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건황
1. 소개
발해의 제12대 가독부이자 국왕. 대이진의 동생이다. 858년 2월 당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대건황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2. 업적
858년 겨울, 오효신(烏孝愼) 등 104인을 일본에 파견하였다.-《일본서기》
860년, 이거정(李居正) 등 105인을 일본에 보냈다.-《일본서기》
14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이 일본과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 외에는 그가 내치를 어떻게 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외의 기록으로는
868년 정건장의 묘지를 조성하였고
868년 돈황문서(敦煌文書)를 만들도록 하였다.
871년 양성규(楊成規)등 105명을 일본에 보냈다. -《일본서기》
871년에 대건황이 죽었으며 대현석이 즉위하였다.
3. 발해의 권신?
밑의 의문 항목과 연관되어 있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함화 11년 중대성 첩사본"에는 문서를 작성한 신하들의 이름과 직위가 적혀 있는데 그 중 대건황은 공작위를 가지고 중대친공, 대내상, 전중령 직위를 가지고 있다. 직위를 해석하면:
- 중대친공: 발해 중대성(중서성)의 종친 공작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
- 대내상: 발해 정당성(상서성)의 수장.
- 전중령: 전중시의 벼슬.
4. 의문
대이진이 죽고나서 아들들이 왕위에 올라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동생 대건황이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의문을 남긴다. 물론 대이진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아들이 한 둘은 아닐테고 당장 대이진의 기록에 나오는 아들만 봐도 4명이며 사신으로 갔다는 것은 장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소 10대 후반~20대 초반일테고 대이진이 죽었을 때는 대략 30대 초반~40대 후반일 것이다. 우연하게 전부 죽었다 하더라도 손자가 없었을까? 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왕위 계보상 의문점을 토대로 추측할 뿐이다. 일각에서는 이로 인해 정변이 있지 않았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하기도 한다.
5. 사후
아들 대현석이 왕위를 승계하였다. 재위 당시 사용한 연호가 대정(大定)이고 안왕(安王)이라는 시호가 있다는 설이 있지만 기록된 책이 위서인 환단고기라서 인정받지 못한다.
6. 《신당서》 기록
대이진이 죽으니, 아우 대건황(大虔晃)이 왕위에 올랐다.
7. 연표
857년 대이진이 죽고 권지국무이자 동생인 대건황이 즉위하였다
858년 정당성 좌윤 오효신 등 104명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고 달력인 장경선명력경을 주었다
860년 이거정 등 105명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868년 정건장의 묘지를 조성하였고 돈황문서(敦煌文書)를 만들도록 하였다.
871년 대건황이 죽고 아들 대현석이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