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거
1. 개요
薦擧
천거란 어떠한 조직에서 구성원이 그 조직의 리더에게 인재를 발굴해서 조직에 가입시켜 직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낙하산 인사라고 볼 수도 있는데, 시험이 아닌 소개를 통해 등용되는 것을 천거라 한다. 물론 그로 인해 자신을 천거해 준 사람의 라인에 자동으로 들어가 영원히 뗄 수 없는 인맥이 된다.
2. 역사
현대에는 대체로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는 방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세계 대부분 문화권에서 인재 등용은 세습 아니면 천거 방식이었다. 예외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중세부터 과거 제도라는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았지만, 동아시아 역시 고대에는 천거가 일반적이었다.
2.1. 중국사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에게 인재를 추천해서 등용하게 했는데 이 때는 추천한 사람이 일종의 보증을 서게 되어 있었다. 천거 대상자의 업무능력이 무능해도 상관없긴 한데, 문제는 천거 대상자가 천거된 이후 모반을 일으키거나 큰 사고를 칠 경우 그 사람을 천거한 사람도 같은 처벌을 받는다는 점이다.[1]
후한 말기에는 이게 엄청나게 범람했고, 그래서 유력 군벌이 관직임용 대상자를 먼저 임명부터 하고 나서 나중에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 허락을 받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안량과 문추가 원소에게 나중에 천거하는 형식을 취하고 일단 임시로 임명되어 장군이 되었는데 이후 여포가 원소의 객장으로 들어왔을 때 여포 본인은 동탁을 사살한 공으로 황제에게 직접 관직을 받은 상태에서 안량과 문추를 '원소가 임명한 관리'라는 이유로 비웃고 못살게 굴었다. 결국 그 이유 때문에 여포는 원소의 휘하에 더 있지 못하고 추방당했다.
당시 태수에게는 1개월당 1인씩 효렴으로 천거하는 게 가능했는데 손견이 환계를 천거한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환계는 이걸 눈물나게 고마워했고 그래서 손견이 사망한 후 죽음을 무릅쓰고 유표에게 찾아가서 손견의 영구를 찾아왔다. 실제로도 이렇게 천거가 어렵다보니 천거한 사람과 천거받은 사람간에는 끈끈한 인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조역시 천거에 반드시 필요한 월단평을 허소에게 획득하기 위해 허소의 친척이자 자신의 친구인 허유에게 그렇게 매달렸고 결국 허소로부터 '''태평지간적, 난세지영웅'''이라는 칭호를 획득해낸다. 조조는 '난세지영웅'이라는 저 말 한마디에 엄청나게 기뻐했다.
2.2. 한국사
신라의 화랑은 보통 청소년 수련 단체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화랑의 매력으로 인재를 모으고 화랑과 휘하에 모인 낭도의 공동생활로 결속력을 다지고 교육해 그 중에서 능력이 우수한 자를 천거해 뽑아 신라의 문무관직에 부임시키는 역할이기도 했다.
과거 제도가 정착한 후에는 기본적으로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고 배치했지만 조선 시대에도 천거가 있었는데 류성룡이 장수 3명을 천거했다. 그 대상자로는 이순신, 권율, 원균이었는데[2] 원균만 유일하게 류성룡의 얼굴에 먹칠했다.[3] 나머지 두 장수 이순신과 권율은 류성룡이 자기 이름을 걸고 천거한 값을 확실히 해냈다.
3. 한계와 결과
하지만 천거제는 태생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을 소개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천거하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은 아예 천거될 수 없었다. 때문에 천거제 시스템 하에서는 천거받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천거할 수 있는 사람의 눈에 그것이 아니라면 그런 사람의 주변 사람의 눈에 띄어야 했다. 이렇다 보니 뇌물과 부정부패는 당연히 따라오는 일로 무슨 짓을 해도 천거하는 이외 천거받는 이와의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으며 권력 그나마도 중국의 경우 향거리선제는 그나마 견제장치라도 있어 천거에 주의를 가지기라도 했지 그런 것도 없던 구품관인법은 개판 그 자체가 되어 위나라, 서진, 동진 그리고 남조국가들을 말아먹는다.
결국 이러한 천거 시스템과 여러 문제점으로 인해 문벌귀족이라는 괴물을 탄생시켰고 귀족이 되고 말고는 황제가 간섭할 수 없고 귀족들만이 결정할 수 있다든가 황제의 가문이 한미하다고 귀족들이 얕잡아보는 일까지 발생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제도가 쉽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결국 수나라 때에 가서야 과거 제도의 전신격인 제도가 마련되어 과거 제도의 시작을 알리지만 그 후에도 그 잔재는 많이 남아 송나라 때에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과거 제도로 바뀐다.
물론 천거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위의 예시처럼 조선에서도 천거란 흔했다. 단지 그것이 주가 아니었을 뿐 다만 조선에서도 이런 천거 시스템을 다시 제도화하려는 주장이 없던 것은 아니어서 중종때 조광조가 현량과 실시를 주장했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과거 제도의 문제점과 폐단을 지적하며 과거 제도와 천거제의 병행이나 혹은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천거제로의 회귀를 주장했으나 아무래도 천거제의 태생적 문제점이 과거제보다도 심한지라 현량과는 실패했고[4] 실학자들도 "좋은 인재들을 잘 선발해서 천거해야~" 수준의 주장만 할 수 있었지[5] 어떻게 천거 시스템이 잘 돌아가게 할 지는 내놓지 못했다.
분명 천거제는 장점도 있다. 천거하는 사람의 역량이 뛰어난 경우 누가 봐도 "어? 이 사람은 아닌데?" 라고 할 사람이지만 정작 앉혀놓고 보니 제대로 된 사람인 경우도 있다. 앞서 말했듯 유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순신은 너무 특진이라고 유성룡과 동기 겸 같은 당파인 김성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렇게 천거제는 능력은 있지만 어떤 사정으로 인해 능력을 발휘할 수 없던 사람을 발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런 장점은 단점이 되는게[6] 부지기수인 것이 한계였고 결국 중국과 한국에서는 과거 제도에 그 자리를 내주고 기껏해야 '이 사람을 어떤 자리에 앉힐 것인가' 정도의 일에 활용될 수 있었다. 삼국지에서도 전술한 안량과 문추가 원소의 천거로 원소의 휘하가 되었는데 이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서 안량은 관우에게 잡혀 죽은 게 전부였고 문추 역시 매복에 걸려 죽은 게 전부였다.
4. 현재
- 오늘날에는 각 정당에서 선거 후보를 공천할 때 천거를 통해 후보를 정해서 출마시킨다.
- 이경규가 강호동을 연예계에 진입시킨 일이나 이영자가 홍진경에게 코메디언을 시켜준 일 등이 일종의 천거에 해당된다.
- 김영삼은 평소에 인재욕심이 많아서 이회창, 이명박, 안희정 등 인재들을 천거했는데 그 중 이명박은 대통령 당선에 성공했다. 이회창 역시 박근혜를 천거했다.
- 박근혜도 손수조를 천거하긴 했는데... 이거 한 방으로 다 같이 망했다.
[1] 때문에 천거하는 사람은 조심을 기해서 했으며 심지어 천거를 하지 않기도 했다.[2] 물론 이들은 아예 생짜 일반인은 아니었고 다들 과거에는 합격해서 작은 관직을 하고 있다가 류성룡에게 천거된 것이다.[3] 그리고 유성룡은 이게 분했는지 본인도 원균이 노답이라고 생각했는지 징비록에서 원균을 비판했다.[4] 실패해도 대실패로 끝났다. 어느 정도냐고? 전국에서 33명을 뽑는데 '우연히도' 모두 서울 출신의 명문가 자제에 정승인 안당의 아들이 셋이나 있었으며 무엇보다 조광조 세력만 뽑았다.천거제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겠다.[5] 이런 건 아무나 다 한다(...) 하다못해 향거리선제와 구품관인법도 취지는 이런 것이었다.[6] 갑툭튀가 벼슬에 앉을 수 있으니 천거하는 사람 눈에만 잘 띄면 자기가 능력이 없어도 얼마든지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