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바실렙스키 '''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Василе́вский '''

'''이름'''
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Василе́вский
영어: Aleksandr Mikhaylovich Vasilevsky
한국어: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바실렙스키
'''출생'''
1895년 9월 30일, 러시아 제국
'''사망'''
1977년 12월 5일,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복무'''
러시아 제국군(1915–1917)
소련군(1917–1959)
'''최종 계급'''
육군 원수
'''주요 참전'''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만주 작전
'''주요 서훈'''
소비에트연방영웅 2회
레닌훈장 8회
전승훈장 2회
1. 개요
2. 생애
2.1. 출생에서 독소전쟁 직전까지
2.2. 독소전쟁에서의 활약
2.2.2. 스탈린그라드 전투 - '천왕성 작전'
2.2.3. 쿠르스크 전투에서 쾨니히스베르크까지
2.4. 전쟁 이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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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예복을 입은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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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돈바스에서 세묜 부됸니(右)와 함께.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소련군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독소전쟁 기간 중 소련군의 총참모장직에 가장 오래 있으면서(1942년 6월 - 1945년 2월) 파트너인 게오르기 주코프와 함께 소련군을 승리로 이끈 여러 굵직한 작전들을 입안하고 실행한 소련의 명장. 미국에 조지 C. 마셜이 있다면 소련엔 이 사람이 있었다.

2. 생애



2.1. 출생에서 독소전쟁 직전까지


1895년 9월 30일에 러시아 제국 이바노프 주 노바야골리티하에서 가난한 러시아 정교회 신부의 여덟 자식 중 넷째로 태어났다. 바실렙스키는 원래 농학자나 측량 기사가 되고 싶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애국심에 불타올라 1915년 2월에 알렉산드르 군사학교에 입학해 전시 속성 교육으로 4개월 만에 졸업해 전선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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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대위 시절의 바실렙스키
뛰어난 능력을 보여줘서 22세에 대위로 승진한 바실렙스키는 노포호벨스키에서 근무하다가 10월 혁명이 발발하자 붉은 군대에 입대해 승진을 계속했다.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시작되자 바실렙스키는 폴란드 전선에 참전해 네만 강까지 진격하는 데 참여했고 공훈을 인정받아 제48소총사단장으로 임명됐다. 여기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 고위 장군들과 연줄을 쌓게 되었다. 다른 신진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바실렙스키 또한 투하쳅스키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1931년 5월에 노동적군전투훈련국에 배속되었는데 여기에서 훗날 훌륭한 파트너가 되는 게오르기 주코프를 알게 되었다. 바실렙스키는 1936년까지 국방위원부 참모학교를 거쳐 볼가 군관구 참모부로 일했고 1936년 가을에 창설된 보로실로프 참모대학에 입학했다. 이때 이오시프 스탈린은 붉은 군대 내에도 대숙청의 피바람을 몰고 왔는데 바실렙스키는 대숙청으로 인해 상관들이 대부분 숙청당하자 본의 아니게 쾌속 승진을 거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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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 시절의 바실렙스키.

2.2. 독소전쟁에서의 활약



2.2.1. 모스크바 공방전총참모장 임명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바실렙스키는 참모차장 겸 작전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바실렙스키는 스탈린의 계속되는 무리한 현지 사수 방안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번번히 무산되고 말았다. 독일 국방군모스크바 직전까지 밀어닥치자 바실렙스키는 주코프와 총참모장인 샤포슈니코프 원수와 함께 모스크바 공방전을 치러내게 됐다.
바실렙스키는 모자이스크 일대를 방어해 내는 데 성공했고 독일군의 폭격에 부상까지 입어 가며 진두 지휘했다. 이후 주코프가 독일군에 대해 제한적인 반격을 하는 작전을 입안할 때 참여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의 승리에 지나치게 기고만장해져 전 전선에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명령했고 바실렙스키는 주코프와 더불어 이 무리한 계획에 반대했지만 스탈린의 고집에 무산되었다. 그 결과 소련군은 연패를 당하고 스탈린은 자신감을 잃었다. 물론 이 당시 스탈린이 자신감을 잃어버린 덕택에 소련군 장성들의 자율성이 향상되었고 결과적으론 승리에 기여했다.
한편 국방장관 세묜 티모셴코의 야심찬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실패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자 당시 티모셴코의 정치장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에게 작전 중단을 건의하려 바실렙스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증언에 따르면 바실렙스키는 흐루쇼프의 전화를 아예 묵살했고 흐루쇼프의 주장은 스탈린에게 도달하지도 못했다 한다. 이 때문에 흐루쇼프는 바실렙스키가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패배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 무렵 총참모장 샤포슈니코프 원수가 병환으로 총참모장직을 계속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바실렙스키가 총참모장으로 승진하였다.

2.2.2. 스탈린그라드 전투 - '천왕성 작전'


1942년 봄에 독일군은 캅카스 침공 계획인 청색 작전을 가동시켜 캅카스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스탈린은 하르코프 방면에서 반격을 명령했다. 바실렙스키는 총군부사령으로 승진한 주코프와 더불어 하르코프 방면에 대한 공세를 연기할 것을 스탈린에게 건의했으나 스탈린은 또 무시했고 결국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소련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캅카스를 휩쓸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과 혈투를 벌였다. 소련군은 끈질기게 싸웠지만 전투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때 바실렙스키는 독일 제 6군의 우익과 좌익이 약체인데다가 전투 의지도 별로 없는 루마니아 왕국 제 3,4군으로 보호되고 있다는 걸 파악하고 취약한 독일군의 양 날개를 꺾어 스탈린그라드를 역포위하는 계획인 '천왕성 작전'을 입안했다. 바실렙스키는 주코프와 함께 스탈린에게 달려가 천왕성 작전의 실행을 허가받아 독일군에게 맹공을 가했고,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공로로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소련 원수로 진급했다. 자세한 사항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고.
이상하게도 주코프가 천왕성 작전의 입안자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 천왕성 작전의 입안자는 분명 바실렙스키다.

2.2.3. 쿠르스크 전투에서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로 지나치게 자신감에 가득찼던 소련군은 결국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독일군에게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패배하고 이 결과로 쿠르스크 지역이 돌출되고 만다. 바실렙스키는 주코프와 함께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 계획을 수립하고 위기 끝에 돌출부 방어에 성공했다. 이후 속행된 쿠투조프, 수보로프, 루먄체프 작전을 주코프와 함께 시행하여 반격을 가했다. 자세한 사항은 쿠르스크 전투 참고.
1944년에 바실렙스키는 스텝 전선군 사령관을 맡아 독일군을 드네프르 강 좌안으로 밀어내고 크림 반도를 탈환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때 세바스토폴 인근을 시찰하다 지뢰 폭발 사고로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고, 모스크바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바실렙스키는 주코프와 의논하여 독일 중부집단군 섬멸 작전인 바그라티온 작전을 입안했다. 바그라티온 작전 진행 중에 바실렙스키는 제3벨로루시 전선군과 발트 전선군의 작전 조율을 맡아 바그라티온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1945년 2월에 쾨니히스베르크를 공략하던 제3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인 이반 체르냐홉스키가 전사하자 바실렙스키는 후임으로 전선군 사령관이 되어 쾨니히스베르크 함락에 성공했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스탈린의 신임을 잃은 바실렙스키는 총참모장직과 전선군 사령관 직을 내놓고 물러나게 됐다. 어쨌든 승전 기념식에 참가하긴 했지만.

2.3. 만주 작전


군복을 벗고 물러나 있던 바실렙스키는 만주일본 제국 관동군을 공략하라는 임무를 받고 극동 전략 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바실렙스키는 험지인 다싱안링 산맥으로 대규모 기계화부대인 제6근위전차군을 주공으로 투입하는 과감한 만주 침공 계획인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입안하고 극동 전략 방면군을 진두 지휘해 만주로 쳐들어가 관동군을 궤멸시키고 몽강연합자치정부만주국을 멸망시키며 작전 시작 일주일 만에 압록강베이징까지 군대를 진격시켰다. 8월 13일 스탈린은 해리 S. 트루먼에게 바실렙스키를 더글러스 맥아더와 더불어 공동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트루먼은 거부했다.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자 바실렙스키는 직접 일본의 항복 문서를 받았다.

2.4. 전쟁 이후


전쟁이 끝나고 숙청을 면한 바실렙스키는 1946년에 총참모장에 재기용되고 국방장관까지 올랐다. 국방장관 시절 바실렙스키는 기존의 야전교범-44에 1945년의 전훈을 첨가하여 군사 교리를 조금 수정하고 지상군 편제를 훗날의 전장으로 상정한 중유럽에 걸맞게 개편했다. 바실렙스키의 개편에 따라 소련군 전차/기계화 군단은 전차/기계화 사단으로 개편되었으며 이전 소련군 기동 부대의 기본 편제인 전차 여단들은 사단을 구성하는 전차 연대가 되었다. 기존의 전차군들은 만주에서 보여준 제6근위전차군의 편제를 따라 더 가벼운 기계화군으로 재구성되었다.
바실렙스키는 스탈린이 죽은 1953년에 니콜라이 불가닌에게 국방장관직을 내주고 차관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불가닌은 아무레도 정치인인지라 사실상 국방성의 실권은 바실렙스키가 쥐고 있었다. 이후 바실렙스키는 불가닌과 더불어 라브렌티 베리야의 숙청에도 가담했지만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한 이후 실권을 잃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1977년 2월 5일에 사망한 바실렙스키는 그 공적이 인정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연설이 당시 한국어로 더빙된 영상.

3. 평가


활약상으로 따지면 주코프 못지않은 대단한 활약을 한 장군으로 평가받는다. 바실렙스키는 소련을 승리로 이끈 대부분의 작전에 관여했고 작전에만 능한 참모가 아닌 실전에도 능하다는 사실을 여러번 증명했다. 엄연히 실책이나 패전도 존재하는 주코프에 비해 이렇다할 흠결도 없어서 몇몇 학자들은 바실렙스키가 주코프보다 역할이 더 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수정주의 학자인 빅토르 수보로프는 소련 공산당이 일부러 독소전쟁 중 총참모부의 역할을 폄하했다고 주장하며 바실렙스키가 주코프보다 더 공적이 많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실렙스키의 활약은 작전 입안과 실행 같은 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스탈린과 주코프의 갈등을 조율하는 데 상당한 공헌을 했다는 데 있다. 말투가 직선적이고 딱딱하며 성격이 다소 오만한 주코프는 당연히 작전 수립 때마다 스탈린과 번번히 충돌했다. 바실렙스키는 그때마다 뿔나 있는 스탈린을 부드러운 말로 달래고 더는 스탈린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방법으로 스탈린을 설득해 결국 주코프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형적인 참모장군답게 주코프보다는 기가 약한 편이라서 주코프 없이 단독으로 스탈린과 작전을 논의할 때는 스탈린의 위세에 눌려 스탈린의 잘못된 결정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바실렙스키에게 악감정이 있던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바실렙스키를 빌헬름 카이텔급의 예스맨으로 폄하했다. 하지만 바실렙스키를 온갖 패착을 반복했던 카이텔에 비유하는 건 그야말로 바실렙스키에 대한 모욕이다. 이 사람은 소련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이지만, 카이텔은 독일군 최악의 졸장이다. 차라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카이텔에 비유하면 그나마 인정했을지 모른다.[1]
하지만 아무래도 2차 대전 소련군의 아이콘이 된 주코프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국내외적으로 많이 낮은 편이긴 하다. 주된 역할이 야전군을 지휘하는게 아니라 스타브카에서 대전략을 고안, 입안하는 참모 역에 집중했다 보니 지명도가 낮긴하나, 중요성이나 능력, 공헌도로 치면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마치 한신장량의 관계에 가깝다. 대신 우달로이급에 바실렙스키의 이름을 딴 함선이 있긴 하다.
어쨌든 바실렙스키는 후세 학자들에게 주코프와 대조국 전쟁 당시 붉은 군대에게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되었을, 정치적으로 최고 통수권자와 군대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며 대전략을 짜고, 전쟁의 큰 그림을 그리는 참모라는 역할로써 전쟁 역사에 금자탑을 세운 훌륭한 총참모장으로 평가받는다.

[1] 하지만 둘다 정치형 군인일지라도 카이텔은 그냥 아첨꾼인 반면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이 그저 그랬던 시절 도와준 동지 관계니 보로실로프보다도 못한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