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반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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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재평가?


1. 개요


스테판 안드리요비치 반데라(Степан Андрійович Бандера, 1909년 12월 1일 ~ 1959년 10월 15일)는 우크라이나의 극우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2. 생애


190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폴란드 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청소년 조직에 영향을 받으면서 1929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Організація Украінських Націоналістів,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에 가입했다. 이후 조직 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 두각을 드러냈고, 1933년에 집행관이 되어 그당시 폴란드에서 계몽 활동, 반우크라이나 정책 항의 시위 등을 주도하다가 1934년 폴란드 당국에 의해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된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반데라는 감옥에서 풀려나 당시 독일의 점령 아래 있던 크라쿠프로 이동했고, 그 곳에서 조직을 이끌던 안드리 멜니크(Андрій Атанасович Мельник, 1890–1964)[1] 과 재회한다. 하지만 온건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끌길 원했던 멜니크와 갈등을 빚으면서, 반데라는 자신을 지지하는 조직원을 데리고 우크라이나 혁명 민족주의자 조직(OUNR, 통칭 OUN-B)을 설립한다. 그러던 중 1941년 독일군이 소련침공을 준비하면서 아프베어(Abwehr)에서 소련 내 공작을 위해 반데라와 접촉했고, 1941년 6월 30일 독일군이 키예프를 점령하자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선포하기도 했는데 독립을 선포하여 설립된 정부가 바로 우크라이나 국민정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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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여름 키예프에 걸려있던 플래카드[* 플래카드에 쓰인 문구는 '히틀러 만세! 반데라 만세!', '우크라이나 독립국이여 영원하라!, 반데라여 영원하라!'로, 이당시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에 대해 어떤 기대를 했었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애초부터 우크라이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러시아인들이든 우크라이나인들이든 모두 청소할 대상으로만 본 독일 군부는 반데라의 이런 행위를 두고 볼 리가 없었고, 9월 5일 반데라와 OUN-B의 주요 간부들을 체포해 부헨발트(Buchenbald) 수용소로 보냈다. 이후 지도부를 잃은 OUN-B는 극단주의적으로 치달아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OUN-B는 무장투쟁 전개 과정에서 루치크 학살, 볼린 학살 등을 자행, 12만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이 학살당하고 수십만 명이 고향을 등져야 했다. 또한, 1944년 소련 장군이었던 니콜라이 바투틴을 암살하는 등 우크라이나 내 파르티잔 독립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1945년 소련이 승리한 이후, OUN-B는 소련군에 의해 점차 소탕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1950년대 중반에 완전히 소탕되었다.
한편, 반데라는 나치 독일이 패망한 이후 서독에 남았으며,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등을 전개하다가 1959년 뮌헨에서 KGB 요원인 보그단 스타신스키에 의해 암살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그단 스타신스키 역시 리비우 출신의 우크라이나인이었고, 부모들은 반데라주의자였다. 이후 1961년, 할 거 다 해먹은 후에 소련에서 서독으로 망명한다. 1931년생으로 2020년에도 살아있다고 한다. 1984년 아내와 함께 새 신분이 주어져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했다. 우크라이나 극우파들 테러나 암살을 우려해 철저하게 숨어살고 있다고 한다.

3. 평가


반데라는 폴란드 시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을 조직하고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자국의 독립을 위해 '''나치'''에 협력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다.
우크라이나가 소련의 구성원이었던 소련 시절, 그의 조직원이었던 반데라당원(Бандеровці)는 소련 내 분리주의자의 대명사로 통하면서 철저히 탄압되었다. 하지만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독립 투쟁을 이끈 면모가 발굴되면서 독립운동가로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몸을 담았던 OUN은 이후 미국, 서유럽 등지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을 중심으로 명목을 이어갔고,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독립시키려는 노력을 이어가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오늘날 우크라이나 정치를 이루는 세력의 한 축으로 성장한다.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그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려서, 비교적 러시아의 영향을 덜 받고 독립 의지가 강했던 서부에서는 독립영웅으로서 높이 평가된다. 특히 리비우 등 서부 우크라이나 도시들에는 반데라 동상과 반데라 거리가 여러 군데 있고, 도시들마다 반데라를 명예시민으로 추대할 정도이다.
하지만 '''엄연히 나치와 협력한 전과'''가 있고, 특히 그의 조직원들이 유대인(우크라이나 유대인 포함), 폴란드인 학살[2]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는 유대인들, 폴란드인들 입장에서는 '''나치 부역자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특히 폴란드인들 입장에서는 800년에 가까운 역사에 걸쳐 폴란드인들이 살고 있던 르부프갈리치아, 볼린 지방의 폴란드인들을 학살했던 만큼 오늘날까지도 우크라이나 정부에 지속적으로 사죄를 요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폴란드 의회는 2016년 7월 22일 볼린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3][4]

4. 재평가?


실제로 2009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반데라가 이끌던 OUN-B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응답한 우크라이나인은 14%인 반면 부정적이라고 응답한 우크라이나인은 45%로, 부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의 비율이 더 높았다. 서부 갈리치아(긍정 63% : 부정 12%) 지역에서는 OUN-B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이 높았으나, 도네츠크를 포함한 동부(긍정 2% : 부정 59%)나 오데사를 포함한 남부(긍정 2% : 부정 79%)의 경우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키예프를 위시한 중부 지역은 동·남부 지방과 달리 역대 선거 결과 등을 보면 친서방 성향이 강한 편이었으나, OUN-B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편이었다(긍정 13% : 부정 38%). # 이러한 면모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도 프라비 섹토르를 비롯한 노골적인 극우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에서는 공개적으로 영웅시하고 있으나,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반데라는 '''독립운동'''과 '''나치부역'''이라는 공과 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단정지어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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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데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발행한 우표(출처: 위키피디아)
비단 민간인들 뿐만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그는 홀로도모르와 더불어 '''우크라이나 현대사의 가장 민감한 부분''' 중 하나로, 2010년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유셴코가 '''우크라이나 영웅(Герой України)''' 훈장을 추서했다가 다른 유럽국가들에게 비판받은 사례가 있었고,[6] 결국 이듬해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로 정권이 바뀌면서 서훈이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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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키예프 유로마이단 시위본부에 내걸린 반데라 초상화 (출처: 위키피디아)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당시 주도적 역할을 하며 중심이 되었던 극우 성향 자유당원들이 반데라를 영웅시하는데, 사실 이들 조직의 뿌리가 OUN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영화 브라뜨에서도 주인공 다닐라 바그로프의 형 빅토르가 우크라이나 갱단한테 시비를 털 때 '''반데라 개새끼 해봐'''라며 도발하는데 뭔 말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던 갱들이 바로 화를 낸다. 그만큼 우크라이나에서는 위인으로 칭송받는 동시에 주변 타 국가에서는 평판이 극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16년 개봉한 폴란드 영화 증오(2016)에도 반데라를 추종하는 반데라주의자들이 등장한다. 폴란드계 주민과 우크라이나계 주민의 뿌리깊은 갈등을 보여준다.
[1] 우크라이나 독립에 기여했으며 무엇보다 폴란드인, 러시아인, 유대인 학살에 반대한 온건파이다. 참고로 2차대전 끝나고 캐나다룩셈부르크를 오고가며 살고 천수를 누렸다.[2] 영화 증오를 참고하면 반데라주의자들이 어떻게 학살을 했는지 잘 알 수 있다.[3] 출처[4] 역사적으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는 좋지 않은 편이었다. 현대 서부 우크라이나의 영유권 문제 뿐만 아니라 중동부 유럽이 전반적으로 그랬듯이 폴란드인들은 슐라흐타 지주 계층으로서 현지 사회적, 정치적 엘리트로, 정교회권 우크라이나인들은 도시 외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으로서 사회적, 경제적 분화와 이에 따른 갈등 또한 심했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동부 우크라이나와 연합한 서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ЗУНР)을 두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다투었고, 결국 전쟁에서 이긴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소련과 분할해 소유하게 되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이후 크레시(Kresy)라고 불리는 옛 폴란드 공화국 영토가 당시 소련에 소속되어 있던 우크라이나로 양도되면서 이 지역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이 본토(주로 2차 대전 이후 새로 얻은 구 독일의 영토)로 강제 이주되어서 오늘날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과거사 문제같은 분쟁을 제외하면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5] 이와 비슷한 사례로 발트 3국에서 활동하던 '''현지인 출신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있다. 이들은 소련군과 맞서 싸운다는 명목 아래 친위대에 입대, 소련군과 맞서 싸웠으며, 전후 소련으로 송환되어 처벌받았다. 이후 소련 시절에는 나치 부역자로 비난을 받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 후 오늘날 독립운동으로써 재평가받고 있다. 특히 라트비아에서는 한 때 3월 16일을 기념일로 지정해 공개적으로 이들의 활동을 '''독립투쟁'''으로 기리기도 했다.[6] 폴란드는 물론이고, 친나치 인물에 유태인을 공격한 전력도 있어 안 그래도 동유럽계 이민자가 많은 저 멀리 이스라엘의 어그로까지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