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삼품과
讀書三品科
통일신라 원성왕 때부터 국학에서 시행한 공무원 시험.
삼국 시대의 신라는 주변국과의 빈번한 전쟁 때문에 무예를 중시하였으나, 삼국통일 후 전쟁이 거의 사라져 평화로운 시대가 되었고 왕권 강화를 위해 왕족(성골, 진골) 계통을 견제하고자 능력은 있었으나 신분적 한계에 부딪힌 6두품을 등용하고자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였다. 이 시험은 국학의 졸업생들이 치는 것으로[1] 대부분 6두품이었다.
시행 이전까지 신라는 골품제에 따라 타고난 혈통이 있어야 관리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이었고, 앞서 진흥왕 때부터 화랑제도 정비를 통해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공동생활을 거친 후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는 시스템을 갖추었지만 앞서 중국에서 구품관인법(구품중정제)이 그랬듯 검증 과정이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는 천거제도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 중국은 수나라, 당나라부터 시험을 쳐서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고,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통일 신라에서 시행했던 제도였으나, 완강한 신라의 골품제라는 신분적 한계에 좌절하는 이들이 많았다. 고려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과거의 초보적 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 귀족의 관료 독점을 어느 정도 완화하였다. 신라 후기에는 신라삼최처럼 실력이 있는 사람은 그냥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빈공과에 응시해 벼슬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비중이 공기가 된다. [2]
게다가, 유학파 이외에도 전통적 인재 등용 제도였던 화랑 제도 역시 통일 이전처럼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예전처럼 화랑도 공동생활을 통해 인재를 천거하는 것도 계속되었다. 화랑이 무인집단 이미지가 강하지만 엄연히 거기서도 유불도 경전 공부도 병행했고, 통일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즉 독서삼품과는 해외유학파와 전통파 사이에 끼어서, 관리임용 제도로 광범위하게 쓰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예전에 비해 새로운 임용 방식을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유교 경전으로 시험을 쳐서 단순히 성적을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으로 나눠 관리 '''임용에 참고'''하는 방식이었다. 원성왕의 의도는 수문제가 과거 제도를 했던 것처럼 성적순대로 관리 임용을 하고 성적순대로 직급을 배치하는 작업에 직접 도입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발에 밀려서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원성왕은 '''왕위에 오른 정통성이 약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시험 과목: 2~3가지 경전을 읽기만 하면 중품까지되고, 5가지 경전에 능통하기만 하면 되는게 시험인가??,..가 아니고, 여기서 '''읽은'''의 경우 정확하게 '''암송'''을 하는 것이다. 당시 유학은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훈고학이었다. 따라서 사서삼경을 완전히 '''입으로 외워야'''하는 것이다. 특품 정도면 '''신라 전체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암송왕'''이다.
특품 : 오경(五經:《시경》·《서경》·《역경》·《춘추》·《예기》)·삼사(三史:《사기》·《한서》·《후한서》)·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에 '''모두 능통한''' 사람
상품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예기(禮記)》·《문선(文選)》을 '''읽어 그 뜻에 능통'''하고 아울러 《논어》·《효경》에도 '''밝은''' 사람
중품 : 《곡례》·《논어》·《효경(孝經)》을 '''읽은''' 사람
하품 : 《곡례(曲禮)》·《효경》을 '''읽은''' 사람
1. 개요
통일신라 원성왕 때부터 국학에서 시행한 공무원 시험.
2. 배경
삼국 시대의 신라는 주변국과의 빈번한 전쟁 때문에 무예를 중시하였으나, 삼국통일 후 전쟁이 거의 사라져 평화로운 시대가 되었고 왕권 강화를 위해 왕족(성골, 진골) 계통을 견제하고자 능력은 있었으나 신분적 한계에 부딪힌 6두품을 등용하고자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였다. 이 시험은 국학의 졸업생들이 치는 것으로[1] 대부분 6두품이었다.
시행 이전까지 신라는 골품제에 따라 타고난 혈통이 있어야 관리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이었고, 앞서 진흥왕 때부터 화랑제도 정비를 통해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공동생활을 거친 후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는 시스템을 갖추었지만 앞서 중국에서 구품관인법(구품중정제)이 그랬듯 검증 과정이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는 천거제도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 중국은 수나라, 당나라부터 시험을 쳐서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고,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통일 신라에서 시행했던 제도였으나, 완강한 신라의 골품제라는 신분적 한계에 좌절하는 이들이 많았다. 고려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과거의 초보적 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 귀족의 관료 독점을 어느 정도 완화하였다. 신라 후기에는 신라삼최처럼 실력이 있는 사람은 그냥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빈공과에 응시해 벼슬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비중이 공기가 된다. [2]
게다가, 유학파 이외에도 전통적 인재 등용 제도였던 화랑 제도 역시 통일 이전처럼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예전처럼 화랑도 공동생활을 통해 인재를 천거하는 것도 계속되었다. 화랑이 무인집단 이미지가 강하지만 엄연히 거기서도 유불도 경전 공부도 병행했고, 통일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즉 독서삼품과는 해외유학파와 전통파 사이에 끼어서, 관리임용 제도로 광범위하게 쓰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예전에 비해 새로운 임용 방식을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3. 방식
유교 경전으로 시험을 쳐서 단순히 성적을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으로 나눠 관리 '''임용에 참고'''하는 방식이었다. 원성왕의 의도는 수문제가 과거 제도를 했던 것처럼 성적순대로 관리 임용을 하고 성적순대로 직급을 배치하는 작업에 직접 도입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발에 밀려서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원성왕은 '''왕위에 오른 정통성이 약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시험 과목: 2~3가지 경전을 읽기만 하면 중품까지되고, 5가지 경전에 능통하기만 하면 되는게 시험인가??,..가 아니고, 여기서 '''읽은'''의 경우 정확하게 '''암송'''을 하는 것이다. 당시 유학은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훈고학이었다. 따라서 사서삼경을 완전히 '''입으로 외워야'''하는 것이다. 특품 정도면 '''신라 전체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암송왕'''이다.
특품 : 오경(五經:《시경》·《서경》·《역경》·《춘추》·《예기》)·삼사(三史:《사기》·《한서》·《후한서》)·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에 '''모두 능통한''' 사람
상품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예기(禮記)》·《문선(文選)》을 '''읽어 그 뜻에 능통'''하고 아울러 《논어》·《효경》에도 '''밝은''' 사람
중품 : 《곡례》·《논어》·《효경(孝經)》을 '''읽은''' 사람
하품 : 《곡례(曲禮)》·《효경》을 '''읽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