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각(조선)
李珏
? ~ 1592년(선조 25)
1. 개요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약칭은 경상좌병사)로 울산 병영에서 부대를 이끌고 동래성을 지원하러 갔던 무관이다. 본관은 함평(咸平)[1] , 자는 숙헌(叔獻).
2. 생애
이각은 통정대부 죽산도호부사를 지낸 아버지 이윤실(李允實)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수(李樹)[2] 의 딸 사이의 여섯 아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재직하고 있었다.
부산진 전투에는 시간내에 도착하지 못하고, 동래성 전투에는 먼저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요격하러 간 양산군수 조영규에게 적의 군세가 수만이나 된다는 말을 듣고 송상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외각에서 지원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 나왔다.[3]
박홍과는 이후에도 다르게 싸울 준비를 갖추지 않고 있다가 1만의 병사로 도주해서 임금을 뵈러 간다는 핑계로 북쪽으로 가다가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을 만나 참수되었으며, 그의 목은 조리돌려졌다.
경상좌도 병력의 지휘권을 쥔 병사가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그때까지 임지를 지키고 있던 관군 병력과 흩어진 관군과 피난민들을 규합해 결성된 의병들은 통합된 지휘를 받지 못하고 박진이 신임 경상좌병사로 부임하는 1592년 6월까지 각개 전투를 벌였다.
여러모로 당시 조선군 입장에서는 만악의 근원급의 인물이었는데, 이각이 도망치다 병사의 인신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후임 병사 박진은 군사를 수습하고 명령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의심을 받으며 고생해야 했다. 또한 이 사건의 연쇄작용으로 이일 역시 병력을 모아보지도 못하고 상주에서 패배한 뒤 탄금대까지 도망쳐야 했다.
[1] 함성군파 15세.[2] 종실로, 임회수(臨淮守)에 봉해졌다.[3] 사실 제승방략에 병마절도사는 성을 외부에서 지원하게 되어있었다. 한 명의 병사라도 급한 송상현의 요청이지, 작계상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래성 보다는 제1차 울산병영 전투에서 끝까지 본진을 지킨 병사들을 버린 것이 더 욕먹을 일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