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 롯데

 

1. 개요
2. 연고지 이전
3. 잔혹한 이동
4. 4번째 퍼시픽리그 우승,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과 무시당한 센다이
5. 수도권으로의 복귀


1. 개요


집시 롯데는 일본프로야구치바 롯데 마린즈롯데 오리온즈[1][2] 시절인 1973년~1977년에 특정 본거지에 홈구장을 가지지 않고 여러 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르며 구단을 운영하고 있던 안습의 시기를 비하하는 호칭이다. 이 5시즌 동안 롯데는 수도권미야기센다이시 등을 전전하며 홈게임을 가졌다. 특정 거점을 가지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모습을 팬들은 '''"집시 구단"'''이라고 야유했다.

2. 연고지 이전


롯데는 다이마이 오리온즈 시대의 1962년부터 도쿄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했지만, 다이마이 야구단을 인수한 롯데에서 도쿄 스타디움을 사용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3] 1972년 시즌 종료 후 구장은 폐쇄되었다.[4] 이듬해인 1973년에는 수도권을 연고로 하는 다른 구단들의 홈구장을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경기 일정을 결정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닛타쿠홈 플라이어스[5]고라쿠엔 구장, 야쿠르트 아톰즈[6]메이지진구 야구장, 다이요 훼일즈가와사키 구장 등에 경기가 없는 날에 홈경기를 편성했지만,[7] 그래도 절반 이상은 개최지가 미정 상태였다.[8] 그런 와중에, 미야기센다이 시에 있는 미야기 구장을 사용하는 방안이 부상했다.
프로 야구 실행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1973년부터 미야기 구장에서의 홈경기를 편성했으며 그 해 5월 22일 미야기 구장에서의 첫 홈경기가 對 긴테츠 버팔로즈 전으로 열리면서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다.[9] 같은 해에는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이 취임하여 그의 엄청난 인기와 당시 후쿠오카를 연고로 하던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의 라이벌전 등과 전후기리그 우승을 위한 피터지는 싸움[10] 등이 관객 증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11] 이 해 시즌의 관객수가 작년 시즌의 '''31만명''' 이란 처참한 성적에서 '''94만 6500명''' 으로 그해 관객수 1위를 차지하며 대량 증가하는 호조를 보이면서 퍼시픽리그 신기록을 달성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 해 11월, 롯데는 이듬해인 1974년부터 미야기 현을 연고지로 할 것을 발표. 12월 실행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미야기 현으로 임시 연고이전 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와 동시에 특별 혜택으로[12] 수도권에서의 개최 경기수도 확보하였다. 그렇게 하여 이듬해인 1974년 개막전을 포함, 미야기 구장에서 총 27번의 공식전이 열렸다.
여담으로 도쿄에서 나갈때 쳤던 개드립이 유명하다. '''"우리는 도쿄시민뿐만 아니라 일본국민 전체에게 사랑받는 구단이 될것이다."''', '''"우리의 연고는 일본 그 자체다."''' 등등(.....)

3. 잔혹한 이동


그러나 구단사무실과 합숙소 등의 제반시설은 계속 도쿄에 있었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도 도쿄 근교에 거주하고 있었다. 수도권 경기 때는 가정이나 팀 합숙소에서 직접 구장으로 출퇴근이 가능했지만, 센다이미야기 구장에서 홈경기가 있을 때는 센다이 시내의 호텔에 숙박하면서 유니폼 차림으로 버스로 구장과 호텔을 왕복하는, 원정 경기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13] 센다이로 이사온 선수는 단 1명도 없었다. 당시 주전이었던 야마자키 히로유키(山崎裕之)[14]는 '''"센다이가 본거지라고 해도 대부분 원정 경기와 같은 호텔 거주였기 때문에 신경이 편안해지지 않았다"''' 고 회고했다.
또한 당시 퍼시픽리그 6개 구단의 홈구장은 센다이(롯데 오리온즈)와 도쿄(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이외엔 칸사이(난카이 호크스, 킨테츠 버팔로즈, 한큐 브레이브스), 큐슈(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등 일본 서부 지방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동 거리가 길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센다이는 고속 교통망의 정비가 막 시작되던 시기여서 도호쿠 신칸센도 미개통 상태였기 때문에 항공기로 이동하거나 도호쿠 본선특급 열차 등의 일반 노선을 이용해야만 했다. 특히 센다이에서 후쿠오카 원정 경기를 떠나야 할 때는, 당시 이 두 지역의 항공을 연결하는 직항편이 없어서 하네다 공항에 들렀다가 공항 로비에서 가족을 잠깐 보고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타야하는 웃지못할 장면도 연출됐다. 이런 가혹한 이동 탓에, 1개월 가까이 수도권의 집이나 합숙소를 비우기도 했다. 그래서 한신 타이거스오사카 돔 개장 이전까지의 '''"죽음의 원정"'''보다 더 잔혹한 이동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고생을 자초한 롯데의 센다이 이전은 수도권에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기까지의 잠정 조치에 불과했다.
여담이지만, 이 해 오프시즌에 도쿄닛타쿠홈 플라이어스와의 합병 계획이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이후 닛타쿠홈은 닛폰햄에 구단을 매각해 닛폰햄 파이터즈가 탄생하게 되었다.

4. 4번째 퍼시픽리그 우승,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과 무시당한 센다이


1974년 롯데 오리온즈는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전기리그 우승팀인 한큐 브레이브스와 일본 시리즈 진출을 걸고 대결,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1, 2차전을 연속 우승하며 2승을 거뒀다. 그 후 미야기 구장에서 열린 3차전에서도 4-0으로 승리하며 4년만에(1970년 이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 해 롯데의 관객수는 87만 2천 명으로 작년에 비해 6만 명 정도 감소했지만 그래도 그 해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가 개최되기 전 프로야구 실행위원회에서 '''"만약 롯데가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할 경우, 일본시리즈 개최 구장은 고라쿠엔 구장을 사용한다"'''고 통지하였다. 당시 야구협약에서는 '''일본 시리즈를 개최하는 야구장은 3만 명 이상의 관중 수용 능력을 갖는 곳이어야 한다''' 라는 규정이 있었는데, 당시 미야기 구장의 수용 인원은 28,000명밖에 되지 않았다.[15] 센다이 팬들은 실망했지만 시설의 미비로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같은 해, 롯데는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와 격돌하여 4승 2패를 거두며 1950년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 후 24년만에 구단 사상 2번째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했다. 적지인 나고야에서 귀경하여 롯데는 도쿄에서 우승 퍼레이드를 실시했다. 센다이에서도 "당연히 퍼레이드 같은 행사가 있겠지" 라고 하며 기대는 높아졌으나, '''롯데 구단은 시즌 오프 때까지 센다이에서 어떠한 우승 축하 행사도 개최하지 않았다'''. 배신감을 느낀 센다이 시민들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일었고, 센다이 지역에서의 응원 열기는 단번에 떨어지고 말았다.
1975년과 1976년, 롯데는 미야기 구장에서 1973~1974년보다 늘어난 33경기 정도의 홈경기를 개최했지만, 1974년 구단의 무개념 행각에 실망한 센다이 팬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관객 동원 수는 60만 3300명(1975년), 64만 3300명(1976년)으로 폭락했다. 그런데 1976년엔 당초 수도권에서 개최하기로 한 경기가 우천취소되어 시즌 막판에 재편성 된 경기가 집중적으로 미야기 구장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5. 수도권으로의 복귀


1977년 시즌 말 롯데가 홈구장을 가나가와현으로 이전하는 구상이 표면화했다. 이것은 다이요 훼일즈가 다음해인 1978년 홈구장을 가와사키 구장에서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것[16]에 따라, 롯데도 다시 수도권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위에 서술한 것과 같이 5년에 걸쳐 센다이 등에서 열린 경기 때마다 장거리 이동을 거듭해온 롯데나 원정 구단 모두에게 선수들의 신체적 및 정신적 부담 증가가 뚜렷했고, 이동 경비의 부담도 매우 컸다. 센다이에서는 이전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자 '''"센다이에 남아달라"'''고 수도권 이전 중지를 요구하는 정재계나 시민단체 등에 의한 서명 활동이 있기도 했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롯데가 도쿄에 돌아가는 것은 기본 노선"''' 이라는 견해가 다수였다.
그 해 시즌, 롯데는 전기리그 우승을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내주고 뒤이어 후기리그 우승을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후기리그 땐 실속을 거듭하면서 똑같이 후기리그 우승을 위해 쾌질주하던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따라잡혀 결국 그 해 10월 4일 미야기 구장에서 열린 최종전에서 패배하면서[17] 자력 후기리그 우승을 놓쳤지만, 그 다음 날 한큐 브레이브스긴테츠 버팔로즈에게 패배하면서 간신히 후기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 후 플레이오프에서 2승 1패로 선제했지만[18] 그 후 2연패로 리그 우승을 놓쳤고,[19] 패배가 결정된 5차전이 미야기 구장에서 열리면서 이것이 집시 롯데 시대 최후의 미야기 구장에서의 경기가 되었다. 이 해 미야기 구장에서는 38경기가 개최되면서 집시 롯데 시대 최다수의 홈경기가 개최되었고, 롯데의 관객수는 75만 2000명으로 전년도보다 대량 증가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관중수와 설비 문제로 1번도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은 아쉬움을 겪었다.
롯데와 다이요는 시즌 종료 후 사용 구장에 대한 절충을 실시한 결과, 타이요는 당초 계획대로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전용 구장으로 하고 롯데는 타이요가 기존에 쓰던 가와사키 구장을 사용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이에 따라 롯데의 수도권 복귀가 확정되었고, 5년간에 걸친 집시 롯데 시대는 여기서 종지부를 찍었다. 야마자키 히로유키는 '''"응원해준 센다이 팬들에게 미안했지만 선수의 대부분은 '아, 이제 겨우 도쿄에 돌아가는 구나'고 안심했다"'''고 회고했지만, 미야기 현 출신의 사사키 노부유키[20]는 '''"롯데 입단 2년째에 센다이로 홈구장이 옮기면서 1군에 오르면 센다이로 돌아갈 수 있다"고 목표로 해왔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굉장히 아쉬웠다"'''고 말했다.[21]
이전 결정 후인 12월 24일, 가와사키시 시내에서는 롯데의 퍼레이드 및 격려회가 열렸다. 카와사키 시민들은 다이요의 요코하마 이전을 카와사키 팬들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하여, 새로운 팀인 롯데를 환영했다. 그러나 구장의 노후화 및 관중수 침체로[22]롯데는 또 다른 고난과 맞닥뜨렸다. 롯데는 카와사키 구장으로 이전 한 후에도 미야기 구장에서 연간 10경기 전후의 시합을 개최했지만, 1990년대 이후에 구장 시설의 노후화로 경기수는 점점 감소하였다. 이후 2005년부터 퍼시픽리그에 새로 합류한 신생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미야기 구장을 홈구장으로 삼으며 롯데의 미야기 구장에서의 홈경기는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23]

[1] 1949년 9월 21일 일본 유력 일간지인 마이니치 신문에 의해 '''마이니치 오리온즈(1950~57년)'''라는 이름으로 창단한 이후 '''다이마이 오리온즈(1958~63년)''', '''도쿄 오리온즈(1964~68년)'''로 이어져 왔다. 그러다 1969년 한일 다국적 기업인 롯데그룹이 네이밍 스폰서를 맡고 1970년 시즌 종료 후 구단을 정식으로 인수하면서 '''롯데 오리온즈(1969~91년)'''로 팀명이 변경되었고 1992년부터 치바로 연고이전하면서 현재의 팀명인 '''치바 롯데 마린즈(1992~현재)'''를 사용하고 있다.[2] 흔히 한국 사람들이 원년 롯데 자이언츠하면 떠오르는 남색과 빨간색을 일본 롯데가 쓴 때가 이 시기다.[3] 다이마이에서 롯데가 구단을 인수할 때 홈구장의 인수도 제안했지만 롯데 기업은 물론 구단에서도 구장 크기가 너무 작다며 거절하였다.[4] 위치선정 미스와 비인기였던 파리그 소속 팀인 오리온즈의 홈구장이라 관객이 적어 적자가 많았던 사정도 있었다.[5] 1974년부터 닛폰햄이 구단을 운영하게 되면서 '''닛폰햄 파이터즈'''로 구단명 변경[6] 1974년부터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구단명 변경[7] 그 외에도 교토니시쿄고쿠 구장, 시즈오카쿠사나기 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루기도 했다.[8] 진구구장에서 20경기 가량의 홈경기를 치루려 했으나 대학야구 리그 등으로 인해 6경기로 대량 축소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9] 첫 경기날 최대수용량인 2만3천명을 넘는 3만명 이상의 관중이 미야기 구장을 찾을 정도였다.[10] 가네다 마사이치의 쇼맨십 항목 참조[11] 그러나 이 해 시즌은 결국 전후기리그 전부 2위로 끝나며 리그 우승에 실패했다.[12] 당시 야구협약엔 '''연고지의 야구장에서 50% 이상의 공식전을 치루지 않으면 안된다''' 란 규정이 있었다.[13] 참고로 '''2020년 현재''' 한국프로농구V-리그 구단 대부분이 이와 비슷하다. [14] 통산 2081안타 270홈런을 기록하며 베스트나인 5회, 다이아몬드 글러브 3회 등을 수상한 명선수.[15] 2013년에도 비슷한 이유로 원칙상으로는 못 할 뻔했지만 가변석을 뚝딱 설치하면서 일본시리즈를 개최하였고, 처음으로 미야기 현에서 홈구단이 우승을 확정지었다.[16] 신축된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삼고자 했다. 근데 문제는 롯데도 이걸 노렸다(...)[17] 이 날 9회 2사 때 경기장 스탠드로 이물질이 날아들면서 가네다 감독이 직접 구장 마이크로 '''"선수들도 저도 열심히 해왔습니다. (경기를) 플레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관객들에게 말할 정도로 경기가 일시 중단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18] 이때도 롯데가 리그 우승을 달성할 시 고라쿠엔 구장에서 일본시리즈 홈경기를 개최하도록 결정되었다. 근데 이 해 센트럴리그 우승팀이 당시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여서, 만약 롯데가 우승했다면 1981년의 최초이자 마지막 덕아웃시리즈보다 4년 앞서서 최초의 덕아웃시리즈가 열릴 수도 있었다![19] 사실 1차전에서 '''1-18'''로 대패하는 등 조짐이 보이긴 했다. 이 해 플레이오프에서 롯데는 5전 전부 합쳐 '''9득점''' 밖에 못하는 물빠따를 선보이며 한큐에게 졌다(...) 참고로 5차전도 7-0으로 영봉패하는 굴욕을 겪었다(...)[20] 1971년 드래프트 '''10위'''란 엄청 낮은 순위로 데뷔한 선수로, 결국 주전으로 발탁되지 못하고 1979년 은퇴했다.[21] 그러나 사사키는 집시 롯데 시절인 1974년과 1976년, 1군 경기에서 단 1안타도 기록하지 못했다(..)[22] 롯데 오리온즈 최후의 해인 1991년을 제외하곤 단 한번도 100만 관중을 기록하지 못했다.[23] 라쿠텐이 롯데와 같은 퍼시픽리그 소속이어서 롯데의 미야기 경기 자체는 증가했다. 다만 전부 원정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