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기동 목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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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도기동 목책성의 북쪽 구간 전경. 사진 우측이 안성천이 흐르고 있는 북쪽이다.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536호'''
'''안성 도기동 산성'''
安城 道基洞 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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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기도 안성시 미양로 866 (도기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169,475㎡
'''지정연도'''
2016년 10월 24일
'''제작시기'''
삼국시대[12]
'''위치'''


1. 개요
2. 상세
3. 관련 유적
4. 바깥고리
5. 사적 제536호
6. 관련 문서


1. 개요


경기도 안성시 도기동에 위치하는 백제-고구려의 '''목책 산성'''. 사적 제536호. 사적 등록 명칭은 '안성 도기동 산성'.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략 및 일련의 남진 과정을 보여주는 관방 유적이다. 백제의 목책성 축조와 475년을 기한 목책성의 함락, 고구려의 재사용의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2. 상세


돌이나 흙으로 쌓은 일반적인 산성이 아니기 때문에 최근에 들어서야 확인된 유적이다. 그 이전에는 유적이 있으리라 추정된다는 의미의 유물 산포지였으며, 기남문화재연구원의 2015년 발굴 이전에 산성 주변에서의 몇번의 발굴에서 목책이 일부 확인되는 성과가 있었음에도 발굴 범위가 협소했던 터라 그 정확한 전모를 알 수 없었다. 특히 기남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 이전(2014년)에 이루어진 주택신축부지 발굴[1]과 동시기에 기남문화재연구원의 발굴부지에 연접하여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창고부지 조사[2]에서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성곽의 일부임이 확인되지 않거나(겨레), 성곽유적이 아닌 단순 석축열로 확인되는(세종대 박물관) 등 유적의 정체가 이전까지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도기동 산 51-3과 53번지를 개발하였던 업주의 추가 창고부지 개발로 인해 도기동 산성이 소재한 북쪽 능선의 비교적 넓은 범위가 발굴될 수 있었고, 이 유적이 백제에 의해서 초축되었다가 고구려에 의해서 함락한 목책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한지역에서 고구려 관련 유적이라면 동북공정 때문에도 그렇고 더욱 기민하게 반응하듯, 도기동 목책성의 존재가 매스컴에 보도된 2015년 이후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사적으로 등록되었다. 다른 유적들이 기본적으로 1년 이상씩 걸리는 것에 비하면 매우 빠른 사적 지정인 셈.
성의 구조는 말그대로 목책에 의해서 성벽을 구성한 목책성이다. 일반적인 미디어에서 접하는 나무만 꽂혀있는 목책성은 아니고 "목책도니성"이라고 하여 목책을 먼저 세우고 진흙을 발라 보강한 것이다. 표현이 생소할뿐 목책을 구성하는 목재가 가연재(可燃材)임을 생각하면 진흙으로 목책을 한번 발라서 화재, 화시(火矢)에 대비하는 것은 당시에는 당연한 방식의 축조법이기도 하다. 다만 목책 아래의 부분만 남은 것이기 때문에 도기동 목책성에서 확인된 토괴와 토낭이 단순 성토재의 흔적인지 도니의 기법의 흔적인지는 완전히 모식도로써 그려낼 정도로 정확하지는 않다.
유적은 크게 2개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백제에 의해서 초축된 부분과 고구려에 의해서 점령되면서 재축조(또는 보강)한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제가 초축한 부분은 비교적 작은 목책공과 토루만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백제토기들이 다수 확인되었기 때문에 백제에 의해서 초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목책이 설치되는 기저부에서 굴착과 성토의 방식[3]이 다른 백제의 토성에서 보이는 계단식 굴착 후 다시 사질토와 사질점토를 번갈아가며 다져 놓은 양상과 동일하기 때문에 도기동 목책성의 초축이 백제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고구려 남진 이전의 즉, 475년의 도기동 목책성의 유적을 살펴보면 도기동 일대가 당대 권역 내의 작은 중심지로써 기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도기동 산성의 남쪽 아래에는 4~5세기대의 백제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 위계도 지역 내 상위층의 분묘에 해당하는 것이다. 조금 더 멀리 수 km 내에도 많은 백제 유적들이 존재하며 유적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안성 도기동 일대는 안성천을 중심으로 일종의 권역을 형성하였을 백제의 작은 도시들 중 하나이며, 그 중심지가 바로 이 유적이 위치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고구려의 남진으로 백제 유적의 축조는 중단된다.
고구려에 의해서 점령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에 의해서 축조된 목책이 백제의 목책을 파괴하고 새로이 만든 흔적도 확인되기 때문이다.[4] 뿐만 아니라 유적에서 고구려 목책의 흔적이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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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동 목책성 내 고구려 축조 구간
고구려의 목책은 고구려만의 특징적인 요소가 있는데, 방형으로 크게 굴착한 후 목주를 박아 넣는 구조이다. 방형으로 크게 굴착한 그 흔적이 사람 한명이 쭈구리고 앉으면 뭍을 수 있을 정도로 큰 편이다. 또 통상 2열의 구조로 구축되어 사실상 이중구조의 목책을 형성한다. 바깥쪽에 있는 목책에는 기둥에 돌과 점토로 기둥 사이로 형성되는 목책벽을 보강하는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특히, 고구려는 성곽을 운용함에 있어 치(雉)를 굉장히 많이 활용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치의 흔적은 비단 석축성곽 뿐만아니라 목책성에서도 확인이 되는 부분이다. 안성 도기동 목책성에서도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특징을 갖는 목책성이 고스란히 확인되었다.
475년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된 관방시설들은 몇가지 특징으로써 구분되고 유형화된다. 간단히 정리하면 첫번째는 소규모 목책의 설치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나중에 다시 석축 보루로써 보강한다는 것이다. 다른 세번째 특징으로는 규모와 상관없이 백제의 목책성을 점령하여 다시 목책성을 보강, 재구축하는 것이 있다. 세번째 유형의 경우, 점령지역의 방어시설을 활용하는 것이다보니 유적이 비교적 큰 경우가 많다.
안성 도기동 목책성은 세번째 특징을 갖는 고구려 목책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같은 양상이 나타나는 곳으로는 연기 남성골 산성[5], 대전 월평동 산성이 있다. 공통적인 특징은 말했듯이 백제 목책을 파괴하고 형성되는 특징을 가지며[6], 모두 한강 이남에 위치하고, 또 도피하여 새로이 천도한 웅진(공주시) 방향으로 서울에서부터 직선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번째 유형의 목책성들은 한성 공략을 위해 축조되는 것으로써 백제군의 격파를 위한 전략 전술적 차원에서 형성된다면, 세번째 유형의 재점령, 재축조는 와해된 백제를 추노하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이후 고구려는 웅진성에 당도하여서는 문주왕과 함께 돌아온 신라군에 막혔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7] 도기동 목책성이나 월평동, 남성골 산성들은 이후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에 즈음하여 고구려의 대 신라 방어기지로써 어느 정도 활용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를 즈음하여 폐기되고 이전에 형성되었던 한강 이북의 고구려 목책성들은 대부분 석축성으로 보강되어 대 신라전의 방어기지로 재활용된다.

3. 관련 유적


남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은 산성과 고분군으로 나뉜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 유적에 대한 인식은 남한엔 거의 없다고[8] 보았었으나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그 알려지게 되었다. 남한 내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의 편년은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반경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역사적 맥락으로도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9]
  • '475년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된 성곽 유적
    1. 임진강·한탄강 유역 고구려 보루군
    2. 양주분지 고구려 보루군
    3. 아차산 일대 보루군
    4. 한강 이남 고구려 점령 성곽
      • 서울 몽촌토성
      • 안성 도기동 목책 유적
      • 대전광역시 월평동 산성
      • 청원 남성골 산성
      • 진천 대모산성 [10]
      • 충주 장미산성 [11]

4. 바깥고리



5. 사적 제536호


안성천과 잇닿은 나지막한 구릉지에 지형을 따라 축조한 안성 도기동 산성은 2015년 9월 창고를 짓기 위해 발굴조사를 하다가 삼국시대 목책성이 확인되어 긴급 보호를 위한 중요문화재(사적) 가지정(‘15.12.2) 이후,사적으로 지정하였다.

그 구조와 출토유물로 볼 때 4~6세기 사이에 백제가 축조했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고구려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활용한 목책성이 경기 남부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됨에 따라 진천 대모산성(충북 기념물 제83호), 세종 부강 남성골산성(세종 기념물 제9호) 등 기존의 고구려 관련 유적과 연계하여 한강이남 지역에서의 고구려 영역확장과 남진 경로를 살펴 볼 수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또한 목책구조가 잘 남아 있는 드문 사례로 삼국시대 책(柵)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어 고대 성곽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로 주목된다.

발굴조사 결과 목책성 외에도 세발토기(삼족기), 굽다리접시(고배), 시루 등 백제 한성도읍기의 토기를 비롯하여 뚜껑, 손잡이 달린 항아리(파수부 호), 짧은 목 항아리(단경호), 사발(완) 등의 고구려 토기와 컵 모양의 가야계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6. 관련 문서



[1] 도기동 436-1번지 주택신축부지(겨레문화유산연구원/2014)[2] 도기동 산51-3 건물신축부지, 도기동 산52번지 창고신축부지(세종대학교 박물관/2015)[3] 특히 군사적 방어의 목적이기 때문에 견고해야 하므로 성(城)과 같은 관방유적에서는 정지(整地)작업은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목책의 축조 방식 뿐만아니라 토루를 구축하는 방식, 토루의 기저부를 보강하는 방식, 절개면을 다시 매우는 방식 유적에서 고루 나타나며, 목책성을 이해하고 판별하는 데에 주요한 근거가 된다.[4] 백제 목책 유구 위에 중첩되어 고구려 목책 흔적이 있는 경우를 뜻한다. 층위적으로 밑에 있는 것이 먼저 생긴 것이고 후대의 흔적이 그 위로 생기기 때문이다.[5] 과거 연기군, 지금은 세종 남성골 산성이라고도 한다. 관용적으로 연기 남성골이라는 표현이 많아서 이를 우선 서술한다.[6] 다만 남성골 산성은 완전히 중첩하여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고 바로 맞은 편에 백제산성을 무력화 시키고 생기는 것으로 추정된다.[7] 문헌에서도 모순되는 기록이 있어서 이 시점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백제가 패퇴한게 언제고 고구려는 완전 일시적으로 왔다만 간거고, 아니면 특정 기록이 틀렸다거나 등등.[8] 단 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고구려 계통의 적석총으로 보기만 했지 백제의적석총으로 판단하였었다.[9] 참고로 강원도 일대, 특히 춘천을 중심으로 고구려 석실들이 꾀나 자리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이미 점령한 것 내지는 고구려에 속한 말갈이나 맥(...)의 일파가 아닌가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구려의 5세기 남진정책과는 다소 무관한 유적.[10] 축조와 점령의 주체에 대해서도 고, 백, 신 모두가 거론되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도 대모산성에는 치 시설이있어 고구려라고도 하지만... 수 킬로 둘레를 갖는 큰 성벽에 치는 딱 1개 애매하게 있을 뿐이다.[11] 축조와 점령의 주체에 대해서도 고, 백, 신 모두가 거론되고 있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