을 엄호하며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GD사단은 소련 67근위소총사단과 3기계화군단의 강력한 저지선에 가로막혔고, 소련 공군 전폭기의 폭격에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판터 전차의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고장이 속출하면서 전체 판터의 거의 1/3이 기동 불가능 상태가 되는 불운까지 겹쳤다. 또한 GD사단의 대규모 전차를 통제하기위한 10기갑여단의 임무도 GD전차연대장의 비협조, 판터의 기계고장에 따른 불신이 겹쳐 유명무실화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측면의 3기갑사단이 소련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며 성공적으로 진격했고, 이에 힘입어 48기갑군단은 적의 제1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각 부대들이 입은 피해는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이렇게 독일 남부 집단군의 주공이었던 48기갑군단의 이렇게 꺾여가면서 쿠르스크 남부 전선의 공세 또한 초반부터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는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5.4. 쿠르스크 남부 전선 - 제2SS기갑군단의 약진
한편 제2SS기갑군단은 48기갑군단에 비해 한결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48기갑군단의 우익을 엄호하며 공격을 시작한 제2SS기갑군단은 소련 6근위군의 방어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오보얀-쿠르스크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만약 6근위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지고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을 따라 계속 진격하여 독일 4기갑군과 합류하게 된다면, 쿠르스크 남부 전선은 전면적으로 붕괴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었기에 보로네즈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 대장은 곧바로 증원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방어선의 곳곳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 7월 7일에는 이틀만에 쿠르스크 방어지대의 핵심지역인 '쿠르스크-오보얀 도로'를 향해 20마일(30km)이나 전진하였다. 그러나 이날을 기점으로 제2SS기갑군단은 점점 힘에 부쳤고, 결국 소련 제1전차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7월 9일, 호트의 4기갑군은 기갑사단을 한데 모아 전선에 뚫고 나아가, 토텐코프 사단을 선두로 하는 독일군과 쿠르스크 사이에 있는 마지막 장애물인 프숄 강을 뚫고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는 참호를 파 들어갔다. 하지만 이후로 북서쪽인 쿠르스크쪽으로 진격은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5.5. 프로호로프카 전투
결국 호트는 주력 공세를 북동쪽의 작은 철도 교차점인 프로호로프카로 돌렸다. 7월 9일부터 14일까지가 쿠르스크 공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무장친위대 기갑사단들(제1 SS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 (LSSAH), 제2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제3 SS기갑사단 토텐코프)들을 앞세운 독일기갑부대는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352대의 전차를 굴리며 진격하였다. 이에 7월 6일에 스탈린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장군에게 생일 축하 겸 손수 전화를 하면서, 그에게 귀중한 예비 병력의 일부를 주고 프로호르프카를 지키라고 하였다. 7월 7일 오전 1시 30분, 소련 5근위전차군은 사흘간 370km(230마일)이 넘는 거리를 독일의 Ju87 급강하 폭격기와 맞닥트리며 밤낮으로 행군하여 7월 10일에 전선에 도착하였다. 사실 이 정도 거리는 원래 기차로 이동을 해야 정상인데[15] 전차가 직접 주행한 탓에 승무원이나 기계에 많은 무리를 줬으나 사기는 왕성했다.이어 두 부대가 만났을 때, 양 편의 병사들은 좁은 차창을 통해 적군의 규모를 확인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방이 구릉지였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었다. 거대한 두 부대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 이로써 희대의 대전차전이 시작되었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1,500대가 넘는 전차가 뒤엉킨 전투는 없었다. 게다가 이 전투에는 그 어떤 계획된 전술도, 일관된 지시도 없었다. 양측의 전차는 서로의 위에 올라타기도 하고,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악전고투를 겪었다. 한 목격자는 전장이 너무 비좁아보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8시간에 걸친 맹렬한 전투 끝에 두 부대는 서서히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소련은 300여대의 전차를 남겨둔 채 퇴각했고, 독일 역시 비슷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소련은 신속하게 전차를 보강한 반면, 독일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14]
- 영국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 <독일 육군의 선봉, 기갑부대> 편
주코프는 로트미스트로프에게 T-34가 6호 전차 티거에게 화력에서는 제압당하지만[16][17] 기동성이 앞서니 '기계화 부대의 백병전'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7월 12일 아침, 제2SS기갑군단 소속의 294대 가량의 독일군 전차와 790여대의 소련군 전차가 대치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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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아침 7시, 대규모의 독일 폭격기 부대가 소련군 진영을 맹렬히 폭격하였고 이에 맞서 소련 전투기들이 출격하였다. 폭격기들이 돌아간 후, 소련군은 대지공격기와 카츄샤 로켓을 동원하여 인근을 쑥대밭을 만들었다. 오전 8시 30분, 로트미스트로프는 강철이란 뜻의 '스탈'이라는 암호로 공격 명령을 내렸고 곧이어 독일 쪽에서도 LSSAH의 전차들이 몰려나왔다. LSSAH는 수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소련군보다 앞서 전장에 도착하여 해당 지역에 구축되어 있던 대전차참호와 회랑을 선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날, 겨우 3제곱 킬로미터에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의 전차들이 뒤엉켰다.[19]
공격해오는 소련군을 독일군은 월등한 교환비를 보이며 격퇴하였으나 소련군은 전차를 잃을때마다 병력을 재편성해서 끈질기게 공격했다. 전투 과정에서 소련군 170전차여단장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옥챠브리스키에서는 미하일 비트만이 소속된 티거 전차 4대가 소련군 전차 100대중 수십대를 격파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독일군 격퇴 시도는 실패하였고 엄청난 손실을 입어야 했다. 전투 결과 독일군은 제4기갑군 전구에서 약 프로호로프카에서 4대의 4호 전차 손실을 포함해 43~80대의 기갑차량을 손실했고 소련군은 약 300~400대의 기갑차량을 손실했다. 독일군 측의 전과 주장으로는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이 244대를 파괴한것으로 집계되었다. 투입된 소련군의 3개의 전차군단중 1개의 전차군단이 사라졌다. 소련군은 70대의 티거를 파괴하였다고 선전하였으나 실제로는 옥챠브리스키와 프로호로프카 근방에서 완파된 1대를 빼면 없다. 즉 전술적으로는 독일군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월등한 교환비에도 불구하고 공세탄력을 크게 상실한 독일군은 더 이상 결정적인 진격이 불가능해졌고, 소련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어 추가적인 반격이 전혀 불가능하였다. 7월 13일, 로트미스트로프에게는 5근위군 등에서 증원군이 계속 도착하긴 했지만 5근위 전차단의 기동 가능한 전차의 수는 50대 밖에 없었고 병력은 반으로 줄어있었다. 다음날도 계속 전투가 진행되었지만 이는 소규모에 불과했으며, 독일군의 진격은 소련군의 방어선에 막혀 돈좌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만 따져 봤을때는 독일 기갑군의 전술적 승리에 가깝지만,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로 인해 소련군의 돌출부를 제거하려는 최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전략적으로는 소련의 승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전투가 실제로는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대패했고, 대패를 감추고 싶었던 소련에 의해 독일군의 손실이 부풀려진 전투라는 주장도 있다. 소련측 논리는 본인들이 SS기갑군단의 전차 300대를 격파했다고 주장하는데 SS기갑군단이 보유한 전차수가 352대 정도이며 다스라이히와 토텐코프는 프로호로프카에 있지도 않았다.
훗날 바실렙스키는 이 전투를 회상하면서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고 회고했으며, 한 종군 기자에 따르면 이 지역은 전투가 끝난지 수십주가 지날 동안 끔찍하고 황량한 사막으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5.6. 독일군 공세 종료
7월 10일, 서방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히틀러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귀중한 병력을 남부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7월 13일, 성채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고, 2SS기갑군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호트 장군을 비롯한 휘하 장군에게는 성채작전 이전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만슈타인 원수는 작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돌려진 히틀러의 관심을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히틀러의 공세 중지 결정은 이탈리아의 연합국 상륙보다는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으로 인하여 돌출부가 남부 집단군 전력만으로 돌출부를 끊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장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 설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만슈타인 주장대로 공세를 지속했으면 역시나 발리는 쪽은 독일군이였다.왜냐면 스텝 예비군은 전투에 참가를 안해서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48 기갑군단과 SS 2기갑군단은 이미 지속적인 전투로 인해 만신창이와 전투 피로가 쌓일데로 쌓여서 이대로 공세를 유지했다가는 군단 자체가 와해되는 결말 밖에 없다.
결국 독일군의 쿠르스크 공세는 7월 15일에 끝났으며 이탈리아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히틀러는 8월 1일 동부전선의 길이를 단축하여 유럽으로 돌릴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오룔 돌출부로부터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6. 소련군의 반격과 전투 종료
6.1. 쿠르스크 북부 전선 - 쿠투조프 작전
7월 12일, 쿠르스크 북쪽에서는 오룔(오렐이라고도 한다.)과 브랸스크를 탈환하여 독일 중부 집단군을 무너트릴 계획으로 쿠투조프 작전이 개시되어 독일 9군의 후방을 위협했다. 처음에 3개군으로 공격을 시작했던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은 작전 초기엔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전진이 힘들었지만, 추가로 3개군을 더 투입하여 독일군의 한쪽이 뚫리면서 소련군은 물밀듯이 쳐들어가 8월 5일에 오룔이 함락되고, 8월 18일에는 브랸스크 시가 소련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독일군은 얌전하게 후퇴하지 않았다.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만 2천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60,804명,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거기에 독일군은 특히 소련군 포로 11,732명까지 데리고 하겐 라인으로 무사히 퇴각한다. 클루게와 모델은 쿠르스크 방면의 공세를 준비하면서도 오렐 전투를 예상하여 방어에 용이한 예비 전투 지구를 확보해 두었고, 9군 사령관 모델이 제2기갑군의 사령관을 겸임하며 지휘 체계를 통일시켰다. 결과적으로 중부집단군은 퇴각했음에도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의 전력을 보존하여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6.2. 쿠르스크 남부 전선 - 루미안체프 작전
쿠르스크 남쪽에서의 반격은 한참 후인 8월 3일에 주코프 장군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개시되었다. 이 작전의 이름은 루미안체프 작전으로, 목표는 하르코프의 탈환이었다. 이 공격은 주로 쿠르스크 후방에 있던 이반 코네프의 초원(스텝) 예비 전선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만슈타인의 독일군 기갑부대가 자리를 잠시 비운 직후인, 8월 3일 주코프가 보르네즈 전선군과 스텝 예비 전선군, 그리고 남서부전선군의 우익을 동원해 반격 작전을 개시하자 독일군은 완전히 허를 찔리게 되어 소련군이 결국 8월 5일에 벨고로드 시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후 중부집단군으로 부터 차출된 증원부대와 루미안체프 작전 저지를 위해 파견된 기갑부대 일부가 서둘러 돌아오면서 독일군은 일시적으로 소련군을 저지하였다.
히틀러는 어떻게든 하르코프와 도네츠강 유역만은 지키고 싶어 했지만 8월 7일에 서부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의 좌익은 11개군과 기타 군소대를 동원해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8월 13일 마침내 스텝전선군이 하르코프에 돌입하여 10일간 치열한 시가전 끝에 8월 23일에는 하르코프 시도 점령함으로써 독일군은 도네츠강 유역을 포기하고 드네프르강 서쪽으로 후퇴함으로써 쿠르스크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된다.
7. 결과
비록 소련군의 병력 손실은 독일보다 훨씬 많아서 인명피해가 독일의 4배가 되었고, 전차 같은 경우는 독일군에 비해 거의 7배의 손실을 입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에도[20][21] 승리는 소련의 것이었다. 당연히 소련의 승리고 이 점에 대해서 모든 전쟁사가의 견해가 일치한다. 만슈타인 역시 후에 자신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작전이 잘 안 풀렸던 상황은 인정했다.
이후 독일은 이탈리아에 서방 연합군이 상륙했기 때문에 더 이상 동부전선의 소련군만 상대할 수 없었고, 전력의 상당부분을 서부전선에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1944년 중반까지는 서유럽 전체의 공업지대(+추축국을 도왔던 중립국 스웨덴)와 자원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던 나치독일이 소련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이나 공업력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나치독일은 이런 공업력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는 독일에게 대단히 나쁜 소식이었다.[22]
소련군도 쿠르스크 이후 반격부터 해서 드네프르강을 완전히 뚫어버리기까지 200만 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지만 1941년 독소전 직전 인구 2500만 명은 족히 넘던 드네프르강 서안 서부 우크라이나를 탈환해서 인구 밀집지대에서 징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손실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군사적인 면'''만''' 본다면 동부전선 > 이탈리아가 맞기는 했다. 지형적으로 봐도 이탈리아 북부는 알프스 산맥으로 제대로 막혀있고 중부에도 아펜니노 산맥 + 많은 강들로 지연전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어차피 뚫릴 이탈리아 남부로, 동부전선의 정예기갑 병력을 뺀 것은 아무리 봐도 전략적 미스다. 더군다나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드네프르 강이 뚫리고 서부 우크라이나를 스탈린이 확보하면 거기서 또 보충할 수 있는 규모도 상당할 것이며 이는 독일에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편적인 견해일 뿐이다. 이탈리아는 1943년 연합국이 상륙하자마자 추축국의 대열을 빠르게 탈퇴했고,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연합국 편을 들어 독일군의 이탈리아 반도 축출을 거들었으므로 이탈리아의 중요성에 대한 히틀러의 판단은 그른 게 아니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급히 이탈리아 국왕에 의해 체포된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괴뢰국인 살로 공화국을 만들어 이탈리아 북부를 맡겼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가 연합국의 공세를 잘 막아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은 독일군과 연합국이 대치상태로 있다가 독일이 멸망해서 별로 중요성이 없다고 간주되곤 하지만, 만약 이탈리아가 통채로 연합국으로 넘어갔다면 멀리 있어서 도움 안되는 일본을 제외하면, 군사적으로 의미있는 추축국 중 가장 먼저 항복했다는 점에서 독일 국민이나 다른 추축국 루마니아, 헝가리, 핀란드, 크로아티아 등 지도자에게 줄 수 있는 충격은 상당했다. 즉, 이탈리아의 군사적 가치는 동부전선보다는 훨씬 낮았지만 추축국의 안정화를 위해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의 안정을 위해 작전을 취소한 히틀러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보는건 근시안적인 견해다.
8. 매체에서의 묘사
- 게임 월드 오브 탱크에서 프로호로프카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 미니어처 게임인 DUST에서도 원래 역사처럼 발발하였다. 이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로봇보행 병기를 투입한 독일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보행병기만으로 소련군들을 모두 발라버릴수있다고 자만한 독일군이 개활지에 전차를 상대로 투입했다가 소련군의 대전차화기 등등에 대차게 발려 버렸다. 덕분에 독일군은 자기들의 보행병기까지 노획당하고 소련은 이를 기반으로 한 보행병기인 KV-47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보행병기들의 키는 일반적인 전차등에 비해서 크고 속도가 느려서 시가전은 몰라도 개활지로 나왔다간 그냥 움직이는 타겟이 된다.
- SD 세계대전 소련군 캠페인 9번째 임무가 해당 전투이다.
- 스웨덴의 유명한 파워 메탈 밴드인 사바톤에서는 쿠르스크 전투를 모티브로 하여 Panzerkampf(전차전)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해당 곡
-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서 주인공들이 참전한 전투다.
- 콜 오브 듀티: 유나이티드 오펜시브의 소련 임무의 배경이다. 임무 1은 성채 작전 초반부, 임무 2는 포니리 공방전, 임무 3은 프로호로프카 전투, 임무 4와 5는 위의 루미안체프 작전의 마지막 국면인 4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묘사하고 있다.
- 워 썬더에서 쿠르스크 맵이 등장한다.
9. 여담
독일에선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실시한 대규모 기동훈련에 터키군 수뇌부를 초청, 참관케 하고 히틀러와 접견하게 하는 등 터키에 호의를 보이려 애썼다. 당시 친독 성향의 중립국이었던 터키를 끌어들이면 고착된 동부전선의 전세를 유리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일은 소련군의 연료를 책임지고 있다 생각한 캅카스 지역의 유전을 터키가 공격해주기를 바랐고 실제로 독소전쟁 초반부터 독일은 터키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과거 1차대전에서도 터키와 독일은 같은 동맹국이었고 러시아는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총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터키는 전신인 오스만 제국이 1차 대전에 독일 편으로 참전했다가 결국 패배하여 공중분해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신중했다. 1차대전 패전의 대가로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고 아나톨리아 이외의 모든 영토를 잃어버렸으니까. 그나마 남은 영토도 케말 파샤로 대표되는 터키인들의 강력한 저항끝에 영국과 프랑스가 포기하고 끝까지 물고늘어졌던 그리스도 나가떨어지면서 겨우 지켜낸 것이다. 1차 대전 당시 같은 아군이던 불가리아나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많은 영토를 잃은 것과 달리 그래도 상당수 영토(그리스가 그리도 노리던 아나톨리아 지역까지)라도 스스로 지켜냈다.
결국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의 전략적 패배로 귀결되었고 터키는 전쟁 막판까지 중립을 지키다가 1945년 2월 23일에서야 줄서기식으로 연합군에 참가하여 추축진영에 선전포고했다. 터키가 비겁하다느니 기회주의적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터키는 당시 미국과 연합이던 소련군을 가장 견제했다. 당시만 해도 소련과 국경을 맞닿은 데다가 1920년대에 스탈린이 카르스를 비롯한 북동쪽 땅을 소련에게 넘기라는 요구를 하자 터키는 20만이 넘는 군대를 배치하면서 전쟁 준비를 했고, 미국이나 영국이 놀라서 터키를 지원하기로 함에 따라 스탈린도 포기하고 물러난 바 있었다. 이러니, 2차대전 당시 터키는 소련이 폴란드를 쳐들어오자 다음은 우리일것이라고 소련 쪽을 예의주시했다. 그런 소련과 손잡은 연합군에 대하여 여러 모로 의견이 오고가던 점도 컸다. 게다가, 또 다른 터키 전쟁학자의 의견도 있는데, 이미 독소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터키는 독일의 패배를 직감하고 독일에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는 설도 있다. 이게 가능성이 있는 게 터키 건국자인 아타튀르크는 1930년대, 살아 생전에 히틀러를 미쳤다고 봤으며 2차 대전을 예측하고 미국이 필연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것이고 미국으로 인해 승전할 것이라는 소름돋는 예언 수준의 예상까지 했으며 2인자인 이스메트 이뇌뉘(2차 대전 당시 터키 수상)에게 히틀러를 편들지 말라고 충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목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는 옆나라인 그리스가 맥없이 떨어지는걸 보고 나름대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징병령을 확대하고 사실상 1942년부터 총동원 체제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이 불과 20여년 전에 벌어졌으니 그리스에 살고있지만 과거 터키땅에 거주했고 여전히 일가친척이나 옛 이웃들이 남아있던 그리스 주민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터키로 피난 오는것도 승인했고 특히 테살로니키의 유대인들은 대부분이 터키로 피난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이 터키를 통하여 유럽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이 컸기에 미국이 엄청난 지원을 하고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도 덮어버렸던 걸 봐도 당시 터키에 대하여 뭐라고 따질 겨를도 없었다.
이 전투에는 한 여성이 개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여인은 바로 올가 체코바이다. 독일에서 영화 배우로 활동하며 히틀러의 환심을 샀는데 이렇게 해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소련 정보부에 올가가 감사를 표한 서신이 남은 걸로 보면 첩자였던 건 분명한 듯하다. 어차피 이 무렵은 스타브카는 NKVD의 '붉은 관현악단'으로 대표되는 첩보전의 압도적 승리로 인해서 독일 야전 제대들보다 먼저 작전 명령서를 받을 정도로 소련의 정보력이 우세했고 심지어 독일군 내에 친공 성향 장성이 20여 명에 달했다는 소리 까지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한 개인이 결정적 제보를 했다고 보긴 힘들다.
[1] 7월 5일부터 7월 15~16일까지는 독일군의 공세, 7월 12일부터 8월 23일까지는 소련군의 공세.[2]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양 측 병력이 기록에 따라 다 다릅니다. 작성 시점에서 수치는 Axis Forum 등의 여러 웹사이트들과 다른 문헌들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으나, 정확한 수치가 있다면 수정 부탁드립니다.[3] 과거엔 사상 최대의 전차전으로 알려졌으나 독일 측 사료가 연구되면서 프로호로프카 전투의 독일측 전차 수량이 더 적게 추정되면서 규모 면에서는 1940년 벨기에 장블루 전투가 더 컸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40년 즈음에는 연합군이나 독일군이나 중전차를 대규모로 운용하지 않았다. 즉 흔히 경전차라고 불리우는 체급의 싸움이 주축이었다는 말. 반면 쿠르스크에서는 기본이 중형전차 이상급에 각군이 애지중지하는 중전차가 다수 투입된 순수힘싸움 구도의 대규모 전차전도 매우 자주 일어났다. 투입된 전차들의 화력을 기준으로 잡고보면 쿠르스크 전투가 최대의 전차전이었던것은 맞다. 당장에 쿠르스크 전투 자체가 독일에서는 자기들쪽으로 돌출된 지역에서 직전 전투로 응집된 소련군을 격파하여 밀리고 있던 동부전선에서 반격을 하기 위한 것이였고, 소련으로서는 직전 공격의 실패 를 설욕하고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 예상되는 독일의 주력군을 격파하고자 하였다.[4] 전략적으로 후방에서 대기하며 적시 투입을 기다리는 부대의 의미로, 예비군과는 다른 뜻이다.[5] 사실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하면서 동부전선의 집단군 사령관들은 전선 축소-방어에 유리한 지역으로 퇴각해서 진지를 구축하여 겨울 동안에 소련군의 역습을 방어-를 건의하였으나, 히틀러는 오히려 사령관들과 육군 지휘부를 해직하고, 본인 스스로 동부전구 사령관직에 취임하면서 전선 유지를 지시하였다. 이전의 하르코프 전투에서도 그렇고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소련군 손실의 대부분의 소련군의 반격 국면에서 나왔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독일군 사령관들의 판단이 옳았다. 이 어리석은 명령은 추축국들에게 나치의 빛나는 위상을 유지시켰겠지만, 독일의 전쟁능력을 빠르게 소모시켜 버렸다. 이에 당시 가장 발전된 참모조직에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말하지 못하고 차선책을 제시하였으나, 아르덴지역에서의 승리에 고무되어 있었던 퓌러는 이를 무시하고 오로지 앞으로 나갈것을 주문하였다. [6] 이 점에서는 히틀러의 주장이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만슈타인의 하르코프 공방전은 성공적이었지만, 소련군은 아직도 엄청난 예비부대가 남아있었다. 5월의 공세가 성공한다고 한들, 독일군은 이미 두들겨 맞을대로 맞은 상태였고, 기갑전력이 보충되지 않는 한 소련군을 무너뜨리기는 어려웠다. 물론 히틀러의 말대로 기갑전력을 보충한다 하더라도 이제 전력에서 완전한 우위를 확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부 군사 다큐멘터리의 군사 전문가들은 히틀러의 이 주장을 최악의 악수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소련군이 독일 공세가 연기된 사이 모든 병사와 인민들을 총 동원하여 수백km의 깊은 도랑에 대전차포, 다닥다닥 설치한 지뢰 등 철벽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고 심지어 소련이 위협적으로 보던 타이거 전차는 소련이 '''삽질'''로 만든 수백KM 길이에 깊이가 깊은 도랑에 빠져서 무력화 되어버린 사례가 많았으며 공세가 지연된 핵심적인 원인인 판터 D형 전차들이 실전에서 낮은 신뢰성을 보이며 많은 수의 판터가 고장이 발생되어 무력화되는 등 사실상 공세를 연기한 의미가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군이 우주방어선을 짤 시간을 주지 않았으면 독일도 승산은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소련군의 장비 및 병력 보충속도가 독일군의 보충속도를 압도하고 있던 현실을 감안하면 시간이 갈수록 전력격차는 더 벌어졌을 것이기에 차라리 공세를 일찍 하는 것이 더 나았을 수도 있긴 하다.[7]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승패가 뒤바뀌기엔 어렵다고 봐야 한다. 애초에 전투에서도 독일군 공세기간 내내 소련군은 스텝 전선군은 전투 투입도 안 하고 전략 및 반격 예비대로 온존시켜놨었다. 한마디로 소련군은 전략 예비대 투입도 안 할 정도로 쿠르스크 전투의 방어국면에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41년의 모스크바 전투나 42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때처럼 소련군이 피말리며 사활을 걸고 방어하던 상황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오히려 소련군의 반격국면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로 소련군이 입은 손실이 훨씬 더 컸다. 이 정도로 독일군의 공세는 실패적이었는데 여기서 변수가 좀더 생긴다 한들 큰 그림이 바뀌긴 어렵다.[8] 앞의 주들 모두 옳은 이야기들이지만, 당시 독일에게 있어서 최소한 동부전선에서의 최고의 전략은 돌출된 지역 제가 아닌 후방에 안정적으로 구축된 요새로 전략상 후퇴로 소련군들을 끌어 들여서 격파는 것이였다. 사실 모스크바전투 직후부터 시행되었어야 했으며 ,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수렁에서도 빠졌어야했다. [9] Kursk: The German View[출처] Niklas Zetterling, Kursk 1943 (Frank Cass 2000) 140p [10] 이 다섯번째 사나이라는 네이밍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4명의 첩자는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히게 되지만, 이 다섯번째는 오랜기간 잡히지 않았다. 영국 정보부는 첩자가 5명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있었고, 이것이 대중들에게도 퍼지면서 '다섯번째 사나이'라는 별칭이 붙게되었다. 후일 관련 영화도 제작된다.[11] 오픈탑 차량에 탑승한 승무원을 공격하는 용도.[12] 남부집단군은 과거 캅카스지역으로 진출한 부대가 포함된 곳으로 캅카스산맥 점령은 히틀러가 독소전 시작 이전에 목표로 삼았던 3곳 중 하나였다.(나머지는 수도 모스크바와 발트 해연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특히나 독일에서 광할한 우크라이나 평야라는 엄청난 거리를 이동해야 했기에 무장 수준이 굉장히 좋았다. 또한 모스크바 점령에서 실패하면서 히틀러가 집중했던 지역도 캅카스산맥으로 스탈린그라드 점령의 이유가 캅카스 유전과 모스크바사이의 연결선 제거와 캅카스 점령을 위한 작전에서 소련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위치라는 점이 크게 작용되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버텨준 덕분에 이 부대들을 무사히 도망나와서 남부집단군에 합쳐졌다.[13] GroßDeutschland. 독일 국방군의 최정예 사단으로 일단 독일 국방군사단들과 달리 독일제국 전역에서 신병을 모집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일단 이 사단은 나치가 지원을 몰빵해 주던 친위대 사단과 견줄만한 장비를 가졌다.) 나치당 이념과 전혀 관계없이 병사들을 선발했으며 심지어 프랑스계 독일인과 프랑스출생 게르만족도 그로스도이칠란트사단에 정부대원으로 입대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사단은 독일군 최정예사단이라는 이름에 아깝지 않은 훈련을 자랑한다. 부상자 후송훈련으로 실제로 교관들이 모제르 소총 실탄을 발사하는 등 한달에 약 24명정도의 신병들이 교육도중 사망했다고 한다.[14] 1500대는 소련측 주장으로 전형적 프로파간다이다. 독일군이 600대의 전차를 동원했다 주장하는데 프로호로프카전차전이 일어난 회랑에는 라이프슈탄다르테의 파이퍼 대대, 마르틴 그로스의 장갑대대, 미하일 비트만과 4대의 티거, 그리고 구스타프 크니텔의 정찰대대, 알베르트 프라이의 제1SS장갑척탄병 연대만이 소련군들을 상대했다.[15] 그나마 신뢰성에서 월등한 T-34였으니까 이 정도라도 했지 무겁고 구동계가 허약한 독일제 중전차들은 이 정도나 되는 거리의 자력이동을 시도했다간 퍼져버렸을 것이다.[16] 판터는 프로호로프카 전차전에 투입된적 없다. 판터 194대 전량이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에 배속되었으며 프로호로프카 회랑에서 싸운건 라이프슈탄다르테 일부 부대이다.[17] 로트미스트로프는 또한 LSSAH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티거의 숫자를 과대평가했다.[18] Zetterling, Niklas; Frankson, Anders (2000).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Cass Series on the Soviet (Russian) Study of War. London, UK: Taylor & Francis (Frank Cass). ISBN 0-7146-5052-8.[19] 독일 외무부장관의 아들 루돌프 리벤트로프의 7대의 4호 전차와 요아힘 파이퍼의 기갑척탄병 대대는 2개 전차연대와 9 공수군 병력의 소련군 병력을 상대로 혈전을 치뤘다. 쿠르트자메트라이터는 5대의 마르더 구축전차를 이끌고 32대의 소련 전차중 혼자서 24대를 처리하기도 했다. 알베르트 프라이의 1기갑척탄병연대는 다스라이히의 전구로 접근해가는 9공수사단의 병력을 격퇴하였다.[20] 독일군의 작전 쿠르스크를 방어했던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의 전차 수는 600여 대에서 50대로 줄어 간신히 방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전투에서 T-34가 독일 전차들을 상대로 낮은 교환비를 기록하자 소련은 이전까지 집중하던 전차의 생산성 향상과 방어력 개량이라는 양대 중점 사항을 생산성과 화력개선으로 변경하게 된다.[21] 당시 독일의 1기갑군단이 소련의 1기갑군을 상대하였는데, 이는 전략적으로 봐서 1:4의 비율에 피해는 소련에게 나쁜 것이 아니였다.[22] 독소전 초기 소련은 연전연패 중에서도 서부지역에 있었던 공장들을 뜯어다가 우랄산맥지역에서 생산해냈다. 그에 비하여서 서유럽공업지대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의 항공부대들이 막대한 피해만 입고 이기지 못하면서 미국과 영국 공군의 폭격에 피해가 누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