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타 마사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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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田 雅一(1906년 1월 21일 ~ 1985년 10월 24일)
일본의 사업가, 영화제작자, 프로야구 구단주, 마주(馬主).
193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영화계에서 활동하며 '''다이에이(大映)'''의 사장으로 라쇼몽 등의 명작을 제작했고 일본 야구계에서는 다이마이 오리온즈의 구단주, 퍼시픽 리그 총재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평소 허풍과 과장이 심한 언행 때문에 '''나가타 나팔'''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1]
1906년 교토부 교토시 태생이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상당히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13살 때 도쿄로 상경하여 오쿠라 상업학교(현 도쿄경제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가 뇌출혈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4년 만에 중퇴하여 낙향하였고, 고향에서 야쿠자 조직에 몸담는 등 경찰의 요주의 대상이 되면서 홀어머니의 걱정을 끼친 끝에 가문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1925년 일본활동사진 교토 촬영소에 취직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당시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특유의 말빨과 사교성을 바탕으로 나중에 정치인이 된 실업가 '''후지무라 요시로'''와 배우 '''아사오카 노부오''' 등의 귀여움을 받으며 친분을 쌓았고, 나중에 나가타가 독립하여 영화 등 사업을 벌일 때 이들에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934년 일본활동사진을 퇴사한 나가타는 '''다이이치 영화(第一映画)'''를 설립했지만 2년 만에 문을 닫았고, 1942년 일본 정부가 주도한 영화사 통합 작업으로 창설된 '''대일본 영화제작(大日本映画製作)'''[2] 에 임원으로 입사하여 1947년 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영화 제작과 마주(馬主) 활동에 전념하던 중, 1951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 베니스 국제 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을 석권하고 자신이 소유하던 경주마가 일본 경마 더비에서 10연승 하는 맹활약을 보이면서 나가타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하였으며 다이에이 또한 1960년대 초반까지 영화계의 호황으로 좋은 실적을 거두어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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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내야수 '''야마자키 히로유키'''[3] (가운데) 입단식에 참석한 나가타 구단주. 우측은 감독이던 '''혼도 야스지'''.
그리고 평소 야구에도 관심이 많던 나가타는 1948년 동업 형식으로 도큐 플라이어즈[4] 경영에 개입하여 팀명이 '''큐에이 플라이어즈'''로 바뀌기도 했지만 1시즌 만에 손을 떼고 1949년에 인수한 '''긴세이 스타즈'''를 다이에이 스타즈로 팀명을 바꾸어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프로야구계에 뛰어들었다. 1953년 퍼시픽 리그 총재로 취임하여 '''다카하시 유니온즈''' 가입 및 통합 등 리그 재편성을 주도했으며, 다이에이 스타즈는 1957년 다카하시를 사들여서 '''다이에이 유니온즈'''가 되었다가 1958년 마이니치 오리온즈에 흡수 합병되면서 '''다이마이 오리온즈'''로 바뀌었고 나가타는 다이마이 구단의 공동 경영인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사실상의 구단 경영권을 나가타가 장악하면서 야구계에서는 '''"흡수된 곳은 다이에이가 아니라 마이니치였다"''' 라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명 감독 니시모토 유키오가 이끌던 다이마이가 1960년 일본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미하라 오사무의 다이요 훼일즈에 4전 전패로 참패하고,[5] 이를 구단주에게 보고하러 온 니시모토에게 나가타가 성질을 못이기고 막 독설을 퍼붓다가 바카야로 라는 폭언으로 인해 니시모토가 격분하여 단 1시즌 만에 사표를 던지게 만들었던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6]
1962년 자신의 사재를 털어 오리온즈의 전용 구장 도쿄 스타디움을 건립하였지만 위치선정 미스[7] 와 팀 성적 부진, 모기업인 다이에이의 재정 악화 등으로 불과 10년 만에 문을 닫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나가타는 1971년 구단 경영권을 롯데[8] 에 넘기고 야구에서 손을 떼었다.[9]
한편 1960년대 중후반 부터 TV의 급 성장으로 인해 영화계는 불황의 늪에 빠져들었고, 다이에이도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가타의 독선적인 경영으로 인하여[10] '''하세가와 카즈오''', 타미야 지로 등 간판 배우들의 은퇴 또는 퇴사, 해고 이후 다이에이는 간판 배우의 부재로 영화 흥행 실패와 경영난을 겪게 되었다.
결국 다이에이는 1971년 12월 도쿄 지방재판소의 파산 선고를 받고 도산하였으며, 나가타는 1976년 '''나가타 프로덕션'''을 세워 재기를 노렸지만 무위에 그친 채 병들고 가난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1985년 10월 24일, 나가타는 급성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79세. 그가 생전 야구계에서 보인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 나가타는 '''야구 전당'''에 입성하였다.
1. 개요
永田 雅一(1906년 1월 21일 ~ 1985년 10월 24일)
일본의 사업가, 영화제작자, 프로야구 구단주, 마주(馬主).
193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영화계에서 활동하며 '''다이에이(大映)'''의 사장으로 라쇼몽 등의 명작을 제작했고 일본 야구계에서는 다이마이 오리온즈의 구단주, 퍼시픽 리그 총재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평소 허풍과 과장이 심한 언행 때문에 '''나가타 나팔'''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1]
2. 생애
1906년 교토부 교토시 태생이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상당히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13살 때 도쿄로 상경하여 오쿠라 상업학교(현 도쿄경제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가 뇌출혈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4년 만에 중퇴하여 낙향하였고, 고향에서 야쿠자 조직에 몸담는 등 경찰의 요주의 대상이 되면서 홀어머니의 걱정을 끼친 끝에 가문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1925년 일본활동사진 교토 촬영소에 취직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당시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특유의 말빨과 사교성을 바탕으로 나중에 정치인이 된 실업가 '''후지무라 요시로'''와 배우 '''아사오카 노부오''' 등의 귀여움을 받으며 친분을 쌓았고, 나중에 나가타가 독립하여 영화 등 사업을 벌일 때 이들에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934년 일본활동사진을 퇴사한 나가타는 '''다이이치 영화(第一映画)'''를 설립했지만 2년 만에 문을 닫았고, 1942년 일본 정부가 주도한 영화사 통합 작업으로 창설된 '''대일본 영화제작(大日本映画製作)'''[2] 에 임원으로 입사하여 1947년 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영화 제작과 마주(馬主) 활동에 전념하던 중, 1951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 베니스 국제 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을 석권하고 자신이 소유하던 경주마가 일본 경마 더비에서 10연승 하는 맹활약을 보이면서 나가타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하였으며 다이에이 또한 1960년대 초반까지 영화계의 호황으로 좋은 실적을 거두어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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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내야수 '''야마자키 히로유키'''[3] (가운데) 입단식에 참석한 나가타 구단주. 우측은 감독이던 '''혼도 야스지'''.
그리고 평소 야구에도 관심이 많던 나가타는 1948년 동업 형식으로 도큐 플라이어즈[4] 경영에 개입하여 팀명이 '''큐에이 플라이어즈'''로 바뀌기도 했지만 1시즌 만에 손을 떼고 1949년에 인수한 '''긴세이 스타즈'''를 다이에이 스타즈로 팀명을 바꾸어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프로야구계에 뛰어들었다. 1953년 퍼시픽 리그 총재로 취임하여 '''다카하시 유니온즈''' 가입 및 통합 등 리그 재편성을 주도했으며, 다이에이 스타즈는 1957년 다카하시를 사들여서 '''다이에이 유니온즈'''가 되었다가 1958년 마이니치 오리온즈에 흡수 합병되면서 '''다이마이 오리온즈'''로 바뀌었고 나가타는 다이마이 구단의 공동 경영인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사실상의 구단 경영권을 나가타가 장악하면서 야구계에서는 '''"흡수된 곳은 다이에이가 아니라 마이니치였다"''' 라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명 감독 니시모토 유키오가 이끌던 다이마이가 1960년 일본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미하라 오사무의 다이요 훼일즈에 4전 전패로 참패하고,[5] 이를 구단주에게 보고하러 온 니시모토에게 나가타가 성질을 못이기고 막 독설을 퍼붓다가 바카야로 라는 폭언으로 인해 니시모토가 격분하여 단 1시즌 만에 사표를 던지게 만들었던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6]
1962년 자신의 사재를 털어 오리온즈의 전용 구장 도쿄 스타디움을 건립하였지만 위치선정 미스[7] 와 팀 성적 부진, 모기업인 다이에이의 재정 악화 등으로 불과 10년 만에 문을 닫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나가타는 1971년 구단 경영권을 롯데[8] 에 넘기고 야구에서 손을 떼었다.[9]
한편 1960년대 중후반 부터 TV의 급 성장으로 인해 영화계는 불황의 늪에 빠져들었고, 다이에이도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가타의 독선적인 경영으로 인하여[10] '''하세가와 카즈오''', 타미야 지로 등 간판 배우들의 은퇴 또는 퇴사, 해고 이후 다이에이는 간판 배우의 부재로 영화 흥행 실패와 경영난을 겪게 되었다.
결국 다이에이는 1971년 12월 도쿄 지방재판소의 파산 선고를 받고 도산하였으며, 나가타는 1976년 '''나가타 프로덕션'''을 세워 재기를 노렸지만 무위에 그친 채 병들고 가난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1985년 10월 24일, 나가타는 급성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79세. 그가 생전 야구계에서 보인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 나가타는 '''야구 전당'''에 입성하였다.
3. 여담
- 1951년 다이에이가 제작한 영화 라쇼몽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라며 혹평하고 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제작비 좀 아끼라며 잔소리만 늘어놓았으며,[11] 시사회 도중 자리를 뜰 정도로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라쇼몽이 베니스 국제 영화제, 아카데미상에서 잇달아 상을 받고 해외에서 호평을 얻자 자신의 입장을 확 뒤집어 라쇼몽을 극찬했다고 한다(...). 게다가 인터뷰 때 이런 명작이 나오게끔 이 몸이 제작한 공이 큰 것 아니겠느냐며 자화자찬 하는 발언을 해댔고, 당연히 구로사와는 "나가타 저 놈을 확 두들겨 패버릴까?" 라며 아주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 후 구로사와는 7인의 사무라이를 감독할 때에도 제작자 모토키 소지로를 비롯한 이들과 비슷한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 1956년 시즌 종료 후 나가타가 구단주이던 다이에이 스타즈가 다카하시 유니온즈를 인수 합병했는데, 이로 인해 퍼시픽 리그는 7팀 체제가 되면서 경기 일정이 절름발이 처럼 되었다. 이에 나가타가 제안한 해결책은 1957년 시즌 최하위 팀은 다른 팀에 강제 합병이었다. 만년 하위팀이던 킨테츠 펄스가 또 꼴찌를 하겠거니 라는 생각으로 제시한 것이었는데, 정작 그 해 최하위는 나가타의 다이에이 유니온즈 였고, 킨테츠는 6위를 마크했다. 결국 다이에이는 마이니치 오리온즈에 강제로 통합당하고 말았다(...).
- 1964년 한신 타이거스의 고야마 마사아키와 도쿄 오리온즈의 야마우치 카즈히로를 맞바꾸는 이른바 세기의 트레이드 당시, 나가타는 직접 한신 사장에게 "고야마를 우리 팀에 보내 주시오" 라며 전화로 줄기차게 요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야마는 감격하여 도쿄 행에 두말없이 응했다고.
- 독실한 일련정종 신자였으며, 만년에는 일련정종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 교육 사업에도 관심이 커서 세이신여자학원(聖心女子学院)을 후원하면서 도쿄 도내 옛 쿠니노미야(久邇宮) 사저 부지를 사들여 기증하고 삿포로 소재의 학원 부지도 마련해 준 적이 있다. 아들인 나가타 히데마사가 어느 날 "아버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라고 묻자, "훌륭한 학교를 세워서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구별 없이 교육을 받게 해 주는 것"이라고 답했다 한다. 사람이 독선적이고 괴팍한 면은 있었지만 성품 자체가 악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그래서 기자들은 나가타가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기사화 했다가 적지않게 낭패를 보는 바람에 그의 발언은 절반 정도만 사실로 인정하고 지면에 실을 정도였다고...[2] 다이에이의 전신.[3] 1946년생의 내야수이며 1965년 도쿄 오리온즈에 입단하여 팀명이 롯데 오리온즈로 바뀐 이후 1978년 까지 플레이 하고 1979년 세이부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되어 1984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20시즌 통산 성적은 '''2251경기 출장, 2081안타, 타율 0.265, 270홈런, 985타점, 137도루.''' 은퇴 이후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4] 당시 도큐의 전무이사 이자 후일 토에이의 실질적인 창업주가 되는 오카와 히로시가 구단주였다.[5] 그것도 전부 1점차 패배였다(...).[6] 니시모토는 일본프로야구계의 대표적인 콩라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운의 명장이며 수많은 일본시리즈 출전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승 횟수는 0이다. 그나마 현역 시절이던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즈 소속으로 딱 한번 '''일본 제일'''을 경험한 바 있다.[7] 아라카와구 주택가에 구장을 만들었으며, 도쿄 중심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8] 롯데는 이미 1969년 부터 오리온즈의 네이밍 스폰서로 참여하고 있었다.[9] 도쿄 스타디움은 이후 철거됐으며 현재는 스포츠 센터와 연식 야구장이 들어서 있다. 롯데 측에 구단 인수 제의 시 구장도 함께 인수할 것을 요청했으나 롯데에서 거부하였는데, 투수 출신 감독이었던 가네다 마사이치가 '''도쿄 스타디움은 너무 타자 친화적이라 투수들의 피홈런이 늘어날 것'''이라며 주장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도쿄를 떠난 롯데는 무연고를 선언하며 집시 롯데의 길로 스스로 들어서고 말았다.[10] 아들인 나가타 히데마사 부사장도 이에 한 몫 거들었다고 한다.[11] 정작 라쇼몽은 등장인물이 10명도 안되는 저예산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