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다하루
1. 개요
일본의 전 야구선수이자 전 야구감독. '''NPB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으며, 1960-1970년대 세계를 향해 성장하는 일본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현재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프로야구단의 회장. 현역 시절 포지션은 1루수.
한국식 독음인 '''왕정치'''라고 많이 알려져 있다. 도쿄에서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중화민국 국적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쌍둥이 누나가 있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저장성 출신의 중국인 왕사복(王仕福, 왕쓰푸 / 오 시후쿠, 1985년 사망)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인 오 토미(王 登美, 2010년 사망, 무려 108세까지 장수했다.)이다. 창씨개명 정책에 따라 집안 전체가 어머니 쪽 성(當住:토즈미)을 따르기도 했지만, 일본의 패전 후 원래대로 왕씨 성으로 복귀했다. 원래는 돈을 번 뒤에 본토로 돌아가 큰아들은 의사[6] 로, 작은아들인 오 사다하루는 전기 엔지니어로 키울 생각이었다고 하나,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1949년에 완전히 공산화되자 일본에 정착했다고 한다.[7]
오 사다하루는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한다고 WBC 출정 인터뷰에서 밝혔다.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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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 실업고를 졸업하고 195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그러나 입단 첫 해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타율 0.161, 7홈런이란 성적을 남겼는데, 삼진이 많아서 팬들로부터 그의 성을 본따 "왕, 왕, 삼진왕"이라고 야유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아라카와 히로시[8] 코치가 그를 전담 지도하면서 타격 스킬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9] 특히 전설에 남은 외다리(一本足) 타법의 힌트를 준 이가 바로 아라카와 코치이다. 결국 피나는 훈련 끝에 오 사다하루는 1962년 38홈런으로 센트럴리그 홈런왕에 등극하며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1964년에는 이후 50년 가까이 깨지지 않을 단일시즌 55홈런 기록을 달성하며 신화적 지위에 오른다. 22년간의 현역 생활동안 '''수위타자 5회[10] , 홈런왕 15회[11] , 타점왕 13회[12] , 트리플 크라운 2회[13] '''에 빛나며 일본프로야구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확실히 오 사다하루는 일본 야구에서 홈런하면 떠오르는, 일본 리그에서 몬스터급 기록을 남겼던 전설적인 거포이다.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은 행크 아론을 넘어선 기록이고 일본에서는 오를 "세계의 홈런왕"이라 부를 정도이지만, 당시의 미국과 일본 야구의 레벨 차이와 당시 일본 구장들의 평균 거리와 미국 구장의 평균거리가 거의 10미터 가깝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들어 미국 쪽에서는 그다지 인정하고 있지는 않다.[14]
1977년 9월 3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vs 야쿠르트 스왈로즈 戰에서 오 사다하루가 756호 홈런을 쳐서 행크 아론의 기록을 깨는 장면. 당시 투수는 스즈키 야스지로[15] 였으며, 스즈키는 결국 이 756호 홈런을 맞고 곧바로 강판당하며 이날 패전투수가 되었다.[16]
행크 아론과의 홈런 더비
이후 행크 아론이 일본에서 그와 홈런 대결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가 1974년. 행크 아론은 40세였고 선수생활을 마감하던 시점(2년 뒤인 1976년 은퇴했다), 오 사다하루는 34세였고 그해 시즌에도 타격 3관왕을 했을 정도로 절정의 기량을 유지하던 때[17] 그러나 체격부터 행크 아론의 압승이고 영상에서 보듯 타구 비거리의 수준이 다르다. 슬슬 휘둘러도 담장을 가볍게 넘기는게 행크 아론. 오 사다하루와 행크 아론의 홈런 개수를 가지고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하겠다. 차원이 다른 리그와 구장환경에서 뛰었으니까.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는 일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는건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기. 그만큼 미일 야구의 격차가 크던 시점이다. 오 사다하루는 행크 아론과 우열 비교가 가능한 레벨 자체가 못 된다고 하는게 정답이다.
거기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이었던 '''고라쿠엔 스타디움은 현재 기준으로도 심하게 탁구장이었다. 공식 발표로 좌우 펜스가 91m/88m(러키존 시절)에 중앙 120m인데 실측결과는 그보다 훨씬 작았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배트 규정이 강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압축배트를 쓰는 선수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물론 오 사다하루도 압축배트를 사용했다.[18] 여담으로 베이브 루스가 홈런을 쳐낸 양키 스타디움도 좌타자들을 위해 당겨놓았기 때문에 우측펜스까지의 거리가 메이저리그에서도 짧은 편이라고 까였는데, 그게 97m로 고라쿠엔 구장과의 차이는 무려 10m.
다만 왕정치의 기록의 가치에 대해 논할 때는 1970년대 당시에는 지금처럼 교통/통신이 발달되어있지 않아서 국가 간 야규 교류도 활발하지 못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그나마 프로리그라도 있던 일본이 당시 미국이나 쿠바 같은 곳을 제외하고는 가장 야구의 수준이 높았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일본 프로야구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백인천이 40살이 넘는 나이에도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서 타율 .412에 장타율 7할 4푼을 기록했고, 90년대까지만 해도 한일 슈퍼게임에서 밀렸을 정도로 과거에는 국가 간 레벨차이가 극심했다.
그래도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기록에는 국적과 인종의 차가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개인 박물관에 오 사다하루의 방망이를 받아 보관하였다. 홈런 개수만으로 오 사다하루의 역량이 메이저의 유명한 강타자보다 높다고 할 수는 없으나, '''기록이 평가 절하될 까닭은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같은 조건에서 뛰었던, '슬러거' 소리를 들었던 선수들보다도 거의 2배에 가까운 홈런 수치를 기록하며[19] 넘사벽의 위업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당시 오 사다하루의 기량 또한 적어도 탈 NPB급이었다는 것만큼은 인정받아야 한다.
입단 후 은퇴하기까지 22년간 '''시즌 통산 868홈런'''[20] 을 쳐냈으며, 시즌 외의 기록[21] 까지 합치면 1000개 이상의 홈런을 쳐낸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13년 연속 홈런왕, 8년 연속 타점왕, 8년 연속 40홈런'''을 치며 기복도 없었고, 통산 슬래시라인도 .301/'''.444'''/'''.634 OPS 1.080''' [22] 로 말 그대로 일본프로야구를 지배한 타자의 모습을 보였다. 당시 나가시마 시게오와 '''ON타선'''을 구축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우승(1965~1973)을 이끌었다. 당연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오 사다하루가 현역 때 달고 있었던 등번호 1번은 영구 결번이다.
스즈키 이치로가 홈런, 장타율 등을 제외하고 일본 야구계의 타격기록을 웬만하면 다 경신했지만 아직 1위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 통산 루타수이다. 오 사다하루의 현역 통산 루타수는 통산 5862루타. 이치로는 2016시즌 종료시점에 5809루타이다. 이치로가 현역 생활을 계속 이어간다면 일본인 통산 루타 기록도 이치로의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가 2017년에 결국 일본 프로야구 출신 선수 중 통산 루타수는 2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물론 일본 리그만을 한정한다면 여전히 1위이다.) 참고로 한국 선수 중 통산 최다 루타수가 이승엽인데 5394루타이다.
3. 연도별 기록
'''빨강색'''은 NPB 역대 1위.
4. 지도자 경력
은퇴 이 후 후지타 모토시 감독 휘하에서 '''조감독''' 을 맡으며[23] 감독 수업을 받은 뒤 1984년부터 5년 간 1군 감독을 맡았다.[24] 그러나 시기가 워낙 교진군은 우승 아니면 죽음 이라는 극단적인 시기여서[25] 5년 동안 리그 우승 1회(1987년)[26] 에 그친 책임을 물어 감독직 사퇴,[27] 이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을 맡을때까지 야구해설가, 평론가의 길을 걸었다.[28][29]
1994년, 퍼시픽 리그에서 한창 막장가도를 달리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직을 제의받은 오 사다하루는 처음엔 요미우리 와의 관계 때문에 취임을 망설였지만 다이에의 GM 네모토 리쿠오가 "거인이란 집안은 이미 장남인 나가시마가 대를 이은 셈이다. 당신은 차남이니 부담 가질 필요가 있는가?" "이제 시대는 나가시마 vs 오 사다하루 의 라이벌전을 원한다" 라고 간곡히 설득하여[30] 결국 오는 다이에 감독직을 받아들였다. 다이에의 수장이 된 오는 3년 간 필사의 리빌딩 끝에 1998년 무려 20년 만에 A클래스(리그 3위 이상)를 달성한 후 1999년에 '''후쿠오카 이전 이후 처음이자 35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고[31] , 이후 감독직에서 용퇴하는 2008년까지 일본시리즈 2회 우승, 퍼시픽리그 3회 우승, 9년 연속 3위 이상을 기록하며 팀을 퍼시픽 리그의 끝판왕으로 환골탈태시킨다. 그리고는 2006년에 위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체력적인 문제로 더 이상 팀의 지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2008년 시즌을 끝으로 지도자를 포함한 현장 일선에서의 야구인 생활을 떠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리그 바닥을 해맸던 호크스를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최강팀으로 만들어낸 전적 때문에, 후쿠오카 팬들에게 오 사다하루 감독은 그야말로 갓동님. 비록 감독 마지막 해인 2008년에 꼴찌로 시즌을 끝냈지만,[32] '''"왕감독 까지 말죠. 왕감독 까는 놈 캐뉴비"'''라는 말이 나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을리 없고 부임 3년 간 팀 리빌딩을 하던 기간 중 1996년 5월 9일에 일본 야구계에 유명한 에피소드인 '''날계란 투척사건'''을[33] 당하기도 했다.[34] 어쨌든 '비 온 뒤 땅 굳어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듯 싶다.
현재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구단 회장과 NPB 커미셔너 특별고문으로 있다. 그리고 소프트뱅크 구단의 프런트 수장으로서 2010년대, 혹은 2020년대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소프트뱅크 왕조'''를 이룩함으로써 '''선수, 감독, 프런트로서 모두 성공한 거의 유일한 야구인이 되었다.'''
5. 통산 감독 성적
6. 이야기거리
6.1. 플레이 스타일
앞서 말했듯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 외다리타법으로 유명하며 한때 이승엽의 주 타법이였다. 1루수로서의 수비능력 역시 리그 최고. 시즌 수비기회 연속 무실책 991회(1980년 4월 25일~10월 10일)를 기록, 1루수로서의 센트럴 리그 기록을 기록할 정도였다.[37] 1972년 NPB 골든글러브[38] 가 처음 생긴 이래로 은퇴시즌까지 9년 연속 수상을 했다.[39]
다만 이와는 별개로 일본프로야구 1루수 최다 실책 보유자이기도 하다.(165개) 수비가 나빴다는 증거라기보다는 주전으로 활동한 기간이 길어서 생긴 기록으로 볼 수 있다.
6.2. 초대 WBC 우승 감독
WBC 1회 대회 때 일본 감독을 역임하여 일본을 WBC 초대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WBC 1회 대회 감독 지명 당시 상당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고, '대만인에게 일본팀의 감독을 맡길 수 없다'라는 비판도 들었지만 결국 우승을 해냈고, 요미우리 시절 동료였고 동갑내기 절친인 장훈은 "지금까지 사다짱(오 사다하루의 애칭)을 비웃은 바보들은 전부 머리를 밀고 사죄하라!"라는 명언 아닌 명언을 남겼다.(사실 장훈 옹은 다이에 호크스의 3년 리빌딩 시절 때 이 말을 처음 했다.)
6.3. 시즌 55홈런 저지 논란
문제라면 그의 '한 시즌 55홈런' 기록 등 워낙 일본 야구계에 남긴 영향이 크다 보니, 이 기록을 경신하려는 선수, 특히 외국인 선수에게는 여러가지 불이익이 있었다. 일본 야구계 일각에서조차 왕정치의 기록이 이런 식으로 유지되는 것을 두고 일본 자민당의 장기집권 체제인 55년 체제를 본따 '''"55호 체제"'''라 불렀을 정도였다. 대표적인 피해자로는 한신 타이거스의 랜디 바스, 긴테쓰의 터피 로즈, 세이부의 알렉스 카브레라 등이 있다.
2013년 오랜만에 그의 기록에 도전한 이가 등장했는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그 주인공으로 8월달 월간 18홈런을 쳐내면서 이미 30경기 넘게 남은 시점에서 50홈런을 돌파했다. 더불어 9월 15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홈경기에서 56호와 57호 연타석홈런을 작렬시키면서 오 사다하루 기록은 49년만에, 이승엽의 아시아 기록은 10년만에 모두 갈아치웠다. 그리고 60호 홈런까지 치면서 아시아 처음으로 60홈런에 도달했다. 위에 열거한 사례들에서처럼, 2013년에 기록을 달성할 즈음 발렌틴을 상대하는 투수들이 그에게 볼넷만 주는 등 홈런을 칠 빌미를 주질 않자 국내 야구 팬덤에서도 "그따위 기록 하나가 신성하다고 볼로 보내버리냐"는 악평을 많이 들었다. 이 당시 국내외적으로 쓴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그에 대해 모 구단 투수코치가 '''기록을 빼고 생각해도 타율이 .340에 OPS가 1.200 이상인 타자한테 정면승부가 먹혀들겠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박으로 비난을 잠재웠다.
6.4. 논란
일본에서 매해 열리는 세계 어린이 야구대회 재단 관계자를 맡고 있다. 문제는 2019년 후쿠시마로부터 1시간 거리 밖에 안되는 아즈마 경기장에서 열리는 대회를 찬양하면서 후쿠시마가 안전하다고 인터뷰하고 있다...한국은 이 대회에 불참했다.
6.5. 일화들
- 일본 야구계의 또 한 명의 레전드인 장훈과는 여러 이유로 둘도 없는 막역지우이다. 1940년 용띠 동갑내기에 1959년 프로입문 동기이고 거기다 프로데뷔 전부터 많은 구단의 스카웃 표적이 됐다든지, 국적 문제라든가, 외국인 대접을 받는 타자라든지 등등 공통점들이 많았다. 그렇게 막역지우가 된 장훈과 오 사다하루는 프로 데뷔시절부터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오 사다하루가 장훈의 히로시마 집에 놀러와서는 장훈의 어머니가 끓여준 수제비를 먹고 목욕까지 한 뒤에 자고 갔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라고. 오 사다하루가 선수 시절 딱 한번 요미우리 구단에 대든적이 있는데 장훈이 1979년 시즌 종료 후 롯데 오리온즈로 트레이드 될 때 였다. 그 해 납회식 때 장훈이 구단주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자 오 사다하루는 발끈하여 "장훈이 거인에서 3000안타를 칠 수 있게 해달라"고 구단주에게 대들었다고 한다. 그때 구단주가 '자네 술 취했나?' 라며 불쾌해했고 장훈은 오 사다하루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이제 거인에서 내가 할 몫은 없다. 롯데로 가겠다" 라면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이런 깊은 인연 덕택인지, 오 사다하루 감독이 욕을 대차게 먹으며 실시한 리빌딩이 성공해 1999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하자 장훈은 지상파 방송에 출연해 "그동안 왕짱(애칭)을 욕한 놈들은 모두 머리를 밀고 사죄해라!"라고 대차게 일갈하기도 했다.
- 1977년에 처음 생긴 국민영예상을 최초로 받았다. 2020년까지 26명, 1개 단체 밖에 받지 못 한 문화/스포츠 관련 최고 등급의 상훈인만큼 일본의 국민적 영웅[40] 으로 인정받았다.
- 그런 스타인 만큼 그에 대한 기사도 많고 방송출연, 책 등 미디어 활동도 활발했으며 광고도 많이 찍었다. 광고 몇 개를 살펴보면...
[41]
- 1994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15년 1월에는 대만 야구 명예의 전당(臺灣棒球名人堂)의 2번째 헌액자로 선정되었다.
- 2010년 7월 3일 후쿠오카 돔에 "오 사다하루 베이스볼 뮤지엄"이 개관했다. 현역시절 받은 각종 트로피 및 상패 등을 비롯하여 현역시절 쓰던 유니폼, 스파이크, 미트, 배트, 756호 홈런을 쳤을 때 썼던 배트 등이 전시되어 있으니 혹시 야후돔 갔다가 시간 남으면 한번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입장료도 1천엔으로 크게 비싸지는 않다.
-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좌완투수 중 하나인 스티브 칼튼의 각성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1968년 당시 칼튼이 소속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일본 선발팀과의 경기에서 오 사다하루와 칼튼이 맞붙었는데, 오가 홈런을 치자 칼튼은 다음 타석에서 그를 위협하려고 처음으로 몸쪽 슬라이더를 던져 봤다고 한다. 이때 오 사다하루가 어깨쪽으로 날아오는 그 공을 보고 몸을 뒤로 피했는데, 공의 궤적이 휙 변해 스트라이크존에 꽂히는 걸 보고 칼튼은 '내가 멋진 슬라이더를 가졌구나'라고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다고.
- 요미우리 감독시절에 주니치 드래곤즈와 벤치 클리어링이 잦았는데, 카리스마로 유명한 오 사다하루였지만 상대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오 사다하루 앞에서 주먹을 쥐어보이면서 '너 님 나랑 맞짱뜰거삼?'하고 도발을 하자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도 해서 당시 팬들이 조금 실망했다는 카더라도 있었다. 실제 상황을 설명하자면 <돌격 크로마티 고교>로 유명한 요미우리의 워렌 크로마티가 빈볼을 맞자 주니치 투수를 주먹으로 가격했고, 호시노가 오 사다하루에게 주먹을 쥔 제스쳐를 취하며 "주먹으로 치는건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호시노는 안티 요미우리로 유명하지만 나가시마나 오 사다하루 같은 선배격에게는 굉장히 깍듯하다고 한다.
- 홈런을 치고도 절대로 세리머니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딱 한번 최다 홈런 신기록을 경신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환호를 했다.
- 팬 서비스는 확실했던 선수. 선수시절에도 팬들의 요청에 인상 찌푸린 적이 없었으며, 당시 팀 동료였던 도이 쇼조가 "왕이 싸인 안하고 연습만 했으면 홈런 1000개는 더 쳤을 것이다. 다만 싸인도 홈런도 성실히했으니 기록과 기억 모두 가져간 남자가 됐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일화로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 시절, 당시 신인이었던 고쿠보 히로키가 팬들의 사인 요구에 힘들다며 "경기전에는 악수나 사인 요청을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왕이 "바보 같은 자식, 너에게 부탁하는 팬의 용기를 생각해라!"라고 불호령을 내린적이 있었다. 왕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어릴 때 고라쿠엔 구장 앞에서 퇴근하는 거인 선수들에게 싸인을 요구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본 척도 안하고 지나갔으나, 요나미네 카나메 선수가 미소를 띄며 싸인을 해 주었고, 이 요나미네를 보고 감명을 받아 나중에 스타가 되면 웬만해선 팬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잘 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고령인 현재도 팬들의 사인 요청에는 기분 좋게 응하지만 최근 유명인의 사인을 받아서 인터넷 경매에 내놓는 세태를 의식한 듯 사인을 하면서 "난 (현역시절부터) 하도 사인을 많이 해서 내 친필 사인이라고 해도 워낙 흔하기 때문에 인터넷 경매에 내놔봐야 1엔의 가치도 없단다."라고 했다 카더라.
- 아직도 입만 떼면 현역들의 나약함을 까면서 "우리 때 선수들이 더 대단했다"면서 "너희들 중에 오처럼 통산 800홈런 칠 수 있는 선수 있어?", "우리가 현역 때 기량이면 지금 현역 너희들하고 붙어도 다 쳐바름"이라고 주장해대는 NPB의 원로급 및 올드비 들이 꽤 있는 데에 대해 정작 본인은 "그 때와 지금은 구장의 크기도 달라지고 야구수준에 차이가 있다. 현역 때의 내가 그 모습 그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에 온다면 그 때처럼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인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면서 현대의 야구가 발전해 있음을 인정하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다만 "그때와 지금은 경제력, 장비, 시설, 기술, 훈련법 등 모든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만큼 소년시절부터 지금 시대의 영양섭취, 훈련법, 야구이론 등으로 내가 트레이닝을 한다면 지금 현역들에게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면서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감독-회장으로 구단 업무 현업에 오랜 기간 종사하며 야구의 발전상을 세밀하게 지켜본 위치에 있는만큼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당시 야구의 국제교류가 거의 없던 시절이지만 각종 국제대회나 올스타전에 1타로 선발된 덕에 스프링캠프, 친선전 등을 포함해 공식기록으로만 통산 110경기 338타석이나 미국과 시합을 했다. 이정도면 1시즌치 조금 못되는 기록. 이 338타석에서 25홈런을 기록했다. MLB기준으로 보면 적당한 중장거리포 정도의 기록으로 꽤 나쁘지 않은 기록. 상대한 미국도 선수들의 수준도 높아서 폄하할 기록은 절대 아니다. 미국이 지금은 (특히 내구성에 민감한 투수들은) 마이너리거나 내보내지만 당시는 야구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국제교류 자체가 드물어 겸사겸사 해외여행도 가 볼수 있는 기회고 하다 보니 에이스들도 많이 가서 돈 드라이스데일, 톰 시버 등등 당대 MLB 레전드 투수들을 상대로 낸 기록. 덕분에 당시엔 미국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일본 야구선수였다.
- 톰 시버가 평하기를 메이저리그에 와도 25~30홈런은 칠 만한 타자라고 평했고. 다른 투수들도 공통적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타자라며 왕을 추켜세웠다. 물론 대부분 일본에서 치뤄진 친선전에서의 인터뷰인 만큼 립서비스가 포함된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일본 올타임 홈런왕이 고작 적당히 잘 하는 주전급의 선수 정도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는 점은 왕의 실력을 높이 사는 동시에 당시 미일 야구격차가 얼마나 현격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 파랜드 스토리 6에 등장하는 허그의 최종무기가 오즈 배트(Oh's bat)인데 그 오가 바로 이 오 사다하루이다.
- 그의 이름을 딴 소행성도 있다.(61189 Ohsadaharu)
- 높은 성의 사나이(드라마)에서도 라디오 뉴스에서 언급된다. 이 세계관에서도 슈퍼대스타인 것은 같은 모양이다.
7. 관련 문서
[1] 표준중국어 병음으로는 Wáng Zhēnzhì[2] 한자 독음 시 왕정치. 이 이름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3] 이건 호적상 생일이고 실제 생일은 열흘 빠르다고 한다.[4] 원래 좌투우타였다가 학창시절 좌투좌타로 전향. 우타석에서 쳤던 이유는 오른손잡이로 강제 교정을 시키던 아버지에게 혼날까봐라는 뒷이야기가 있다.[5]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6] 10살 터울의 형인 테츠히로는 게이오기주쿠대학으로 진학해 의사가 되었다. 2008년 사망.[7] 절친 장훈의 1990년대 인터뷰에 의하면 오 사다하루에게 귀화압력이 상당했으나, 그는 이를 모두 거부했고, 영주권 취득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무언가의 재류자격을 갱신해가며 일본에 거주한다고 한다.(영주자의 하위호환인 정주자일 가능성이 농후)[8] 아라카와 코치와의 인연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는데 아라카와가 마이니치 오리온스 소속 선수시절 중학생이던 오 사다하루가 왼손잡이임에도 우타석에서 치는걸 보고 좌타석으로 바꾸길 권유하기도 했다. 오 사다하루 이전의 제자는 에노모토 키하치가 있다.[9] 오 사다하루 관련 사진을 찾아보면 방안에서 진검을 휘둘러 아라카와 코치가 떨어뜨려 주는 종이를 베는 훈련을 하는 이미지도 있다.[10] 1968~70, 1973~74.[11] 일본프로야구 최다 기록. '''1962년부터 74년까지 1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한 것도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장 기록이다. 1975년에야 라이벌 한신 타이거스의 타부치 코이치가 홈런왕을 차지하며 연속 홈런왕 기록 연장을 저지한다. 오는 다음해인 1976년과 1977년 홈런왕을 탈환하며 15차례 홈런왕이 되었으나 이후 야마모토 코지나 카케후 마사유키 등이 대두하며 홈런왕 왕좌를 다시 차지하지 못했다.[12] 일본프로야구 최다 기록. '''1971년부터 78년까지 8년 연속''' 타점왕도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장 기록.[13] 1973~74. 특이 사항으로 이 두 시즌 모두 단일시즌 출루율 5할-장타율 7할-OPS 1.250을 넘겼으며 특히 1974년에 기록한 '''출루율 .532'''와 '''OPS 1.293''', '''158 볼넷''', '''고의사구 45개'''는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 기록이다. [14] 지금이야 미국에서도 미일 통산 기록을 쳐주기는 하지만(마쓰이 히데키의 500홈런, 스즈키 이치로의 4000안타라든지) 그건 그 선수가 그만큼 야구를 오래했다는 것을 인정하는거지 일본야구가 미국야구와 대등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나마 오늘날에는 그 격차가 줄어들었으니 이 정도지 과거에는...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5]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야쿠르트 스왈로즈,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뛰며 통산 81승 54패 52세이브, 548탈삼진과 방어율 3.68의 기록을 남겼다. 또한 1978년 최고승률 타이틀을 수상했고, 현역 당시 세이브 포인트를 수상 기준으로 하는 바람에 구원왕은 단 1번도 못땄지만 1984~85년 2년 연속으로 최다 세이브를 기록한 바 있다.[16] 다만 이해 시즌에 스즈키는 팀을 구단 사상 첫 리그 2위로 이끌며 14승 9패, 72탈삼진, 방어율 3.67의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17] 1974년 행크 아론의 성적은 20홈런 .268 .341 .491, 나쁘진 않지만 40홈런을 밥먹듯 때리던 전성기와는 비교도 안되는 성적. 반면 당시 오 사다하루의 성적은 무려 '''49홈런 .332 .532 .761'''라는 본즈급 성적으로,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과 상술한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 OPS를 기록한 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다.[18] 구체적으로는 대나무 압축 배트. 이 때문에 이후 일본 야구에서 자주 대나무 압축 배트를 볼 수 있었다.[19] 이는 곧, 당시 리그의 선수들이 대체적으로 '''지금에 와서는 지극히 좁아보이는 규모의 그라운드도 넘기기 힘들어 했다'''는 얘기가 된다.[20] 역대 2위인 노무라 카츠야(657홈런)와 200개 이상 차이난다. 여담으로 현역 마지막 홈런을 허용한 선수가 훗날 기아에서 코치를 지냈던 칸베 토시오다.[21] 일본시리즈 29개, 올스타전 13개, 미일 올스타전 23개, 시범경기 93개[22] 통산 출루율, 장타율, OPS 모두 일본프로야구 역대 1위이다.[23] 이 시기 요미우리의 지도체제를 감독 후지타, 조감독 오, 수석코치 마키노 시게루 3명의 실권자가 있다 하여 삼두정치라 불렀다. 하지만 오 사다하루의 감독 첫 해에 마키노 시게루는 방광암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이는 오가 감독을 맡은 1998~2000년 다이에에서도 재현된다. (감독 오, 조감독 쿠로에, 수석 코가 히데히코)[24] 요미우리 역사상 두번째 외국인감독. 첫번째는 한국전쟁 이후 일본으로 귀화한 후지모토 히데오.[25] V9 이후 1975년에 교진군 사상 처음으로 세리그 꼴찌를 찍었고, 그 뒤 1976~77년 2년 연속으로 세리그 우승은 했으나 일본시리즈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쳐발리고, 그 뒤 세리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쿠르트 스왈로즈 등 전통의 약체들이 갑툭튀 하는 바람에 우승을 못했다, 그 뒤 1981년에 나가시마 시게오에서 후지타 모토시로 감독이 바뀐 뒤 리그 우승을 한 뒤 일본시리즈에서 같은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덕아웃 시리즈에서 승리해 간신히 V9 이후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나, 그 뒤 리그 우승은 별로 이루지 못하고, 일본시리즈에 가면 한큐처럼 V9 시절에 탈탈 털린 팀이나 요미우리만 만나면 명승부를 만들어내는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당하는 바람에 코칭스탭은 그만큼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26] 일본시리즈에선 같은 교진군 OB 모리 마사아키가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2승 4패로 패배했다. 여담으로 이 해 일본시리즈 5차전은 고라쿠엔 구장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NPB 공식 경기였다.[27] 사실 성적은 5년연속 A클래스를 찍을 정도로 좋았다. 문제는 프런트가 원했던 건 일본시리즈 우승이란 거.. [28] 사실 1992년에 닛폰햄 파이터즈의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당시 2번째로 거인군의 감독을 맡았던 후지타 모토시 감독의 경질설이 돌자 거인군 감독 컴백을 염두에 두고 거절했다.(결국 닛폰햄은 오사와 케이지를 감독직에 복귀시킨다.) 그러나 오 사다하루가 거인군 감독으로 컴백하는 일은 없었다. 결국 오 사다하루는 3년 뒤인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 취임이라는 선택을(요미우리 감독과 성골직도 포기하게 된 건 덤.) 하게 된다.[29] 여담으로 오 사다하루는 요미우리 감독시절 준우승 책임을 지고 사퇴가 기정사실화 될때 요미우리가 선수치고 후임 감독 후지타 모토시를 발표해버렸다. 사퇴가 확실시 되어도 공식적 발표를 안한 상태서 바로 후임을 발표한건 아직까진 감독 신분이자 요미우리의 레전드 출신인 오 사다하루를 물먹이는 짓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필 인물이 후지타 모토시의 컴백이라 팬들도 "나가시마에 맞먹는 레전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비난을 했지만 소용없는 일.. 오 사다하루도 이에 꽤 불쾌했을 만하지만 무덤덤하게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나갔고 그뒤에도 요미우리 감독을 기다렸으니 진짜 대인배 중의 대인배.[30] 여기에 위에 얘기한 감독 사퇴 및 선임과정서 벌여놓은 요미우리의 무례를 얘기하며 오 사다하루를 자극했다는 얘기도 있다. 둘은 2000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와 다이에의 감독으로서 정면대결해 '''ON 시리즈'''를 실현시켰으며, 이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가 우승했다. 2001년 시즌 종료 후 나가시마가 '종신 명예감독'으로 감독직을 은퇴하고 하라 타츠노리가 요미우리의 감독이 되며 ON은 다시 맞붙지 못하게 되었다.[31] 이게 '''명목상 최초 외국인 감독 일본시리즈 우승'''이다. 알다시피 일본에선 오 사다하루를 외국인으로 취급을 하지 않기에, 최초의 외국인 감독 우승을 2005년 일본시리즈의 우승팀 감독인 바비 발렌타인(당시 치바 롯데)으로 본다.[32] 후반기까진 상위권이었지만 시즌 막판 1달 동안 분위기를 잘못 타는 바람에 연패를 거듭해서 꼴찌로 추락했다. 무엇보다 이때는 위에도 나와있지만 고령에 위암 수술 후 건강 악화가 겹쳐 감독 일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33] 이날 경기를 패배하고 돌아가면서 분노한 팬들에게 야유와 비난을 당하다가 당하다가, 분노를 참지 못한 팬들이 선수단들이 타고 있던 구단 버스에 날계란을 던진 사건. 구글에 生卵事件, 日生球場 生卵 등으로 검색하면 사건 당시의 버스 사진을 볼수 있는데, 버스 앞유리가 노란물, 흰물 할 것 없이 뒤섞인 계란 범벅이다.[34] 이 날은 긴테츠 버팔로즈의 옛 홈구장이었던 일본생명구장(日本生命球場, 줄여서 닛세이 구장日生球場)의 마지막 프로야구 경기였다. 이후 일본생명구장은 사회인야구나 고교야구 경기 등에 쓰이다가 1998년을 끝으로 철거되었다.[35] 암 치료로 인해 55경기 결장[36] 컨디션 저하로 인해 1경기 결장[37] 이기록도 2009년 같은 요미우리 직속후배인 이승엽이 깨버렸다.[38] 당시 명칭은 '''다이아몬드 글러브'''.[39] 일본의 골든글러브는 수비 실력만 평가하기 때문. 단 센트럴리그 1루수 골든 글러브는 왕정치 이후 1981년 한신의 후지타 타이라, 1992년 한신의 짐 파치올렉이 수상한 것을 빼면 1993년까지 오 사다하루, 나카하타 키요시(1982~88, 통산/연속 7회), 코마다 노리히로(1989~91, 1993~1999로 통산 10회) 3명의 요미우리 주전 1루수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자리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코마다는 1993년 오프시즌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FA이적한 이후에도 1999년까지 주구장창 1루 골든글러브를 독점했다.[40] 앞에서 보았듯 일본 국적자가 아니지만 일본인들은 대체로 그를 대만인/중국인이라 여기지 않는다. 바비 발렌타인이 2005년 일본시리즈를 우승했을 때 외국인 감독으로 최초 우승이라 말했을 정도.[41] 선수시절 오 사다하루는 닛산 자동차 모델로 활약했는데, 당시 일본시리즈에서 MVP 수상자 상품으로 수여된 토요타 자동차를 타게 될 경우에 닛산과의 계약파기를 우려하여 일본시리즈 MVP를 고사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1971년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시리즈 3차전 9회말 끝내기 쓰리런을 치고도 MVP를 포기했던 일. 그래서 현역 시절 9년 연속 우승 등 요미우리의 최전성기의 주역으로 활약했음에도 일본시리즈 MVP는 단 1번도 수상한 적이 없다. 우수선수상도 1963년 딱 1번 수상한 게 전부, 다만 1979년까진 일본시리즈에서 우수선수상 이외에도 타격상, 기능상 등 다양한 상(1979년 이후론 전부 우수선수상으로 일체화)을 수상했기에 이 중 타격상을 1972년 1회, 기능상을 6회(1965~66, 1968, 1970, 1971, 1973) 수상한 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