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벤트
1. 개요
잉글랜드 국적의 전 축구선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2. 클럽
2.1. 입스위치 타운 FC
입스위치 타운 유스에서 성장한 벤트는 2001년 1군 데뷔전을 치렀다. 팀이 2부리그(현재의 풋볼 리그 챔피언십)로 강등당한 02-03 시즌부터 주전으로 뛰었고, 이후 03-04, 04-05 2시즌 동안 각각 41경기 16골, 50경기 20골을 넣으며 팀내 최고 득점자가 된다. 벤트의 활약에 힘입어 입스위치 타운도 2시즌 동안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승격에는 실패한다.
2.2. 찰튼 애슬레틱 FC
챔피언십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벤트는 2005년, 25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프리미어리그 소속의 찰튼 애슬레틱으로 이적한다. 새 팀에서 벤트는 대니 머피와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시즌 개막 후 4경기에서 5골을 넣고 8월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한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대니 머피가 떠난 후 벤트의 득점 페이스는 떨어졌지만, 리그에서 18골(컵대회 포함 22골)을 득점한 벤트는 득점 3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잉글랜드 국적 선수 중에 최다 득점이었다. 06-07 시즌에도 35경기에서 15골을 넣는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팀은 강등되었고, 벤트는 클럽 레코드인 이적료 1650만 파운드를 남기고 팀을 떠난다.
2.3. 토트넘 홋스퍼 FC
거액의 이적료와 함께 토트넘으로 이적한 벤트였지만, 주전경쟁에서 밀려나게 된다. 당시 토트넘에는 로비 킨, 베르바토프 영혼의 투톱이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메인 데포를 밀어내고 팀의 써드 공격수까지는 차지했으나, 36경기 8골로 이적료에 걸맞지 않은 활약을 보였다. 08-09시즌을 앞두고 킨과 베르바토프가 모두 팀을 떠나면서 벤트는 다시 주전으로 나선다. 활약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성적 부진으로 후안데 라모스가 경질되고 해리 레드냅[1] 이 부임하고, 겨울 이적시장에서는 로비 킨과 저메인 데포가 돌아오면서 벤트는 차츰차츰 주전에서 밀려나게 된다. 여름 이적 시장에서는 포츠머스 FC에서 레드냅과 호흡을 맞췄던 피터 크라우치까지 영입되면서 벤트가 팀을 떠나는건 확실하게 되었다. 이적 시장 초반부터 선덜랜드 AFC가 오퍼를 넣었는데, 토트넘 회장인 다니엘 레비 특유의 긴 협상 때문에 이적이 더디게 되자, 트위터로 레비를 욕했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2.4. 선덜랜드 AFC
토트넘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벤트는 선덜랜드에서 부활하는데 성공한다. 09-10 시즌 벤트는 켄와인 존스와 호흡을 맞추며 리그에서 24골을 넣었는데, 그 해 선덜랜드 AFC의 총 득점이 48득점이었다. 벤트 혼자 팀 득점의 절반을 책임진 셈. 05-06 시즌에 이어 다시 한번 리그 득점 3위에 오른다. 페페 레이나에게 풍선 골을 넣은 것도 이 시즌. 10-11 시즌에도 23경기에서 11골을 넣으며 준수한 활약을 하던 중, 겨울 이적시장에서 아스톤 빌라 FC로 이적하게 된다.
2.5. 아스톤 빌라 FC 이후
직전 해까지 빅4를 위협하던 아스톤 빌라는 10-11시즌 주전들의 줄부상으로 강등권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클럽 레코드인 2400만 파운드를 지르며 벤트를 영입했다. 벤트는 기대에 부응하여 잔여 16경기 동안 9골을 득점해 팀을 강등권에서 구해내고, 리그 득점 4위에 오른다. 하지만 이것이 벤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11-12시즌까지는 25경기에서 10골로 무난한 활약을 보였으나, 시즌 후반기 부상으로 일찍 시즌아웃되고 난 뒤 12-13시즌부터는 폼이 급격히 떨어져 크리스티안 벤테케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팀 전력 구상에서 제외된다. 이후 임대 생활을 했지만, 활약은 미미했고, 아스톤 빌라와의 계약기간이 종료된 후 자유계약 신분이 된다. 그나마 임대생활 동안 17경기 12골을 넣으며 좋은 활약을 했던 챔피언십 소속의 더비 카운티 FC에 입단했으나, 이미 벤트의 실력은 챔피언십에서도 통하지 않는 수준까지 떨어져있었다. 더비에서도 전력 구상에서 제외된 벤트는 17-18시즌 버턴 앨비언 FC로 임대되었다가 복귀 후 더비 카운티와의 계약이 종료되어 다시 자유계약 신분이 되었다.
2019년 7월 26일, 1년 간의 공백 끝에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각 연령대별 대표팀에 모두 뽑혔었고, 리그 득점 3위 2번, 4위 1번을 기록했던 좋은 골잡이였지만, 성인 국가대표팀과는 인연이 없다. 도합 13경기 출전 4골에 불과하며, 월드컵,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출전은 단 한번도 없다. 본인 커리어의 정점이었던 득점 3위 시즌 2번이 모두 월드컵이 열린 해였다는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2006 월드컵때 엔트리 합류가 예상되었으나, 당시 감독이던 스벤예란 에릭손이 시오 월콧[2] 을 파격적으로 발탁하면서 탈락. 2010 월드컵때는 파비오 카펠로가 에이스 웨인 루니를 지원할 타겟맨들을 우선 발탁하면서 다시 한번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마지막으로 유로 2012때 조별예선 2경기 출전 징계를 받은 웨인 루니를 대신할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본인의 부상으로 엔트리에 합류하지 못했다.
4. 은퇴 이후
토트넘을 챔피언스리그 결승으로 이끌었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보다 라이벌 아스날 FC의 미켈 아르테타를 단지 우승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좋은 감독이라고 말해 토트넘 팬들의 공분을 샀다.#
[1] 벤트가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자, "저건 우리 마누라도 넣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 당시 월콧은 잠재력을 인정받아 아스날 FC로 이적이 확정된 상태였지만, 고작 17살이었고 챔피언십에서 23경기 뛴 것이 1군 커리어의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