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촌토성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297호'''
'''몽촌토성'''
夢村土城
Mongchon To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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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88-3번지 외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면적'''
482\,164㎡
'''지정연도'''
1982년 7월 22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위치'''


1. 개요
2. 1980년대 발굴조사와 보존
3. 용도
3.1. 방어의 이점
4. 21세기의 발굴 조사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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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과 오륜동 사이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성(土城). 현재 토성 성벽 및 그 내부가 사적문화재로 공식 지정되었다.
한성백제때의 토성으로 북쪽에 있는 풍납토성과 함께 하남 위례성(城)의 주성(主城)이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외 선사시대 때 존재했던 움집터, 판축터, 지하구멍 등이 발굴되었고, 토성의 축조는 3세기경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유물에 근거한 추정이기 때문에 추후 발굴조사 및 성벽 절개조사를 통해 바뀔 가능성이 아주 크다.
서울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의 역 이름도 이 곳에서 따왔다.

2. 1980년대 발굴조사와 보존


몽촌토성은 그냥 야드막한 언덕 수준의 가치로 전락한 상태[1]였으며, 심지어 한강 정비 때 잠실도를 육지화하는 데에 이곳의 흙을 쓰자는 제안이 나왔을 정도였다. 다행히 '''고고학자들이 이 터가 예전 백제 하남위례성터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제기해''' 보존될 수 있었다.
땅 밑에 무언가가 있어 개발도 하지 못할 땅이니 다른 것으로 못 쓰게 해두자는 생각으로 1984년 올림픽공원을 착공하였는데, 역시나 공사 도중 토성터와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학자들의 발굴조사를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올림픽공원 안에 토성터와 유물들을 보존하기로 함에 따라 1986년 올림픽공원 개장 때 공원 안에 존치해 있는 유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미 들어선 아파트 단지 때문에 제대로 발굴도 못하고 보존도 못하는 '''풍납토성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고고학자들의 판단이 현명하였던 것이다.''' 토성터의 둘레는 약 2.7㎞이며 높이는 6.7m.[2]
1983년에서 1987년까지 이루어진 조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3]
1983년에는 성의 규모, 축조방법, 외부시설을 확인하기 위해 성 외부에 탐색갱(트렌치)을 넣어 조사를 실시하였고 1984년에는 서울대, 숭실대, 한양대, 단국대 합동으로 성의 규모, 축조방법, 내부시설에 대한 발굴을 실시하였다. 1985년에는 성 내부 민가가 철거되어 내부의 전면적인 유구의 분포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1987년에는 성의 동북쪽 부분에 대한 전면발굴을 실시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 도성을 이루고 있는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건물지 유구와 함께 고구려 토기가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사이장경옹(나팔입항아리)'이 확인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해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경기 북부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충주, 대전까지 고구려 유적이 드문드문 확인되긴 하지만 백제의 도성을 이루는 곳에서 확인되었다는 점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몽촌토성 출토 고구려 토기[4]
풍납토성의 경우 전체의 절반도 발굴하지 못했지만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고구려 유구 및 유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 토기가 확인되긴 하지만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층위적으로도 백제 문화층에서 확인되어 교류로 보아야 한다. 결국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킨 후 몽촌토성에 주둔하면서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약 30년 만에 한성백제박물관에 의해 다시 이루어진 몽촌토성 발굴조사에서 더 명확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 참고.

3. 용도


현재는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의 첫번째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이었을 것으로 거의 확정된 상태.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위례성에는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학자들은 북성을 풍납토성으로 남성을 몽촌토성으로 추측하고 있다.
학자들은 풍납토성이 사실성의 왕성 역할을 하고, 몽촌토성은 비상시. 그러니까 외적의 침입이나 반란시에 들어가 농성할 수 있는 일종의 대피성 개념으로 세웠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풍납토성에서 계속 출토되는 어마어마한 유물로 미루어 볼 때 두 성간의 관계가 이랬을 확률이 매우 높다.
사실 이렇게 성을 투 트랙으로 운용하는 것은 삼국시대고구려신라에서도 보인다. 고구려 역시 첫 번째 수도인 졸본에서 대피성 개념으로 오녀산성을 사용했고, 국내성에도 환도산성이라는 대피용 성이 있었다. 후에 천도하는 평양에도 이 같은 개념이 적용되어 평양성 외에 대성산성을 따로 수축했다. 신라도 수도 경주 월성 외에 동쪽 산자락에 명활산성이라는 전시 예비수도를 두기도 했었다. 백제에도 이 같은 개념이 적용되었던 걸로 생각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방식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후대의 후삼국시대에도 후백제가 평지의 왕성(위치 불명)과 대피용성인 동고산성, 남고산성을 운영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평시의 한성과 비상시의 남한산성을 건설했고, 조금 더 위급한 상황이 예상되면 강화도를 이용했다.

3.1. 방어의 이점


몽촌토성을 실제로 살펴보면 대피성이라 보기 좀 어려울 지도 모른다. 다른 대피성들[5]들과 달리 산성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야트막한 언덕이라는 자연적 지형을 이용해 지은 토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촌토성은 수비상으로 두 가지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인근 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지형에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몽촌토성의 꼭대기에 올라가보면 알겠지만 현재의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하남시 일대를 대부분 볼 수 있다. 이는 만약 공격 편대가 몰려올 경우 거점지역으로서 미리 대비도 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적극적으로 요격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군대에서 전방초소와 감제고지를 왜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터이다.
두 번째는 성이 비스듬한 형태로 축조되었다는 것이다. 언덕의 비탈을 따라 성을 축조해서 외부에서 내부를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꼭 나쁘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외부 병력이 내부를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내부에서도 외부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어 볼 수있다는 것이다. 가까이 달려 붙는 적병들의 움직임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적병은 성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부를 보기 힘든 구조다. 또 비탈을 따라 토성이 구축되어 있어 적의 공격 방향이 일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가 극대화된 곳이 안시성이다.
또한 몽촌토성에는 대략 2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로 세워진 목책과 해자가 존재했다. 공성측에서는 해자를 넘어 목책을 뚫어야 했는데, 방어측은 그 위의 언덕에서 적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성 전술이 한정되어 있고, 공격 장비도 변변찮았던 2~3세기의 공격군들은 해자와 목책으로 방어되는 몽촌토성을 공략하기 힘들었을 것. 게다가 가야 기마 무사상이나 유골[6]로 알 수 있듯 당대 사람들은 현대인들보다 훨씬 키가 작았으니(현대의 초등학생 6학년~중학생 정도 수준이다), 몽촌토성 공략은 훨씬 더 난해했을 것이다.

4. 21세기의 발굴 조사


2013년 11월 5일부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몽촌토성을 다시 한번 발굴조사를 펼쳤는데, 2014년 7월 29일, 백제시기로 추정되는, 수레자국이 선명한 도로유적과 통일신라시기의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관련 기사.
또한, 가장 큰 규모의 고대 도로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도로는 백제에 이어 고구려, 통일신라 역시 개축해 이용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기사.
1980년대 이루어진 조사는 올림픽공원 조성을 위한 긴급발굴에 가까웠기 때문에 몽촌토성 내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따라 한성백제박물관에서는 몽촌토성 발굴조사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약 30년 만에 다시 발굴조사에 착수하였다. 2013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구역은 '내성농장'이 있었던 곳으로 나홀로나무(왕따나무) 바로 아래쪽에 해당한다. 발굴조사와 관련한 내용은 한성백제박물관 홈페이지의 백제학연구소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은 주변에 비해 지형이 낮은 곳에 해당하며 물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집수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현재 그 실체를 확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조사에서 고구려 유구 및 유물이 확인된 것 처럼 현재 조사지역에서도 고구려의 유구와 유물이 상당히 많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거점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아졌다(현재도 계속 발굴조사가 진행중인 관계로 추후 추가될 예정이다.).

5. 기타


이 토성 안에 조선 숙종 시절 우의정을 지냈던 충헌공 김구의 무덤이 있다.

[1] 풍납토성도 마찬가지지만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침식 등으로 깎여나간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살던 땅까지는 현재의 땅에서 약 3~4m를 파야 나온다(풍납토성은 약 3~4m를 파야 백제시대 유적이 나온다.). 즉, 당시 성벽이 훨씬 높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축조한 건축물은 지속적인 관리가 없으면 망가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 따라서 '저렇게 낮은 게 무슨 성벽이야?'라는 생각은 하지 말자.[2] 이런 선견지명이 없던 풍납토성은 지금 난개발로 시달리고 있으며 수 조 원의 혈세가 들어갈 예정이다.[3] 이하 내용은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1988년 발간한 몽촌토성 발굴조사 보고서를 참고하였다.[4] 출처 : 서울대학교박물관 , 한성백제박물관[5] 고구려오녀산성, 환도산성, 대성산성, 신라명활산성, 후백제동고산성, 남고산성, 조선남한산성[6] 둘 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