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트넘 홋스퍼 FC

 




[image]
'''토트넘 홋스퍼 FC'''[1]
'''Tottenham Hotspur F.C.'''
'''정식 명칭'''
'''Tottenham Hotspur Football Club'''[2]
'''애칭'''
'''스퍼스 (Spurs)
릴리화이츠 (The Lilywhites)
'''
'''창단'''
1882년 9월 5일 '''(141주년)'''
'''소속 리그'''
'''프리미어 리그 (The Premier League)'''
'''연고지'''
잉글랜드 런던 해링게이 구 (Haringey) 토트넘 (Tottenham)
'''홈 구장'''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62,214명 수용)
'''라이벌'''
'''아스날 FC''' - '''북런던 더비'''
'''첼시 FC''',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크리스탈 팰리스 FC - 런던 더비
'''구단주'''
[image] 조 루이스 (Joe Lewis)[3]
'''회장'''
[image] 다니엘 레비 (Daniel Levy)
'''감독'''
[image] 주제 무리뉴 (José Mourinho)
'''주장'''
[image] 위고 요리스 (Hugo Lloris)
'''부주장'''
[image] 해리 케인 (Harry Kane)[4]
'''역대 한국인 선수'''
[image] 이영표 (2005~2008)
[image] '''손흥민''' (2015~ )
'''클럽 앰버서더'''
[image] 게리 마버트 (Gary Mabbutt)
[image]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Osvaldo Ardiles)
[image] 레들리 킹 (Ledley King)
[image] 스콧 파커 (Scott Parker)
[image] 브래드 프리델 (Bradley Friedel)
'''공식 웹 사이트 및 소셜 미디어'''
[5]
'''국내 웹 사이트 및 팬 커뮤니티'''
[6]
'''우승 기록'''
'''프리미어 리그'''
(2회)

1950-51, 1960-61
'''EFL 챔피언십'''
(2회)

1919-20, 1949-50
'''FA컵'''
(8회)

1901, 1921, 1961, 1962, 1967, 1981, 1982, 1991
'''EFL컵'''
(4회)

1971, 1973, 1999, 2008
'''FA 커뮤니티 실드'''
(7회 / *: 공동우승)

1921, 1951, 1961, 1962, 1967*, 1981*, 1991
'''UEFA 컵 위너스컵'''
(1회)

1962-63[7]
'''UEFA 유로파 리그'''
(2회)

1971-72[8], 1983-84
'''클럽 기록'''
'''최고 이적료 영입'''
[image] 탕기 은돔벨레 (Tanguy Ndombele)
2019년, From 올림피크 리옹, £6500만[9]
'''최고 이적료 방출'''
[image] 가레스 베일 (Gareth Bale)
2013년, To 레알 마드리드 CF, £8920만[10]
'''최근 영입'''
[image] 조 로든 (Joe Rodon)
2020년, From 스완지 시티 AFC, £1100만[11]
'''최다 출장'''
[image] 스티브 페리맨 (Steve Perryman) - 854경기 (1969~1986)
'''최다 득점'''
[image] 지미 그리브스 (Jimmy Greaves) - 266골 (1961~1970)
'''리그 득점왕'''
(11회)

[image] 지미 그리브스 '''4회''' (1962-63, 1963-64, 1964-65, 1968-69)
[image] 바비 스미스 (1957-58)
[image] 스티브 아치벌드 (1980-81)
[image] 클라이브 알렌 (1986-87)
[image] 게리 리네커 (1989-90)
[image] 테디 셰링엄 (1992-93)
[image] 해리 케인 '''2회''' (2015-16, 2016-17)

'''TO DARE IS TO DO'''
'''THIS IS MY CLUB. MY ONE AND ONLY CLUB'''
'''COME ON YOU SPURS'''
'''TOTTENHAM TILL I DIE'''
1. 개요
2. 역사
2.1. 초창기 (창단~1949)
2.2. 첫 번째 리그 우승과 리빌딩 (1949-1958)
2.3. 빌 니콜슨이 이끈 최전성기 (1958-1974)
2.4. 몰락과 부활을 경험한 포스트 니콜슨 시기(1974-1987)
2.5. 테리 베너블스 시기(1987-1992)
2.6. 암흑기였던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초창기(1992-2004)
2.7. 유럽대항전 단골로 도약한 시기 (2004~2014)
2.8. 2014년 이후
3. 스쿼드
3.1. 1군
3.2. 아카데미 (23세 이하)
4. 스태프
5. 라이벌
6. 인물
6.1. 레전드
6.2. 기타 유명 선수들
7. 인기
7.1. 한국에서의 인지도
7.2. 토트넘을 응원하는 유명인사
8. 여담
8.1. 토트넘과 유대인
8.2. 챔피언스 리그와의 인연
8.3. FM에서의 토트넘 홋스퍼
11. 역대 이적료 Top 10
12. 같이보기
.

1. 개요


영국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프로 축구 클럽. 연고지는 런던. 홈 구장은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영국 클럽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 UEFA 유로파 리그 초대 우승[12] 클럽. 애칭은 스퍼스(Spurs).[13] 1882년 창단되었으며, 토트넘에 소재하고 있는 화이트 하트 레인을 2017년 5월 14일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했다.[14] 이후 2019년 4월 3일부터 같은 자리에 세워진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을 새로운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부 리그 우승 2회, FA컵 8회, 리그컵 4회, 유로파 리그 2회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프리미어 리그가 출범한 이후 한 번도 강등되지 않은 6개 팀 중 하나다.[15] 이후 리그 최고 성적은 2016-17 시즌 준우승이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최고 성적은 2018-19 시즌의 준우승이다.
엠블럼은 수평아리(싸움닭)가 축구공 위에 올라가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클럽의 모토는 라틴어인 'Audere EST Facere'로, 영어로는 'To Dare Is to Do', 한국어로는 '용감한 것은 도전하는 것이다'란 뜻이다.
문서명은 현재 가장 보편적인 명칭인 토트넘 홋스퍼로 토론을 통해 정해졌지만, 과거에는 국내 명칭이 통일되지 않아 매체마다 다르게 부르기도 했다. 흔히 미국식으로 '토트넘 핫스퍼'라고 하거나 토텐햄 핫스퍼,[16] 토튼햄 홋스퍼, 토튼엄 홋스퍼, 토트넘 하츠퍼 등이다. 참고사항으로 국립국어원은 프로 리그 관련 명칭을 개정하면서 영국식 영어인 '토트넘 홋스퍼'로 표준 표기를 정했다.[17]

2. 역사



2.1. 초창기 (창단~1949)


1882년에 토트넘에 있는 올 할로우 교회 학생들에 의해 창단됐다. 정확히는 1882년 9월 5일이며, 바비 버클이 축구 팀을 만들었다. 몇 년후 팀원들은 존 립셔 교사를 초대 회장으로 모셔다가 팀을 재조직하고 팀을 위한 땅을 찾으면서 아이들을 지원해준다. 그리고 1884년 같은 지역 팀 홋스퍼와 헷갈릴까봐 현재의 팀명으로 했다.
처음에는 북런던 지역의 유일한 팀이었으나, 1913년에 아스날 FC가 울리치에서 북런던의 하이버리로 이전하자 북런던 지역 팬들이 갈라져 라이벌이 성립되었다.[18] 이들은 노섬벌랜드 파크에서 다른 지역 클럽들과 친선 경기를 가졌다. 첫 경기는 1882년 9월 30일 래디컬스와의 경기였고, 2대0으로 졌다. 이후 런던연합컵에 참가했으며 1885년 10월 17일 세인트 앨반스에 5대2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 이후로부터 토트넘은 지역 사회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했으며 토트넘과 경기를 하고 싶어하는 팀들이 많아져 홈 경기가 늘기 시작했다. 1892년에 서던 얼라이언스에도 합류했다.
1896년 여름에 지역리그인 서던 리그 디비전 1에 참가하였고, 초대 감독으로 볼턴을 지휘했던 프랭크 브레텔을 부임시켰다. 브레텔 감독은 에버튼 등지에서 뛰던 존 카메론을 사들여 팀을 정비하고 1899년에 카메론이 감독직까지 도맡아 1899/1900 시즌에서 우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99년부터 화이트 하트 레인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1901년에는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결승전 재경기(1차전 2-2)에서 3대1로 꺾으며 FA컵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는 풋볼리그 창설 이후 논리그 클럽이 FA컵을 우승한 첫 사례이자 유일한 사례였다.[19] 1908년 토트넘은 서던 리그에서 탈퇴, 풋볼 리그 2부에 참여하였고[20], 그해 디비전 2에서 준우승하며 바로 1부로 승격한다. 1부리그에서의 첫 시즌인 1909/10 시즌 고전했으나 최종전에서 첼시 FC에 승리하며 첼시를 강등시키고 15위로 잔류에 성공했고, 이후 몇 시즌 동안 주로 1부리그 하위권에 머물었다.
1912년에는 피터 매킬럼으로 감독이 바뀌었다. 1914/1915 시즌이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조기 종료되었고, 토트넘은 꼴찌였다. 전쟁 중 화이트 하트 레인은 정부 소유가 되어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전환됐다. 이 기간에 토트넘은 아스날의 홈구장이었던 하이버리와 클랩튼 오리엔트(레이튼 오리엔트의 전신)의 홈구장 호머튼 그라운드를 전전해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리그는 재개되었고 1부리그는 기존의 20개 팀에서 두 팀을 늘려 22개 팀으로 확장했다. 21번째 클럽은 전 시즌 1부리그 19위였던[21] 첼시 FC가 되었고, 22번째 클럽으로는 다름아닌 '''디비전 2에서 5위였던 숙적 아스날 FC가 되며''' 토트넘은 디비전 1 참가 후 처음으로 디비전 2로 강등되고 말았다.[22][23] 이로 인해 북런던 더비는 런던에서 가장 치열한 라이벌리를 형성하게 됐다.
석연치 않게 강등당한 토트넘은 디비전 2에서 우승하며 한 시즌 만에 곧바로 1부리그로 승격한다. 1921년 4월 23일에 FA컵 결승전에서 토트넘은 울버햄튼을 상대로 1-0으로 이겨 통산 2회 우승을 차지했다. 1921/22 시즌에는 리버풀 바로 아래인 2위로 시즌을 마치며 엄청난 활약을 했다. 하지만 이후 10위권 밖의 중하위권에 머물다 1927/1928시즌 매킬럼 감독이 떠나고 토트넘은 21위로 다시 강등된다.[24] 디비전 2에서 5시즌을 보내다가 1932/33 시즌 디비전 2 준우승으로 다시 승격했다. 1933/34 시즌 3위로 좋은 시즌을 보냈으나 1934/35 시즌에 부상자가 속출하며 최하위로 다시 강등되었다. 1930~40년대 내내 2부에서 계속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1940년대까지는 아스날의 위세에 밀려 한동안 존재감 없이 지냈다.

2.2. 첫 번째 리그 우승과 리빌딩 (1949-1958)


1949년에 아더 로위 감독 취임 후 빌 니콜슨 등을 중심으로 '푸시 앤 런'이라는 스피드를 중시한 공격축구를 선보이며 팀은 새로 변모했다. 알프 램지를 영입한 1949/50 시즌에 15년 만에 1부로 승격시켰고, 바로 다음 시즌인 1950/51 시즌 빌 니콜슨의 활약으로 1부 리그 승격에 이어 1부 리그에서 우승컵을 따냈다.(토트넘 1위, 맨유 2위, 블랙풀 3위, 뉴캐슬 4위, 아스날 5위 등) 첫 경기에서 스탠리 매튜스 경이 이끌던 블랙풀 FC에 1:4 패배를 당하며 출발했지만 10월과 11월 재키 밀번의 뉴캐슬에 7-0 대승을 거두는 등 파죽의 8연승을 기록했다. 최종전에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1:0으로 꺾고 2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승점 3점이 앞서며 승격하자마자 창단 첫 1부리그 우승을 따냈다. 다음 시즌인 1951/52 시즌에는 버스비의 아이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승점 4점이 뒤쳐져 준우승했다. 그러나 1952/53 시즌과 1953/54 시즌 리그 10위와 16위에 그쳤다. 1954/55 시즌 또다시 16위에 그쳤다. 아더 로위 감독은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으로 1955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떠나기 전 한 선수와 계약을 맺었는데, 그 선수는 대니 블랜치플라워로 FWA 올해의 축구선수상을 두번이나 받은 엄청난 선수였다.[25]
로위의 후임은 수석코치 지미 앤더슨이었다. 1955/56 시즌 거의 강등될 뻔 했다가 18위로 겨우 잔류했고, 1956년 빌 니콜슨이 코치로 부임한 뒤 블랜치플라워와 바비 스미스의 활약에 힘입어 1956/57 시즌 2위로 마쳤다.[26] 1957/58 시즌도 3위로 마쳤다. 앤더슨은 클리프 존스, 테리 메드윈, 피터 베이커, 론헨리, 테리 다이슨, 모리스 노먼, 바비 스미스 등의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거나 유스에서 승격시켜 팀을 잘 리빌딩했다.

2.3. 빌 니콜슨이 이끈 최전성기 (1958-1974)


1958년 10월, 초반 성적 부진과 함께 건강상의 이유로 앤더슨이 사임하고 수석코치 빌 니콜슨이 감독을 맡았다. 니콜슨 감독은 데이브 맥키, 존 화이트와 계약을 맺었고 팀의 최고의 선수이자 리그의 탑 티어 선수라고 할 수 있는 지미 그리브스를 영입하였다. 이외에도 마틴 치버스, 팻 제닝스, 스티브 페리맨, 조 키니어 등을 영입하여 팀을 새로 꾸려서 1967년 FA컵, 1971, 1973 두 번 리그컵에서 각각 우승을 차지하고, 1972년 UEFA컵 결승에선 같은 잉글랜드 팀인 울버햄튼 원더러스를 꺾어 영국 팀 최초로 또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에버튼 FC와의 데뷔전에서 10:4 대승을 거뒀으나 그 시즌은 18위로 마쳤고, 1959/60 시즌 우승팀 번리 FC에 승점 2점이 부족한 3위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해당 시즌 FA컵에서 크루 알렉산드라에 13-2 대승을 거뒀는데 이는 토트넘 역사상 최다점수차 승리로 남아있다. 데이브 맥키와 존 화이트를 영입한 토트넘은 1960/61 시즌 리그와 FA컵을 모두 우승하며 1897년 아스톤 빌라 이후로 64년 만에 역대 2번째로 더블을 달성했다. 리그에서 아직까지도 잉글랜드 내 최고 기록[27]으로 남아있는 파죽의 '''개막 11연승'''을 기록한 토트넘은[28] 2위 셰필드 웬즈데이를 승점 8점차로 여유롭게 따돌리고 압도적인 2번째 1부리그 우승을 달성했다.[29] FA컵에서는 레스터 시티를 결승에서 2-0으로 꺾고 3번째로 우승했다.
1부리그 우승으로 1961/62 시즌 유로피언 컵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토트넘 역대 최고의 공격수 지미 그리브스AC 밀란에서 영입하여 그의 맹활약으로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대회 우승팀이었던 SL 벤피카에게 탈락했다.[30] FA컵 결승에서 번리를 3-1로 꺾고 연속으로 우승하여 유로피언컵 탈락의 아쉬움을 달랬다. FA컵 우승으로 1962/63년에는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에 처음 참가했고, 레인저스와 브라티슬라바, OFK 베오그라드를 꺾은 뒤, 로테르담에서 열린 5월 15일 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5-1로 꺾으며 영국 팀 최초로 트로피를 들었다.
1960/61 시즌 우승 후 리그에서 3위-2위-4위로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1964/65 시즌은 선수들의 노쇠화와 부상 문제, 그리고 존 화이트가 골프를 치던 중 벼락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터지며 6위에 그쳤고 니콜슨 감독은 팀을 리빌딩할 결심을 했다. 앨런 멀레리, 팻 제닝스, 시릴 노리스, 마이크 잉글랜드, 테리 베너블스, 지미 로버트슨, 필 빌, 조 키니어, 앨런 길질로 팀을 새롭게 꾸렸다. 리빌딩에 성공하며 1966/67 시즌 3위와 함께 FA컵 결승에서 런던 라이벌 첼시 FC를 2-1로 이기고 FA컵 5번째 우승에 성공했다.
1967/68 시즌에서 1969/70 시즌까지 리그는 7위와 6위, 11위 그리고 위너스컵은 2라운드 탈락으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맥키와 존스, 로버트슨, 베너블스는 이 시기에 팀을 떠났다. 스티브 페리맨과 레이 에반스, 존 플렛,그리고 마틴 치버스가 이들의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지미 그리브스는 마틴 피터스와의 트레이드로 웨스트햄으로 이적했다. 1971년에는 랄프 코티스를 영입하며 또다시 팀을 리빌딩했다.
새롭게 리빌딩 된 팀은 1970/71 시즌 리그 3위와 함께 리그컵 결승에서 아스톤 빌라에 2-0 승리를 거두며 리그컵 첫 우승을 거뒀다. 1971/72 시즌은 UEFA컵 준결승에서 이탈리아의 강호 AC 밀란을 제압한 뒤 결승에서 울버햄튼 원더러스를 1,2차전 합계 3-2로 첫 번째 UEFA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UEFA컵 우승으로 토트넘은 두 개의 유럽클럽대항전에서 우승한 최초의 영국팀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1972/73 시즌에는 리그컵 결승에서 노리치 시티를 1-0으로 이기며 2년 만에 우승했다. 디펜딩챔피언으로 참가한 UEFA컵에서는 준결승에서 대회 우승팀 리버풀 FC를 만나 원정다득점 원칙에 의하여 아쉽게 탈락했다. 1973/74 시즌에는 2년 만에 UEFA컵 결승에 올라갔으나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상대로 1차전 홈에서 2-2 무승부, 2차전 원정에서 2-0으로 패배해 합계 4-2로 준우승했다. 그리고 토트넘의 훌리건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UEFA는 6년간 토트넘의 유럽대항전 출전권을 박탈했다.[31]

2.4. 몰락과 부활을 경험한 포스트 니콜슨 시기(1974-1987)


1974/75 시즌 도중에 니콜슨 감독이 사임하자, 아스날 출신이던 테리 닐이 감독이 됐다. 1974/75 시즌 간신히 강등을 모면한 뒤 글렌 호들이 데뷔한 1975/76 시즌 9위로 마쳤다. 아스날에서 주로 선수생활을 보냈던 닐은 토트넘에서 엄청난 족적을 남긴 전임자의 그림자와 함께 당연히 환영받지 못했고 결국 친정팀인 아스날 FC의 감독으로 떠났다.[32] 1976년 케이스 버킨쇼 코치가 팀 감독을 맡았으나 1976/77 시즌에 최하위인 22위로 27년 만에 디비전 2로 강등당했다. 강등과 함께 토트넘의 수호신이었던 팻 제닝스가 라이벌 아스날 FC로 이적하는 아픔도 겪었다. 70년대 초반 컵대회 우승멤버들은 대부분 팀을 떠났다. 충격적인 강등에도 불구하고 구단주는 버킨쇼를 신임했다. 버킨쇼 감독은 구단주의 신임에 보답하며 토트넘은 1977-78 시즌 치열한 승격 경쟁 끝에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과 승점이 같은 상황에서 골득실에서 앞서 3위로 강등 1년 만에 1부 승격에 성공했다.[33] 1978년 여름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듀오 오스발도 아르딜레스리카르도 비야를 깜짝 영입했다.[34] 또한 유스에서 마크 팔코, 폴 밀러, 크리스 휴튼, 미키 하자드를 발굴하고 그레이엄 로버츠, 토니 갈빈, 그리고 공격수인 가르스 크룩스와 스티브 아치발드를 영입해 두 시즌을 리빌딩했다.
1980-81 시즌 FA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맨체스터 시티를 재경기 끝에 리카르도 비야의 결승골로 3-2로 이겨 통산 6번째 FA컵을 들어올렸다. 레이 클레멘스가 영입된 1981-82 시즌에도 FA컵 결승에서 퀸즈 파크 레인저스를 재경기 끝에 1-0으로 승리해 2연속&7번째 FA컵 우승에 성공했다. 해당시즌 리그컵에서도 결승전에 올랐으나 리버풀 FC에 3-1로 패배하며 준우승했고, 8년 만의 유럽대항전인 UEFA컵 위너스 컵에서는 AFC 아약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35]를 꺾으며 8강에 진출했으나 8강에서 FC 바르셀로나에 1차전 홈에서 1-1 무승부, 2차전 원정에서 1-0으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1982-83 시즌 게리 마벗을 영입하여 리그에서 4위를 했으나 위너스컵에서 2라운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조기 탈락했다. 1983-84 시즌에는 UEFA컵에서 페예노르트와 바이에른 뮌헨, 오스트리아 빈, 하이두크 스플리트를 꺾고 결승전에서 RSC 안더레흐트를 만나 두 경기 모두 1-1 무승부 끝에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이겨 통산 두 번째 UEFA컵(현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이는 토트넘의 마지막 유럽대항전 우승으로 남아있다.[36]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끝으로 버킨쇼 감독은 스스로 팀을 떠났다.
버킨쇼의 후임은 수석코치 피터 슈리브스였다.[37] 전반기에는 1위를 기록하며 우승에 도전했으나 후반기 성적이 급락해 에버튼 FC리버풀 FC에 밀려 3위로 마쳤다. UEFA컵 진출권을 따냈으나 헤이젤 참사가 터져 잉글랜드 클럽들이 5년간 유럽대항전 출전권 박탈당하는 바람에 없는 일이 되었다. 1986년에는 스티브 페리먼이 19년의 토트넘 선수생활을 마치고 팀을 떠났다. 1985/86 시즌 크리스 워들과 폴 알렌의 영입이 있었으나 10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했고 슈리브스는 시즌 막판 경질되었다. 루턴 타운 FC의 감독이었던 데이비드 플리트가 신임 감독이 됐다.
1986/87 시즌 토트넘은 호들과 아르딜레스, 알렌, 워들, 스티브 호지를 미드필더로 기용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5인 미드필더를시도했다. 원톱인 클라이브 알렌은 이 시즌에만 전체 대회를 합쳐 49골을 기록했는데 여전히 클럽 최고 기록이다. 토트넘은 리그와 두 개의 컵대회에서 우승에 도전했으나 무관에 그쳤다. 리그컵에선 준결승에서 숙적 아스날 FC에 패했고, 리그에서는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에버튼과 리버풀에 밀려 3위로 마쳤다. 마지막으로 FA컵 결승에서는 코번트리 시티를 상대로 종료 직전 게리 마벗의 뼈아픈 자책골로 인해 3-2로 져 준우승했다. 시즌을 마친 뒤 팀의 간판 스타였던 글렌 호들AS 모나코로 떠나며 한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2.5. 테리 베너블스 시기(1987-1992)


1987/88 시즌이 진행중인 1987년 10월에 데이비드 플리트 감독은 개인적인 이유로 사임했다. 과거 토트넘 선수이자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을 했던 테리 베너블스가 부임했다. 그가 맡았을 때 토트넘은 호들이 팀을 떠난 공백 때문인지 리그에서 고전하며 강등권 근처에 있었다. 베테랑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는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베너블스는 테리 펜윅과 폴 월시를 영입하며 반전을 시도했으나 13위에 그쳤다. 간판 공격수였던 클라이브 알렌은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1988년 3월 지롱댕 보르도로 이적했다.
1988년 여름 국내 최다 이적료인 200만 파운드를 들여 뉴캐슬 유나이티드폴 개스코인을 영입했다. 또한 맨체스터 시티의 스트라이커 폴 스튜어트를 17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1988/89 시즌 토트넘은 초반에 강등권을 전전했지만 반등하여 연말에는 9위로 도약한 뒤, 최종적으로는 6위로 마쳤다. 1989년 여름에는 월드컵 득점왕이자 잉글랜드 국가대표 공격수 개리 리네커FC 바르셀로나로부터 영입했다. 하지만 크리스 워들은 올림피크 드 마르세유로 425만 파운드에 이적했다.
리네커와 개스코인이 모인 1989/90 시즌 토트넘은 리그에서 3위로 마쳤다. 1990/91 시즌 토트넘은 시즌 초반 10경기에서 무패를 기록했지만 후반기 성적이 떨어지며 10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FA컵은 달랐다. 준결승에서 라이벌 아스날 FC을 개스코인의 30야드 떨어진 지점에서의 환상적인 프리킥골과 리네커의 2골로 3-1로 제압했는데 이는 역대 FA컵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리고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FA컵 결승전에서 2-1로 꺾어 8번째 FA컵을 들어올렸다.[38] 그러나 폴 개스코인은 이 경기에서 치명적인 무릎 십자인대 부상을 입어 1991/92 시즌 전체를 날렸다. 개스코인은 SS 라치오의 영입 대상이었고, 그가 무릎 부상에서 회복하자 1992년 여름 550만 파운드에 그를 영입했다.[39]
1991년 6월 앨런 슈가가 토트넘의 신임 회장이 되었고 베너블스 감독은 클럽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그리고 피터 슈리브스가 감독으로 재신임을 받아 6년 만에 1군 감독이 됐다. 간판 골잡이 게리 리네커는 1991년 11월, 1991/92 시즌을 끝으로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하기 위해 토트넘을 떠날 것을 선언했다. 리네커는 리그 28골을 득점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고 J리그의 나고야 그램퍼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토트넘의 성적은 영 신통치 않았고 42경기에서 15승7무20패 승점 52점으로 15위에 그쳤다. 지난해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7년 만에 나간 유럽대항전인 UEFA컵 위너스컵에서는 하이두크 스플리트FC 포르투를 꺾고 8강에 올랐으나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 합계 1-0으로 밀려 탈락했다.
1992년 여름 성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슈리브스가 경질된 가운데 베너블스는 프런트 업무를 내려놓고 현장으로 복귀하기를 희망했으나 1군 팀 코치였던 덕 리버모어와 레이 클레멘스가 공동으로 감독을 맡았다. 베너블스는 슈가 회장과의 갈등 끝에 1993년 해고됐는데 토트넘 팬들의 반발이 거셌고 법정 공방까지 갔다.

2.6. 암흑기였던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초창기(1992-2004)


1992년 앨런 슈가가 회장으로 부임한 이래 연거푸 감독을 교체해가며 테디 셰링엄, 위르겐 클린스만, 다비드 지놀라 같은 거물들을 더 영입했다. 연이어 솔 캠벨같은 유망주들도 등용했으나 우승은 커녕 유럽대항전 진출 경쟁에서도 밀려 6위 안에 도 들지 못하며 대부분 중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시즌 초반에는 성적이 좋은 편으로 희망고문하다가 곧 추락하며 시즌이 끝날 때에는 10위 언저리에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나마 성과라 할 만한 것은 1999년 워딩턴컵(현재의 EFL컵) 우승 뿐이다. 이 시기 토트넘에 대하여 한준희 해설위원은 많이 투박했다고 평했다.
1992-93 시즌 윙어 대런 앤더튼, 수비수 닐 러독, 공격수 테디 셰링엄이라는 굵직한 보강이 있었다. 셰링엄은 당시 클럽레코드인 210만 파운드에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영입되었다. 프리미어리그 출범 첫 시즌 토트넘은 8위로 마쳤다. 셰링엄은 22골(1골은 노팅엄에서 넣은 골)로 프리미어리그 첫 시즌 득점왕에 오르며 일본으로 떠난 리네커의 공백을 없앴다.
그러나 실질적인 감독 역할을 했던 베너블스가 슈가와의 불화로 떠나며 리버모어&클레멘스의 공동감독 체제는 막을 내렸고 토트넘의 1980년대 초반 스타플레이어였던 오스발도 아르딜레스가 신임 감독이 됐다. 1993-94 시즌 초반에는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 테디 셰링엄이 부상을 당하자 팀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9경기 연속 무승과, 7연패가 포함된 10경기 연속 무승에 시달렸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서 토트넘은 강등에 대한 걱정을 해야했다. 다행히 셰링엄이 부상에서 복귀한 뒤 승점을 쌓기 시작하며 최종전을 앞두고 겨우 잔류를 확정지었다. 최종 순위는 15위.
1994-95 시즌 전 토트넘은 1980년대 어빙 숄라 회장 시절 부정선수 영입건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았고,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으며 60만 파운드의 벌금과 함께 FA컵 출전권 박탈, 리그 12점 승점 감점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자칫 강등 위기에 몰릴수도 있는 상황에서 다행히 슈가 회장의 항소로 벌금만 더 내고 승점 감점과 FA컵 출전 박탈은 없는 일이 됐다. 징계에도 불구하고 1994 FIFA 월드컵에서 활약했던 3명의 선수를 영입했다. 루마니아 국가대표인 일리에 두미트레스쿠와 게오르게 포페스쿠, 그리고 독일의 간판 스트라이커인 '''위르겐 클린스만'''을 영입해 전력을 강화했다. 아르딜레스 감독은 공격적인 축구를 선호하며 공격진에 클린스만과 셰링엄, 앤더튼, 밤비, 두미트레스쿠를 세웠다.
1994-95 시즌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개막전에서 토트넘은 웬즈데이에 셰링엄과 앤더튼, 밤비, 클린스만의 골로 4-3으로 이겼다. 그러나 지나친 공격몰빵전술은 수비불안과 실점 증가를 가져왔고 성적도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결국 아르딜레스는 1994년 11월 경질되었다. 후임은 QPR의 감독이었던 게리 프랜시스였다. 부임 후 팀을 안정화시키며 프리미어리그를 7위로 마쳤다.[40] FA컵에서 준결승까지 갔으나 에버튼 FC에 4:1로 패배하며 4년 만의 FA컵 결승전과 UEFA컵 진출이 무산되었다. 위르겐 클린스만은 모든 대회를 합쳐 29골을 득점하며 맹활약했으나 토트넘이 우승 경쟁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낀 탓에 옵션을 발동하며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났다. 클린스만의 이적을 시작으로 두미트레스쿠와 포페스쿠, 밤비까지 팀을 떠났다.
1995년 여름에는 루엘 폭스와 크리스 암스트롱을 영입했고 훗날 토트넘의 주장이 되는 레들리 킹을 스카웃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토트넘 이적에 관심이 있었고 글렌 호들의 팬이었던 데니스 베르캄프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전력이 다소 약화된 토트넘은 1995/96 시즌과 1996/97 시즌 각각 유럽대항전과 다소 거리가 먼 8위와 10위로 마쳤다. 이에 30세가 넘어간 테디 셰링엄은 우승 야망을 이루기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41] 셰링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뉴캐슬의 공격수였던 레스 퍼디난드를 클럽레코드인 600만 파운드를 들여 데려왔으며, 또한 뛰어난 테크니션이었던 다비드 지놀라까지 250만 파운드에 뉴캐슬에서 영입했다.
그러나 1997-98 시즌 퍼디난드는 부상으로 초반에 쓰러졌고, 1997년 11월 리버풀에 4-0으로 대패하고 하위권으로 떨어지자 프랜시스는 사임했다. 스위스 리그에서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크리스티안 그로스를 프랜시스의 후임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그로스 감독이 온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강등권으로 추락해 강등권 탈출이 시즌 목표가 되었다. 1997년 12월 위르겐 클린스만이 임대를 통해 토트넘으로 복귀했다. 클린스만이 후반기 절반의 시즌에만 9골을 득점, 곧바로 클린스만 효과를 보며 토트넘은 승점을 쌓기 시작해 강등권에서 빠져나왔고, 37라운드 윔블던 FC 원정에서 클린스만이 4골을 득점해 6-2 대승을 거두며 잔류를 확정지었다. 최종 순위는 18위 볼튼에 승점 4점이 앞선 14위였다. 클린스만의 임대 후 활약으로 토트넘을 강등 위기에서 구한 것은 EPL에서 손꼽히는 임대의 전설 중 하나로 남아있고 이 때문에 클린스만은 토트넘에서 불과 1년 반만 활약하고도 토트넘 팬들로부터 영웅이자 레전드로 평가받고 있다.
1998-99 시즌 개막 후 3경기에서 1승2패로 저조하게 출발하자 그로스 감독은 임기 1년도 못채우고 경질당했다. 그런데 후임은 전 아스날 감독이었던 조지 그레이엄이었다. 아스날 출신인 점도 있지만 롱볼축구와 수비적인 축구로 악평이 높은[42] 그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당연히 매우 좋지 않았다. 당장 라이벌 팀인 아스날 FC벵거볼을 앞세운 공격적이고 매력적인 축구로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그레이엄은 부임 후 팀 셔우드와 슈테펜 프로인트를 영입했다.
1998-99 시즌 리그는 중위권인 11위로 마쳤으나 토너먼트에 강했던 그레이엄답게 리그컵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91년 FA컵 우승 이후 8년 만의 트로피였다. 리버풀 FC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6강과 8강에서 제압했으며 준결승에서 윔블던 FC를 꺾고 결승전에 진출한 뒤 결승전에서 퇴장으로 인한 수적 열세에도 레스터 시티를 앨런 니엘센의 후반 45분이 지난 뒤 추가시간이 끝나기 직전 결승골로 1-0으로 꺾었다. 다비드 지놀라는 맨유의 트레블에도 불구하고 PFA 올해의 선수상과 FWA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수상했다. FA컵에서도 준결승까지 올라갔지만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2-0으로 졌다. 리그컵 우승으로 토트넘은 1991-92 시즌 이후 8년 만에 유럽대항전에 나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리그컵 우승은 토트넘의 좋은 성적으로 이끄는 터닝포인트가 되지 못했다. 1999-00 시즌 UEFA컵과 리그컵, FA컵 모두 조기 탈락했고 리그 성적도 겨우 10위에 그쳤다. 2000년 여름 안드리 셰브첸코와 함께 디나모 키예프의 챔피언스리그 돌풍을 이끌었던 세르게이 레브로프를 클럽레코드였던 1,1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그러나 레브로프는 첫시즌에만 리그 9골을 넣은 뒤 두 번째 시즌에 단 1골만 그치고 임대를 전전하며 '''토트넘 역사상 최악의 영입'''으로 전락했다.
2000-01 시즌 도중에 지속적으로 토트넘 팬들로부터 공적이 되었던 슈가 회장은 클럽의 지분을 팔 의사를 보이기 시작했고, 조 루이스와 다니엘 레비로 구성된 ENIC 그룹으로의 매각과 함께 2001년 2월 클럽 회장에서 사임했다.[43] 그리고 레비가 신임 회장이 되었다. 레비가 부임한지 한 달이 지난 3월 많은 돈을 썼음에도 리그에서 중위권에서 저조한 성적을 내고 있던 조지 그레이엄을 전격 경질하고 사우스햄튼 FC의 감독으로 있던 토트넘의 레전드 글렌 호들을 신임 감독으로 데려왔다. 아스날과의 FA컵 준결승이 데뷔전이었는데 2-1로 졌다.
2001년 여름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던 주장 솔 캠벨보스만 룰을 통해 이적료 단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라이벌 아스날로 이적한 일이었다. 이 일로 캠벨은 토트넘 팬들에게 "유다"라는 멸칭과 함께 공적이 되었다. 한편 테디 셰링엄이 3년 만에 토트넘으로 복귀했고 거스 포옛크리스티안 치게를 영입했다.
2001-02 시즌 첼시를 준결승 2차전에서 5-1로 꺾고 2년 만에 리그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승격팀이었던 블랙번 로버스에 2-1로 져 준우승했다. 리그에서는 꾸준히 6-7위권을 지키며 유럽대항전 진출에 도전했으나 9위로 마쳤다.
셰링엄의 토트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2-03 시즌 '''로비 킨'''을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700만 파운드'''에 영입하고 자유계약으로 리버풀의 제이미 레드냅을 데려왔다. 3승1무의 호성적으로 8월을 마치며 호들은 월간 감독상을 수상했고 2003년 2월까지도 TOP 6를 유지하며 UEFA컵 진출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그러나 62실점이나 허용한 허약한 수비 때문에 10위로 떨어지며 호들 감독의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일부 선수들은 호들의 리더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2003-04 시즌에는 유망주 프레드릭 카누테엘데르 포스티가를 영입했다. 그러나 초반 6경기에서 승점 4점으로 강등권에 머물자 호들은 전격 경질되었고, 단장이었던 데이비드 플리트가 감독대행을 맡아 잔여 시즌을 이끌었다. 2003-04 시즌은 1997-98 시즌 이후로 최악인 14위로 마쳤는데 해당 시즌 라이벌 아스날 FC은 무패우승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2004년 4월 25일 홈에서 열린 북런던 더비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라이벌의 우승을 확정지어주고 말았다. 그나마 겨울이적시장에서 데려온 저메인 데포가 후반기 7골을 기록하며 로비 킨과 함께 팀의 희망이 된건 위안거리.

2.7. 유럽대항전 단골로 도약한 시기 (2004~2014)


2004년 여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자크 상티니를 신임 감독으로, 네덜란드인 마틴 욜을 수석코치로, 프랑크 아르네센을 스포르팅 디렉터로 선임하며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또한 폴 로빈슨, 마이클 캐릭, 페드로 멘데스, 누레딘 나이베트, 에릭 에드만 등이 영입되었고 거스 포옛과 크리스티안 치게, 대런 앤더튼, 엘데르 포스티가, 마우리시오 타리코, 게리 도허티, 스티븐 카 등이 팀을 떠나며 선수단의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막 후 1과 0이 많은 이진법 축구의 지루한 스코어가 이어지던 2004년 11월 상티니 감독은 개인 사정(이면에는 아르네센과의 불화)을 이유로 13경기만 치른 채 돌연 사임했다.[44] 상티니의 후임은 수석코치였던 마틴 욜이었다. 부임 후 첫 경기였던 아스날과의 홈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4-5 패배를 당했지만 곧 리그 5연승과 함께 UEFA컵 진출권 경쟁에 합류했다. 겨울이적시장에서 마이클 도슨이 합류하고 제이미 레드냅과 케이시 켈러는 팀을 떠났다. 지난 10여년과는 다른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아쉽게도 최종전 끝에 9위로 마감하지만 컵대회에서의 선전과 함께 지난 10여년과는 다른 수비력과 경기력으로 토트넘 팬들에게 기대감을 주기엔 충분했다.[45]
2005년 여름 아르네센 단장은 첼시로 떠나고 다미앙 코몰리가 신임 단장이 됐다. 지난 시즌에 이어 대대적인 선수 영입과 방출이 있었다. 프레데릭 카누테(세비야)와 에릭 에드만(스타드 렌), 션 데이비스, 노에 파마로, 페드로 멘데스(이상 포츠머스)가 떠난 대신 수많은 폭풍영입들이 있었다. 톰 허들스톤(더비 카운티), 폴 스톨테리(베르더 브레멘), 아론 레넌(리즈 유나이티드), 티무 타이니오(오세르), 웨인 라우틀리지(크리스탈 팰리스), 호삼 미도(AS 로마 임대[46])를 영입한데 이어 8월 3일 네덜란드 국가대표 수비형 미드필더 에드가 다비즈를 인테르에서 자유영입했다. 그리고 여름이적시장 마지막 날에는 5명의 영입이 이루어졌는데 이영표(PSV)를 포함 저메인 제나스(뉴캐슬 유나이티드), 그레고리 라시아크(더비 카운티), 호삼 갈리(페예노르트), 대니 머피(찰튼)이 대거 팀에 합류했다.
2005-06 시즌 토트넘은 한번도 6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으며 후반기에는 라이벌 아스날을 따돌리고 꾸준히 4위를 유지하며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도전했다. 리그컵 준결승과 챔피언스리그에서 결승에 진출하며 많은 일정을 소화한 아스날과는 다르게 다른 두 컵대회에서 하위리그 팀에게 첫 경기에서 탈락하며 리그만 집중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이었다. 2006년 4월 30일 마지막 홈경기였던 볼튼전에서 1-0으로 이겼을 때 두 경기 덜 치른 5위 아스날에 승점 7점차로 앞선 4위로 챔피언스리그를 눈앞에 뒀다. 하지만 아스날은 두 경기를 다 이기며 최종전에서 4위 여부를 가리게 됐는데 최종전 웨스트햄전을 앞두고 식중독 사건을 겪으며 주전 선수들이 컨디션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최종전에서 웨스트햄에 2-1로 패하고 아스날이 하이버리 마지막 경기에서 앙리의 해트트릭으로 위건에 4-2 역전승을 거두며 다 잡았던 4위와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놓치게 됐다. 하지만 이것도 1989-90 시즌 이후 16년 만에 거둔 최고의 성적이었고 헤이젤 참사 이후 컵대회 성적이 아닌 리그 순위로만 유럽대항전에 진출한 첫 번째 시즌이었다. 리그에서 38실점만 내주며 1971년 이후 35년 만의 최소실점이기도 했다.
2006년 여름에는 유럽대항전을 병행하는 상황을 고려하여 많은 영입이 있었다. 베누아 아수에코토, 디디에 조코라,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스테드 말브랑크, 파스칼 심봉다의 영입이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 캐릭이 맨유로 이적하며 전력의 큰 누수를 겪게 됐다. 2006-07 시즌 전반기는 주전들의 부상과 새로운 선수들의 적응 문제로 중위권에서 머물렀다. 그래도 그 와중에 첼시 FC에 2-1 역전승으로 16년 만에 승리를 거두는 쾌거도 있었다.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로비 킨의 강력한 투톱이 자리잡은 마지막 12경기에서 1패만 기록하며 2년 연속 5위로 마쳤다. 그러나 리그 20경기 연속 실점을 포함, 54실점이나 허용한 수비력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47] 그래도 UEFA컵 8강[48], 리그컵 4강[49], FA컵 8강[50]에 진출하며 지난해 40경기에서 21경기나 늘어난 총 61경기[51]라는 많은 경기를 치렀음에도 리그 순위가 추락하지 않고 5위를 유지했다는 점은 매우 의미가 있었다.[52] [53]
2007-08 시즌 4,000만 파운드 가량의 이적료를 쏟아부으며 가레스 베일대런 벤트, 유네 카불 등을 영입했고 올해는 다르다를 외치며 빅4 체제를 깰 대항마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즌 초반부터 수많은 실점을 허용하며 10경기 1승으로 19년 만의 최악의 출발으로 강등권으로 추락했다. 시즌 전부터 구단주와 마찰이 있던 욜 감독은 결국 성적부진으로 경질당했다.[54] [55]
마틴 욜 감독의 후임은 프리메라 리가에서 세비야의 감독을 맡고 있었던 후안데 라모스였다.[56] 라모스 감독은 2007-08 시즌 중간에 부임했기 때문에, 그의 뜻대로 팀을 재정비할 수 없는 상태에서 11위와 마무리했는데, 이 때 아스날과 첼시를 꺾고 칼링컵을 들어 올리며 서포터들의 지지를 얻어냈다.[57] 그 성공을 등에 업고 2008-09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모드리치와 벤틀리, 고메스 등을 사는 등 팀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이영표도 이 시기에 팀을 떠났다. 하지만 로비 킨과 베르바토프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벤트와 파블류첸코가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며 리빌딩은 실패했고, 개막 후 8경기에서 구단 역사상 최악인 2무6패로 최하위로 떨어졌고, 2008년 10월 25일 결국 경질당했다. 또한 코놀리 단장도 감독과 함께 경질되었다.
라모스의 후임으로는 포츠머스 FC해리 레드냅 감독을 선임했다. 유럽식 단장 시스템에서 감독이 코칭과 선수 이적을 담당하는 전통적인 영국식 매니저 시스템으로 회귀했다. 레드냅은 부임하자마자 4경기에서 아스날, 리버풀, 맨시티를 상대로 3승1무를 거두며 빠르게 회복시켰고 수비가 크게 안정되며 리그를 8위로 마감했다.
이후 첫 챔피언스 리그 진출 등, 4시즌 동안 빅 4를 위협할 수준의 팀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시기 저메인 데포[58], 루카 모드리치, 라파엘 판데르파르트 등 주요 선수들을 영입했으며, 가레스 베일의 포지션을 윙어로 변경하며 기량을 꽃피우게 하기도 했다. 2009-10 시즌 4위로 마감하면서 빅4 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 꿈에 그리던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이루어냈고, 2010-11시즌엔 49년 만에 진출한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인터 밀란을 꺾고 조별리그 1위, AC 밀란을 꺾고 챔스 8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2011-12 시즌 리그에서 순항했으나 레드냅은 파비오 카펠로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잉글랜드 국가대표 감독설이 나오면서 회장과 마찰을 빚었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추락하다가 간신히 4위를 했다. 그러나 6위 첼시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좌절되며 사임했다.
해리 레드냅 감독의 후임으로 아카데미카, 포르투, 첼시에서 감독직을 맡은 바 있는 안드레 빌라스보아스가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됐다. 공격적이고 라인을 끌어올리는 전술을 선호하는 빌라스보아스와 베일과 레넌, 워커, 데포 등 빠른 선수들이 즐비했던 토트넘은 궁합이 맞는 듯 보였다. 그러나 임기 1년 차에는 가레스 베일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 때문인지 스트라이커들이 부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2년 차엔 베일을 판매한 금액으로 7명을 데려왔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에릭센을 제외한 6명이 베일의 빈자리를 채우기는 커녕, 오히려 팀의 구멍이 됐다. 심지어 지난 시즌 주전 센터백이었던 베르통언의 부상으로 도슨과 키리케슈(+카불)가 센터백 듀오를 하는 일이 꽤 잦았는데, 올라간 라인 때문에 뒷공간이 계속해서 노출하면서, 리버풀이나 맨시티 같은 팀들에게 대패를 연거푸 당하고 시즌 중 결국 경질되었다. 래드넵이 로테이션 문제로 욕을 먹었다면, 빌라스보아스는 부족한 스쿼드에 지나친 자기 전술 고집으로 욕을 먹고 떠나게 되었다.
감독대행으로는 수석 코치였던 팀 셔우드가 선임됐는데, 이후 관뚜껑에 들어가 있던 아데바요르가 살아나는 신기함을 보였으며,[59] 솔다도는 여전했다. 하지만, 선수 기용 면에서 선수들과 불화가 있었으며, 빅 4에게 약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볼란치를 두지 않는 파격적인 전술을 감행했는데, 강팀을 상대로는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라이트백 카일 워커를 중미로 활용하는 등의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그리 효과적이진 못했다. 다만 해리 케인, 나빌 벤탈렙 등 재능 있는 유소년 선수들을 1군에 데뷔시킨 점은 칭찬받는다.
전체적으로 스피드에 있어서만큼은 프리미어 리그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팀이고 그러한 스피드를 잘 살리는 전술을 구사했었다.[60] 대표적으로 베일 - 데포 - 레넌의 빠른 삼각편대의 역습은 상대팀을 항상 긴장하게 하는 요소였다. 이러한 스타일은 가장 재미있고 다이내믹한 축구를 한다는 평을 받았다. 때문에 토트넘의 경기는 화끈한 공격력과 부족한 수비력이 어우러져, 이기든 지든 다른 팀들의 경기보다는 재밌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2013-14 시즌 가레스 베일의 이적 이후 이를 살리지 못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2.8. 2014년 이후


시즌이 끝나고 구단은 그를 경질하고 새로운 감독으로 사우스햄튼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를 선임했다.
2014-15 시즌 사우스햄튼 FC의 감독이었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의 부임 후 리그 5위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53실점 득실차 +5 라는 나쁜 수치를 보여주며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다음 시즌인 2015-16 시즌 사우샘프턴에서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준 수비수 토비 알더웨이럴트를 영입하여 같은 국적의 얀 베르통언과 리그 최고의 수비진을 형성하며 리그 최소 실점(35골)과 최고의 골 득실(+34)을 이뤘다. 실로 환골탈태. 유망주 센터백이었던 에릭 다이어의 포지션 변경도 신의 한 수. 중앙 미드필더 영입 없이 시즌을 시작할 때만 해도 팬들의 우려가 컸으나 다이어가 리그 베스트급 활약을 펼쳐 토트넘의 반등을 이끌었다. 토트넘은 시즌 막판까지 2위를 달리며 레스터 시티 FC와 우승 경쟁을 했지만 마지막 4경기에서 무너지며 결국 3위에 머물렀다.
포체티노 선임 이후 팀 분위기를 해치는 먹튀들기대만큼 활약하지 못한 주축들을 모조리 정리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 와중에도 타운젠드 등 몇몇 선수를 제외하곤 별 군말 없이 나간 걸 보며 그의 선수단 장악력이 꽤 대단한 것 같다는 게 팬들의 평. 실제로 포체티노가 감독을 맡은 두 시즌간 선수 방출로 벌어들인 이적료만 '''1억 파운드'''에 이른다. 같은 기간 영입 시장 지출은 7730만 파운드.
포체티노의 경력을 살펴보면 가는 곳마다 젊은 선수들을 육성하고 끈끈한 수비 조직력과 스쿼드 장악력을 뽐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베일 머니"를 값비싼 먹튀 영입에 모조리 써버렸으나, '홋스퍼 웨이'라는 최신 훈련시설을 막 마련한 토트넘 입장에선 한정된 자원으로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낼 수 있는 포체티노가 상당히 매력적인 카드였던 셈. 게다가 '''막장으로 유명한''' 토트넘의 수비력을 한 단계 높여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토트넘의 선택은 옳았다.[61] 선수 면면을 보자면, 델레 알리를 불과 5백만 파운드에 영입해 잉글랜드의 차세대 스타로 키워놨고,[62] 확고한 주전으로 자리 잡은 에릭 다이어 역시 4백만 파운드에 값싸게 데려와 그저 그런 수비수 유망주에서 확고한 주전 미드필더로 바꿔놨다. 어처구니 없는 실점 장면을 줄이고 리그 최소 실점 팀으로 올려놓은 건 덤. 여러 모로 포체티노를 선택하면서 팀 컬러가 많이, 열심히 뛰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는 15-16 시즌 챔스 진출과 최종 순위 3위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하지만 분명히 단점과 부족한 점은 존재한다. 일단, 포체티노의 전술적 역량은 탑 감독이라고 불리기는 부족하다.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교체로 분위기를 끊어먹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도 했다. 유스를 육성하고 선수들을 북돋는 '''매니저''' 역할은 월등하지만 적재적소에 뛰어난 전술을 적용하는 '''헤드 코치'''로서의 역할은 아직 모자란 모양.[63]
두 번째로는 지나치게 젊은 스쿼드. 2015-16 시즌 내내 많은 찬사를 받았던 다이어, 알리, 워커 등 젊은 선수들이 우승 실패가 확정되자 멘탈이 부서진 모습을 보여줬다. 많이 뛰고 열심히 뛰는게 팀 컬러랬더니 그걸 넘어서 상대편을 많이 패고 열심히 패는 모습까지 보여줘버렸다. 옐로카드 9개를 받으면서 EPL 신기록을 세운 36라운드 첼시전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결국 마지막 세 경기 동안 1승이라도 거두면 2위 확정인 상황에서 '''1무 2패'''를 거두며 라이벌 아스널에게 2위를 내줬다. 팀 내 베테랑이라고 할만한 선수가 없다는 것도 큰 단점인데, 주장인 위고 요리스는 GK라 필드 플레이어들을 조율하긴 힘들고, 부주장인 얀 베르통언은 부상으로 2개월이나 빠졌던 데다가, 그나마 고참인 무사 뎀벨레는 '''본인부터''' 분위기에 휩쓸려 버리는 모습을 보여줬다.[64][65] 이 문제는 어렸던 선수들이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해결되는 모양새다. 토트넘은 2018-19 시즌 기준으로 오히려 EPL 내에서 선수단 평균 연령이 상위권에 속한다.
세 번째는 신구장 건립 건이다. 세계구급으로 비싼 런던 땅값 덕분에 돈이 한두 푼 나가는 게 아니다. 영입 시장이 점점 과열되는 축구판에서 구장 건립 비용으로 돈이 나가면 그만큼 스쿼드 투자에 돈이 덜 들어간다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도 아래 나오는 NFL 유치와 나이키와의 새 유니폼 계약 체결, 그리고 나날이 높아지는 TV 중계권 수익 덕분에 큰 타격 없이 재정관리를 할 수 있다는 게 구단 측의 설명. 다른 건 몰라도 재정 문제에 관해선 '''갓레비'''를 외치는 팬들이다.
네 번째로 주급이 타 라이벌 팀에 비해 적은 편이어서, 팀의 주축 선수를 잃을 위험이 크다. 타 팀들보다 적은 주급 체계가 계속 된다면 많은 선수들이 빠져나갈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선수들을 지키고, 더 나아가 확고한 명문 강팀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급 체계에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해 보인다. 회장인 다니엘 레비가 THST[66]와의 미팅에서 서포터들에게 밝힌 바론, 토트넘은 EPL내에서 보너스를 가장 많이 지급하는 구단이라고 한다.# 즉 기본적인 주급은 다른 클럽에 비해 적지만 선수의 성적이나 경기력만큼 급료를 더 받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것. 이 때문에 선수들이 금전적인 문제로 클럽을 떠나려 하진 않는다고 밝혔다. 이로써 팬덤 내에서 팀 주급에 대한 논의는 어느정도 일단락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스퍼스 팬들은 차라리 보너스를 줄이고 주급을 올려주는 건 어떻겠냐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다행히 '''2018년 6월 8일, 팀 내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해리 케인이 보너스 포함 주급 30만 파운드[67]라는 거액으로 2024년 까지 계약을 연장했다!''' 이는 프리미어 리그 내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고액 주급으로, 로컬 보이 및 프랜차이즈 스타를 지키겠다는 다니엘 레비 회장의 굳은 의지가 보인다. 또한 최근 주전 수비수 토비 알데르베이럴트와의 재계약에도 성공하며 달라진 주급 체계를 예고한 다니엘 레비 회장이다.
마지막으로 우승컵 유무가 있다. 토트넘은 챔피언스 리그, 프리미어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려 본 적이 클럽 역사상 한번도 없으며, 유로파 및 1부 리그 또한 마지막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린지 40년이 넘어가는 수준이다. 심지어 가장 최근 우승 컵을 들어올린 기록이 무려 13년 전 칼링컵일 정도로 실적이 다른 EPL 라이벌 팀들에 비해 '''비교가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턱없이 부족하다.'''[68][69] 가장 우승에 근접해있던 2016-17 시즌 프리미어리그 2위, 2018-19 시즌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등 포체티노 부임 당시에는 리그를 대표하는 강호로 떠올랐으나 우승컵을 따내지는 못했다.
2019-20 시즌 초반 토트넘이 리그 중하위권에서 허덕이는 모습을 보이게 되자 구단은 2019년 11월 19일 (현지 기준) #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을 전격적으로 경질하고 바로 다음날 11월 20일 (현지 기준) 주제 무리뉴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무엇보다도 우승 청부사라 불리며 상당한 우승경력을 지닌 무리뉴 감독이 새롭게 취임하면서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가 관건이 되고 있다. 일단 취임 이후 2연속 승리를 거두면서 침체되었던 팀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끌어올리는 상황이 되기는 하였다. 결국 무리뉴 감독의 취임은 토트넘에서 우승을 바란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 토트넘의 행보가 주목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시즌 중간 부임한 무리뉴 감독의 전술을 그대로 입히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선수들의 부상도 여기저기서 시달리면서 토트넘의 19-20 시즌은 최근 몇시즌 동안 가장 최악의 순위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챔피언스 리그 직행도 실패하고, 유로파리그도 2차 예선에서 출발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20-21 시즌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유로파리그 플레이오프까지 모두 이기며 결국 유로파리그에 나갔다.
20-21 시즌 또한 초반에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것을 끝으로 변화 없는 뻔한 구식 전술로만 일관하는 무리뉴 감독의 축구 스타일로 인해 패배를 거듭하며 리그 순위로 유로파리그 티켓을 확보하는 것 조차 어려워진 상황에 놓여있다. 한때 리그 1위를 차지하며 무리뉴 2년차는 다르다! 라며 내심 리그 우승까지도 기대를 하기도 한 당시 토트넘 팬덤 및 축구 커뮤니티 상황과는 180도 달라진 상황. FA컵 탈락, 유럽 유수의 강팀이 잔뜩 포진해 치열한 경기가 예상되는 올시즌 유로파리그 수준 등의 상황을 고려할때 현재로선 리그컵 결승전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토트넘 핫스퍼의 상황이다.[70]

2.9. 역대 시즌




3. 스쿼드



3.1. 1군




3.2. 아카데미 (23세 이하)




4. 스태프


'''토트넘 홋스퍼 FC 2020-21 시즌 스태프'''
'''보드진'''
'''직책'''
'''국적'''
'''이름'''
'''영문이름'''
구단주
[image]
조 루이스
Joe Lewis
회장
[image]
다니엘 레비
Daniel Levy
재무 이사
[image]
매튜 콜레컷
Matthew Collecott
전무 이사
[image]
도나마리아 컬른
Donna-Maria Cullen
운영 이사
[image]
레베카 케이플혼
Rebecca Caplehorn
비상임 이사
[image]
키번 와츠
Kevan Watts
[image]
론 롭슨
Ron Robson
'''스태프'''
'''직책'''
'''국적'''
'''이름'''
'''영문이름'''
감독
[image]
주제 모리뉴
José Mourinho
수석 코치
[image]
주앙 사크라멘투
João Sacramento
1군 보조 코치
[image]
레들리 킹
Ledley King
골키퍼 코치
[image]
누노 산투스
Nuno Santos
피트니스 코치
[image]
카를로스 랄린
Carlos Lalín
테크니컬 코디네이터
[image]
슈테펜 프로인트
Steffen Freund
수석 스카우터
[image]
스티브 히첸
Steve Hitchen
전력분석관
[image]
조반니 체라
Giovanni Cerra
스포츠 과학자
[image]
샘 풀리
Sam Pooley
영양사
[image]
한나 셰리단
Hannah Sheridan
1군 팀 닥터
[image]
크리스토퍼 휴스
Christopher Hughes

5. 라이벌



5.1. 아스날 FC


[image]
'''토트넘 홋스퍼 FC
Tottenham Hotspur FC
'''
'''아스날 FC
Arsenal FC
'''
'''북런던 더비(North London Derby)'''
전통의 라이벌이며 이 두 구단의 시합은 '''북런던 더비'''라 불린다. 북런던 더비는 맨체스터 더비, 머지사이드 더비 와 같이 프리미어 리그를 대표하는 더비 매치 이며, 공격적이고 빠른 경기가 치러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기마 경찰이 출동하고 누가 이기던 상관없이 경기장 시설은 박살나는게 다반사다. 예전부터 유래가 깊은 더비였고, 최근 토트넘이 반등하고 아스날이 주춤하면서 그 열기가 더 뜨거워지고 있다.
먼 옛날 두 팀은 지역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러나 아스날의 연고지 이전으로 당시 토트넘의 구장인 노섬벌랜드 파크와 5km까지 거리를 좁히면서 악연이 시작되었다. 특히 1919년, 1부 리그 팀을 20개에서 22개로 늘리면서 당시 1부 최하위였던 토트넘과 2부 5위였던 아스날 중 한 팀만 1부에 참가해야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 때 아스날이 승격하며 토트넘이 강등당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악연 중 하나로 솔 캠벨과 관련된 일화가 유명하다. 솔 캠벨은 토트넘 유스 출신으로 줄곧 토트넘에서만 뛰었다. 주장까지 맡았던 핵심 선수였는데, 2001년 재계약을 미루었다. 이 때 ‘타 팀으로 이적하더라도 이탈리아나 맨유, 리버풀로 갈 것이다.’며 팬들을 안심시킨 뒤, 아스날로 이적하고 무패 우승의 주역이 되며 토트넘 서포터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다른 하나는 상술했던 라자냐 사건. 1995년 이후 토트넘은 11년동안 아스날보다 높은 순위인 적이 없었기에 특히 관심이 집중되었으나 좌절되고 만 것이었다. 아스날은 줄곧 ‘성 토터링엄의 날(St. Totteringham's day)’[71]을 기리며 토트넘을 조롱해왔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북런던 더비문서 참조.

5.2. 첼시 FC


[image]
[image]
'''토트넘 홋스퍼 FC
Tottenham Hotspur FC
'''
'''첼시 FC
Chelsea FC
'''
이들과의 악연은 특히 훌리건과 관계된 것으로 유명하다. 첼시의 훌리건은 신나치 보수파, 극우주의와 관련이 많았다. 이들 중 극성인 사람들은 히틀러를 찬양하며 인종청소를 선동하고 런던 내 유대인들에게 악감정을 가졌다. 유대인이 밀집한 지역을 연고로 하는 토트넘 역시 곱게 볼 리 없었으며, 이는 경기장 내까지 이어져 유대인을 비방하는 노래를 부르는 등 여러 악연을 쌓아갔다.
자세한 내용은 런던 더비 문서 참조.

6. 인물



6.1. 레전드


[image]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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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로마자 이름'''
'''국적'''
'''포지션'''
'''선수 활약 기간'''
'''경기'''
''''''
'''감독 활약 기간'''
'''비고'''
빌 니콜슨
Bill Nicholson
[image]
MF
1938-54
341
6
1958-74
[107]
빌 브라운
Bill Brown
[image]
GK
1959-66
262
0


피터 베이커
Peter Baker
[image]
DF
1953–65
342
3


론 헨리
Ron Henry
[image]
DF
1955-65
287
1


대니 블랜치플라워
Danny Blanchflower
[image]
MF
1954-63
382
21

[108]
모리스 노먼
Maurice Norman
[image]
MF
1955-65
411
19


데이브 매카이
Dave Mackay
[image]
MF
1959-68
318
51


클리프 존스
Cliff Jones
[image]
MF
1958-68
378
159


존 화이트
John White
[image]
FW
1959-64
183
40


바비 스미스
Bobby Smith
[image]
FW
1955-64
317
208


레스 알런
Les Allen
[image]
FW
1959-65
137
61


테리 다이슨
Terry Dyson
[image]
FW
1955-65
209
55


테리 메드윈
Terry Medwin
[image]
FW
1956-63
215
72


키스 버킨쇼
Keith Burkinshaw
[image]




1976-84
[109]
팻 제닝스
Pat Jennings
[image]
GK
1964-77
590
1

[110]
게리 마벗
Gary Mabbutt
[image]
DF
1982-98
611
38

[111]
앨런 멀러리
Alan Mullery
[image]
MF
1964-72
374
30


게리 리네커
Gary Lineker
[image]
FW
1989-92
106
67

[112]
마틴 피터스
Martin Peters
[image]
MF
1970-75
260
76


글렌 호들
Glenn Hoddle
[image]
MF
1975-87
490
110
2001-03

마틴 치버스
Martin Chivers
[image]
FW
1968-76
367
174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Ossie Ardiles
[image]
MF
1978-82, 1983-88
311
25
1993-94

리카르도 비야
Ricky Villa
[image]
MF
1978-83
179
25


클라이브 알런
Clive Allen
[image]
FW
1984-88
135
84
2007, 2008[113]

테디 셰링엄
Teddy Sheringham
[image]
FW
1992-97, 2001-03
277
125

[114]
다비드 지놀라
David Ginola
[image]
MF
1997-2000
127
22

[115]
폴 알런
Paul Allen
[image]
MF
1985-93
370
28

[116]
크리스 워들
Chris Waddle
[image]
MF
1985-89
173
42

[117]
대런 앤더튼
Darren Anderton
[image]
MF
1992-2004
358
48

[118]
슈테펜 프로인트
Steffen Freund
[image]
MF
1999-2003
131
0


필 빌
Phil Beal
[image]
DF
1963-75
420
1


랄프 코츠
Ralph Coates
[image]
MF
1971-77
248
23


존 프랫
John Pratt
[image]
MF
1969-80
415
49


마이크 잉글랜드
Mike England
[image]
DF
1966-75
397
19


앨런 길진
Alan Gilzean
[image]
FW
1964-74
439
133


레이 클레멘스
Ray Clemence
[image]
GK
1981-87
330
0
1992-93[119]

지미 디먹
Jimmy Dimmock
[image]
MF
1919-31
438
112


아더 그림스델
Arthur Grimsdell
[image]
MF
1912-27
360
27


윌리 홀
Willie Hall
[image]
FW
1932-39
222
29


테드 디치번
Ted Ditchburn
[image]
GK
1946-58
452
0


론 버지스
Ron Burgess
[image]
MF
1939-54
324
16


그레이엄 로버츠
Graham Roberts
[image]
DF
1980-86
287
35


폴 밀러
Paul Miller
[image]
DF
1979-87
285
10


스티브 페리맨
Steve Perryman
[image]
MF
1969-86
854[120]
39
1994[121]

지미 그리브스
Jimmy Greaves
[image]
FW
1961-70
379
266[122]



[image]
'''위대한 선수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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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로마자 이름'''
'''국적'''
'''포지션'''
'''선수 활약 기간'''
'''경기'''
''''''
'''감독 활약 기간'''
'''비고'''
비비언 우드워드
Vivian Woodward
[image]
FW
1901-09
197
63


스티브 아치벌드
Steve Archibald
[image]
MF
1919-21
24
1


패니 월든
Fanny Walden
[image]
MF
1913-24
237
24


태피 오캘러핸
Taffy O'Callaghan
[image]
FW
1927-35
263
99


존 캐머런
John Cameron
[image]
FW
1898-1907
293
139


토미 클레이
Tommy Clay
[image]
DF
1914-29
351
24


톰 모리스
Tom Morris
[image]
MF
1899-1912
523
3


빌리 민터
Billy Minter
[image]
FW
1908-1920
334
101


시릴 놀스
Cyril Knowles
[image]
DF
1964-75
506
17


위르겐 클린스만
Jürgen Klinsmann
[image]
FW
1994-95, 1997-98
68
38

[123]
크리스 휴튼
Chris Hughton
[image]
DF
1979-90
398
19


폴 개스코인
Paul Gascoigne
[image]
MF
1988-91
112
33

[124]
잭 줄
Jack Jull
[image]
DF
1882-94
159
24


바비 버클
Bobby Buckle
[image]
MF
1882-95
53
25


가스 크룩스
Garth Crooks
[image]
FW
1980-85
182
75




6.2. 기타 유명 선수들


'''이름'''
'''로마자 이름'''
'''국적'''
'''포지션'''
'''선수 활약 기간'''
'''경기'''
''''''
'''감독 활약 기간'''
'''비고'''
에런 레넌
Aaron Lennon
[image]
MF
2005-15
364
30

[73]
버트 스미스
Bert Smith
[image]
MF
1921-31
319
10


데이비드 하월스
David Howells
[image]
MF
1988-98
335
27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Dimitar Berbatov
[image]
FW
2006-08
102
46

[74]
에디 베일리
Eddie Baily
[image]
FW
1947-55
325
69


가레스 베일
Gareth Bale
[image]
MF
2007-13, 2020~
203
55

[75]
조지 헌트
George Hunt
[image]
FW
1930-37
198
138


해리 클라크
Harry Clarke
[image]
DF
1949-56
322
4


이안 워커
Ian Walker
[image]
GK
1991-2001
313
0


잭 커원
Jack Kirwan
[image]
MF
1899-1905
347
97


저메인 디포
Jermain Defoe
[image]
FW
2004-08, 2009-14
363
143

[76]
레들리 킹
Ledley King
[image]
DF
1999-2012
315
14


렌 듀크민
Len Duquemin
[image]
FW
1947-57
307
134


레스 베넷
Les Bennett
[image]
FW
1946-54
294
117


마이클 도슨
Michael Dawson
[image]
DF
2005-14
324
10

[77]
로비 킨
Robbie Keane
[image]
FW
2002-08, 2009-11
306
122

[78]
스티븐 카
Stephen Carr
[image]
DF
1993-2004
270
8

[79]
테리 네일러
Terry Naylor
[image]
DF
1970-80
301
4


해리 케인
Harry Kane
[image]
FW
2010~
295
205


위고 요리스
Hugo Lloris
[image]
GK
2012~
350
0


크리스티안 에릭센
Christian Eriksen
[image]
MF
2013-2020
305
69


손흥민
Son Heung-min
[image]
FW
2015~
236
101

[80]
이영표
Lee Young-Pyo
[image]
LWB
2005~2008
93
0

[81]

7. 인기


이전엔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번번히 실패하면서 눈에 띄는 행보가 적기에 큰 인기를 얻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챔스권을 위협하기에 충분한 팀이며, 빅4 팀들과 같은 큰 인기는 없었지만 다크호스 분위기를 내며 꾸준히 지지를 얻고 있었다. 가레스 베일, 로비킨, 반더바르트, 모드리치, 베르바토프 등 유명한 선수들이 소속되어 있던 점도 한 몫 했다.
그리고 포체티노 부임 이후 해리 케인, 델레 알리, 에릭센, 손흥민 등 탑클래스 선수들이 성장하면서 꾸준히 리그 상위권을 유지하고 챔피언스리그에 3시즌 연속 진출하면서 리그에서 인기 있는 팀 중 하나로 거듭났다.
2019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극적으로 진출하며 인지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무리뉴라는 명장을 선임하면서 리그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7.1. 한국에서의 인지도


'''토트넘을 국내에 알린 이영표'''
국내에서는 이영표 선수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활약했던 클럽으로도 유명했다. 이 시기 토트넘은 윙백을 많이 영입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기존 선수들이 어중간했기 때문이다. 그 중 이영표는 가장 안정감이 있었기에 이영표를 신뢰했던 마틴 욜 감독 체제에서는 선발 출전을 많이 하였지만, 이후 후안데 라모스 감독 체제에서는 정확한 크로스 및 공격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이는 오버래핑 이후 커버해주는 선수가 나빴기에 공격보다 수비 위주로 플레이하다보니 그렇게 보였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피지컬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수비에서 몸싸움에 고전한 경우도 많았다. 2007년 가레스 베일, 앨런 허튼 등의 윙백을 영입하며 이영표는 점점 전력외로 분류되었고, 2008년 8월 토트넘을 떠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하였다.
그러던 중 2015년 여름 이적 시장 막바지에 갑자기 '''손흥민'''의 토트넘 이적설이 나오면서 급격한 관심을 받았고, 8월 28일 금요일 오후 6시경(한국시간) 공식 오피셜이 발표되었다. # '''이적료 3000만(한화 408억 추정치) 유로를 기록하며 토트넘 홋스퍼로 (2020년까지) 5년 계약을 확정지었다.''' 손흥민의 이적료는 아시아 역대 최고이며, 당시 토트넘 역대 1위 기록이다. #
'''토트넘과 정식으로 5년 계약 사인을 하고 있는 손흥민'''
'''Heung-Min Son signs for Spurs!'''
'''2015.09.24 한글패치 설치 완료!'''[82][83]
대표팀 주장인 손흥민의 토트넘에 이적 이후 손흥민과 토트넘 구단 모두 성장하면서 한국에서 많은 라이트 팬들이 생겼고 그로인해 현재 한국에서 인기 있는 팀 중 하나로 꼽힌다. 해외축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손흥민은 대충 알기 때문에 토트넘 팬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축구 경기 국내 유튜브 조회수를 보면 타팀에 비해 토트넘이 압도적으로 많고, 네이버 스포츠 MY팀 응원수도 맨유, 리버풀을 제치고 토트넘이 3배 이상 많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선 토트넘 경기가 있을 때마다 손흥민 관련 기사들이 넘쳐난다. 다만 그에 비해 헤비 팬들의 숫자는 다른 빅클럽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며 축구 커뮤니티 사이트들에서도 경쟁 팀들의 팬들끼리 기싸움을 할 때도 토트넘은 언급되지 않고 묻히는 경우가 많다.[84]

7.2. 토트넘을 응원하는 유명인사


  • 고든 브라운 - 영국의 제 74대 총리.
  • 곽민선 - 대한민국의 프리랜서 아나운서.
  • 니키 와이어 - 영국 락의 거장.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의 베이시스트.
  • 대니얼 블룸버그 - 영국 출신의 가수, 스테이시 마틴의 현 남자친구. (2019년 기준)
  • 대니얼 머피 - 미국 출신의 야구 선수.[85]
  • 로이 킨 - 아일랜드 출신의 전 축구 선수이자 전 축구 감독.
  • 루퍼트 그린트 - 영국 출신의 배우.
  • 릴카 - 프랑스 출신의 유튜버이자 인터넷 방송인[86]
  • 마이클 매킨타이어 - 영국의 코미디언이자 TV쇼 진행자.
  • 마이클 키와누카 - 영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 마크 월버그 - 미국 출신의 영화배우.
  • 백예린 - 대한민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 셔누 - 몬스타엑스의 멤버.[87]
  • 스티브 내시 - 캐나다 출신의 NBA 농구선수.
  • 스티브 매퀸#s-2 - 영국 출신의 영화 감독.
  • 스테이시 마틴 - 프랑스 출신의 영화배우.
  • 샤니아 트웨인 - 캐나다 출신의 팝 아티스트.
  • 아델 - 영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토트넘 출신이다. 직접 경기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 알렉산더 맥퀸 - 영국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 이안 소프 -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2000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수영 선수.
  • 엠마 번튼 - 지금은 해체한 영국의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의 멤버.
  • 조니 버클랜드 -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 의 기타리스트.
  • 존 시나 - 미국 출신의 WWE 프로레슬러. 명예선수로도 위촉되었으며 등번호는 54번이다.
  • 조앤 K. 롤링 - 해리포터의 창시자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 조지 스미스 - 영국 출신의 밴드 뉴호프클럽의 멤버.
  • 주드 로 - 영국 출신의 배우.
  • 잭 에프론 - 미국 출신의 배우.
  • 제리 스프링거 - 영국 출신의 쇼호스트. 제리 스프링거쇼의 호스트.
  • 제시 제이 - 영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 제프 벡 - 영국 출신의 기타리스트.
  • 채닝 테이텀 - 미국 출신의 배우.
  • 코리 클루버 - 미국 출신의 야구선수.[88]
  • 케이트 모스 - 영국 출신의 패션 모델.
  • 켄드릭 라마 - 미국 출신의 래퍼.
  • 톰 하디 - 영국 출신의 배우.[89]
  • 톰 홀랜드 - 영국 출신의 영화 배우.
  • 피어스 브로스넌 - 아일랜드 출신의 영화배우.
  • 핀 밸러 - 아일랜드 출신의 WWE 프로레슬러.
  • 필 콜린스 -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 AJ 트레이시 - 영국 출신의 래퍼.
  • 박서준 - 한국의 유명 배우. 손세이셔널 방송에 나와 토트넘과 손흥민의 팬이란걸 말함(손흥민 친분이라 토트넘팬이라고 한 걸수도)

8. 여담


  • 타이트한 영입 전략
'EPL'하면 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중계권료를 통한 영입 경쟁으로, 거금을 사용하는 리그로 알고 있다. 실제로 EPL의 많은 구단들이 넷 스펜딩[90]에서 적자를 보는 구단이 많지만, 토트넘은 그렇지 않다. 토트넘은 스타급 선수들에게 다른 강팀 주전급 이하의 비교적 낮은 연봉을 지급하여 예산을 절약한다. 최근 다섯 시즌의 토트넘 홋스퍼의 넷 스펜딩을 본다면, 2011-12 시즌 £25.35m, 2012-13 시즌 £-4.1m, 2013-14 시즌 £10.51m, 2014-15 시즌 £0.55m, 2015-16 시즌 £12.44m의 이적료 흑자를 기록했다.[91] 이와 비교해서 강등권인 뉴캐슬이나 선덜랜드의 경우 각각 £-77.20m, £-49.54m를 기록했으며, 맨체스터 시티는 £50.74m 가치의 선수들을 팔고도 £-100.2m를 기록했다. 때문에 토트넘 팬들은 귀신같은 이적료 협상력을 보여주는 레비 회장에 대해서 혀를 내두를 때도 있지만, 이득에 급급한 나머지 느린 협상 기간, 이해할 수 없는 영입 등의 행태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한다. 특히 2018-19 시즌 여름과 겨울 이적시장을 합쳐 영입한 선수가 0명이었던 건 프리미어 리그 최초. 이것을 '0입'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회장 레비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러한 일의 주범은 조 루이스 구단주이다.
이로 인해 2016-17 시즌만 해도 EPL에서 가장 젊은 팀이었으나 현재는 결코 젊지 못한 팀이다. 4년이 흐른 지금, 그 시절 젊었던 선수들이 점점 나이가 들고 있으며 영입 역시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
[image]
  • 홋스퍼[92]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유일한 구단이다. 이에 대해서 토트넘 팬들은 "유나이티드, 시티, 로버스로 가득 찬 세상에 홋스퍼는 하나밖에 없다!"(In a world full of Uniteds, Citys and Rovers, there is only One Hotspur)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현지에선 보통 줄임말인 '스퍼스(Spurs)'라고 부르는데, 타팀팬들이 이를 발음이 비슷한 스퍼드(Spuds, 감자)라고 비하한다.
  • 한 때 위르겐 클린스만을 영입하기도 했지만 한 시즌 만에 다른 팀으로 가버렸다.[93] 그러나 그 한 시즌 동안 모든 대회를 통틀어 30골을 넣는 환상적인 활약을 했다. 클린스만은 이후 97/98시즌 도중 토트넘이 강등권에서 허덕일 때 구세주처럼 재이적, 팀을 구해냈다. 특히 강등권 팀간의 대결이었던 37라운드 AFC 윔블던과의 경기에서는 혼자 4골을 몰아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클린스만의 이름은 토트넘의 레전드로 팬들 사이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 2015-16 시즌에는 리그 내에서 가장 젊은 구단이 되었다.# 토트넘의 평균 나이는 24.7세이며, 리버풀의 25.5세, 뉴캐슬의 25.6세보다 어렸다. 유럽 상위 5개 리그에서 토트넘보다 어린 구단은 니스, 발렌시아 CF, 레버쿠젠뿐이었다.
  • 2016-17 시즌 토트넘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는 화이트 하트 레인이 아닌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이유는 신구장을 건설하기 위해 현재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의 북측 스탠드를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2017-18 시즌과 2018-19 시즌 중반까지는 모든 홈 경기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신구잔 개장 시기가 점점 늦어지며 2018-19 시즌 막바지인 4월 3일이 돼서야 개장됐다.
  • 금호타이어가 2016-17 시즌부터 2년간 토트넘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 2부리그에서 승격하자마자 바로 다음 시즌에 우승한 3팀중에 하나이다. 1950년에 승격하여 1951년에 우승을 하였다. 나머지 두팀은 리버풀과 입스위치다.
  • 2017-18 시즌 9R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프리미어 리그 한 경기 최다 관중(80,827명)을 기록하였다. 리그경기가 웸블리에서 열린 것은 이번 시즌이 처음이었고, 화이트 하트 레인때보다 두 배 이상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같은시즌 25R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81,978명으로 다시 한 번 경신하였다.
  • 팬들 사이에서 자조적으로 쓰이는 'spursy'라는 단어는 '중요한 때에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이라는 뜻이라고(...)#
  •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더 잃을게 없던 한국이 철전지 원수인 독일을 2-0으로 박살내 독일을 조별리그 광탈시키자 토트넘 트위터에 손흥민에게 엄청난 극찬을 보낸 사례도 있다.[94]
  • 토트넘 홋스퍼의 신구장의 교통은 정말... 세븐 시스터즈 역에서 내린뒤 약 30분을 홈팀 팬들과 걸어가야한다. 버스가 못다니는 수준이라 생각하면된다. [95] 경기가 끝난뒤 지하철을 타면 정말 한국의 9호선이 아닌지 구분이 안간다 더심할수도 있다. 물론 구장 근처에 오버그라운드가 다시는 화이트 하트 레인 역이 있긴 하지만, 경기 후에는 엄청난 대기시간을 자랑한다. 배차간격이 기준 15분에서 단축되는데도 그런 이유는 사람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약 15분 거리에 다른 기차역이 있긴 하지만, 거기도 사람이 많은건 매한가지(...). 그에반해 스탬포드 브릿지 런던 스타디움은 정말 깔끔한 교통을 보여준다.
  • 토트넘 홋스퍼의 연고지라 할 수 있는 토트넘 지역은 런던에서는 별로 치안이 좋지 못하고 이민자, 빈민, 건달 등이 많아서 직접 관람하러 갈 사람은 주의를 요한다. 토트넘이 속해 있는 헤링게이 구는 런던 소재 클럽 중 인기 구단들 중에 첼시 FC, 풀럼 FC의 연고지 같이 런던의 부촌에 해당하는 곳들이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가 소재한 스트랫퍼드는 물론이고[96], 토트넘의 이웃이라고 볼 수 있는 아스날 FC의 연고지인 이슬링턴에 비해서도 위험한 동네라는 게 중론이다. 크리스탈 팰리스 FC의 연고지인 크레이던 지역이랑 비슷한 수준으로 런던에서 손에 꼽히는 우범지대이므로 직관하러 런던을 방문할 팬이 있다면 가급적 경기 끝나고 구장 근처를 어슬렁거리거나 하는 일 없이 조심하는 것이 좋다.
  • 신기하게 팀내에 국가대표 주장이 많다. 현 소속 선수만 해도 해리 케인, 손흥민, 위고 요리스, 가레스 베일, 세르주 오리에 등이 주장을 맡고 있으며 전 소속 선수들인 빅터 완야마[97]크리스티안 에릭센[98] 등도 국가대표 주장이다.
  • 2020년 8월, All or Nothing: Tottenham Hotspur라는 제목의 토트넘 다큐멘터리 첫 에피소드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를 통해 공개되었다. 총 9부작으로 되어 있으며 내레이션은 영화배우 톰 하디가 맡았다.

8.1. 토트넘과 유대인


연고지인 토트넘이 유대인들의 밀집 지역인 것과 관련된 인연으로, 서포터는 이드(Yid)라 불린다. 런던 인근에는 많은 유대인이 살았는데, 특히 토트넘 근처에는 하시디즘을 추종하는 유대인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지역 사람들과 잘 동화되지 않았는데, 이는 반유대주의에 휘말리는 원인이기도 했다. 특히 첼시는 유달리 이에 대해 심한 적대감을 드러내곤 했다.[99] 1936년부터 첼시 서포터들이 '토트넘 녀석들을 나치에게 보내자'는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을 정도였는데 나치랑 영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이런 응원가도 당연히 중단되었다. 그리고, 위르겐 클린스만이 토트넘에서 활약할 1994-95 시즌에 당시 첼시 서포터들은 그를 지드(Yid) 위르겐이라고 비하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100] 하지만 더비전마다 여전히 반유대주의 운운하면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는 '''일부''' 팬들은 존재하는 모양이다.
토트넘 서포터들 역시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국기를 응원기로 사용하거나 팀의 승리 시 ‘이드’를 외치며 대응하였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일반 토트넘 팬들에게도 전해지며 유대인의 정체성이 퍼져나가 오늘에 이르렀다. 토트넘의 경기 시작 전 스타디움 주변에서 'Yid4ever(유대인이여 영원하라)'라는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현 회장인 다니엘 레비는 리바이라는 유태인계 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유태인이며 이영표가 회고하길, 회장이나 간부직에 유태인이 많으며 서포터에도 유태인이 많아서인지 다윗의 별같은 유태인 깃발을 많이 흔들었다고 한다.
2018-19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네덜란드 AFC 아약스와 맞붙었는데, 공교롭게도 아약스도 유태인 구단으로 유럽에서 이름이 알려져있다. 정작 아약스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유태인 구단도 아니고, 유태인이 주축디 왼 적도 없지만. 토트넘은 2차전에서 역대급 명승부 끝에 1차전 패배를 뒤집고 결승에 진출했다.

8.2. 챔피언스 리그와의 인연


토트넘의 챔피언스 리그 좌절 역사는 조금 불쌍할 정도이다. 2012-13 시즌 1점 차이로 5위의 성적으로 좌절된 것은 양반이다. 2011-12 시즌에 4위를 했지만, 6위인 첼시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는 바람에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는 한 리그에서 4팀만 챔피언스 리그에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101] 2005-06 시즌에는 최종전 38라운드에서 비기기만 해도 4위가 확정되는 경기에서 주전 중 대부분의 선수들이 호텔 음식을 잘못 먹고 식중독이 생기는 바람에 웨스트햄에 2:1로 패하여 5위의 성적으로 진출이 좌절된 사건도 있다.(소위 라자냐 사건)[102] 토트넘 측은 FA에 경기를 늦출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최종 라운드는 승부조작을 막기 위해 모든 경기가 동시에 치러져야 하기 때문이었다.[103]
2016-17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에서 3위를 하는 바람에 또 다시 유로파 리그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KAA 헨트에게 결국 밀려나서 32강에서 조기탈락했다. 그야말로 웸블리의 저주이다.
2018-19 시즌, 8강에서 손흥민의 맹활약에 힘입어 맨체스터 시티를 기적적으로 꺾고 4강에서도 아약스를 원정에서 루카스 모우라해트트릭으로 역전하면서 마침내 결승전에 진출하지만, 상대는 마찬가지로 4강에서 FC 바르셀로나를 대역전극으로 이기고 올라온 리버풀 FC였다. 경기는 결국 무사 시소코가 어이 없는 핸드볼 파울로 이른 시간에 PK를 내주었고 교체로 나온 기적형 공격수 디보크 오리기의 추가골에 무너지고 말았다. 여담으로 해당 결승전에서 박지성에 이어 챔피언스 리그 결승 무대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로 손흥민이 선발 출전하였다. 아쉽게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출전과 동시에 득점 및 우승 타이틀을 달게 되는 최초의 한국인 선수이자 아시아 선수가 되기에는 실패하였으나 아직까지 챔피언스 리그 결승 무대를 밟아 본 아시아 선수는 박지성손흥민 둘 뿐이다.
그래도 유로파 리그는 1971-72[104], 1983-84 시즌 우승 2회를 달성했다.

8.3. FM에서의 토트넘 홋스퍼


풋볼 매니저에서는 극악무도 사기스런 팀으로 악명이 높다.
08때는 감독만 후안데 라모스로 바꿔놓으면 언제나 빅4를 위협하며 최소 3-4위에 꾸준히 안착하며, 09때는 워낙에 토트넘 선수들 어빌들이 출중했고, 10때는 래드냅+모드리치 조합에 버틸수가 없다!
게다가 시리즈 마다 양민학살은 끔찍하게 잘한다. 기본 3-0, 4-0 나오는 상황. 2011 역시 2~4위권을 오가는 강팀. 리그 탑 클래스의 미드필더진은 충실히 구현된 반면 Thumb up 밖에 하지 못하는 공격진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것이 그 원인.(...)
라리가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더불어 실축에서 변방 소규모 클럽의 알짜 유망주는 죄다 쓸어가고, 토트넘이 꼭 영입해서 로스터로 수정된 FM상의 그 유망주들은 스탯 수정으로 어정쩡하게 나와 유망주 죄다 버리는 토트넘으로도 유명했다.[105] 게다가 소액으로 영입해서 살때는 4-500억 이상 찔러야만 파는 거상의 면모도.(...)
플레이시에는 시리즈마다 적당한 수준의 이적료를 지급하며, 시즌 목표를 유에파 진입으로 설정할 수 있기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잉여 자원을 방출하고 로테이션 멤버 및 주전 멤버 한두명 보강하면 우승권도 가능할 정도가 된다.
게다가 FM 14~15부터는 에릭 라멜라크리스티안 에릭센이 엄청난 고포텐을 받으면서[106] 실력 좋은 AI가 감독하면 챔스권을 위협할 만큼 강한 팀이 되기도 한다.
FM 16에서는 에릭 다이어델레 알리가 상향을 받았고, 나빌 벤탈렙도 전작에 이어 건재한 포텐을 자랑한다. 이를 바탕으로 적절한 전술과 해리 케인의 백업 공격수 정도만 영입만 충족하면 '빅 4 진입 + 미래의 구단 설계'는 쉬운 편. 워낙에 팀 평균 연령이 어려서 가능한 일이다.
다만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미드필더가 많아 주축을 중심으로 로테이션을 돌리거나 방출/임대 등으로 정리하는 등의 선택이 요구된다.
그런데 17에서 완전히 '''사기구단이 되었다!''' 유저가 해도 잘하고 컴터가 해도 잘하니 이뭔.(...)
하지만 FM 2021 에서는 무리뉴 감독은 수비적인 전술쓰는데 첫 시즌시 전술숙련도가 낮아서 수비가 제대로 되지 않고 실점이 빈번하며 무엇보다 공격시 역습 위주지만 선수들의 전체적인 속도가 애매하다보니 AI가 제대로 실제 축구처럼 굴리지 못하고 번번히 강등권에서 해매는데 플레이어가 맡으면 쉬운팀이 되는 아이러니한 팀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경기 운영 난이도"가 쉽다는 것이지 어빌 150을 넘는 선수가 노쇠화로 인해 전작들에 비해 많이 줄었고, 이적자금은 거의 없다시피 한 데다가 유로파 지역예선까지 치뤄야 해서 "구단 운영 난이도"는 역대 최악으로 손꼽힌다. 때문에 21로 처음 입문한 한국유저가 토트넘 핫스퍼를 플레이하면 엄청난 난이도에 벽을 느끼게 된다.
FM2019에서 현실 반영을 위해 대니 로즈를 팔려고 하지만 항상 남고 싶다고 찡찡거려 골머리를 쓴다 그럴때 임대를 보내고 1시즌 뒤에 팔면 된다. 뉴캐슬 등에서 오퍼가 오지만 135억대 대니 로즈나 레비회장이 허락 하지 않는다.

9. 유니폼




10. 응원가




11. 역대 이적료 Top 10


'''토트넘 홋스퍼 FC 역대 이적료 영입'''
'''시즌'''
'''이름'''
'''전 소속팀'''
'''포지션'''
'''국적'''
'''이적료'''
19/20
탕기 은돔벨레
올랭피크 리옹
MF
[image]
£55.45m
17/18
다빈손 산체스
AFC 아약스
DF
[image]
£42.00m
16/17
무사 시소코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MF
[image]
£29.75m
19/20
지오바니 로셀소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FW
[image]
£27.20m
19/20
스티븐 베르흐베인
PSV 아인트호벤
FW
[image]
£27.00m
13/14
로베르토 솔다도
발렌시아 CF
FW
[image]
£26.00m
13/14
에릭 라멜라
AS 로마
MF
[image]
£25.80m
17/18
루카스 모라
파리 생제르맹 FC
FW
[image]
£25.56m
15/16
손흥민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MF
[image]
£25.50m
20/21
세르히오 레길론
레알 마드리드 CF
DF
[image]
£25.00m
'''토트넘 홋스퍼 FC 역대 이적료 방출'''
'''시즌'''
'''이름'''
'''이적팀'''
'''포지션'''
'''국적'''
'''이적료'''
13/14
가레스 베일
레알 마드리드 CF
MF
[image]
'''£89.20m'''
17/18
카일 워커
맨체스터 시티 FC
DF
[image]
£54.00m
12/13
루카 모드리치
레알 마드리드 CF
MF
[image]
£33.00m
08/09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FW
[image]
£30.75m
06/07
마이클 캐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MF
[image]
£23.12m
08/09
로비 킨
리버풀 FC
FW
[image]
£20.00m
18/19
키어런 트리피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DF
[image]
£20.00m
16/17
나빌 벤탈렙
FC 샬케 04
MF
[image]
£19.00m
17/18
케빈 비머
스토크 시티 FC
DF
[image]
£18.00m
19/20
크리스티안 에릭센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MF
[image]
£17.00m

12. 같이보기




[1] 국립국어원의 어문 규범에 따르면 해당 구단의 올바른 표기는 '토트넘 홋스퍼'이다. #[2] /ˈtɒtᵊ.nəm ˈhɒt.spɜː/, '톳늠 홋스퍼'에 가깝게 발음한다. 미국식 발음으론 '타튼햄' 정도, 런던 억양인 Cockney 발음으로, '톳' 정도의 발음 + '늠' 또는 '넘'이다. 톳늠, 톳넘. '트' 발음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3]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와 축구기자, 축구 전문지, 축구팬들 또는 토트넘 팬들조차도 토트넘의 구단주를 대니얼 레비 회장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반쯤 틀린 것이다. 토트넘의 최대 주주는 스포츠 지주회사인 ENIC Group인데, 조 루이스는 ENIC Group 지분의 51%를 소유하여 토트넘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레비 회장은 토트넘의 대주주 중 한 명일 뿐 실질적인 구단주는 아니다. 한편 조 루이스 구단주의 재산은 51억 달러(2018년 포브스 추산)로 프리미어 리그 구단주 중 맨체스터 시티 FC의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 구단주, 첼시 FC의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에 이어 3번째로 재산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 정작 이 많은 재산을 구단재정에 지원하지 않을 뿐더러 챔피언스 결승에 갔는데도 돈을 딱히 안풀었다. 거의 방치수준 레비가 짠돌이 이미지로 굳혀진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건 구단주가 구단재정에 지원을 안해주는게 가장 큰 문제로 지목될 정도이다.[4] 3주장은 토비 알데르베이럴트, 4주장은 에릭 다이어이다.[5] 영어와 한글 서비스 중이다.[6] 토트넘 핫스퍼의 한 한국 팬이 2020년 11월 30일 오픈한 커뮤니티 사이트이다.[7] 영국 클럽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8] 초대 우승.[9] 한화로 약 957억 원.[10] 한화로 약 1477억 원.[11] 한화로 약 162억 원.1100만 파운드는 기본금이고 여기에 400만 파운드의 추가 옵션 이적료가 있다.[12] 1971-72 시즌.[13] '''더''' 스퍼스가 아니다. 그냥 스퍼스. 맨유를 부를 때 '''더''' 유나이티드라고 안하고 그냥 유나이티드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14] 이전 경기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이 철거되고 새로운 경기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2017-18 시즌부터 2018-19 시즌 중반까지 웸블리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했었다.[15] 리버풀, 맨유, 아스날, 첼시, '''토트넘''', 에버튼[16] 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KBS 월드컵 중계에서 사용한 표기다.[17] 관련 내용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18] 이런 이유로 인해 많은 수의 현지 팬들은 아스날을 "울리치 FC"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북런던 원조가 아니라 "굴러온 돌"이라는 비아냥.[19] 20세기의 토트넘은 이 우승컵을 시작으로 세 차례를 빼고 1로 끝나는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는 좋은 징크스가 있었다. 1901, 1921, 1961, 1981, 1991년 FA컵 우승, 1971년 리그컵 우승, 1951, 1961년 리그 우승을 거뒀다.[20] 당초에는 거부되었으나 스토크 시티가 재정문제로 인해 풋볼리그에서 탈퇴하면서 새로운 멤버로 참가하게 됐다.[21] 전쟁이 없었다면 1915/16 시즌에는 디비전 2로 강등되는 상황이었다.[22] 공교롭게도 아스날은 이 시즌 이후 지금까지 100년이 넘게 1부리그에서 강등되지 않고 있다.[23] 아스날의 헨리 노리스 구단주는 토트넘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런던의 울위치에서 북런던의 하이버리 지역으로 홈구장을 이전한데 이어 잉글랜드축구협회 관계자들에게 아스날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로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아스날에 대한 토트넘의 증오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24] 4위였던 더비 카운티와 21위 토트넘의 승점차는 겨우 6점일 정도로 혼전이었다. 시즌 전 토트넘의 공격수 지미 시드가 셰필드 웬즈데이로 이적했는데 얄궂게도 웬즈데이는 강등이 유력하다가 막판의 대상승세로 잔류에 성공했고 다음 두 시즌은 웬즈데이가 우승했다.[25] 블랜치플라워의 등장으로 알프 램지는 선수에서 은퇴하고 입스위치 타운의 감독이 되었고, 훗날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서 잉글랜드 감독으로 조국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26] 우승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토트넘에 승점 8점이 앞섰다.[27] 유럽 5대리그로 넓혀도 2018/19 시즌 파리 생제르맹이 개막 15연승을 달성할 때까지 58년 간 5대리그 최고기록으로 남아있었다.[28] 개막 16경기에서 15승1무였는데 이 기록은 맨체스터 시티가 2017/18 시즌 17경기 16승 1무로 경신했다.[29] 이는 2020년 현재까지 토트넘의 마지막 리그 우승이다.[30] 2010/11 시즌 전까지 토트넘의 유일한 유로피언컵(현재는 챔피언스리그) 참가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또한 2018/19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 전까지 최고기록이다.[31] 이는 니콜슨이 스스로 사임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리버풀의 케니 달글리시힐즈버러 참사 이후 얼마 뒤에 사임한 것과 비슷하다.[32] 닐은 아스날에서 1983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하며 FA컵 우승 1번, FA컵 준우승 2번, UEFA컵 위너스컵 준우승 1번을 기록했다. 현재는 스포츠 바를 열고 아스날 구단 TV에서 논평하는 등 평범한 현지 구너로 살아가고 있다.[33] 시즌 초반 신인 콜린 리의 4골에 힘입어 홈에서 브리스톨 로버스를 9-0으로 꺾은 것이 유리한골득실 확보에 도움이 됐다.[34] 영국&아일랜드 출신이 아닌 선수를 보는 것은 당시에는 극히 드물었다.[35] 1차전 토트넘의 2-0 승, 2차전 프랑크푸르트 2-1 승이었는데 차범근이 토트넘을 상대로 합계 2-2로 만드는 득점을 했다. 하지만 글렌 호들이 종료 10분을 남기고 8강을 결정짓는 골을 기록했다.[36] 이후 유럽대항전 결승에 오르기까지 35년이나 걸렸다.[37] 애버딘 FC의 SPL 우승을 이끌었던 알렉스 퍼거슨에게 감독직을 제의하기도 했다고 한다.[38] 당시에는 토트넘이 최초로 8번째 FA컵을 들어올린 팀이었다.(1996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경신) 그리고 현재까지 토트넘의 마지막 FA컵 우승이자 FA컵 결승전으로 남아있다.[39] 무릎 부상 전 그의 몸값은 790만 파운드였다.[40] 2016-17 시즌 전까지 아스날보다 순위가 높았던 마지막 시즌이었다.[41] 맨유에서의 두 번째 시즌에 셰링엄은 맨유의 트레블에 기여했다.[42] 그레이엄의 아스날 시절을 묘사하는 말이 "Boring Boring Arsenal"이다. 영국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뻥축구과 질식수비를 구사하던 팀이었다.[43] 2007년까지는 슈가 전 회장도 토트넘의 지분 일부를 유지했다.[44] 역대 토트넘 감독 중 최단 재임기간이다.[45] 9위였지만 7위 미들즈브러와 승점차 3점, 4위 에버튼과의 승점차는 9점으로 이전의 시즌들에 비하면 매우 선방한 시즌이었다.[46] 1년 후 완전이적[47] 이는 수비의 핵심 레들리 킹이 유리몸이었던 것과 마이클 캐릭의 이적이 컸다. 이 문제는 윌슨 팔라시오스가 2009년 1월 위건에서 영입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다.[48] 우승팀 세비야에 탈락[49] 아스날에 2차전 연장전 돌입 끝에 탈락[50] 첼시에 재경기 끝에 탈락[51] 이마저도 UEFA컵 32강 페예노르트전이 페예노르트 훌리건 문제로 부전승해서 2경기를 아낄 수 있었다.[52] 평소에 유럽대항전과 거리가 멀었던 팀이 갑자기 유럽대항전을 치를 경우 많아진 일정으로 인한 엄청난 체력소모로 리그 순위가 갑자기 추락하고 심지어 강등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다.[53] 2년 연속으로 유럽대항전에 진출한 것도 1985년 이후 처음이었다.[54] 다니엘 레비 구단주는 4강 진출 실패에 적잖은 실망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55] 사실 여름이적시장에서부터 욜 감독이 원했던 영입은 없다시피 했고, 코몰리 단장의 입김이 강했다. 토트넘의 문제점은 수비였는데 EPL에서 검증이 되지 않은 젊은 카불을 데려오고 엉뚱하게 안그래도 공격수가 많았는데도 중복자원인 벤트를 데려왔다.[56] 시즌 전부터 접촉이 있었다.[57] 2020년 현재까지 토트넘의 마지막 트로피이다.[58] 2008년 1월 포츠머스로 이적했으나 다시 영입했다.[59] 빌라스보아스와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다. 선수 본인도 멘탈갑으로 유명하고.[60] 카일 워커의 이적 이후 이런 특징이 줄었다.[61] 특히 토트넘의 1순위 옵션이었던 '''루이 판할'''을 맨유한테 뺏기고 차선책으로 택한 게 포체티노였던지라, 팬들 입장에선 말 그대로 새옹지마.[62] 실제로 델레 알리의 응원가 가사 중 "He is only cost '''5 mil''', he is better than Ozil(그는 500만 파운드밖에 안 하는데 메수트 외질보다 잘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63] 사실 젊은 감독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기란 어렵다.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팀을 지휘하는 능력은 어느 정도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64] 코스타의 눈을 찌르는 것처럼 보였다.[65] 그나마 뎀벨레가 고참이라고 해 봤자 겨우 30세이다! 이 정도면 토트넘 스쿼드가 얼마나 젊은지 알 수 있다.[66] Tottenham Hotspur Supporters' Trust[67] 기본급 20만 파운드+보너스 10만 파운드로 추정.[68] 당장 레스터시티만 해도 프리미어리그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BIG 6로 불리는 상위권 빅클럽들 중에서 "유일하게" 프리미어리그 우승 기록이 없는 클럽이다.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클럽은 있으나 당장 21세기 기준 21년 동안 들어올린 트로피가 토트넘 핫스퍼는 딱 한개다. 타 BIG 6 클럽 들은 같은 기간 동안 14개~23개에 육박하는 트로피들을 들어올렸다.[69] 이러한 비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의 트로피 갯수로 인해 토트넘을 두고 셀링 클럽에서 빅클럽을 위협할 수 있는 강팀 정도로 진화했을 뿐이지 아직 BIG 6 클럽과 같은 범주에 있는 빅클럽으로 두기에는 무리라고 주장하는 축구팬들 및 해외 칼럼리스트들이 여전히 꽤나 존재한다.[70] 여담으로 토트넘 핫스퍼의 가장 최근 우승 기록이 13년전의 리그컵(당시 칼링컵)이다. 이번 리그컵을 우승하면 13년간의 무관을 똑같은 리그컵으로 극복하는 셈.[71] 남은 경기와 상관 없이 아스날이 토트넘보다 높은 순위인 것이 확정되는 날.[72] 구단의 홈페이지 리뉴얼 전 'GREAT PLAYERS' 항목에 있던 선수들 중, 명예의 전당에 등재된 이들을 제외하고 적는다. 출처[73] 2008-09 시즌 서포터 선정 올해의 선수.[74] 2006-07 시즌 서포터 선정 올해의 선수.[75] 2012-13 시즌 서포터 선정 올해의 선수.[76] 2004년 서포터 선정 올해의 선수.[77] 2009-10 시즌 서포터 선정 올해의 선수.[78] 2003년, 2005-06 시즌, 2007-08 시즌 서포터 선정 올해의 선수[79] 1999년, 2000년 서포터 선정 올해의 선수.[80] 2018-2019, 2019-2020 토트넘 홋스퍼 올해의 선수.[81] 토트넘 풋볼 리그 컵: 2007-08 우승 라인업.[82] 모바일로는 들어가지지 않았다가 24일 저녁부터 들어가지기 시작했다.[83] 다만 아직 완전히 한글화되진 않았다. 짤막한 소식을 알려주는 수준이다.[84] 박지성이 맨유로 이적했던 2000년대 중반 때와는 달리 손흥민이 토트넘으로 이적한 2015년엔 이미 한국에서 해외축구 팬덤이 완전히 자리잡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85] 토트넘 홈 구장에도 매년 방문하며, 올스타에 뽑히자 구단이 축하해주기도 했다.[86] https://www.youtube.com/channel/UC48NSSfUBsmL0k0wKxSqRkw[87]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에서 언급했는데 MK 던스에서 갈아탔다고 고백했다.[88] 토트넘이 미국으로 프리시즌을 치르고 있을 때 팀 동료인 얀 고메스와 함께 토트넘 선수들을 만나 토트넘의 팬이라는 것을 밝혔다. 프리시즌에 대니얼 머피와 토트넘 이야기를 꽤 하는 것 같다.[89] 토트넘의 서포터이며, 토트넘 다큐멘터리 의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90] Net spending, 이적료 수입-이적료 지출의 값을 말한다.[91] 특히 2015-16 시즌 넷 스펜딩에서 이득을 본 구단은 토트넘이 유일하다.[92]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헨리 4세의 극중 인물인 '해리 홋스퍼'에서 유래됐다. 뜻은 무모한 사람, 성급한 사람이다.[93] 클린스만이 저니맨인 점도 있다.[94] 물론 토트넘 뿐만 아니라, 모든 영국 축구팬들도 함께 독일의 광탈을 아주 통쾌하고 있다.[95] 평시에는 구장 앞까지 버스가 다니지만 경기때에는 주변 도로를 통제하기 때문이다.[96] 사실 스트랫퍼드가 속한 뉴엄 구 자체는 헤링게이보다 전체적으론 치안이 더 나쁘다. 그래도 스트랫퍼드 쪽은 말끔하게 재개발해서, 경기장에만 들렀다 갈 거라면 위험하지 않다.[97] 앵팍트 드 몽레알로 이적.[98] 인터밀란으로 이적.[99] 첼시는 런던에서도 이름난 부촌이라 영국 특유의 계급문화 + 인종차별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100] 아이러니하게도 2003년 첼시는 유대계 부자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인수되어, 되레 토트넘 서포터들에게 '이젠 너희들이야말로 진정한 지드 첼시가 되었다'며 놀림을 받았다. 그리고 첼시는 2007-08 시즌에 이스라엘 유태인 감독인 아브람 그랜트가 감독을 맡았으며, 2010년부터 2013년까지는 요시 베나윤이 있었으니(단 부상등의 이유로 크게 활약한적은 없다.) 더 비웃음을 당했다.(...)[101] 이는 지금은 규정이 바뀌어서, 한 리그에서 최대 5팀까지 챔스에 진출할 수 있다. 즉, 지금 규정대로라면 토트넘은 챔스에 나갈 수 있었다. [102] 그 날 토트넘이 머무르던 호텔의 요리사가 아스날 팬이라는 이야기가 있다.[103] 하지만 2015-16 시즌의 경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본머스의 경기 시작 전 폭발물로 의심되는 물체가 경기장에서 발견돼 부득이하게 연기됐다.[104] '''초대 우승'''이다![105] 지오반니 도스 산토스가 대표적 예, -10포텐짜리가 토트넘을 가자 개너프가.(...)[106] 크리스티안 에릭센, 에릭 라멜라 모두 '''유망주 시절에 -9포텐을 받았던''' 선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