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소

 

1. 개요
2. 내용
3. 평가


1. 개요


남명 조식이 1555년 음력 11월 19일 명종에게 올린 상소문.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지만 이를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라서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라고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단성소'라고 부른다. 그 파격적 내용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명문이다. 이 상소를 올린 것이 을묘년(서기 1555년)이라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도 부른다.
1555년에 명종은 조식을 단성현감에 제수했다. 그러나 조식은 역시나 관직을 거부했고 관직을 사양하면서 올리는 상소로 올린 것이 바로 이 상소문이다. 단성소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관직을 사양할 수 밖에 없는 '''개인적''' 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이 항목의 내용은 후반부이며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단성현(丹城縣)은 당시 경상도에 있던 고을로, 강성현(江城縣)과 단계현(丹溪縣)을 통합한 지역이다. 현대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일대가 단성현이었다.

2. 내용


전략
抑殿下之國事已非, 邦本已亡, 天意已去, 人心已離, 比如大木, 百年蟲心, 膏液已枯, 茫不知飄風暴雨, 何時而至者久矣。
전하께서 나라일을 잘못 다스린 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들의 마음 또한 이미 임금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한테 파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은 지가 오랩니다.
在廷之臣, 非無忠義之士, 夙夜之良也, 已知其勢極而不可及, 四顧無下手之地。 小官嬉嬉於下, 姑酒色是樂, 大官泛泛於上, 唯貨賂是殖 河魚腹痛, 莫肯尸之
조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충성스럽고 뜻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 밤 늦도록 공부하는 선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나라의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 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서 히히덕거리며 술 마시고 즐기는 일에 정신이 없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오직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으는데 정신이 팔려 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而且內臣樹援, 龍挐于淵 外臣剝民, 狼恣于野, 亦不知皮盡而毛無所施也。 臣所以長想永息, 晝而仰觀天者數矣, 噓唏掩抑, 夜以仰看屋者久矣。
뿐만 아니오라 조정의 내신들은 파당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외신들은 향리에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이리떼처럼 날뛰면서도,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은 깊은 시름에 탄식만 길게 나올 뿐, 낮이면 하늘을 우러르기 수차례였고,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밤이면 잠못 이룬 지가 오랩니다.
慈殿塞淵, 不過深宮之一寡婦, 殿下幼沖, 只是先王之一'''孤嗣。''' 天災之百千, 人心之億萬,何以當之, 何以收之耶? 川渴, 雨粟, 其兆伊何? 音哀服素, 聲像已著。 當此之時, 雖才兼周、召, 位居鈞軸, 亦未如之何矣。 況一微臣材如草芥者乎? 上不能持危於萬一, 下不能庇民於絲毫, 爲殿下之臣, 不亦難乎? 若賣斗筲之名, 而賭殿下之爵, 食其食而不爲其事, 則亦非臣之所願也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아드님, 고아이실 뿐이니,''' 천가지 백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이런 때를 당해서 비록 재주가 주공과 소공[1]을 겸하여 삼공의 위치에 있다 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형편이온데, 하물며 부족한 소신과 같이 아무 힘도 없는 자야 더 말해 무엇하오리이까? 위로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조금이나마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니, 임금님의 신하되기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추호라도 헛된 이름을 팔아 임금님의 벼슬을 도적질해서 그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신은 원치 않습니다.
此所以難進者二也。 且臣見近日邊鄙有事, 諸大夫旰食, 臣則不自爲駭者, 嘗以爲此事, 發在二十年之前, 而賴殿下神武, 於今始發, 非出於一夕之故也。 平日朝廷, 以貨而用人, 聚財而散民, 畢竟將無其人, 而城無軍卒, 賊入無人之境, 豈是怪事耶? 此亦對馬倭陰結向導, 作爲萬古無窮之辱, 而王靈不振, 若崩厥角。 是何待舊臣之義, 或嚴於周典, 而寵寇賊之恩, 反加於亡宋耶? 視以世宗之南征, 成廟之北伐, 則孰與今日之事乎?
또 제가 요즈음 보건대, 변방에 일이 생겨 여러 대부가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하지만, 저는 놀라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이십 년 전에 터질 것인데, 전하의 신무(神武)하심에 힘입어서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니, 하루 저녁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조정에서 재물로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만 모이고 백성은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장수의 자격에 합당한 사람이 없고 성에 군졸이 없어서, 외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했으니 이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이번에도 대마도 왜노가 향도와 남몰래 짜고 만고에 끝없이 치욕스러운 짓을 하였건만, 왕의 신령한 위엄은 마치 한 모퉁이가 무너지듯 떨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옛 신하를 대우하는 의리가 혹 주나라 예법보다도 엄하여 원수를 총애하는 은덕이 도리어 재앙으로 송나라에 더해진 꼴이 아니겠습니까? 세종께서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시고 성종께서 북벌하신 일을 보아도 어디에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然若此者, 不過爲膚革之疾, 未足爲心腹之痛也。 心腹之痛, 痞結衝塞, 上下不通。 此乃是卿大夫乾喉燋唇, 而車馳人走者也。 號召勤王, 整頓國事, 非在於區區之政刑, 唯在於殿下之一心; 汗馬於方寸之間, 而收功於萬牛之地, 其機在我而已。 獨不知殿下之所從事者, 何事也? 好學問乎? 好聲色乎? 好弓馬乎? 好君子乎? 好小人乎? 所好在是, 而存亡繫焉。
그러나 이같은 것은 하찮은 피부병에 지나지 않고, 마음과 속의 병은 이보다 더 심각합니다. 이런 나라 형편을 바로잡는 길은 여러 가지 다양한 나라의 법령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께서 한번 크게 마음먹기에 달여있는 것입니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홀로 전하께서 하시려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시지를 못합니다.'''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말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그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이냐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苟能一日惕然(驚)〔警〕悟, 奮然致力於學問之上, 忽然有得於明新之內, 則明新之內, 萬善具在, 百化由出。 擧而措之, 國可使均也, 民可使化也, 危可使安也
진실로 전하께서 하룻밤 사이에 깜짝 놀라 새사람이 되듯 깨달으십시오. 지금부터라도 학문에 힘써 덕을 밝히시고, 백성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게 하십시오. 착함과 덕을 펴는 정치를 하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흩어진 민심이 다시 전하께로 돌아오고, 위기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후략

3. 평가


그러나 단순한 사직상소문이 아니라 당대의 국가적 현실과 정치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국정비판 상소문이 돼버리고 말았다. 단순하게 비판을 했어도 문제가 될 판이었는데 조식은 아예 상소문 중에 "자전은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한 후사'''에 지나지 않으시니 천백가지의 천재지변과 만가지의 민심을 어찌 수습하시렵니까?" 라고 했다. 쉽게 말해서 이 문장은 형식상의 예법을 걷어내면 '''대비는 과부에 불과하고 주상은 애비없는 자식일 뿐이니 나라 꼴이 뭡니까?''' 라고 하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전하께서는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중략) 전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느냐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습니다." 이 문장은 쉽게 말하자면 '''주상, 니 대가리엔 뭐가 들었냐?''' 라는 소리다(...). 명종 때의 정치상황을 감안하면 죽여달라고 어그로를 끈 것이나 다름없다.
이 상소를 읽은 명종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조식 이거를 죽여? 살려?' 할 정도로 빡쳤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이미 친정을 하고 있던 명종이었지만 아직도 문정왕후의 입김은 강했고 그 위세를 믿고 윤원형등의 외척들이 날뛰던 시절이었다. 명종 자신도 이런 현실이 싫은 마당에 조식이 상소를 올려서 대차게 디스해버렸으니 열이 안받을수가 없었을듯. 상소문을 읽은 직후 명종이 내린 전교를 보면 ' 비록 간절하고 강직한 듯하기는 하나 자전에 대해 공손하지 못한 말이 있으니, 군신(君臣)의 의리를 모르는 듯하여 매우 한심스럽다.' , '임금이 아무리 어질지 못하더라도 신자로서 어찌 차마 욕설을 하는가? 이것이 현인 군자가 임금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는 일이겠는가?' 라고 나오는데, 이게 전교로서 다듬은 표현인 점을 감안하면 명종의 분노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명종이 너무 빡쳐 있어서 성수침[2]이 '조식 저것이 학문이 부족해서 지잘난줄 알고 저러니까 전하께서 참으십시오' 라고 주청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조식이 벼슬은 안했지만 당대 최고의 학자로 불려서 이황에 버금갈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명종도 세간의 반발을 의식해서 죽이지 못하였을 뿐이다.
단성소는 오늘날의 정치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커서 자주 정치개혁을 강조하거나 선거철이 되면 회자되기도 한다. 그만큼 명문장이란 이야기. 명종실록에서도 사관은 조식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고 주석으로 찬양하고 있다.
조식 이전 40여년 전에 채수라는 학자도 설공찬전이란 소설을 써서 중종을 주전충에 빗대서[3]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킨바가 있었다.

[1] 소공(召公) 석(奭)을 말한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쿠데타를 도왔으며 무왕 사후 그의 아들 성왕(成王)을 보필한 인물로 주공단과 나란히 칭송받는 인물.[2] 성수침의 아들이 바로 이이, 정철의 친구였고 초기 서인의 중심 인사였던 우계 성혼이다.[3] 반역한 것들은 다 지옥에 가있더라 라면서 주전충도 지옥에 있더라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문제는 주전충은 당나라를 뒤집어 엎고 황제가 된 반역자라는것. 사실상 중종반정의 정통성을 부정해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