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순절도
1. 개요
임진왜란 초기 두 번째 전투였던 동래성 전투 당시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성민들을 기리기 위한 기록화로, 보물 1점과 시도유형문화재 2점이 각각 존재한다. 흔히 우리가 아는 것은 보물로 지정된 순절도이다.
2. 변박의 동래부순절도(1760년)
2.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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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府殉節圖. 조선 영조대의 화가인 변박(卞璞)이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 현재 서울특별시 노원구의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392호이다.
2.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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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하시는 경상좌병사 이각(李珏)님의 위엄넘치는 모습. 잘 모르는 사람은 성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러 떠난 전령으로 착각하기 쉽다.
96㎝×145㎝. 1709년(조선 숙종 35년)에 처음 그려진 기록화로, 이후 1760년(영조 36년)에 기존 원본 그림이 오래되자 부산 지역의 화가 변박이 모사(模寫)한 것이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5일 벌어진 동래성 전투를 묘사하였다.
보물 제391호로 지정된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와 함께 그동안 동래 안락서원에 전해내려오고 있었으며, 근현대 격변기 이후 육군박물관이 소장하게 되었다. 1963년에 보물 제392호로 지정되었다.
2.3. 바깥고리
2.4. 보물 제392호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는 선조 25년(1592년)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년) 처음 그려진 것을 영조 36년(1760년) 화가 변박(卞璞)이 보고 다시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기법을 사용하여 치열했던 교전의 장면을 화폭에 나타내었다. 중심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잡고 있고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동래 병사들이 수비하고 있으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왜병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성곽 아래쪽으로는 왜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송상현의 순절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북문 밖으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의 무리들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면 위쪽의 산은 윤곽선을 선으로 나타내고 점을 찍어 표현하였는데 다소 경직된 모습이다.
작품의 격은 그리 높지 못하고 구도나 형태, 필치 등에서 경직된 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커다란 국난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한 민족성을 표현하여 민족적 교훈을 담고 있다.
3. 민정중의 동래부순절도(16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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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개요
조선 효종 9년인 1658년에 동래부사 민정중(閔鼎重, 1628년 ∼ 1692년)이 임진왜란 당시의 동래성 전투 상황을 직접 겪은 노인(老人)의 말을 토대로 그린 기록화.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의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다른 9점의 유물과 함께 '송상현 문적'이라는 명칭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3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3.2. 내용
1658년에 그린 그림으로 당시 참전용사들의 구술 내용을 토대로 동래성 전투의 모습을 복원한 것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재임 중 왜구(倭寇)에 맞서 목숨을 바친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과 관련된 기록물들을 모은 송상현 문적 5건 10점 중 하나이다.
3.3.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3호
조선 선조 25년(1592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재임 중 왜구(倭寇)에 맞서 목숨을 바친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의 업적을 알려주는 기록물들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동래성전투(東萊城戰鬪) 상황 및 천곡 송상현의 인품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천곡 송상현 유물은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1폭, 교지(敎旨) 3매, 치제문(致祭文) 4매, 혈선발(血扇跋) 1첩, 『천곡수필집(泉谷隨筆集)』 1책 등 5건 10점이다. 이들 유물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천곡 송상현의 일괄 유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이다.
동래부순절도는 효종 9년(1658년) 동래부사 민정중(閔鼎重, 1628년 ∼ 1692년)이 임진왜란 당시의 동래성 전투 상황을 잘 아는 노인(老人)의 말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숙종 35년(1709년)에 이 순절도를 모사한 동래부순절도가 보물 제392로 지정되어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지는 3매로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추증(追贈) 교지는 영조 17년(1741년) 정이품(正二品)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던 천곡 송상현에게 다시 종일품(從一品) 숭정대부의정부(崇政大夫議政府)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한 교지이다. 부인 이씨(夫人 李氏) ‘정경부인(貞敬夫人)’ 추증 교지는 영조 17년(1741년)에 종일품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된 천곡 송상현의 품직(品職)에 따라 부인 이씨에게 정경부인의 품계를 추증한 교지이다. ‘충렬공(忠烈公)’ 시호(諡號) 추증 교지는 천곡 송상현의 시호를 ‘충렬공(忠烈公)’이라 추증할 때의 교지이다. 교지의 말미부분(末尾部分)이 손상되어 시호와 교지를 내린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숭정대부’에 추증된 것으로 미루어 ‘의정부좌찬성’으로 추증되었을 때의 교지와 함께 하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치제문은 4매로 숙묘정유(肅廟丁酉) 사묘제문(賜墓祭文)은 숙종 43년(1717년) 예조정랑(禮曹正郞) 김윤해(金潤海)를 송상현의 묘소로 보내 치제(致祭)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영묘경오(英廟庚午) 사묘제문(賜廟祭文)은 영조 26년(1750년) 영조가 송상현의 묘소 인근을 지나다가 예조정랑 신일청(申一淸)을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영묘어제(英墓御製) 임진사묘제문(壬辰賜墓祭文)은 영조 48년(1772년) 예조정랑 변경진(邊景鎭)을 송상현의 묘소로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순묘임진(純墓壬辰) 사동래단제문(賜東萊壇祭文)은 순조 32년(1832년) 동래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 박제명(朴齊明)을 동래단(東萊壇)으로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혈선발은 송상현이 죽기를 결심하였을 때에 그의 대인(大人) 송화공(松禾公)을 영결(永訣)하면서 부채면(面)에 ‘고성월훈 열진고침 군신의중 부자은경(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이라 혈서(血書)한 16자가 전해지던 것을 조선 영조 31년(1756년)에 윤봉구(尹鳳九)가 송상현을 칭송(稱頌)하여 제술(製述)한 것이다.
천곡수필집은 종가(宗家)에 전해오는 천곡 송상현의 유필(遺筆)로 추정되는 불분권(不分卷) 1책의 필사본(筆寫本)이다. 송상현이 개인적인 처신과 정치 및 학문에 관한 사항들을 당시 여러 선생들로부터 문답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표지를 포함하여 전체 52장(張) 1책이며, 표지의 해정(楷正)한 필체로 ‘천곡수필집(泉谷隨筆集)’이라 제첨(題簽)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서(序)’는 없고 내지(內紙)에 후손인 수일(秀一)이 쓴 ‘발(跋)’이 있다. 또한 수일이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문답에 대한 주제와 문답자가 정리되어 있다. 이 수필집은 필사시기(筆寫時期)와 그 경위도 분명치 않으며, 후손 수일의 발문(跋文)도 숭정(崇禎)4 임신(壬申, 1812)년으로 천곡 송상현 사거(死去)한지 200여년이 지난 후의 기록이다. 그러나 종가에 전해오던 것이므로 천곡 송상현이 직접 정리하고 필사(筆寫)한 것으로 추정된다. 송상현의 저술(著述)이 적지 않았음은 선생의 유저(遺著) 『천곡선생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임진왜란 때에 순절한 후로 많은 저술이 일실(逸失)되어 현재 『천곡선생집』 외에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천곡 송상현 유물은 천곡 송상현이 조선 선조 25년(1592년) 동래부사로 재임 중 왜구와 맞서 목숨을 바친 천곡 송상현 선생의 업적 및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전투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로서 역사자료 및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가치가 크다.
4. 변곤의 동래부순절도(18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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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개요
1834년 4월에 동래부의 정3품 무반직인 천총(千摠)으로 근무하던 화원 변곤(卞崑)이 그린 순절도이다. 현재 울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4.2. 내용
121.5㎝×89.2㎝.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의 모습을 1834년(순조 34년) 4월에 변곤이 그린 기록화이다. 송상현을 비롯한 동래부민들의 충절을 기리는 데에 중점을 두고 제작하였다.
2013년 8월에 울산 유형문화재 30호로 지정되었다.
4.3. 바깥고리
4.4.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1592년(선조 25년) 4월 15일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을 받아 싸우다 순절한 송상현 이하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그린 기록화로, 1834년 4월 동래부 천총이었던 변곤이 그렸다.
화면구성은 중앙에 동래읍성을 두고 성 내부에는 동래부의 군사들을, 외부에는 왜인들의 모습을 성의 윤곽에 따라 배치하여 중앙 중심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치열하였던 교전의 전말을 한 화폭에 효율적으로 담기 위해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조감법을 사용하였다.
화면의 근경에는 결전을 시작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읍성의 동문 위쪽 비로봉 근처로는 왜군이 읍성을 넘어 성내부로 침입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객사 앞으로는 패전을 직감한 송상현이 조복을 갈아입고 임금님께 하직인사를 하고 있으며, 좌우로 양산군수 조영규와 겸인 신여로를 그려 넣었다. 성곽 북문 밖으로는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과 군사들이 그려져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동래부순절도는 육군박물관에 소장된 변박의 작품과 송상현 종가 소장본이 있다. 두 작품에 비해 변곤의 동래부순절도는 가장 후대의 것이나, 화기가 기록되어 명확한 제작시기와 제작자를 제시해 주는 것은 이 작품뿐이다. 또한 변박 작품과 송상현 종가 소장본과 달리 변곤의 동래부순절도에서는 주요 인물 옆에 인물명과 더불어 증직명이 부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중요 산수명도 명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회화적인 측면에서 당시의 궁중기록화나 회화식 지도의 특징이 나타나며, 초기적인 원근법과 인물 표현의 비례 등을 살펴볼 때 19세기 회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5. 동래부순절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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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래문화회관 옹벽에 만들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