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키아 왕국

 



1. 개요
2. 역사
2.1. 왕국 성립 이전
2.2. 왕국의 성립과 전성기
2.3. 로마와의 전쟁
2.3.1. 다키아 원정
2.4. 이후
2.4.1. 다키아 속주
2.4.2. 로마의 포기: 아우렐리아누스황제 때
3. 역사적 의의


1. 개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현재 루마니아 지역에 있었던 고대 왕국이며, 로마와 다뉴브 강 하류 북부의 패권을 둘러싸고 두 번 전쟁을 치렀고, 도미티아누스 시절과 트라야누스 시절에 로마와 격전을 치렀으나 결국 다키아 전쟁에서 패해 멸망했다. 최후의 왕은 데케발루스였다.[1]

2. 역사



2.1. 왕국 성립 이전


원래 이곳은 다뉴브 강과 산악 지역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리스와 로마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곳이다. 게다가 주변에는 켈트족, 게르만족 같은 야만족들이 둘러싸여 있어서 문명의 개화는 아무래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위에 설명했듯이 그 이전에는 켈트족이 트라키아인을 공격하고 지나가는 등 난장판이었다. 그리고 모에시아-트라키아도 1세기 이전에는 아예 아무 기록조차도 없다. 이 지역에 이름이 붙은 것부터가 신기할 수준이다.

2.2. 왕국의 성립과 전성기


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잡으면서, 유민 폭풍의 빈도는 잦아들었는데 그래도 여긴 결코 살 곳이 못 되었었다. 근데 그러던 와중에 '''여러 부족들이 모여들어 전투민족 다키아인으로 각성'''하더니, 기원전 1세기가 되어 부레비스타 왕(BC 82~BC 44)이 여러 부족들을 다키아인의 이름 아래 규합하고 흑해 연안과 중부유럽의 보헤미아까지 이르는 왕국을 세워낸 것이다.
부레비스타 왕이 죽은 후 분열되어 증발하나 싶었으나, 루보보스테스 왕이 켈트족을 몰아내고, 다키아인의 패권을 세우게 된다. 이후 데케발루스 왕이 등장해서 세력을 확장하며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다키아는 로마에 침략하기도 하여 로마와 전쟁이 일어났다.

2.3. 로마와의 전쟁


다키아인들의 빠른 확장은 당연히 로마에 큰 위협이 됐다. 당시 로마는 게르만족의 산발적인 일리리쿰 침입 때문에 상당히 고생하고 있었는데, 다키아 왕국까지 다뉴브 강을 넘어오게 되면 '서쪽에 게르만, 동쪽에 다키아'라는 버틸 수 없는 위기에 처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다키아의 확장은 로마에게 있어 눈엣가시였다. 일단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로마는 다키아와 산발적으로 충돌하였고, 발칸 반도 북부와 다뉴브 강 유역에서는 계속 작은 충돌이 이어졌다.
기원후 87년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가 지휘한 로마군은 다키아에게 대패했고, 푸스쿠스는 전사했다. 로마군은 복수하러 갔다가 다른 지역에서 도미티아누스가 게르만족의 일파인 마르코만니족에게 패하는 바람에 다키아와는 강화를 맺고 철수했다. 이 강화는 매우 굴욕적이었고, 로마는 강화조건으로 다키아에게 기술자와 군사고문, 그리고 배상금을 지불할 정도였다.

2.3.1. 다키아 원정


도미티아누스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는 이를 매우 굴욕적으로 생각했고[2] 다키아에 적대적인 정책을 취했다. 다키아가 모에시아를 대규모로 침공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으므로, 매우 위협적인 거대 야만족 세력의 덩치를 줄여놓으려는 시도였는데, 공교롭게도 이렇다 할 이름이 붙은 것부터가 신기할 정도의 '''벽지 중의 벽지 다키아'''에 갑자기 '''금광과 은광'''이 발견된다. 다키아가 듣보잡 땅에 세워진 왕국이긴 해도 카르파티아 지역은 그럭저럭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었다.[3] 그리고 옆에 붙은 흑해로 무역이 가능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런 땅에 새로 발견된 금맥은 최소한 자원적 면에서는 신흥 왕국의 정립이 가능한 보증 수표였다.
다키아와 로마는 다시 전쟁상태에 들어갔고, 다뉴브 강 유역에서 예전처럼 계속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이때 다키아인들이 보여준 무용은 굉장했고, 로마군은 당시 기록에 따르면 다키아인들이 팔크스(Falx)를 가지고 '''스쿠툼+사지 절단물'''을 찍는 광경을 경험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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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크스는 원래 라틴어로는 평범하게 그냥 '낫'이란 의미인데, 나중에 그와 비슷하게 생긴 무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이 다키아인들의 팔크스는 날 끝을 굽힌 ㄱ자 형태의 곡도로, 찍기 성능과 베기 성능, 찌르기 기능을 합친, 만들기 나름이긴 하지만 칼에 가까운 일종의 언월도였다. 현대에 사용되는 무기 중에서는 구르카 족의 쿠크리를 생각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 '''조선낫''' 같이 생긴 무기다. 다키아인들은 이 팔크스를 사용해 전방의 군단병 대형의 방패를 쪼개버려서 개발살내고, 그 과정에 군단병들의 팔뚝도 덤으로 싹둑 잘라버렸다. 이들은 단순히 창칼 들고 덤비는 광전사가 아니라 정확하게 방패 옆으로 글라디우스를 겨누는 팔을 노려 대각으로 방패와 함께 팔을 절단하는 정예보병이었던 것이다. 이놈의 팔크스에 하도 시달린 나머지, 불편해서 순식간에 폐기되었던 로리카 세그멘타타(갑옷)가 다키아 원정 때 재생산되었으며, 로마군은 라멜라 아머(찰갑)를 팔에도 덧대서 초중무장을 한 상태로 다키아인과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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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병법이 없는 야만인을 상대로 강한 위력을 보이는 레기온이 게르만/켈트가 렙업해서 오는 것을 막기 어려워져갔던 것은 상대가 진보한 것이니 당연한 거라 쳐도, 신생 부족기반 왕국이 저 정도로 그 당시 최강이었던 로마군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굉장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새로이 등장한 것 치고는 무장 수준도 정말 좋았다. 당시 비문명권 부족들의 무장 수준이 날이 갈수록 향상되어 점점 서로마 제국 멸망의 날이 다가오고 있기는 했어도, 그래도 아직 1세기다. 게르만족의 무장 품질이 여전히 듣보잡 수준이던 시기다. 이에 비해 다키아인들은 최소한 방패는 들고 나왔으며, 사슬갑옷이나 찰갑과 투구로 완전 무장한 상급병사들까지 있었다.
사실 장비의 수준은 다키아인의 위력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이유밖에 되지 못한다. 진짜 중요한 건 다키아인들은 조직적이라서 이미 통합된 '''군기'''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떼거리 부족민이 아닌 로마의 적수인 사산조 페르시아군처럼 정규화된 '''다키아 군'''이었다. 장비만 쥐어주면 바로 몸통을 내놓고 돌격하는 야만 광전사에서 곧바로 극초기 로마군으로 돌변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광전사들을 선발 충격군으로 내세우고 조직화된 중보병들을 중추에 배치시키고 진형을 짜는 등, 전략전술까지 구사해 로마군을 아주 환장하게 했다.

2.3.2. 다키아 전쟁: 트라야누스 황제


결국 트라야누스는 밥줄에 돈줄까지 생긴, 호전적이면서 켈트/게르만 부족들의 폭풍에서 살아남은 막강한 지구력까지 가진 전투종족이 흑해와 다뉴브 강을 넘어 말 그대로 골드 러쉬를 오는 광경을 상상한 모양인지, 다키아의 완전 정복을 위한 전쟁을 고려하게 된다.
그리하여, 101년, 트라야누스는 아예 다키아를 멸망시키려고 작정하고 대규모 원정을 실시했다. 이 원정은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이 투입된 '''속주 단위 대규모 전쟁'''으로서, 갈리아 원정을 떠났던 카이사르도 한 수 접어줄 수준의, 로마 제국 2,00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다키아 왕국에 고대 로마 버전 십자군이 선포된 급이다. 로마가 동원한 총병력은 '''15만~20만'''. 정규 로마 군단병뿐만 아니라, 각 속주나 동맹국에서 여러 병력을 제공했다. 여기에 맞선 다키아군은 총 4만 명 정도였으니까 로마 입장에서는 적군의 4-5배의 병력을 동원한 대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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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을 자주 골탕먹였던 다키아 왕국은 이런 대규모 원정은 버틸 여력이 없었고, 끝내 101-102년의 원정에서 수도를 빼았겼으나 데케발루스는 산악지역으로 도피하여 계속해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 게릴라전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자 빡친 트라야누스는 아예 저항을 뿌리뽑으려고 105-106년 다시 원정을 단행했고, 데케발루스는 로마의 대병력에 대패하여 쫓기다가 결국 포위되자 포로가 되길 거부하고 자결했다.
이렇게 다키아가 패하기는 했지만 이제 겨우 새로 생겨난 나라가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절대 강국 로마의 대규모 침공을 5년간 견뎌낸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애초에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원정을 어설프게 갔다가는 실패하거나 박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다키아의 완전 정복을 이룰 수 있도록 철저하고 신중하게 원정을 단행했으며 행군 도중 기회 닿을 때마다 요새를 단단히 하나씩 박아가며 진출했다. 다키아를 초토화시킨 것은 덤이었다.
다키아의 분전에 비할 수 있는 것은 훗날 불가리아 제1제국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바실리오스 2세의 로마를 상대로 30년을 버틴 것인데 전성기라곤 해도 이 당시 로마는 지중해 전체에서 지중해 동부로 반토막, 여기서 발칸 및 아나톨리아로 또다시 반토막이 난 것이기 때문에 다키아 원정 때의 전력을 가진 로마군의 침공을 받았다면 다키아처럼 5년을 버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로마의 적수였던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조차 로마의 총력전 침공을 두려워해서 함부로 맞설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5]

2.4. 이후



2.4.1. 다키아 속주


로마는 이 지역에 다키아를 세우고 트라야누스는 초대 총독에 카이우스 디오를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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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년 콤모두스 황제 시절에 다시 이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하는데, 다키아족의 반란인지 아니면 게르만족같은 야만족의 침략인지 자세한 정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4.2. 로마의 포기: 아우렐리아누스황제 때


한편 다키아 주변의 게르만족인 고트족은 계속 다키아 속주를 파상적으로 공격했고, 금은광이 있다는 것이 장점이긴 했지만 위치가 교두보 수준이고 경계선도 그냥 산맥 아니면 평지인지라 적의 침략을 막는 게 힘들어 비용이 더 들었다. 로마는 이에 견딜 수가 없어서 275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결국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고 이 지역에 주둔하던 군단의 기지를 다뉴브강 남쪽으로 옮겼다.
이후 33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지역을 일시적으로 수복하지만 얼마 안 가 다시 상실한다. 이후 이 지역은 중세로 넘어가며, 루마니아가 된다.

3.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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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에 있는 데케발루스 기념상
현대 루마니아인은 민족과 문화, 언어에서 볼 때 라틴 민족에 속하는데, 언어의 경우에는 주변 민족과 국가들의 영향 때문에 타 민족의 어휘를 많이 받아들여 다른 로망스어파와는 이질적인 편으로 그리스어, 헝가리어, 남슬라브어, 독일어 등 여기서 따온 많은 차용어가 루마니아어에 들어가 있다.[6] 중세에 나타난 루마니아의 국명은 이 지역에 있던 많은 민족이 동로마와 관련돼서 나왔다는 설이 있으며, 때문에 1970, 80년대 루마니아의 악명높은 독재자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도 자신이 다키아와 로마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 현재 루마니아인들은 고대의 다키아, 중세의 동로마 제국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다.
[1] 라틴어식 이름이다. 다키아식 이름은 디우르파네우스(Diurpaneus).[2] 둘 사이에 네르바가 있기는 하지만 재위기간이 2년 남짓으로 짧으니 패스.[3] 애초에 농사가 되기 때문에 후대에 마자르족이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판노니아와 트란실바니아에 눌러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4] 그림의 다키아군은 군기의 일종인 드라코를 들고 있는데 동로마 시기에 로마군에 수입되어 군기의 종류중 하나로 쓰이게 되었다.[5] 실제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정복 후 파르티아를 침공해서 초토화를 시키고 멸망 위기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침공 도중에 트라야누스가 사망하는 바람에 정복을 완료하지는 못했다.[6] 19세기에 언어정화운동으로 타 로망스어의 차용어를 받아들였으나 현재에도 로망스어 중에서는 외래어가 많은 언어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