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골
1. 개요
'''성골'''(聖骨)은 신라의 계급체계 중 골품제에서 가장 높은 계층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골과 진골의 구분
양자의 구분법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우선 삼국사기에서는 진덕여왕까지가 성골이고 태종 무열왕부터 마지막 경순왕까지 진골이라고 하고 있는데, 즉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부터 28명의 왕이 모두 성골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보기 힘든 정황이 많아 사학계에서는 다양한 설이 제기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비해 이 때 모계의 영향력이나 모계 혈통의 단편, 또는 사위 계승이라는 특수한 계승 형태가 보이는 것은 맞지만 기본적으로 신라는 남계 계승을 핵심으로 둔 국가였기 때문에, 일반 상식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를 신라 내부의 종교적 군주 전통과 연결 지어 설명하고 진골 개념만은 태종 무열왕 대 전후해서 출현했다는 설이 제시되었지만, 이후 국내에서 인류학적인 혈통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면서 신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족과 왕비족이 쌍을 이루며 발전해 왔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이러한 배경에서 골품제 또한 인류학적인 차원에서 일족 집단을 단위로 성립한 개념이라고 보는 견해가 보편화되었다. 때문에 과거처럼 후대 어느 왕이 편의적으로 만든 개념이라고 보는 설은 설득력을 잃었다.
단, 박씨, 석씨, 김씨 사이에서도 왕위가 오가던 시대에 같은 김씨 왕족 내에서도 구분을 지어 왕위를 계승시킬 정도로 좁은 개념의 골품제가 성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골품제의 성립 시기는 내물왕 이후 김씨 왕족이 왕위 계승을 독점한 시기 이후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반면 학계에서 부모가 모두 성골이어야 성골 지위가 이어지는 것으로 본 적도 있으나, 해당 학설은 거의 폐기되었다. 아버지가 진지왕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진평왕의 딸인 김춘추조차 진골로 분류된 것이 가장 유력한 반증이다. 때문에 김춘추가 진골인 이유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후 학계에서는 법흥왕-진흥왕-동륜태자-진평왕-선덕여왕으로 이어지는 계열이 왕실을 신성화하고 계속 왕위를 물려 받기 위해 만든 새로운 기준이라고 추정하는 설이 보편화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후자의 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전자의 경우 국가적으로 곤란한 시기에 국내에서나 당에서나 조롱에 가까운 언사를 들어가면서 여성이 왕위에 올라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울주 천전리 각석 을묘명에서 불교를 최초로 공인한 법흥왕을 성법을 일으킨 왕이라는 의미인 '성법흥대왕'으로 칭한 것처럼, 성골의 성(聖)은 불교의 공인 이후 불교의 개념을 빠르게 빌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법흥왕설에서는 법흥왕이 '성법흥대왕'의 칭호나 불교의 공인, 율령의 반포 등으로 국왕의 신성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반면 진평왕설에서는 빠르게는 진흥왕 대부터 신라 왕가의 이름을 전륜성왕이나 석가모니의 가족 이름과 똑같이 지어[1] 동일시, 신성화한 것이라고 보았다. 성골=석가족이며 성골 개념의 시작도 그런 작업이 시작된 진평왕이나 빨라야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부터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진평왕설의 경우 진지왕의 아들인 김춘추가 성골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직관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진평왕은 진흥왕의 장손이고 진지왕은 진흥왕의 차남인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진지왕의 말년의 기술이 다르다. 삼국사기에선 진지왕이 병사했다고 나오고 삼국유사에선 폐위당했다고 나온다. 삼국시대에 관한 양대 정통 사서의 기록을 절충하면, 진지왕 다음에 즉위한 진평왕의 옹립세력이 진지왕의 양위를 종용했고, 진지왕은 저항보단 수용을 택했다고 보아 퇴위 후 편안한 말년과 자신의 후손, 즉 김용춘과 그 아들인 김춘추의 안전과 자신의 조카이자 장손이 되는 진평왕의 즉위와 서로 '빅딜'했다고 보는 설이다.
상식적으로 폐위까지 했는데 진평왕이 그 가족을 우대하여 자기 딸을 사촌동생 김용춘에게까지 시집보낼 확률이 적고, 삼국사기의 기록만을 따르자니 삼국유사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양위 또는 선위의 탈을 쓴 실질적인 찬탈이지만 후에 김용춘 계열인 김춘추가 무사함을 넘어 후대받은 것도 어느정도 설명이 된다. 그리고 상왕이 된 진지왕이 늙어서 병사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큰 모순이 없게 된다. 따라서 후에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이 즉위한 것은 진평왕 옹립세력의 김춘추에 대한 불안감도 작용하지 않았나 추측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평왕의 직계자손을 성골로 세워 진평왕의 딸 덕만공주를 즉위시키고 김춘추는 선덕, 진덕 시기에 삼국통일 사업 등 국난을 극복하는 등으로 자신의 자질을 입증하여 즉위 여건을 만들고 추대의 형식을 통해 즉위하는데, 한 번 진골이란 이유로 왕 되는 거 물먹었는데 다시 "나 원래부터 성골이었어~^^" 하면 모순이 되므로 진골이 왕이 되었다고 기록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것이다.
반면 법흥왕설의 경우, 앞서 언급하였듯 골품제 연구와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인 <성주사 낭혜화상탑비>에 등장하는 '족강' 개념을 원용하고 강조한다. 이 경우 진평왕설에 비해 골품제의 역사는 비교적 길었으나 성골의 범위는 왕실의 3대 내에서도 몹시 좁았다고 보고, 왕궁 내에 거주하는 극소수의 왕족만 성골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진지왕 퇴위 이후 김춘추가 진골로 강등된 것 또한 그러한 원리로 설명한다.
이후 흥덕왕 대에 진골과 6~4두품을 구별하여 설정한 색복지의 교서를 볼때 이 시기에는 성골의 개념이 사라진 것으로 보이나, 9세기 말 진성여왕 대에 성골 또는 진골의 개념이 다시 성립하여 소급 적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890년대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주사 낭혜화상탑비>의 '성이(聖而)'·'진골(眞骨)', '품계는 진골(品眞骨)', '본래 근본은 성골이었다(本枝根聖骨)'[2] 등의 문구, <실상사 수철화상탑비>의 '일족은 빼어난 진골이었다(族峻眞骨)'는 문구로 보아 890년대에 성골과 진골에 대한 인식이 있음은 분명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문헌에 근거한다는 입장에서 거기에 상한선을 그은 것이다. 성골의 성립 계기를 진성여왕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특수한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 한편으로 <성주사 낭혜화상탑비>의 '성이' 내지 '성골'은 현재에도 실질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수식이라고 보는 의견이 남아는 있긴 하다.
진성여왕 대에 다시 등장한 성골의 개념은 진성여왕 본인의 발언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니깐, 진성여왕의 형제자매, 달리 이르면 '''경문왕의 자녀들'''은 일반인과 '''골(骨)'''이 다르다고 한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하대의 성골 개념이 경문왕가가 독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이 하대 성골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은 이전의 국왕과 달리 이름이 모두 1글자에 부수는 日로 고정되어 있다. 물론 "등에 두 뼈가 솟아 있다"를 말 그대로 해석해서 남들과 유전적으로 골격이 다른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이 모두 별다른 이유 없이 30대도 못 돼서 죽어나가는 걸 보면 그닥 좋은 건 아닌 듯 하다(...).[3]“나의 형제와 자매의 골격은 남들과 다른데,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로 헌강왕의 아들이다.”
孤之兄弟姊妹 骨法異於人 此兒 背上兩骨隆起 眞憲康王之子也
이 하대의 성골 개념은 희강왕계와 김균정계 사이에 벌어졌던 골육상쟁의 기억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 중 하나로 보인다. 헌안왕의 아들이었던 궁예가 경문왕에게 밀려 왕위를 잇지 못한 점이나 정강왕 사후 숙부인 김위홍이 살아있었음에도 굳이 여성인 진성여왕이 즉위하는 등 비정상적인 계승이 나타나기 때문.
3. 지위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남성 성골의 대가 끊기자 동아시아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여왕이 연달아 즉위한 것으로 보아 당대 신라에서 성골 혈통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미 성골 남성이 없으므로 결국 성골의 대가 끊기는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결국 여성 성골도 모두 사망한 후에는 진골 출신의 실권자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면서 성골은 사라지게 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골품에 따라 진급 상한선이 나뉘는 신라 17관등 체계 안에서 진골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은 전부 성골들도 오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골이 이찬 등의 관등에 있었다던가 하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그러므로 골품제를 설명할 때 엄밀히 말하면 이벌찬부터 대아찬까지는 진골'만' 오를 수 있다고 주로 설명하는 건 틀린 것이긴 한데, 어차피 성골은 상대에 씨가 마르므로 편의상 그렇게 설명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덕만이 "감히 성골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하느냐!" 일갈에 미실이 깨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뼈대와 근본부터 다르다는 당대 기록들의 인식을 보면 사실 이 정도의 연출은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
4. 비유적 표현
비유적으로 어느 집단에서 철저하게 순혈 엘리트 테크를 탄 경우 성골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순수혈통주의 문서 참조. 잠시 밖에 나갔다와서 약간 급이 낮지만 그래도 좋은 대접을 받는 경우는 진골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스포츠 선수에게 붙이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는데, 이 경우에는 해당 팀의 로컬 보이에다 유스 선수부터 뛰어서 성인팀까지 승격한 경우를 의미한다. AS 로마의 프란체스코 토티, 다니엘레 데 로시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폴 스콜스 등이 여기에 해당되며, 이 중 일부는 이 두 명처럼 원 클럽 맨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구단 연고지의 고향이나 심하게는 출신학교 같은 것도 같으면 로컬 보이로 성골 중의 성골이다. KBO 리그에서는 경북고등학교 야구부(삼성), 경남고등학교 야구부(롯데), 북일고등학교 야구부(한화),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KIA), 인천고등학교 야구부(SK) 등이 성골로 비유된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굉장히 성골을 따지는 것으로 유명한데, 다른 팀과 어떤 식으로든 엮이면 탈락하는 기이한 감독 선정 기준이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순수혈통주의 문서 참조.
반면에, 기대 받던 성골 유망주가 성인 무대를 다른 팀으로 옮겨 데뷔해버리거나 프랜차이즈 스타인 상태에서 라이벌 팀으로 이적해버리면 이적을 통해 들어온 선수에 비해서 팬들의 더욱 큰 증오를 받아버리는데 마리오 괴체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간혹 성골과 진골 표현을 반대로 알고 쓰는 경우가 있다. 성골이라고 비유하고 싶었는데 진골이라고 잘못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
5. 나무위키에 등재된 성골 출신 인물
5.1. 신라 상대
5.2. 신라 하대
5.3. 기타
[1] 예를 들어 진지왕의 이름은 '사륜' 혹은 '금륜'으로 전승되는데, 사륜의 사는 '쇠'를 음차한 것으로, 전륜성왕 중 철륜왕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음은 동륜왕에 해당하는 동륜태자. 동륜의 아들 백정(진평왕), 백반, 국반은 각각 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 그리고 석가모니의 실제 작은아버지들 이름의 한자식 표기다. 진평왕의 왕후는 석가모니의 어머니와 같은 이름인 마야부인이다. 이것을 볼 때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면 석가모니에 해당하는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결국 태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카필라 왕실은 슈도다나 이후 조카가 물려받음과 동시에 망했으니 나름 고증을 잘 살렸다고 봐야 하려나(...).[2] 이 문장이 가리키는 사람은 태종 무열왕의 8세손인 낭혜화상(무염)이다.[3] 원성왕부터 경문왕의 직계 조상들은 모두 근친혼을 6번 했다. 김충공-귀보부인(김인겸 또는 김헌정의 딸), 희강왕-문목부인(김충공의 딸), 김균정-정교부인(김충공의 딸), 김균정-조명부인(김충공의 딸), 김계명-광화부인(신무왕의 딸), 그리고 경문왕-영화부인 김씨(헌안왕의 딸). 둘 사이의 소생이 경문왕의 직계 조상인 것만 넣은 거라서 애는 안낳고 결혼만 한 것까지 추가하면 훨씬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