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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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프로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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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 명예 왕좌로 불리던 시절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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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고인.[1][2]
일본의 프로 바둑 기사. 같은 기타니 미노루 문하인 이시다 요시오, 다케미야 마사키와 함께 황금 트리오로 불렸다.
현실에서는 온후한 인품과 주변을 잘 돌보는 인자한 성격으로, 주변의 인망이 무척 두터운 사람이었다. 2004년에 일본기원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일본 바둑을 개혁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며 많은 바둑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특히 '''가토 마사오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일본 바둑계는 급격한 갈라파고스화의 길로 치닫고 말았다'''. 일본 바둑팬과 심지어 한국 바둑 관계자들도 매우 안타까워한 것은 덤이다. 일본 바둑이 국제 경쟁력을 상실해버리자 중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일본 바둑 관계자들은 "가토 九단이 5년만 더 살았더라면.."이라면서 아쉬워하기도 한다.
가토 마사오의 일본기원 개혁안은 다음과 같다.
기보로 남아있는 반상 위에서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바로 윗 문단에서 '온화한 사람'이란 평가가 잘 믿기지 않을만큼 괴리가 꽤 심하다. 가토가 한창 활약하던 20세기 후반의 일본기원은 실리와 견제 위주의 소위 '점잖은 바둑'이 핵심인데[3] , 가토는 이런 기원의 기풍이나 흐름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격적인 힘바둑을 구사했다. 그 강력한 공격력으로 대마를 때려잡고 불계승을 거두는 일이 많아지면서 전성기의 가토에게 붙은 별명이 '''살인청부업자''' (일본어로는 'ころしや '). 이는 당시 같은 시대를 풍미했으며 '폭파전문가'라는 별명이 있는 조치훈과 비슷하면서도 또한 차이가 분명한 바둑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차이는 두 기사의 기풍을 따져 보면 구분할 수 있다. 조치훈의 공격적인 기풍은 상대의 실리나 세력을 철저히 파괴하는 데에 있다. 이미 자리가 잘 잡혀서 집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은 곳에 거침없이 걸치고 뛰어들어가서는, 모양을 파괴하고 살아남는다. '거칠게 공격적인'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가토의 공격적인 기풍은 잦은 견제와 날렵한 행마로 모양새를 흐트러뜨리는데 있다. 상대가 그런 견제에 세력이 흔들리면 그 순간 퇴로를 끊고 몰아붙여서 마지막에는 숨통을 끊는 것이다. 대마가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방향이나 수순을 잘 읽어내는 집중력과 섬세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괜히 대마불사라는 사자성어가 존재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마를 잘 잡아내는 것이, '부드럽게 공격적인' 가토 바둑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다.
가토와 조치훈도 엄청나게 싸웠는데 상대전적은 조치훈이 더 좋았다.[4] 그러나 조치훈과 가토는 나이가 9살이나 차이났기 때문에 동시대 인물이 아니라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가토와 조치훈이 만나면 조치훈이 가토의 세력을 삭감하거나 침투할 때 가토가 정말 다 잡아 먹으려고 달려드는 바둑이 많이 나왔다.
이러한 기풍은 비단 기보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칼럼이나 강좌용 저서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상대의 돌을 잡기 위해 달려드는 공격보다는 상대의 행마와 모양을 공격하라, 상대에게 손해본다는 느낌을 주면서 이득을 착실히 챙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확한 수읽기나 한 국면에서의 싸움보다는, 판의 흐름을 잘 잡아내고 손익을 잘 잡아내는 법을 먼저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5] . 이처럼 독특하고 또 확고한 자신만의 논리를 갖추었고, 일본 바둑의 약체화를 국내 기전 한정이라는 부분과 반상에서 싸움을 피하는 기풍을 이유로 들어 비판했으며[6] , 이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다.
가토 마사오는 공격으로 이득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하면서 자기 책들에 자신의 기보를 전부 사용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관례적으로 기사들(또는 기원)에 보장되는 기보 저작권을 포기했다. 책의 인세도 저렴하게 받았다. 가토는 자기 책에 적을 때 "나처럼 앞뒤 안 보고 공격을 좋아하면 반드시 판세를 그르친다. 분명한 것은 공격에 투자하는 돌이 공격에 투자하지 않는 돌과 균형을 맞춰서 이득을 얻어낼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수도 없이 적었다. 이를 위해서는 복기를 할 때 단순히 복기를 하는게 아니라 "내가 이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대방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라고 하였고, 필요하다면 노트에 필기를 하라고 하였다.
가토 마사오의 일본 7대기전 주요 성적
특히 82년~89년의 8년 동안 왕좌전을 8연패한 것은 영광스러운 기록. 80년대 중반 이후 조치훈과 고바야시 고이치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일본 바둑계에서 다케미야 마사키 등과 함께 최정상의 두 기사에 격렬히 대항한 대표적인 기사이기도 하다. 또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꾸준한 활약을 펼쳐, 50대 중반인 2002년에 혼인보 타이틀을 따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1976년 5월 십단전 우승을 시작으로 1990년 11월 하네 야스마사 九단에게 왕좌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14년 6개월간 최장기간 7대 기전 타이틀을 최소 한 개라도 보유라는 기록을 세웠다.[8]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61:54 (우위)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 44:31 (우위)
린하이펑 九단 60:58 (우위)
오타케 히데오 九단 40:49 (열세)
이시다 요시오 九단 31:14 (우위)
조치훈 九단 42:71:1 무승부[9] (열세)
서봉수 九단 2:1
유창혁 九단 0:1
이창호 九단 2:4
조훈현 九단 3:4
공식 프로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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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 명예 왕좌로 불리던 시절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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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고인.[1][2]
1. 개요
일본의 프로 바둑 기사. 같은 기타니 미노루 문하인 이시다 요시오, 다케미야 마사키와 함께 황금 트리오로 불렸다.
2. 생애
현실에서는 온후한 인품과 주변을 잘 돌보는 인자한 성격으로, 주변의 인망이 무척 두터운 사람이었다. 2004년에 일본기원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일본 바둑을 개혁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며 많은 바둑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특히 '''가토 마사오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일본 바둑계는 급격한 갈라파고스화의 길로 치닫고 말았다'''. 일본 바둑팬과 심지어 한국 바둑 관계자들도 매우 안타까워한 것은 덤이다. 일본 바둑이 국제 경쟁력을 상실해버리자 중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일본 바둑 관계자들은 "가토 九단이 5년만 더 살았더라면.."이라면서 아쉬워하기도 한다.
가토 마사오의 일본기원 개혁안은 다음과 같다.
결국 가토 마사오 사후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했다. 후지쯔배와 토요타덴소배는 아예 존재 자체가 없어져버렸고, 일본 7대 바둑 기전은 생각시간이 고작 1시간 줄었다. 이러다 보니 급격하게 갈라파고스화로 치달은 것이다.1. 일정기간 성적을 내지 못한 프로기사의 단을 깎는다. 九단인 경우 최대 六단으로까지 강등한다.
2. (히카루의 바둑 같은) 일본기원 관련 연관 창작물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젊은 바둑팬들을 양성해야 한다.
3. 일본 7대 바둑 기전들의 시간을 대폭 줄인다. 시간을 줄임으로써 공격적인 바둑을 유도한다.
4. 일본 기업들을 설득하여 되도록 국제 바둑 기전을 개최하도록 유도한다.
3. 기풍
기보로 남아있는 반상 위에서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바로 윗 문단에서 '온화한 사람'이란 평가가 잘 믿기지 않을만큼 괴리가 꽤 심하다. 가토가 한창 활약하던 20세기 후반의 일본기원은 실리와 견제 위주의 소위 '점잖은 바둑'이 핵심인데[3] , 가토는 이런 기원의 기풍이나 흐름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격적인 힘바둑을 구사했다. 그 강력한 공격력으로 대마를 때려잡고 불계승을 거두는 일이 많아지면서 전성기의 가토에게 붙은 별명이 '''살인청부업자''' (일본어로는 '
정확히 말하자면, 그 차이는 두 기사의 기풍을 따져 보면 구분할 수 있다. 조치훈의 공격적인 기풍은 상대의 실리나 세력을 철저히 파괴하는 데에 있다. 이미 자리가 잘 잡혀서 집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은 곳에 거침없이 걸치고 뛰어들어가서는, 모양을 파괴하고 살아남는다. '거칠게 공격적인'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가토의 공격적인 기풍은 잦은 견제와 날렵한 행마로 모양새를 흐트러뜨리는데 있다. 상대가 그런 견제에 세력이 흔들리면 그 순간 퇴로를 끊고 몰아붙여서 마지막에는 숨통을 끊는 것이다. 대마가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방향이나 수순을 잘 읽어내는 집중력과 섬세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괜히 대마불사라는 사자성어가 존재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마를 잘 잡아내는 것이, '부드럽게 공격적인' 가토 바둑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다.
가토와 조치훈도 엄청나게 싸웠는데 상대전적은 조치훈이 더 좋았다.[4] 그러나 조치훈과 가토는 나이가 9살이나 차이났기 때문에 동시대 인물이 아니라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가토와 조치훈이 만나면 조치훈이 가토의 세력을 삭감하거나 침투할 때 가토가 정말 다 잡아 먹으려고 달려드는 바둑이 많이 나왔다.
이러한 기풍은 비단 기보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칼럼이나 강좌용 저서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상대의 돌을 잡기 위해 달려드는 공격보다는 상대의 행마와 모양을 공격하라, 상대에게 손해본다는 느낌을 주면서 이득을 착실히 챙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확한 수읽기나 한 국면에서의 싸움보다는, 판의 흐름을 잘 잡아내고 손익을 잘 잡아내는 법을 먼저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5] . 이처럼 독특하고 또 확고한 자신만의 논리를 갖추었고, 일본 바둑의 약체화를 국내 기전 한정이라는 부분과 반상에서 싸움을 피하는 기풍을 이유로 들어 비판했으며[6] , 이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다.
가토 마사오는 공격으로 이득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하면서 자기 책들에 자신의 기보를 전부 사용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관례적으로 기사들(또는 기원)에 보장되는 기보 저작권을 포기했다. 책의 인세도 저렴하게 받았다. 가토는 자기 책에 적을 때 "나처럼 앞뒤 안 보고 공격을 좋아하면 반드시 판세를 그르친다. 분명한 것은 공격에 투자하는 돌이 공격에 투자하지 않는 돌과 균형을 맞춰서 이득을 얻어낼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수도 없이 적었다. 이를 위해서는 복기를 할 때 단순히 복기를 하는게 아니라 "내가 이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대방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라고 하였고, 필요하다면 노트에 필기를 하라고 하였다.
가토 마사오의 일본 7대기전 주요 성적
- 명인전 : 우승 2회 준우승 2회 (상대기사 : 조치훈, 고바야시 고이치)
- 기성전(棋聖) : 우승 0회 준우승 4회(상대기사 : 후지사와 슈코 1회, 고바야시 고이치 3회)
- 혼인보(本因坊) : 우승 4회 준우승 5회(상대기사 : 린하이펑 1회, 다케미야 마사키 1회, 조치훈 2회, 장쉬 1회)
- 왕좌 : 우승 11회 준우승 3회(상대기사 : 하시모토 쇼지, 하네 야스마사, 조치훈)
- 특히 82년~89년 동안 왕좌전 8연패라는 위업을 달성, 명예 왕좌로 불리기도 한다. 명예 왕좌 칭호는 일본 바둑 전체에서 가토 마사오가 유일하게 혼자 가지고 있다.
- 십단 : 우승 7회 준우승 4회(상대기사 : 오타케 히데오, 고바야시 고이치, 조치훈, 히코사카 나오토)
- 기성(碁聖) : 우승 3회 준우승 4회(상대기사 : 오타케 히데오 3회, 고바야시 고이치 1회)
- 천원 : 우승 4회 준우승 2회(가타오카 사토시, 린하이펑)
특히 82년~89년의 8년 동안 왕좌전을 8연패한 것은 영광스러운 기록. 80년대 중반 이후 조치훈과 고바야시 고이치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일본 바둑계에서 다케미야 마사키 등과 함께 최정상의 두 기사에 격렬히 대항한 대표적인 기사이기도 하다. 또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꾸준한 활약을 펼쳐, 50대 중반인 2002년에 혼인보 타이틀을 따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1976년 5월 십단전 우승을 시작으로 1990년 11월 하네 야스마사 九단에게 왕좌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14년 6개월간 최장기간 7대 기전 타이틀을 최소 한 개라도 보유라는 기록을 세웠다.[8]
4.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4.1. 일본 기사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61:54 (우위)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 44:31 (우위)
린하이펑 九단 60:58 (우위)
오타케 히데오 九단 40:49 (열세)
이시다 요시오 九단 31:14 (우위)
조치훈 九단 42:71:1 무승부[9] (열세)
4.2. 한국 기사
서봉수 九단 2:1
유창혁 九단 0:1
이창호 九단 2:4
조훈현 九단 3:4
[1] 2004년 농심신라면배 국가대항전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준결승에서 구리 七단(현 九단)을 꺾고 중국을 올킬, 결승에 올라간 직후 찍은 사진. 사실 이 때부터 이미 건강 문제가 심각했다...[2] 다음 대회인 2005년 제 6회 농심신라면배에도 대표로 선발되었었으나.. 대국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남으로써 장쉬가 대타로 출전하였다.[3] 2010년대에도 일본기원의 주류 기풍은 여전히 점잖은 바둑이다. 예외적으로 이야마 유타 九단은 공격적인 힘바둑.[4] 조치훈 기준 71승 42패 1무승부[5] 1992년 하서출판사에서 번역/발행한 저서 '공격과 방어'에는 이러한 그의 논리를 확실하게 잘 드러내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보통의 바둑 교본과는 상당히 다른 논리 전개를 보인다. 보통의 바둑 교본은 기보와 함께 직관적인 설명이 들어가있는 학습서에 가까운데, 이 책은 바둑 교본치고는 특이하게도 저자인 가토 마사오 자신과 함께 가상의 인물 '5급 씨'와 '초단 씨'를 등장시켰다. 집바둑 위주로 소극적인 운영을 하는 '5급 씨'와 과격한 바둑을 구사하지만 조심성은 모자란 '초단 씨'의 아웅다웅을, 가토 마사오가 부족한 공격력과 방어력을 어떻게 보강하는지 알려주는 식으로 강좌 내용을 전개하는 형태. 이러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이용해서 바둑 지식이 모자란 독자도 자연스럽게 기량을 익히도록 만드는 것에서, 그가 선생으로서 얼마나 출중했는지를 알 수 있다.[6] 지금은 고인인 후지사와 슈코 9단 또한 일본 바둑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를 같은 두 가지를 들어 꼬집었다. 둘 다 전투를 지향하는 기풍으로 유명하다.[7] 1위는 조치훈 九단의 1553승[8] 공교롭게도 하네 야스마사 九단은 2020년 10월 15일, 1254승으로 일본 바둑기사 최다승 공동 5위를 기록하였는데 가토 마사오 九단과 타이 기록이다.[7][9] 여담으로 조치훈과 고바야시 고이치의 상대 전적은 조치훈이 66승 63패로 앞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