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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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배에는 문관은 학, 무관은 호랑이, 임금 및 왕자는 용이 그려진다, 이 초상화에서도 흉배가 학이라 송상현이 문관 출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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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송상현광장에 있는 그의 동상
1. 개요
2. 생애 초반
3. 외교관이 된 이후
4.1. 관련 문서
5. 평가
6. 시설
6.1. 송상현 광장
6.2. 송공단


1. 개요


宋象賢
1551년(명종 6) ~ 1592년(선조 25) 5월 23일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 천곡(泉谷)·한천(寒泉). 시호 충렬(忠烈).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관으로, 전쟁 초기 부산 동래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 맞서 성을 지키며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임진왜란 당시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운 충의지사이며 능력상으로는 뛰어난 외교관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능력, 인품 양쪽 모두 훌륭한 인물이다.

2. 생애 초반


1551년 전라도 고부군(현 전라북도 정읍시 망제동 천곡마을)[1]에서 사헌부 감찰 송복흥(宋復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래로 동생 송상인(宋象仁)이 있었다.
1570년(선조 3)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0위로 급제하였으며#, 이어 1576년(선조 9)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 11위로 급제하여#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다.

3. 외교관이 된 이후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뒤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등을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 오늘날의 부산광역시장)가 되어 전란에 대비했는데, 이런 준비를 송상현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경상 좌수영 내 7개 진포가 동래 - 부산진 방면으로 전면 재배치되고 전란 발생 시 각 군현 부대의 집결지가 임무까지 세심하게 지정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시책에 따른 일이라 보는 게 보다 합리적이다.
다만 송상현 본인도 동래성 주변에 마름모를 깔고 나무를 최대한 많이 심는 등[2] 직무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방어 준비를 나름대로 철저히 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동래성 수비군보다 10배 많은 병력으로 조총과 활로 무장한 채 덤벼드는 바람에, 이러한 노력은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4. 임진왜란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첨사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하루만에 동래성에 도달했다. 제승방략에 규정된 대로 양산 군수 조영규#s-2와 울산 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도착했고 경상 좌병사 이각과 경상 좌수사 박홍이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병력이 열세였던 탓에 딱히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이각은 동래성을 구한답시고 산에 진을 치겠다며 빠져 버렸다. 사실상 도망간 것.[3] 양산 군수 조영규도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공성전시 외곽에 별도의 병력을 배치해 구원군을 차단하는 일본군의 전술에 밀려 후퇴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자 전투를 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서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4]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즉, 지나갈 테니 길 좀 열어달라는 소리.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즉, 길을 빌려주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소리.
이에 양군 사이에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으며, 초반에는 일본군이 패하고 후퇴했으나 곧 전열을 재정비해 다시 공격했고 결국 조선군이 중과부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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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게 되자 부채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뒤[5] 조복으로 갈아입고 북향 사배[6]를 올린 뒤, 항전을 이어가다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이 비록 적장이긴 하나 그의 용기에 감탄했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
그 뒤 조선군 병사들은 전부 전사했으며 동래성 주민들도 저항하다가 무참히 학살돼 해자에 파묻혔고, 이는 2005년에 수안역 공사 도중에 발견되었다. 사후에 이조 판서, 찬성에 추증되었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이후 탄금대 전투에서 말아먹긴 하지만 조선군이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을 모아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간을 벌어준 덕이다.
묘와 신도비는 청주IC 부근인 충청북도 청주시 수의동에 위치해 있으며, 그의 후손들 또한 수의동을 비롯한 청주 관내에 모여 살고 있다. 여담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를 피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에 옥산 ~ 남이JC 부근이 곡선으로 휘어지게 되었다.

4.1. 관련 문서



5. 평가


관리로서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부터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전쟁 준비를 했으며 임진왜란 초기 그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일본군에 맞서며 끝까지 싸웠기 때문에 당연히 높이 평가받는다. 전술했듯, 일본군마저 그의 정신을 높게 평가했을 정도.[7]
특히 동래의 후신인 부산광역시에서는 부산진정발, 다대포윤흥신과 더불어 부산을 지킨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부산시 양정동에는 송상현의 동상이 있으며 동상이 있는 삼거리를 송공 삼거리라고 불리는데 '송공'이 바로 송상현. 동상이 설치되고부터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배우는 지역을 빛낸 위인들 중에 동래구 출신이었던 장영실과 같이 꼭 꼽히는 인물이다. 2014년 6월에 송공 삼거리 일대에 송상현의 이름을 딴 송상현 광장이 개장한다. 53사단의 별칭인 '충렬 부대'의 충렬 역시 송상현의 시호인 충렬에서 따온 것이다.

6. 시설



6.1. 송상현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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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전역 인근 부산진구 부전동 삼전 교차로 ~ 양정동 송공 삼거리 일대에 조성한, 충신 송상현의 이름을 딴 광장이다.


6.2. 송공단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위치한, 송상현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순절한 여러 선열을 모신 제단. 부산 광역시 기념물 제11호. 동래 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이 위치한 수안역 인근에 있다.

6.2.1. 충렬사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위치한 사당. 지금은 정발, 윤흥신임진왜란 전사자들의 합동 사당처럼 되어 있지만 본래 그 시작은 송상현의 충혼을 기리는 '''송공사(宋公祠)'''였다. 안락 교차로에 바로 맞닿아 있는 탁월한 입지 덕에, 부산 도시철도 4호선동명의 역이 있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1] 인근의 덕천면 달천리와 함께 현재도 여산 송씨 집성촌이다. 그의 호 천곡(泉谷)은 바로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2] 외부에서의 시야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3] 이후 그는 적전 도망으로 인해 참수되어 목이 조리돌림 당하게 되었다.[4]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끝까지 반대했던 다이묘였기 때문에 빠르게 한양까지 쳐들어가 왕을 포로로 잡아 빨리 끝내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저 글귀의 의미는 '야 그냥 좀 지나가자 니들 안 건드릴게!' 라는 느낌이 강했다.[5] 부자(父子)의 관계 보다는 군신(君臣)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며 성에서 싸우다 죽겠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게 큰 불효로 여겨졌으므로 이런 큰 불효를 불사하고서라도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뜻.[6] 임금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절을 네 번 하는 것.[7] 무엇보다 송상현의 윗사람들은 '''"무관"'''출신이면서도 다 도망을 가버린 반면 송상현은 '''"문관"'''출신이면서 끝까지 맞서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