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미야 마사키
1. 개요
일본의 프로 바둑 기사. '''최초의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자'''이다.
2. 상세
기타니 미노루 문하로 이시다 요시오, 가토 마사오와 함께 '''황금 트리오'''라고 불리며 기타니 황금시대의 일익을 담당했다. 장남은 프로 기사 다케미야 요코(武宮陽光) 五단.
혼인보전 5연패가 걸린 1989년 혼인보전 도전기에서 조치훈에게 0-4로 완패해 영세 혼인보 칭호를 얻지 못했다. 다케미야는 나중에 조치훈과 함께 출연한 혼인보전 TV 중계에서 당시 영세 혼인보 칭호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스윕당한 것은 분했다고 회고했다.[1]
조훈현에게 상대전적에서 압도적으로 앞서는 몇 안 되는 기사.[2] 조훈현도 다케미야는 아주 수읽기가 깊고 감각이 뛰어나다고 인정한 바 있다.
최근에는 해외 바둑 보급에 힘쓰고 있다. 그 덕에 미주, 유럽쪽 인지도는 이창호, 이세돌, 구리 같은 기사들과는 넘사벽으로 높다고.
1988년 첫 후지쯔배 결승전과 우승 인터뷰 장면. 결승전 상대는 린하이펑 九단. 이 때까지만 해도 풍성충은 아니어도 탈모가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image]
1989년 2회 후지쯔배에서 연속우승을 했을 때.
취미는 골프, 백개먼, 노래, 춤, 마작 등 다양하며 모두 프로급이라고 한다. 특히 백개먼은 일본 3대 타이틀 중 하나였던 반성전(盤聖戦)에서 2005년 우승했을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다. 2015년 한-일 바둑 기사들의 친선 골프 대회에서는 일본 측 주장을 맡기도 했다. 참고로 해당 대회 한국 측 주장은 조훈현.
2.1. 기풍(우주류)
'우주류'로 잘 알려져 있는 호방한 세력바둑을 두는 기사이다.
다케미야의 등장으로 인해 세력바둑 및 3연성, 4연성 등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고 그 또한 성적이 상당히 좋았다. 보통 프로들은 실리, 즉 확실한 현찰을 챙기며 바둑을 두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는 불안감 때문이다. 세력바둑의 경우 고도의 수읽기와 섬세함, 공격력, 그리고 아주 정밀한 형세판단이 필요한데, 그 때문에 대부분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최근처럼 속기 위주의 기전이 대부분일 경우 불확실성이 많기 때문에 세력바둑의 승률은 더욱 떨어진다. 그럼에도 다케미야는 세력바둑을 두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또한 팬서비스도 아주 잘 해서 팬들에게 인기가 높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다케미야는 세력바둑의 원조가 아니다. 그에 앞서 한국의 신풍 3인[3] 으로 중 한 명인 조대현도 아주 호방한 세력바둑을 두었고, 애초에 원조를 찾자면 우칭위엔과 기타니 미노루의 신포석이 원조다. 또한 한국의 하찬석 九단 역시 일본의 기타니 도장 수행시절 귀와 변의 포석을 입체적으로 진행하여 세력을 유지하는 포석형태를 연구, 발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다케미야의 우주류는 다케미야만의 독창적인 포석이 아닌 기타니 도장 내에서 있었던 일단의 연구흐름을 다듬어 실전에서 사용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다케미야가 세력바둑의 원조 비슷하게 칭송을 받는 이유는, 세계 대회 우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존의 세력바둑과 달리 다케미야의 세력바둑이 '''우주류'''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중앙을 중시하면서도 굉장히 두텁고 단단하게 잘 두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밤하늘에 별을 놓듯이 차근차근 흑/백으로 뒤덮여가는 중앙을 보고 여러 바둑기사들이 나가떨어졌다.(...)[4] 나중에 야마시타 게이고의 야마시타류가 나오면서 중앙바둑에서도 포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
'우주류'라는 단어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의 바둑을 '자연류'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두기 때문이라나... 그리고 최초의 세계대회인 후지쯔배가 열리자 '최초의 세계대회에서 내가 우승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대회 전부터 주장하며 참가, 우승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