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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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장천리 인근에 있는 산성으로 삼국의 각축지였던 충주에 소재하는 만큼 축조 주체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는 성곽이다. 사적 제400호.
과거에는 고구려 성곽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지만 발굴결과 백제에 의해서 가장 먼저 축조되었다는 것이 확실해 보이며 이후 고구려에 의해서 잠시 점령되었다가 삼국시대의 최종 승리자였던 신라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점유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 조사내용
장미산성은 협축의 석성으로써 삼국시대의 토기들이 분포하고 있어서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시·발굴 조사 이전에는 채집된 여러 삼국시대 토기들 가운데 고구려 토기의 성격을 갖는 토기가 일부 확인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장미산성의 인근에 중원 고구려비가 있고, 탑평리 유적[1] 에서 고구려 구들이 확인되기도 하였으며 장미산성에도 고구려 산성에서 주로 보이는 치(雉)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토기가 채집된 사실과 더불어 고구려 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더러 있었다.
2004년의 발굴조사에서 장미산성 성벽의 일부 구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고구려 산성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는 확인되지는 않았고 협축(夾築) 성벽의 축조기법을 확인하고 석환(石丸)[2] 무지가 조사되었을 뿐이었다.
장미산성의 북벽에 붙어있는 치성(雉城)은 석축이 일부 보강되어는 있지만 위의 사진처럼 석축 성벽이 완전히 남아 있지는 않다. 치성의 윤곽을 따라서 굵은 주혈이 열상으로 배치된 양상은 백제에 의해서 초축되고 이후 고구려가 점령하면서 재사용된 도기동 목책성의 사례가 있기 때문에 또 마냥 고구려만의 특징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더군다나 목책성에 나중에 석축을 덧대 보강하는 양상은 남한지역에 소재하는 고구려의 크고 작은 보루에서도 확인기도 한다.[3]
성벽에 사용된 성석도 고구려 석성에서 보이는 쐐기형 석재의 양상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편이다.
또 고구려 토기의 채집의 문제도 있다. 순수 고고학적 이유는 아니지만 90년대부터 경기도의 북부 지역에서 확실한 고구려 산성이 확인되면서 남한 지역에서의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붐이 일어났는데, 그런 이유에서 유적에서 확인된 토기 조각 하나를 갖고 고구려토기라고 확실히 보기 어려움에도 니질 태토의 토기편인 경우 고구려 토기로 추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장미산성의 경우에도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아서 확실하진 않지만 그러한 맥락에서 고구려와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장미산성에 전면적인 발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성벽 전반에 대해서 시굴조사를 하였던 바 지금까지는 백제에 의해서 가장 처음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해 보인다. 또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목탄을 시료로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 분석결과는 AD 490년으로 확인되었고, 출토되는 유물도 파편이긴 하지만 대부분 백제토기였기 때문에 5세기 중후반 즈음에는 분명히 백제에 의해서 점유되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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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일대 삼국시대 유적 분포도. 누암리 고분군과 하구암리 고분군은 신라의 6~7세기대 고분군, 금릉동 고분군과 단월동 고분군[5] 은 백제의 고분군·유적이며 탑평리 유적, 탑평리 석탑은 신라, 중원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유적이다.
한편 연대측정이 490년을 가리키는 것은 475년의 고구려 남정과 관련이 있음을 추정케도 한다. 장미산성의 축조 자체는 백제와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6세기의 고구려의 남한 내 주요 거점이라는 충주의는 지역적 특징을 고려하면 고구려와 관련이 없었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지근거리에 위치하는 장미산성에서 고구려가 산성을 점유되하였는 물질적 증거는 없어도 정황상의 이유로 고구려와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멀지 않은 곳에 신라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신라에 의해서 만들어진 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었다. 하지만 지금의 조사 결과로 볼 때, 장미산성의 초축과 점유과정을 보면 '''백제→(고구려)→신라'''의 순서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3. 관련 유적
충북, 대전 일대는 소위 '''중원지역'''이라고 지칭되며 삼국시대 5~6세기의 각축장이었던 만큼 관방시설이 굉장히 많다. 중원지역의 삼국시대 산성들이 실제로 유네스코에 등재될 가능성은 낮지만 '''중부내륙 산성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등재'''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도 475년 고구려 남정과 관련하여 고구려의 남한 진출 및 점령과정을 엿 볼 수 있는 다른 관방유적들과도 관련이 있다.
- 475년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된 성곽 유적
4. 바깥고리
5. 사적 제400호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의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통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 경영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북쪽에 있는 절인 봉학사 지역 일부를 빼고는 성벽이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돌을 대강 다듬어 직사각형으로 쌓았는데, 서쪽과 서남쪽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북쪽 정상부분의 성벽을 따라 있는 좁고 긴 군사용 참호는 주변 성벽의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대림산성과 강 건너편 탄금대의 토성, 충주산성과 서로를 보호하며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제351호)과 지형조건이 비슷해 성을 쌓은 시대나 배경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
[사진출처1] 문화재청 홈페이지[1]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관련된 유구들이 모두 확인되었고 유물들도 출토된 바 있다. 뿐만아니라 층위 상으로도 고구려 유물 포함층이 있기 때문에 충주 지역의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있는 유적으로 탑평리를 제외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다만 유적에서는 고구려계 토기라고 불리는 고구려 영향을 받았지만 백제토기로 구분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고구려 유적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수는 없는 이유도 있다.[2] 적성에서도 이러한 석환무지가 확인된 바 있다.[사진출처2] 네이버 블로그[3] 특히 산성의 축조주체를 파악하는 것은 토기와 같은 유물에 비해서는 복잡한 편이다. 특정한 국가의 축조방법이 확인되었다고는 해도 산성은 추후에 그 국가말고도 타국이 점령하여 재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현상이 더불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특정한 기법이 보인다 = 어느 국가의 성곽이다"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것이 신라 성벽의 기단보축으로 신라가 주로 썼던 성벽 보강법이지만 고구려나 백제성곽에서도 가끔씩 보인다.[4] 하지만 490년이라는 기록이 완전히 초축연대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더군다나 축조주체를 판별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490년에 이 성이 있었다 정도의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을 뿐이다.[5] 지도의 오른쪽 아래부분인 남한강의 남쪽에 약간 떨어져 분포하고 있으나 화면 비율 때문에 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