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파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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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숙한 표정 때문에 파울루스에게는 '순교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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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전 후 드레스덴에 거주할 때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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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독일 국방군 육군 지휘관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을 지휘해 유명해졌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3cm의 큰 키에 잘 어울리는 세련된 옷차림과 점잖은 몸가짐 덕분에 친한 친구들은 그를 '영주(der Lord)'라 부르곤 했는데, 이를 잘못 번역해서인지 2000년대 중반에 발매된 영미권 서적에서조차 그를 귀족 출신으로 기술하기도 했다.[2] 하지만 실제로는 헤센 지방의 국스하겐 출신으로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소년원의 부기 계원으로 근무하면서 헤센나사우의 재무관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1910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해군 장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하였고, 이후 필립-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잠시 법학을 공부하다가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보병 111연대에 입대하였다. 당시 함께 훈련을 받던 사관생도 중 루마니아 왕실과 연결된 명문 귀족 가문의 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자신의 누이인 엘레나 콘스탄체 로제티-졸레스쿠를 파울루스에게 소개시켰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1912년 7월 4일 결혼한다. 1914년에 큰딸 올가가 태어났고 1918년 4월엔 쌍둥이 형제인 프리드리히와 에른스트 알렉산더가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선 독일 제국군 소위로 종군했고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세르비아 왕국 방면)에서 각기 참모장교로 종군하였다. 1918년 장군참모 과정을 마치고 대위로 진급하여 종전을 맞게 되었다. 파울루스와 같이 2차 대전에서 독일군의 대부분의 상급대장-원수들이 대위로 종전을 맞았는데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진급이 꽤 빠른 편. 종전 후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병력 규모가 10만으로 제한된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방위군의 정예 장교 4천 명에 선발되는 등 파울루스는 상당히 인정을 받은 장교였다.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열린 육군의 어떤 기동 훈련에서 그는 훈련 연대장을 맡았는데, 훈련 평가관은 그에 대해 "결단력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함"이라고 기록했다. 이런 평가에서 보이듯이 그는 야전 지휘관 타입은 아니었고, 이후에도 주로 참모장교로 근무하며 자신의 장점을 발휘했다. 장군참모 출신 엘리트 장교들은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여러 병과를 돌리는 게 정상인데, 파울루스를 특히 아낀 상관인 프란츠 할더 역시 일선 중대장 경험조차 없는 참모장교였고, 할더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면서 자신의 인맥에 속한 장교들을 적극 등용했다. 이렇게 실전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이 주축을 이룬 참모본부는 2차 대전 개전 후 야전 지휘관들과 자주 충돌을 빚게 된다.
하지만 파울루스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 초창기 베를린 참모본부(병무국)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서로의 집에도 놀러다닐 만큼 절친했던 발터 모델과 개전 후에도 친분을 유지하였고, 할더가 이들과 갈등을 빚을 때마다 원만하게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파울루스의 아들이 제3기갑사단에 근무할 당시 사단장이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발터 모델이었는데, 이때 젊은 파울루스 중위와 그의 동료들에 따르면 "롬멜이나 모델 장군과 비교하면 파울루스 장군은 군인보다는 조용한 학자를 연상시켰다."고 한다.
기존 항목에서는 귀족 출신이 아닌 평민 출신 장교가 오히려 히틀러 집권 하에서 승진이 유리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이러한 이분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일찌감치 나치당이나 히틀러와 친분을 쌓은 장군참모 출신이 아닌 에르빈 롬멜과 페르디난트 쇠르너가 독보적인 예외일 뿐. 이름에 폰(Von) 이 없더라도 전통적인 군인 가문 출신 장교[3] 들은 군부 내 후견인이 장교의 임관, 진급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독일 육군 진급 체계에 여전히 유리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육군을 장악하려 한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에서 파울루스는 프란츠 할더 라인이어서 숙청을 피해갔지만, 정작 같은 평민 출신의 발터 모델은 자신의 추천인인 루트비히 베크가 사임하자 즉시 야전군으로 좌천되었다. 이 때 모델과 함께 야전군으로 좌천된 인물이 프로이센 귀족 출신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4] 히틀러는 이때만 해도 자신의 뜻대로 발터 폰 라이헤나우를 육군 총사령관에 세우는 것조차 실패할 정도였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본격적으로 육군 인사를 좌지우지한 것은 암살자 그룹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 1943, 44년 이후의 일이다.
파울루스는 정치색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현 정권에 이의 없이 충성하는 보통의 독일군 장교였다면 그의 아내인 엘레나 콘스탄체는 처음부터 히틀러와 나치당의 정책을 불신했다고 한다.
2.2. 제2차 세계 대전
2.2.1. 이상적인 참모장
전술한 대로 바이마르 공화국군 시절에 이미 베를린 참모본부에 발탁될 만큼 실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았고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 이후 프란츠 할더가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면서 파울루스는 빠르게 진급했다. 2차 대전 직전에 하인츠 구데리안이 지휘하던 16군단의 참모장을 맡았는데, 구데리안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image]생각이 고결하고, 영리하고, 양심적이며 근면한 데다 아이디어가 풍부한 참모본부 장교로서 파울루스의 순수한 의지와 애국심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나와 파울루스는 훌륭한 조화 속에서 함께 일했다.
- 하인츠 구데리안, 《한 군인의 회상》
▲ 제6군 참모장 시절, 제6군 사령관인 발터 폰 라이헤나우(左)와 파울루스
1939년에 발터 폰 라이헤나우 휘하의 10군(나중에 6군으로 개칭) 참모장을 맡아 폴란드 침공, 그리고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네덜란드군과 벨기에군을 몰아 붙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중장으로 진급하고 OKH 참모차장으로 승진하였다. 상반된 성격의 라이헤나우와 파울루스는 호흡이 대단히 잘 맞았는데, 라이헤나우는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 타입이어서 작전의 세부적인 면이나 사무적인 일에 신경 쓰는 걸 매우 꺼린 반면, 파울루스는 타고난 참모답게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 게다가 배타적이고 사나운 성격 탓에 동료나 부하 장성들과 걸핏하면 말다툼을 벌였던 라이헤나우를 대신하여 10군 사령부를 대표하여 OKH, 16군 사령부와 전화로 연락하며 의견 조율을 담당한 것도 파울루스였다.[5] 10군은 벨기에 레오폴드 3세의 항복을 직접 받을 만큼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이렇게 라이헤나우가 파울루스의 실력을 알고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면서 훗날 파울루스가 6군을 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준다.
이후 할더는 파울루스를 OKH로 불러들였고, 중장으로 진급하며 OKH의 핵심 부서인 작전 참모차장의 자리에 오른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소련 침공의 세부적인 작전을 짜고 검토했으며, 여러 번의 도상 연습을 통해 10주만에 소련을 정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론은 히틀러의 침공 결심을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라이헤나우가 할더에게 파울루스를 다시 자신의 참모장으로 전속시켜 달라고 요청할 만큼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라이헤나우 지휘의 제6군은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우크라이나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으나, 소련군의 거센 저항으로 지연되면서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파면당한다.
2.2.2. 6군의 진격,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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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1월, 6군 사령관에 취임 직후의 사진
라이헤나우가 룬트슈테트의 후임으로 남부집단군 사령관과 6군 사령관을 겸임하면서, 그는 히틀러에게 집단군사령관과 군사령관직을 동시에 수행할 수는 없다며 자신의 6군 사령관 후임으로 파울루스를 추천한다. 파울루스가 기갑대장으로 진급하여 6군 사령관에 임명된 직후 라이헤나우는 뇌출혈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가 처음으로 지휘한 작전은 1942년 5월에 하르코프 방면에서 시작된 소련군의 춘계 공세에 대한 방어 작전이었다. 소련군은 약 60만의 대병력으로 이 공세를 시작했고, 독일군은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았다. 파울루스로서는 처음으로 맡는 야전 지휘였으나, 발군의 지휘력을 발휘해서 소련군의 몇 분의 일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소련군의 대군을 기동 방어로 막아냈고, 이어 루프트바페의 지원을 받아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기갑군과 함께 소련군을 포위하여 패퇴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항목 참조. 이어 바로 실시된 1942년 여름의 청색 작전에서 스텝 평원을 지나 소련군을 격파하고 볼가 강 유역의 스탈린그라드까지 도달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6군은 숙적인 소련 62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시 전체의 90%를 장악했으나, 11월에 펼쳐진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 고리 작전 등에 의하여 소련군에 역포위되어 2개월 간 그야말로 극한의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저항해야 했다.[6] 당시 독일군 주력 병력들은 전면에 집중되어 있었고 후방에는 상대적으로 약한 루마니아군[7] 과 이탈리아군,헝가리군으로 이루어진 동맹군 병력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주코프가 제대로 허를 찔러버린 것이다. 제6군을 구원하기 위해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계획한 겨울폭풍 작전이 결국 실패로 돌아간 뒤 소련군의 소토성 작전에 의한 대대적인 공세에 밀려 결국 항복했다. 독일군 주력이 전부 포위망에 갇혀버렸기 때문에 만슈타인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한정적이었다는 게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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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사진 왼쪽이 항복 직후의 파울루스, 옆에 있는 사람이 슈미트 제6군 참모장
만슈타인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자신이 동쪽으로 전진하면서 파울루스에게 서쪽으로 포위를 뚫고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파울루스가 자기 말을 안 듣고 히틀러의 사수 명령을 고수했기 때문에 구출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사정을 보면 영하 20도를 넘는 혹한에 연료, 식량, 탄약이 모두 부족한 데다가 기진맥진했던 제6군 장병들이 소련군의 다중 포위망을 뚫는 것은 힘들었다는 점을 들어 만슈타인이 파울루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자세한 것은 겨울폭풍 작전 참조.)
6군의 가장 유능한 기갑 지휘관이었던 한스발렌틴 후베 장군이 수훈을 위해 총통 사령부에 호출됐지만 후퇴 허가에 관한 논의를 할 수 없었고, 파울루스는 히틀러를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20대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목에 건 젊은 장교, 빈리히 베어 육군 대위를 선발한다. 베어는 1월 12일 아침에 파울루스의 명령을 받고 6군의 전쟁 일지를 챙긴 뒤 피톰나크 비행장으로 향했다. 베어는 먼저 만슈타인 원수에게 보고를 마친 뒤 늑대굴로 가서 히틀러를 직접 만났지만, 6군의 탈출에 대한 논의는 커녕 히틀러는 '''눈부신 반격으로 판세를 역전하겠다'''는 얘기만을 떠들어댔다. 결국 베어 대위는 '총통이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지도와 깃발로 이루어진 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포위망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에르하르트 밀히 원수의 사령부로 배속된다.[8]
그 와중에 자부심에 가득찼던 헤르만 괴링은 공중 보급만으로도 파울루스의 제6군 보급 전체를 책임질 수 있다고 히틀러에게 말했고 히틀러는 괴링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제6군의 보급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6군이 하루에 받아야하는 보급품의 양만 '''800톤이었고''' 당시 루프트바페가 모든 전력을 동원해 보급할 수 있는 보급품은 불과 10톤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루프트바페는 그만큼의 지원을 해 줄 여력도 안되었고 스탈린그라드 인근에 집중 지원해줄 수 있는 비행장 조차 없었다. 그나마 출발한 얼마 안되는 수송기들도 전력증강으로 강화된 소련군이 독일 수송기들을 격추시켜버리면서 모든 것이 무위로 지나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파울루스는 장병들을 포기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1월 18일 독일에서 온 마지막 우편물이 배달되었을 때 그는 비행기에 타는 대신 아내에게 한 줄로 된 작별 편지를 썼고, 한 육군 장교가 파울루스의 편지를 그의 훈장, 결혼 반지, 인장 반지와 함께 가져갔다. 하지만 이들 물건은 나중에 게슈타포가 압수했다.[9]
항복하기 직전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승진시켰는데, 이는 자살하든가 끝까지 항전하다가 죽으라는 무언의 암시였다. 독일의 원수가 항복한 전례는 그 때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육군 원수 계급장과 부착물, 임명장까지 항공편으로 전달됐다. 후에 비겁하게 포로가 되느니 자결하라고 했다는 히틀러의 말을 전해 듣고, 그는 '''"보헤미아의 상병[10] 따위를 위해 원수가 목숨을 버리라고? 그럴 순 없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기독교인이므로 자살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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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파울루스. 항복하러 왔을 당시엔 수염이 덥수룩한 상태였는데, 소련 측의 배려로 도착 후 면도 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가슴의 육군용 국장과 각종 훈장이 제거된 것으로 보아 훗날 선전용으로 재현된 사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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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복 후 돈 집단군 사령부에서 심문을 받는 모습 (왼쪽부터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상장, 니콜라이 보로노프 포병 원수, 통역장교 니콜라이 댜틀렌코, 파울루스)
이 때 보로노프가 면담을 끝내면서 파울루스에게 '숙소는 만족스러운지, 또 병환 때문에 특별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지' 질문하자 파울루스는 "내가 유일하게 요청하고 싶은 사항은 많은 전쟁 포로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의료 지원을 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보로노프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대답하자 파울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하며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처절했던 소모전으로 인해 아군인 소련군 부상자들에 대한 처우마저 열악했고, 전투에서 맹활약한 소련 제62군 정치장교 쿠즈마 구로프 중장조차 격전지에서 돌던 전염병인 티푸스로 병사하던 마당이라 독일군 포로들에 대한 지원은 현실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독소전쟁 자체가 인간성이 사라진 전쟁 그자체 였기 때문에 소련군은 독일군 포로들을 그것도 수십만에 달한 희생자를 안겨준 독일군 포로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고 학대했다. 결국 9만 여 명에 달하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포로들은 학대속에 기아에 허덕여 빈사 상태였기 때문에 대부분 1943년 봄에 유행한 티푸스로 사망했고 전후 10년 간 억류 생활 후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들은 5천여 명에 불과했다.
2.2.3. 항복 이후
파울루스가 항복하자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원수 진급을 취소시키려 했으나 이미 방송국을 통해 원수 진급 사실이 공표되었음을 알고 단념했다. 스베틀라나의 회고에 따르면 독일 측에서 포로로 잡힌 스탈린의 아들인 야코프 주가시빌리 대위와 소련이 잡은 포로 중 누군가, 아마도 파울루스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는 일화가 굉장히 유명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독일 측 문서적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스탈린이 독일에서 야코프와 누군가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보냈다고 이야기했다고 하지만 그 누군가가 파울루스인지는 알 수 없다.
항복 후 소련은 파울루스를 회유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였지만 파울루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터지자 그는 소련이 지원하는 자유독일국가위원회의 회장이 되어 소련군의 선무 활동에 앞장섰다. 히틀러는 파울루스가 자살하지 않고 포로가 된 직후 크게 화를 내면서 "얼마 지나면 파울루스가 모스크바의 방송에 나와 울며 불며 참회 성명을 내고 소련군이 내어 주는 아무 문건에나 사인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은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실이 되었다. 당시 소련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독일군 포로들은 1955년 포로 석방으로 서독에 귀국 이후에도 동료들 사이에서 (고위 장성이라 해도) 배신자라며 비난당했다. 이때 일본인들은 영화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왜 군인이고 원수나 되는 파울루스가 자살 대신 항복을 선택했는지 이해를 못했다고.(앤터니 비버,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종전 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측 증인으로 활동했고 이 때 소련 언론에선 그를 '스탈린그라드의 유령'이라고 불렀다. 이 때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전범으로 회부된 것이 아니라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파울루스는 자신과 참모본부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빌헬름 카이텔, 알프레트 요들에 대하여 불리한 증언을 끝내 거부했고, 이는 소련 측의 분노를 사서 결국 예정된 1945년 8월에 석방을 못하고 다른 독일군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1953년까지 억류생활을 한다. 하지만 말이 억류이지 그냥 모스크바에 잠깐 거주하는 수준이었다. 그가 장성이라는 점과 소련에 협조를 한 덕이었다. 그에 비해 포로가 된 다른 병사들은 '''시베리아 행이었다.'''
2.3. 전후
파울루스는 제6군 사령관 취임 직후, 이전에 라이헤나우가 발령했던 "동부전선에서는 장병들이 통상 전쟁 방식이 아니라 유대인·볼셰비즘을 절멸하는 전사로서 싸워야 한다."라는 '''1941년 10월 10일 자 강조 명령(Severity Order)을 폐기했다.'''[11] 에리히 폰 만슈타인, 헤르만 호트와 달리 이런 강조 명령을 두둔하지 않았기에 범죄 혐의로 기소될 일이 없었고 소련군에 협력이 인정돼 침략 범죄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다. 억류 생활 역시 포로 수용소가 아닌 모스크바에 있는 안전 가옥에서 지낼 수 있었다."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 파울루스에게 최악의 혐의와 무고가 난무했으며 그에게 변호할 기회가 주어지기 전까지 그 어떤 혐의도 믿지 않겠다."
- 하인츠 구데리안 《한 군인의 회상》
독일군 포로 대부분은 10년 이상 소련 영토에서 전후 복구 작업에 투입됐다가 1955년에까지 순차적으로 석방됐지만, 파울루스는 1953년 소련에 억류됐던 다른 추축군 포로들보다 2년 먼저 포로 생활에서 석방된 후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 시기에 군무원 신분인 동독군사역사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는 파울루스 사후에야 이런 포로가 귀환할 수 있었다고 적혀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장성급 포로라고 대우가 마냥 좋은 건 아니어서 디트리히 폰 자우켄 기갑대장은 고문 후유증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고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는 사망하기 전 7개월 간만 한 달에 한 번 가족에게 엽서를 쓰는 게 허락됐다. 그는 사후 매장 장소조차 기록이 없다.[12]
이러한 파울루스의 운명이 여타의 독일군 원수들, 즉 종전을 맞이하지 못한 채 사망한 페도어 폰 보크와 발터 모델,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돼 처형되거나 자살한 에르빈 폰 비츨레벤, 귄터 폰 클루게, 에르빈 롬멜, 전범으로 수 년 간 감옥살이를 한 알베르트 케셀링, 페르디난트 쇠르너, 결국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옥사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보다는 운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운의 문제가 아니다. 1949년 소련 내부에서 개시된 전범 재판에서도 소련이 재차 파울루스를 기소할 수 없었을 만큼 그가 범죄에 반대하고 해당 명령을 폐기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13]
게다가 구데리안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해 파울루스에게 최악의 혐의와 무고가 난무했으며 그에게 변호할 기회가 주어지기 전까지 그 어떤 혐의도 믿지 않겠다"'''고 기록할 만큼 종전 이후의 파울루스의 삶은 오욕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후 공산 체제인 동독에서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긴 했지만 지병이 악화되면서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했고, 자신이 직면했던 상황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바라본 기록을 저술했으나 생전에 발표조차 하지 못했다.
1956년 후반 무렵 지병이었던 근위축성측색경화증이 악화하면서 급격히 쇠약해졌고 자택에서 투병하던 도중에 사망했다. 죽는 순간까지 히틀러의 후퇴 금지 명령에 복종해 많은 부하를 죽게 했다는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시신은 드레스덴의 톨케비츠 공동묘지에 안장됐지만 파울루스의 유언에 따라 서독 바덴바덴 중앙묘지의 파울루스 가족 묘역으로 이장돼 아내 곁에 묻혔다. 파울루스의 아내 콘스탄체는 남편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후 파울루스라는 성을 포기하고 이혼하라는 게슈타포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 파울루스가 소련 측 선전 방송에 등장하자 '친족의 연대 책임에 관한 포고령'에 따라 아들과 구속됐지만 이탈리아 영토에 진입한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그러나 종전 후 남편이 포로 생활에서 석방되기 전인 1949년에 사망했고 전후 파울루스는 석방은 됐으나 동독에 억류되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아내의 무덤을 찾아갈 수 없었다.
1961년, 파울루스가 생전에 남긴 기록과 6군 관련 문서를 기반으로 전사학자인 발터 괴를리츠와 파울루스의 아들인 에른스트 알렉산더가 공동 편집한 《Paulus und Stalingrad》가 서독에서 발매되고 미국에도 번역 출간되었지만, 냉전이 격화된 시대 분위기를 고려하면 서독에서도 미국에서도 '소련군에 항복하고 협조한 군 사령관'이 남긴 기록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1949년부터 순차적으로 석방되어 1955년에 마지막으로 석방된 독일군 포로들 중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생존자들이 파울루스를 원망했던 것도 그러한 분위기에 일조했다. 포로들 중에서도 고위 장교들은 파울루스가 처한 상황을 이해했는데 계급이 낮은 장병들일수록 파울루스를 원망했다고 한다. 10년이 넘는 포로 생활 끝에 9만 1천여 명 중 5천여 명밖에 살아남지 않았으니 생존자들이 최고 책임자를 원망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같이 항복했던 몇몇 장성과 달리 1년 반이 넘는 시간 소련군 측에 협조를 거부했다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고서야 히틀러 정권의 전복을 호소하면서 소련군에 협조하였다는 사실, 장남의 전사 사실을 전해 듣게 되면서 독일군의 전황에 더욱 회의적으로 변했다는 사실, 이미 진 전쟁을 되도록 빨리 끝내고 헛된 죽음의 숫자를 줄이고 싶어했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잊혔다. 정작 독일의 다른 장성들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 직후 총통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비난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중잣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울루스의 기록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냉전의 종식과 독일의 통일 이후 손자인 알렉산더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박사에 이르러서였다.
파울루스의 쌍둥이 아들 모두 육군에 입대했는데, 장남인 프리드리히는 안치오에서 전사했고 차남인 에른스트 알렉산더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부상당해 이송된 후 하르코프 전투에서도 부상당했다. 전술한 대로 게슈타포에게 감금당했지만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형제 모두 최종 계급은 대위. 그러나 에른스트 알렉산더는 52세가 되던 해인 1970년에 자살했는데 이것은 파울루스가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하던 때와 같은 나이였다.
3. 평가
참모차장으로 근무할 때부터 이미 프란츠 할더의 후임 육군참모총장으로 유력시된 인재였다. 구체적으로 OKW 총참모장인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이 동부전선을 비관하는 전황을 연달아 내놓자 이에 격분한 히틀러는 요들의 집무실을 정리하고 수행 장교들도 내보내고서 후임으로 파울루스를 임명하려 했으나,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올 수 없었기에 이것은 무산되고 요들은 종전 후까지 유임된다.
제6군 탈출 실패를 파울루스에게 떠넘긴 만슈타인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 영향받은 냉전 당시의 서방 측 독소전사, 대한민국 밀덕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 특히 국내에서 august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상에서 유명한 비전문가인 남도현의 블로그와 그가 집필한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 프랑스, 태평양, 스탈린그라드》, 《히든 제너럴》, 《히틀러의 장군들》에서는 패전 책임을 모조리 파울루스에게 전가하면서 히틀러의 명령에만 충실한 '돌쇠'로 반복해서 묘사했지만, 이것은 불공정한 편견에 불과하다.
파울루스는 기갑부대 지휘 경험, 실전 경험은 부족했지만 제2차 하르코프 작전에서의 침착한 대응과 청색 작전에서의 진군으로 스탈린그라드까지 단숨에 도달하는 등 오히려 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것을 인정받아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고 상급대장으로 진급한다. 여기서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가 전략상· 경제상 불필요하다고 판단해 일부 병력으로써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해 소련군을 고사하게 해 스스로 항복하게끔 할 심산이었다. 6군의 상위 제대인 B집단군 수뇌부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름을 딴 소련의 대도시를 독일군이 직접 점령하기를 원하던 히틀러의 강압으로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진입하게 된다. 결국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패한 책임은 '''"스탈린"'''이라는 이름에 집착한 나머지 판단력을 상실하고 수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포위된 후에도 ''''후퇴 불가 현지 사수'''' 명령만 고수한 히틀러의 책임이 가장 크다. 파울루스는 6군 사령관으로서 '기갑 부대는 평지에서의 진군은 유리해도 스탈린그라드 같은 시가전에는 독일군에게 불리하다'면서 스탈린그라드 진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파울루스의 직속 상관으로 B집단군 사령관인 폰 보크 원수가 히틀러의 명령에 반대했다가 해임되면서 히틀러의 고집을 꺾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다만 천왕성 작전까지만 해도 소련군의 예측마저 한참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한 영역에 엄청난 수의 독일군+추축군이 포위되어 있던 만큼 포위망의 밀도는 상대적으로 엷었다. 포위망이 처음 완성된 시점에선 6군의 전역 밖에서 벌어졌다는 사정을 감안해야 하지만 전황의 파악과 이에 따른 기민한 대응이 부족했던 점은 파울루스의 책임이다. B집단군 사령관인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는 전황을 회의하지만 히틀러에게 적극 반대 의견을 개진하지 않고 총통의 명령을 따랐다. 정작 파울루스에게 패전의 책임과 비난이 집중되면서 오히려 1943년 2월 1일, 폰 바익스는 원수로 진급한다.[14]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막바지에 탈출한 한스-발렌틴 후베 휘하의 기갑 장교들은 '시가전에서 전차가 제 용도를 발휘하지 못한 만큼, 포위망이 초기 완성되었을 때 전차를 시가지에서 빼내어 외부로 돌렸어야 한다'며 파울루스의 결단을 아쉬워했다.
행동형 지휘관이 아니어서인지 파울루스 자신이 '포위망 내의 절반은 내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소련군에 진술할 만큼 부하들을 통솔하고 장악하는 능력은 부족했다.[15] 전임 사령관인 라이헤나우보다 부하들의 복지에 신경 쓰는 지휘관이었지만 오히려 6군 장병들은 파울루스가 격전의 와중에도 매일 옷을 갈아입고 장갑을 늘 끼고 나올 만큼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는 모습조차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이 극도에 도달한 상황에서 누적되고 표출되면서 결국 위기 대처 능력 부재로 이어진 셈이다.
4. 주요 보직 내역
- 1939.09.01.: 제10군 참모장
- 1939.10.26.: 제6군 참모장
- 1940.05.30. ~ 1941.12.31.: 육군참모본부 제1참모부장
- 1942.01.01. ~ 1943.01.31.: 제6군 총사령관
5. 진급 내역
- 1910.02.18.: 육군 사관후보생(Fähnrich)
- 1911.08.18.: 소위(Leutnant)
- 1911.: 중위(Oberleutnant)
- 1918.: 대위(Hauptmann)
- 1929.02.01.: 소령(Major)
- 1933.06.01.: 중령(Oberstleutnant)
- 1935.06.01.: 대령(Oberst)
- 1939.01.01.: 소장(Generalmajor)
- 1940.08.01.: 중장(Generalleutnant)
- 1942.01.01.: 기갑대장(General der Panzertruppe)
- 1942.11.20.: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3.01.30.: 원수(Generalfeldmarschall)
6. 주요 서훈 내역
- 1939.09.21.: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09.27.: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2.08.26.: 기사 철십자 훈장
- 1943.01.15.: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동부 전선 현지 서훈)
7. 매체에서
- <에너미 엣 더 게이트>에선 몰락에서 베르너 하세 박사 역을 맡았던 마티아스 하비흐가 분했다. 다만 에르빈 쾨니히 대령을 맞이하는 장면을 비롯해서 단역 수준에 그쳤다.
- 독일 영화 스탈린그라드에서도 등장한다. 에너미 엣 더 게이트보다는 비중이 조금 더 높지만 그래 봐야 항복하러 가는 장면.
[1] 항복 후 소련에서 선전용으로 촬영된 사진이다.[2] 다른 별명으로는 "순교자"가 있다. 항상 엄숙한 표정을 가졌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3] 헤르만 호트, 하인츠 구데리안, 한스발렌틴 후베, 헤르만 발크, 발터 벵크, 지크프리트 베스트팔, 이름만 봐선 평민 같지만 아버지가 군 장교인 군인 가문 출신 장성이다.[4] 정작 모델은 폴란드 침공, 만슈타인은 프랑스 침공에서 실전 경험을 쌓으면서 이후 진급에 유리해졌다.[5] 당시 16군 참모장이 절친인 발터 모델. 파울루스와 모델 역시 외모와 성격 등 여러 면에서 판이하게 다른 친구였다.[6] 바실리 추이코프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시간을 벌 동안 소련은 '''100만에 가까운 병력'''을 집결시키고, 수 많은 전차들과 항공기들을 생산해 천왕성 작전으로 완전히 허를 찔러버린 것이다. 당시 독일군에게 있어서 그저 인간 이하도 아니었던 붉은 군대가 이렇게 허를 찔렀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7] 루마니아군은 소련으로부터 영토를 재탈환하려고 추축국편에 참전했지만 예상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가다가 훨씬 더 깊이 소련 영토에 들어오게 되었고 당연히 보급을 유지할 여력이 안되었다.[8] 이후 베어 대위는 1945년 4월 서부전선에서,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의 명령을 받고 루르 포위망을 탈출하여 총통 사령부에 출석하나 후퇴를 허가 받지 못했다. 파울루스와 모델은 마지막 순간에 동일 인물에게 동일한 임무를 부여했고 동일한 결과에 직면했다. 최후를 맞이하는 방식에서 갈라서게 된 것이다. 두 친구 사이에서 극적인 운명의 반복이 아닐 수 없다. 후베는 모델의 김나지움 동창이자 군 입대 동기이다.[9] 앤터니 비버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10] 히틀러의 최종 군 계급이 상병이었다.[11] 앤터니 비버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무장친위대가 잔혹한 행위를 했었지만, 파울루스는 분명히 해당 명령을 폐기했고 이런 명령 거부까지 파울루스를 기소할 순 없었다.[12]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가 된 고급 장교들은 육체 노동에 동원되던 사병들과는 달리 상당히 후대받았다. 소련도 전후를 의식해 자신에게 협조하는 독일 고위 장성들을 포섭하려고 노력했고 전후 재건된 동독군 지휘관들은 초기 상당수(근 90%)가 이렇게 소련군에 포섭된 독일 국방군 출신이었다.[13]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는 별도로, 서베를린 포위 직후인 1949년 소련 정부의 재산을 파괴했다는 혐의 등으로 알프레트 잘베히터 해군 대장, 에리히 하르트만 공군 대령, 카를 슈트레커 등이 기소되었다. 소련군에 전적으로 협조했던 폰 자이들리츠조차도 여기서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1997년 러시아 정부는 이들에 대한 기소가 위헌이었음을 인정했다.[14] 서열 상으로도 6군 사령관인 파울루스를 원급으로 진급시려면, 직속 상관인 B집단군 사령관 폰 바익스가 원수가 아니면 안 되기도 했다.[15] 51군단장인 발터 폰 자이들리츠-쿠어츠바흐와 파울루스는 마지막까지 대립했다. 파울루스는 항복 직전 자이들리츠를 해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