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스타디움(야구장)
야구장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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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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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스타디움은 한때 도쿄도 아라카와 구에 있던 야구장이다. 치바 롯데 마린즈의 전신에 해당하는 다이마이 오리온즈 - 도쿄 오리온즈 - 롯데 오리온즈가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1] 개장 10년만에 문을 닫게 된 비운의 구장이다.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고쿠테츠 스왈로즈, 그리고 다이마이 오리온즈 3팀이 모두 고라쿠엔 구장을 사용하고 있어 일정 과밀화가 문제였다. 다이마이의 구단주였던 나가타 마사이치[2] 는 사재를 털어 홈구장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도쿄 도 곳곳을 둘러본 결과 아라카와 구에 짓기로 결정한다.
모기업은 영화 산업의 사양화 등으로 경영난에 빠져들고 있었지만, 구장은 속전속결로 착공(1961.7월) 1년이 채 되지 않은 1962.5월에 준공했다. 구장은 도쿄 스타디움으로 명명하고 퍼시픽리그 6개구단이 모두 구장에 모여서 35,000명 스탠드를 가득 채운 채 개장식을 거하게 치뤘다.
프로야구 첫 공식 경기는 전은 개장식 날 오후 7시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였으며 개장 첫 홈런은 난카이의 강타자 포수 노무라 카츠야가 기록했다. 이 구장에서는 홈팀 오리온스 뿐만 아니라 같은 퍼시픽리그 팀인 도에이 플라이어즈와 센트럴리그 팀들인 고쿠테츠, 다이요 훼일즈의 홈경기도 이따끔씩 치뤄졌다.
구단주 나가타는 1964년 시즌부터 팀명에 회사명을 빼고 연고지 이름을 따서 도쿄 오리온즈로 개명했으나 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퍼시픽리그 순위 경쟁에서도 하위권을 늘 기었고, 당시 요미우리가 V9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절이라 센트럴리그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관중 동원 숫자도 낮았다.
1969년 롯데그룹에서 네이밍 스폰서로 참여하며 롯데 오리온즈로 개칭했고, 1970년 10년만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71년 다이에이는 구단의 경영권을 롯데에 양도하면서 도쿄 스타디움의 매입도 제안했다. 그러나 롯데는 매입 대신 임차 계약 지속을 원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3] 1972년 시즌을 끝으로 구장은 폐쇄가 결정되었다.
홈구장을 잃게 된 롯데는 이듬해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특정 연고지를 정하지 않고 여러 군데서 홈경기를 치루는 집시 롯데 시절을 보내게 된다. 1977년 3월에 도쿄도에서 부지를 매입한 후 경기장을 해체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자리에는 종합스포츠센터, 연식 야구장 등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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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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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도쿄 스타디움은 한때 도쿄도 아라카와 구에 있던 야구장이다. 치바 롯데 마린즈의 전신에 해당하는 다이마이 오리온즈 - 도쿄 오리온즈 - 롯데 오리온즈가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1] 개장 10년만에 문을 닫게 된 비운의 구장이다.
2. 역사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고쿠테츠 스왈로즈, 그리고 다이마이 오리온즈 3팀이 모두 고라쿠엔 구장을 사용하고 있어 일정 과밀화가 문제였다. 다이마이의 구단주였던 나가타 마사이치[2] 는 사재를 털어 홈구장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도쿄 도 곳곳을 둘러본 결과 아라카와 구에 짓기로 결정한다.
모기업은 영화 산업의 사양화 등으로 경영난에 빠져들고 있었지만, 구장은 속전속결로 착공(1961.7월) 1년이 채 되지 않은 1962.5월에 준공했다. 구장은 도쿄 스타디움으로 명명하고 퍼시픽리그 6개구단이 모두 구장에 모여서 35,000명 스탠드를 가득 채운 채 개장식을 거하게 치뤘다.
프로야구 첫 공식 경기는 전은 개장식 날 오후 7시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였으며 개장 첫 홈런은 난카이의 강타자 포수 노무라 카츠야가 기록했다. 이 구장에서는 홈팀 오리온스 뿐만 아니라 같은 퍼시픽리그 팀인 도에이 플라이어즈와 센트럴리그 팀들인 고쿠테츠, 다이요 훼일즈의 홈경기도 이따끔씩 치뤄졌다.
구단주 나가타는 1964년 시즌부터 팀명에 회사명을 빼고 연고지 이름을 따서 도쿄 오리온즈로 개명했으나 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퍼시픽리그 순위 경쟁에서도 하위권을 늘 기었고, 당시 요미우리가 V9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절이라 센트럴리그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관중 동원 숫자도 낮았다.
1969년 롯데그룹에서 네이밍 스폰서로 참여하며 롯데 오리온즈로 개칭했고, 1970년 10년만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71년 다이에이는 구단의 경영권을 롯데에 양도하면서 도쿄 스타디움의 매입도 제안했다. 그러나 롯데는 매입 대신 임차 계약 지속을 원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3] 1972년 시즌을 끝으로 구장은 폐쇄가 결정되었다.
홈구장을 잃게 된 롯데는 이듬해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특정 연고지를 정하지 않고 여러 군데서 홈경기를 치루는 집시 롯데 시절을 보내게 된다. 1977년 3월에 도쿄도에서 부지를 매입한 후 경기장을 해체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자리에는 종합스포츠센터, 연식 야구장 등이 들어서 있다.
3. 여담
- 경기장 건축 당시 메이저리그 구장들을 벤치마킹했다. 일본식 야구장 양식인 백스톱 뒤편 기록실이 없다. 관중, 선수들로부터 모두 호평을 받았다.
- 나가타 구단주는 당시 센트럴리그,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강렬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일화로 같은 센트럴리그의 고쿠테쓰와 다이요에게는 도쿄 스타디움을 내주기도 했으나 요미우리에게는 경기장 대여를 계속 거부했다.
- 그러나 야구장 부지가 협소해서 그라운드도 좁게 만들어져 투수들에게 불리했다. 일본프로야구 300승 투수 중의 한 명인 고야마 마사아키는 한신 타이거즈에서 트레이드되어 오기 전에도 발군의 제구력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이 좁은 구장에서는 별 수 있겠냐는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고야마는 팜볼을 연마해 이적 첫 해인 1964년 시즌에 리그 다승 1위(30승)을 기록했으며 그 후로도 에이스로 활약했다.
- 당시 경기장의 위치는 저층 주택가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밤이 되면 거대한 구장에서 발하는 빛이 유독 튀어서 '빛의 구장'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경기 종료 후 조명이 꺼지면 나방들이 경기장 주택가를 기습해 골칫덩이가 됐다.
- 야구장 뿐만 아니라 볼링장, 스케이트장도 설치되어 있었으며, 구장 전면으로는 영화관, 레스토랑, 백화점을 갖춘 종합 레저 시설도 설치하려 했으나 여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선구적이고 파격적인 설계는 이후에 건설되는 일본 야구장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개장식 당일 관객은 만원이었으나 사실 "구장 개장식 날에 관객이 적은 것은 부끄럽다"고 관계자들이 우려하여 구장 주변에 약 15만장의 무료 입장권을 뿌렸다고 한다.
- 1971년 5월 3일 이 구장에서 메이저리그에서도 유례가 없던 5타자 연속 홈런이 나왔다. 장훈은 5타자 연속 홈런 중 4번째 홈런를 쳤다.
- 구장 개장 1호 홈런 기록자 노무라 카츠야가 술회하길, "홈런 타구가 좌익수 뒤 구장 밖으로 잘 날아갔다. 주택지에 지어진 구장이라 주민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구장 좌중간과 우중간이 짧아서 홈런을 치기 쉬웠다. 반대로 말하면 투수-포수 배터리는 그만큼 리드에 신경써야 했다.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경기 전 다이마이의 구단주인 나가타가 1루 벤치 앞에 서서 백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감회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기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나 명물인 구단주였다."라고 말했다. "구장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제1호 기념 부조가 남아 있었을텐데, 난 역시 화려한 것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다[4] "며 웃으며 말했다.
[1] 구단 역사 부분을 설명하자면 1950년 마이니치 신문을 모기업으로 하는 마이니치 오리온즈가 창단됐다. 1958년 다이에이(大映) 영화사가 운영하던 다이에이 유니온즈를 흡수 합병해서 다이마이 오리온즈(다이에이+마이니치)가 되었다. 1964년 도쿄 오리온즈를 거쳐 1969년 롯데 오리온즈가 되었다가 1992년 치바시로 연고이전하며 지금의 팀명으로 변경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2] 해당 항목에도 언급되었지만 '''나가타 나팔'''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허풍이 심했다. 기자들도 그의 말은 반 정도만 믿고 기사를 쓸 정도였으니(...). 또한 다혈질의 과격한 성격으로 1960년 일본시리즈 준우승 보고 차 찾아온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에게 "이 멍청한 자식아" 라고 상소리를 퍼붓는 바람에 뚜껑이 열린 니시모토는 1년만에 다이마이 감독직을 내던졌던 일화가 있다.[3] 당시 감독이었던 가네다 마사이치의 반대(투수에게 불리한 구장)도 있었다.[4] 본인은 퍼시픽리그에서 최고의 강타자로 활약했으나 주목은 늘 센트럴리그의 오 사다하루나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집중되는 걸 보며 그들은 해바라기, 난 달맞이꽃이라며 자조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