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일대 보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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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일대 보루군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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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광진구·중랑구·노원구 및 경기도 구리시 일대에 걸쳐서 분포하고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보루군(堡壘群). 사적 제455호. 아차산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어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임진강·한탄강 유역 고구려 보루군에서 양주분지 보루군을 거쳐 점진적으로 내려와 최종적으로 축조되는 보루군이다. 고구려는 일찍이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의 북변에 비교적 큰 보루들을 선점하면서 대 백제 전선을 남하시키는 데 성공한 것을 바탕으로 한강 유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아차산 일대의 보루들 중에서는 관청에만 사용되는 와당이 확인되고 있어서 다른 지역에서는 대형성곽이 수행하였을 행정적 치소 역할을 했던 것을 대신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1000년 후 한국군마저 이곳에(아차산 4보루 지역) 유적이 있는지 모르고 참호를 건설했다는 것. 세월이 흘러도 전략적 요충지임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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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의 추정복원도.
홍련봉 1·2보루와 아차산 1~5보루, 용마산 1~7보루, 시루봉보루, 수락산보루, 망우산보루, 봉화산 보루가 해당한다. 대부분 산 정상부의 척릉(脊陵)을 따라서 배치되어 있다.
가장 이른 발굴은 80년대로 구의동 1보루와 2보루가 조사되었으나 택지개발로 인해서 파괴되었다.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의 본격적인 발굴은 9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에서는 홍련봉 1, 2보루와 아차산 3, 4보루, 용마산 1, 2보루, 시루봉 보루가 발굴조사되었다.[1]
고구려의 남진 과정을 살펴보면, 임진강·한탄강에서 대백제전선이 확보되었고, 이후 5세기 중후반 어느 시점부터 '''목책(木柵)'''을 활용하여 여러개의 보루를 구축하여 거점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남진해 나갔고 양주 분지 일대를 점령한 뒤에는 아차산 권역으로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아차산에서도 마찬가지로 목축으로 먼저 거점을 확보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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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봉 1보루의 전경. 아래쪽의 목책의 흔적을 통해서 목책성에서 석축성으로 개조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해당 권역에 대한 일정한 통제력을 확보한 뒤에는 목책을 폐기하고 '''석축(石築)'''으로 전환하여 방어력을 보강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목책을 일부 활용하여 그대로 남겨두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석축으로의 전환시기는 6세기경으로 고구려의 남진 과정 중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신라의 한강진출 시점에 신라와의 전쟁이 일어날 쯤에 개축된 것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각 발굴된 보루의 크기는 대부분 장축이 100m가 채 안되는 소형이다. 가장 큰 것이 80m인 아차산 4보루이다. 출토되는 철촉과 무기류를 통해 주둔인원을 산출해보면 작게는 10여 명 많은 경우에는 100명까지도 주둔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내부시설로는 주거공간과 취사공간 등으로 구분되었다. 홍련봉 보루에서는 단야(鍛冶, 무기 제조)와 관련된 시설도 확인되기도 하였다.
아차산의 보루들은 보루라는 이름에 걸맞게 최대의 방어력을 뽑아내기 위해 다양한 방어시설을 구비하였다. 축조과정을 살펴보면, 산의 정상부를 평탄하게 하여 주둔할 공간을 일부 마련하고 외벽을 목책 또는 석축 보루의 형태로 구축하였다. 보루마다 차이는 있지만 성벽을 2중 구조로 만들어 방어력을 보강한 경우도 있다. 성벽에는 치(雉)라고 부르는 돌출된 성벽을 곳곳에 설치하여 사계(射界)를 확보하고 방어를 용이하게 하였다. 이는 목책 단계에서도 확인되는 고구려 보루의 특징이다.[2] 보루의 밖으로는 외황(外隍)[3] 를 두어 적군의 보루로의 진입을 방해하였다.
용마산 0 보루에서는 목재 사다리가 확인되었고, 아차산 3, 4보루에서는 일종의 다리를 놓아야 통과할수 있는 구조가 확인되었다. 홍련봉 0 보루에서도 이와 같은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모두 보루 내부로 들어올 땐 어렵지만 나갈 땐 더 어렵게 하기 위한 방어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출입시설의 방향은 주변 보루가 있는 쪽으로 나있는데 아차산 보루군 자체가 종방향으로 길게 배치된 형태이다. 또 북쪽의 성벽은 비교적 낮은데 남쪽의 성벽은 높은 편인 점은 보루의 함락과 그에 따른 탈출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발견된 무기류를 보면 창과 도끼, 화살촉이 다수이고 칼은 소수여서 장교급만 칼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보루들의 기능적 요소 중의 하나인 감시 능력을 살펴보면 특히 아차산 일대 보루군에 해당하는 보루에서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아주 잘 보인다. 반대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 있었을 백제 측에서도 고구려의 아차산 점령을 코앞에서 목도하였을 것이다.
남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은 산성과 고분군으로 나뉜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 유적에 대한 인식은 남한엔 거의 없다고[4] 보았었으나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그 알려지게 되었다. 남한 내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의 편년은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반경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역사적 맥락으로도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5]
아차산 일대 보루군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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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광진구·중랑구·노원구 및 경기도 구리시 일대에 걸쳐서 분포하고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보루군(堡壘群). 사적 제455호. 아차산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어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임진강·한탄강 유역 고구려 보루군에서 양주분지 보루군을 거쳐 점진적으로 내려와 최종적으로 축조되는 보루군이다. 고구려는 일찍이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의 북변에 비교적 큰 보루들을 선점하면서 대 백제 전선을 남하시키는 데 성공한 것을 바탕으로 한강 유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아차산 일대의 보루들 중에서는 관청에만 사용되는 와당이 확인되고 있어서 다른 지역에서는 대형성곽이 수행하였을 행정적 치소 역할을 했던 것을 대신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1000년 후 한국군마저 이곳에(아차산 4보루 지역) 유적이 있는지 모르고 참호를 건설했다는 것. 세월이 흘러도 전략적 요충지임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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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의 추정복원도.
홍련봉 1·2보루와 아차산 1~5보루, 용마산 1~7보루, 시루봉보루, 수락산보루, 망우산보루, 봉화산 보루가 해당한다. 대부분 산 정상부의 척릉(脊陵)을 따라서 배치되어 있다.
가장 이른 발굴은 80년대로 구의동 1보루와 2보루가 조사되었으나 택지개발로 인해서 파괴되었다.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의 본격적인 발굴은 9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에서는 홍련봉 1, 2보루와 아차산 3, 4보루, 용마산 1, 2보루, 시루봉 보루가 발굴조사되었다.[1]
고구려의 남진 과정을 살펴보면, 임진강·한탄강에서 대백제전선이 확보되었고, 이후 5세기 중후반 어느 시점부터 '''목책(木柵)'''을 활용하여 여러개의 보루를 구축하여 거점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남진해 나갔고 양주 분지 일대를 점령한 뒤에는 아차산 권역으로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아차산에서도 마찬가지로 목축으로 먼저 거점을 확보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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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봉 1보루의 전경. 아래쪽의 목책의 흔적을 통해서 목책성에서 석축성으로 개조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해당 권역에 대한 일정한 통제력을 확보한 뒤에는 목책을 폐기하고 '''석축(石築)'''으로 전환하여 방어력을 보강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목책을 일부 활용하여 그대로 남겨두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석축으로의 전환시기는 6세기경으로 고구려의 남진 과정 중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신라의 한강진출 시점에 신라와의 전쟁이 일어날 쯤에 개축된 것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각 발굴된 보루의 크기는 대부분 장축이 100m가 채 안되는 소형이다. 가장 큰 것이 80m인 아차산 4보루이다. 출토되는 철촉과 무기류를 통해 주둔인원을 산출해보면 작게는 10여 명 많은 경우에는 100명까지도 주둔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내부시설로는 주거공간과 취사공간 등으로 구분되었다. 홍련봉 보루에서는 단야(鍛冶, 무기 제조)와 관련된 시설도 확인되기도 하였다.
아차산의 보루들은 보루라는 이름에 걸맞게 최대의 방어력을 뽑아내기 위해 다양한 방어시설을 구비하였다. 축조과정을 살펴보면, 산의 정상부를 평탄하게 하여 주둔할 공간을 일부 마련하고 외벽을 목책 또는 석축 보루의 형태로 구축하였다. 보루마다 차이는 있지만 성벽을 2중 구조로 만들어 방어력을 보강한 경우도 있다. 성벽에는 치(雉)라고 부르는 돌출된 성벽을 곳곳에 설치하여 사계(射界)를 확보하고 방어를 용이하게 하였다. 이는 목책 단계에서도 확인되는 고구려 보루의 특징이다.[2] 보루의 밖으로는 외황(外隍)[3] 를 두어 적군의 보루로의 진입을 방해하였다.
용마산 0 보루에서는 목재 사다리가 확인되었고, 아차산 3, 4보루에서는 일종의 다리를 놓아야 통과할수 있는 구조가 확인되었다. 홍련봉 0 보루에서도 이와 같은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모두 보루 내부로 들어올 땐 어렵지만 나갈 땐 더 어렵게 하기 위한 방어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출입시설의 방향은 주변 보루가 있는 쪽으로 나있는데 아차산 보루군 자체가 종방향으로 길게 배치된 형태이다. 또 북쪽의 성벽은 비교적 낮은데 남쪽의 성벽은 높은 편인 점은 보루의 함락과 그에 따른 탈출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발견된 무기류를 보면 창과 도끼, 화살촉이 다수이고 칼은 소수여서 장교급만 칼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보루들의 기능적 요소 중의 하나인 감시 능력을 살펴보면 특히 아차산 일대 보루군에 해당하는 보루에서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아주 잘 보인다. 반대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 있었을 백제 측에서도 고구려의 아차산 점령을 코앞에서 목도하였을 것이다.
3. 관련 유적
남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은 산성과 고분군으로 나뉜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 유적에 대한 인식은 남한엔 거의 없다고[4] 보았었으나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그 알려지게 되었다. 남한 내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의 편년은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반경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역사적 맥락으로도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5]
- 475년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된 성곽 유적
4.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아차산 일대 보루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아차산일대보루군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아차산 일대 보루군
- 국립중앙과학관 - 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 서울 아차산일대 보루군
- 두산백과 : 아차산 일대 보루군
5. 사적 제455호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출토유물이나 축성방법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며,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 한강 유역을 진압한 후 551년에 신라와 백제에 의해 한강유역을 상실하기까지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유적이다.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아차산보루, 용마산보루, 시루봉보루, 수락산보루, 망우산보루 등 17여개의 보루로 이루어진 유적으로 그 중 일부를 제외한 10여개의 보루가 고구려의 보루로 추청된다.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중랑천과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존재하는 10여개의 보루는 현재 남한 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고구려 관련유적으로서 발굴 등을 통해 고구려 군사시설의 면모가 규명되고 있으며,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료가 부족하여 그동안 연구활동이 부진했던 고구려 관련 고고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 국경지대 요새의 구조와 성격, 국경방위체계, 군 편제 등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서 고구려의 남하과정, 한강유역에서의 대치와 관리방식,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과 발전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6. 관련 문서
[1] 임진강 유역의 보루들에 비해서는 다소 늦게 본격화되었으며 현재는 양주 분지 일대의 보루들이 발굴되어 임진강, 한탄강 유역 보루군-양주분지 보루군-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이어지는 라인에 대한 일련의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표본이 확보되고 있는 중이다.[2] 치 자체가 고구려 산성에서 주로 확인되는 편이기도 하다. 한편 이러한 치를 설치한 성문인 옹성의 구조도 고구려에서는 비교적 빨리 채용한 편이기도 하다.[3] 물이 없는 해자와 같다.[4] 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고구려 계통의 적석총으로 보기는 했지만 백제의 적석총으로 판단하였었다.[5] 참고로 강원도 일대, 특히 춘천을 중심으로 고구려 석실들이 꽤나 자리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이미 점령한 것 내지는 고구려에 속한 말갈이나 맥(...)의 일파가 아닌가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구려의 5세기 남진정책과는 다소 무관한 유적.[6] 축조와 점령의 주체에 대해서도 고, 백, 신 모두가 거론되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도 대모산성에는 치 시설이있어 고구려라고도 하지만... 수킬로 둘레를 갖는 큰 성벽에 치는 딱 1개 애매하게 있을 뿐이다.[7] 축조와 점령의 주체에 대해서도 고, 백, 신 모두가 거론되고 있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