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

 


'''동래성 전투'''
東萊城戰鬪

'''시기'''
1592년 5월 25일 (음력 4월 15일)
'''장소'''

조선 경상도 부산 동래성[1]
'''원인'''
일본의 내륙 침공 교두보 확보
'''교전국'''
조선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송상현
이각
박홍
조영규#s-2
이언성[2]
홍윤관†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병력'''
2,500명 ~ 3,000명[3]
약 30,000명[4]
'''피해'''
방어군 전멸
전 군민 학살
투항자 500명
전사자 100명
부상자 400명
'''결과'''
동래성 함락, 대규모 양민 학살 발생
'''영향'''
일본, 경상도 및 충청도 진공(進攻).
1. 개요
2. 상세
2.1. 이전 상황
2.2. 전개
2.3. 종료와 영향
3. 유적 발굴
4.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clearfix]

1. 개요


임진왜란의 두 번째 전투. 부산진 전투에서 정발 장군이 지키는 부산진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동래성[5]으로 몰려들었다.
[image]
▲동래부 순절도.[6]

2. 상세



2.1. 이전 상황



당시 동래성은 동래부사 '''송상현'''이 3천여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다. 송상현은 부산진에 있던 왜관일본인들이 모두 떠나는 등 일본인들의 이상 징후를 느끼고는 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성벽 근처에는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방비에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성 주변에 나무가 많으면 공격 측 입장에서 기병 운용이 힘들며 대규모 공격과 성벽을 넘기위한 사다리를 비롯한 공성 무기의 사용, 그리고 진열의 정비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일본군의 병력이 너무 많았던 탓에 이런 준비들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2.2. 전개


1592년 4월 15일, 일본군은 동래성에 도착했다. 경상 좌병사 이각과 경상 좌수사 박홍이 동래성을 구원[7]하러 왔지만, 병력이 열세였던 탓에 딱히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각은 동래성을 구한답시고 산에 진을 치겠다며 빠져 버렸다.[8] 양산 군수 조영규#s-2도 동래성을 구원하러 합세했지만 큰 전력이 되지는 못했다.
고니시는 동래성 앞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고 쓴 나무판을 보였는데, 이에 송상현은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는 답을 했다. 이후 일본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송상현은 조금이라도 더 방어를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성벽 위에 목책을 쌓았다고 하며 일본군 역시 조선군의 활 공격 때문에 생기는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적장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궁수들을 유인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동래성에서는 일반 백성들은 물론 아녀자들까지 병사들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동래성의 취약점인 동래성 동문(인생문)을[9] 집중 공격해서 결국 돌파하고 동래성으로 진입했다. 동래성의 조선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동래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은 뒤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나서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시 한수를 썼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列鎭高枕 여러 진들은 단잠을 자고 있네[10]

君臣義重 군신간의 의는 중하고

父子恩輕 부모님의 은혜는 가볍도다

그 후 송상현은 다시 무장하고 몰려든 일본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일본군의 칼에 찔려 전사했는데, 송상현과 면식이 있던 마츠우라 시게노부(조선 측 기록에는 평조익平調益)라는 일본군 장수가 그에게 피신하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송상현의 애첩과 동래성의 아낙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와를 던지며 일본군에 맞서다가 역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조영규 또한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동래 백성인 김상은과 그의 처와 딸이 기와를 깨뜨려주면 이를 던져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송상현의 소실 금섬은 송상현이 관복을 가져오라고 하자 이를 가지러 오려다가 일본군에게 사로잡혔고 며칠간 욕을 하다가 살해당했으며, 또다른 소실 이씨는 일본에 끌려갔지만 끝내 절개를 지켰다. 이는 노예로 사느니 죽음을 택했다는 뜻이다.
송상현과 함께 싸운 관군인 송봉수, 김희수, 향리인 대송백, 소송백, 관노인 철수, 매동 중에서 김희수, 대송백은 전사했으며, 이 전투에서 송상현의 측근으로 알려진 사람은 신여로, 김섬, 노개방, 문덕겸 등이 있다.
이 때 참전한 사람들 중에는 각지의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일본군에게 항전한 경우도 있었으며, 훗날 임명된 선무 원종 공신 중에서 이 지역 출신인 인물이 66명이 되었다. 이들 중 뛰어난 24명을 선정한 명단으로 별전 공신 또는 24 공신이라 했는데, 김정서, 정승헌, 문세휘, 정순, 김일개, 김일덕, 송창문, 김근우, 강개련, 김흘, 이언홍, 김대의, 오홍, 박인수, 김달, 송남생, 김기, 황보상, 이응필, 송계남, 이복, 오춘수, 김복, 송의남, 철수, 만동 등이 있다.

2.3. 종료와 영향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이 무너지자 예복으로 갈아입고 남문 성루에 올라 임금이 계신쪽으로 절을 한후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를 썼다. 왜군이 들이닥쳐 잡으려하자 걷어차며 "이웃의 법도가 이런 것이더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느냐?" 리고 꾸짖다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와, 활을 들어 왜적 하나를 쏜 후 검을 집어들고 왜적들에게 뛰어들어 둘을 베고 자신도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 <난중잡록(亂中雜錄)>

일본군 장군 고니시는 송상현의 충절을 높이 사서 그의 시체를 온전히 보존하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미는 있는 결말인 것 같지만..
전투 당시 동래성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 전투 중에도 일본군의 무차별 살육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전투가 끝난 후에도 동래성의 백성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일본군한테 참혹하게 처형된 뒤 해자에 파묻혔다. 사실 일본군의 이런 습성은 전국시대 때부터 이어진 것인데, 당시 일본의 공성전에선 전투개시 전에 항복하면 성주 이하 전원의 생명을 살려주고, 전투 중에 항복하면 성주 및 가신 급만 처형했으며, 끝까지 저항하면 성주와 가신들, 병사들과 민간인을 포함한 성 안의 모든 사람을 죽였다.[11]
임진왜란 17년 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은 동래맹하유감이란 글에서 전투 당일이던 4월 15일 새벽만 되면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났다고 기록하였다. 동래 주민 중 생존자는 천 명 중 한두 명 정도였다고 한다.[12]
그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전해주는 기록은 숱하게 많이 있다.

총성이 울리고 그 검광은 대낮을 무색하게 했으며, 적군이 성중에 들어와 사람으로 메우다시피 했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데다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 <임진동래유사(壬辰東來遺史)>

송상현의 애첩 김섬은 함흥의 기녀였는데 송상현이 순절할 즈음에 적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사흘 동안이나 적을 꾸짖고 욕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적도 이를 의롭게 여겨 관구를 갖추어 송상현의 곁에 장사를 지냈다.

동래부민 김상(金祥)은 동네 아낙 두 사람이 깨 준 기와로 적병을 내리쳤다. 적이 떠난 뒤 김상의 어머니가 보니 김상과 두 아낙이, 적병 세 사람과 함께 죽어 있었다.

- <임진유문(壬辰遺聞)>

양산군수 조영규의 아들 조정로가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러 동래성에 갔는데, '''성 안이 온통 시체로 덮여 있어''' 유골을 수습하지 못했다.

- <조공유사기(趙公遺事記)>

4월15일 청명에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났다.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 날이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라 했다. 송상현 부사를 좇아 모인 성안 백성들은 '''모조리 피주검으로 변하고''' 앞서 쌓인 시체 위에 던져져 '''천 명 중 한두 명'''만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고, 조손·부모·부부·자매 중에 간신히 살아남은 자는 죽은 친족을 제사지내며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내가 눈물을 흘리자 늙은 아전은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죽어 곡해 줄 사람조차 남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 이안눌, <동래맹하유감사(東萊孟夏有感祠)>, 1608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의 회고.

발굴된 유골 수는 대개 열둘이지만 이는 특별히 그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 <임진망전유해지총(壬辰亡戰遺骸之塚)>, 1731년 동래성을 보수하다 발굴한 유해를 묻은 후 지은 비문

동래부사 송상현은 굽히지 않다가 살해당했으며 부산의 군사와 백성들도 '''도륙되어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만약 부산이 그들의 땅이 었다면 도륙과 참살을 어찌 이처럼 참혹하게 했겠는가?

- <상촌집(象村集)>

조선군 장수를 비롯하여 조선인 '''5,000명'''이 죽었다.

-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참수된 조선인이 '''3,000명'''이었고 500명이 포로가 되었다.

- 종군승 케이넨의 <서정일기(西征日記)>

조선군은 동래성에서 '''3,000여 명'''의 정예군과 30명의 장수들을 잃어버렸는데, 이는 당시 경상좌도에서 즉각 동원 가능한 병력 '''거의 전부'''에 해당했다. 그 바람에 조선은 경상도 방면에 동원가능한 병사의 수가 크게 부족해졌고, 결국 각지의 징집병과 북방의 병력을 급하게 징집하여 신립에게 몰아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서 참패하며 힘들게 모은 이 병력들을 모조리 말아먹고 자신도 전사하는 바람에, 방어선이 붕괴되었으며 선조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게 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도미노와 같은 병력부족의 악순환은 계속 이어져, 평양에 몽진한 조선 조정이 대동강 방어선을 만들 때는 '''병사의 수가 장군보다 적은'''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대동강 방어선마저 일본군에 패배하여 붕괴하고, 선조가 압록강변의 의주까지 몽진을 가며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지고야 만다.

3. 유적 발굴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1452년에 설치된 동래성 해자는 기초다짐층, 조선전기층, 조선후기층[13]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중 임진왜란기에 해당하는 조선전기층에서 폭 30m x 길이 30m 좁은 공간에서 환도, , 찰갑, 투구, , 화살촉 등등 당시 동래성 전투에 사용된 다양한 조선군의 무기들이, 임진왜란 당시 무기사를 새로 써야할 만큼 대량으로 출토된 것이다. #참고게시물: 400여 년 전 부산의 비극
[image]
[image]
[image]
한편 이 유적에서는 약 20여 구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남성은 물론, 저항할 수 없는 여자와 아이의 유골에서도 활과 조총, 철퇴에 맞거나 창검으로 찔리고 베인 자국이 발견되었으며, 화살 또는 총알이 뚫고 나간 어린아이의 두개골도 발굴되었다. 한 여성 유골은 일본도로 추정되는 칼로 몇 차례나 목을 베인 흔적이 있었으며, 몇몇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은 턱뼈가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도 있었다. 따라서 이 유적은,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이 자신들이 학살한 시신과 쓸모없게 된 조선군 무기들을 해자에 함께 던져 넣고 메워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게시물: 400여 년 전 부산의 비극
[image]
[image]
이때 발굴에 참여했던 정의도 당시 경남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은, 고고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만한 유적을 발굴하고도 "기쁘기는 커녕 오히려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본격적인 발굴에 앞서 위령제부터 지냈을 정도였다 하니 그 참상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유골들을 통해서 당시 조선인들의 평균 체격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는데 동래읍성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들은 모두 조선인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 유골들을 측정한 결과 당시 동래성 주민들 중 남자들의 평균 신장은 163.6cm 정도로 밝혀졌다.[14][15] 그리고 동래성 주민 중 여자들의 평균 신장은 153.4cm로 밝혀졌다.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 시절에 일본인 남성들 평균 신장이 155.1~156.5cm였다고 하고 여성들 평균 신장은 143~144.7cm였다고 하니 조선인 남성은 일본인 남성보다 7~8cm 정도 더 컸고 조선인 여성도 일본인 여성보다 9~10cm 정도 더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영양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치아를 확인할 수 있는 두개골과 하악골 32개체 가운데 에나멜 질감형성(Enamel hypoplasia)이 26개체에서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영양실조에 의해 나타나는 선이라고 한다.#참고기사
여기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들과 인골들은 위의 참고게시물 링크와 이 #참고기사에서 더 볼 수 있으며, '''수안역 내부의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에서는 실물을 볼 수 있으니 인근을 지나게 된다면 들러 보도록 하자.

4.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 영화 난중일기에서 간단하게 나온다.
  • 게임 임진록의 조선 시나리오 브리핑의 배경화면이 동래부사순절도이다.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57화에 약 2분 반 정도 간단하게 다루었다. 여기서 고니시는 병사를 시켜 항복 권유의 글귀가 쓰여진 목간은 동래성앞에 던지게 하였고 이를 본 송상현은 결사 항전의 의지가 담긴 글귀를 활에 묶은 후 날려서 보낸다. 이후 간단한 전투 장면과 함께 내레이션 설명이 나오며 송상현은 북향 사배를 하지 않고 전투를 벌이다 일본군의 칼에 전사한 모습으로 나오며 조선군 병사들 대부분이 학살당하며 일본군이 성안으로 진입한다.
  • 드라마 징비록에서도 13화에서 간단하게 다루었다. 부산진과 다대포 등의 함락 소식을 들은 후 송상현은 이각과 합류를 청했지만 이는 무산되었고 곧 고니시의 항복 권유 글귀가 전해지자 결사 항전의 의지를 담은 답서를 보낸다. 그 직후 일본군이 공격하자 송상현이 화살을 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만 나오다가 자세한 전쟁 장면은 생략한 채 성이 함락되고 송상현 주위의 병사들이 모두 사망하는 것으로 나온다. 송상현 혼자서 고니시 휘하의 병사들에게 포위되었고 송상현은 갑옷 위에 관복을 걸쳐 입은 후 통곡을 하며 절을 올린 후 고니시를 향해 달려들지만 싸우다가 일본군 병사들의 칼을 맞고 전사한다.
  • 현재까지는 1985년 문화방송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이 유일하게 동래성 전투를 비중있게 다룬 사극이다. 비중있는 조연으로 자주 등장하는 박영지 배우가 송상현 장군역을 맡아 열연하였다. 조선군이 연전연패한 극 초기에 왜군을 동래성에서 패퇴시키는 활약을 하지만[16], 이내 적의 총공세에 밀려 성은 함락되고, 송상현의 최후는 역사대로 전개된다. 갑옷 위에 조복을 걸치고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해 절을 한뒤 왜병들을 꾸짖다가 사망한다. 그리고 첩인 이소사와 측근들도 함께 살해당한다. 다만, 1980년대 작품인 까닭에 2005년에 발굴된 동래성 양민 학살은 작품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 조선왕조실톡 83화에서 고니시가 길 내놔라 필담을 시전하자 송상현이 답으로 법규를 시전하다 분노한 일본군에 쓸려나가는것으로 묘사되었다.[17] #

[1] 현재의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자리이다.[2] 울산군수[3] 민간인을 포함하면 약 2만 명으로 추정[4]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 병력과 수군 지원군의 합세.[5]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구[6] 이 사진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그림을 확대해서 보면 성문에 그 유명한 '팻말 문답'이 묘사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그림 곳곳에 당시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는데, 성 안에는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왜군에게 저항하는 여성들도 볼 수 있고, 성 안 가운데에는 북향사례를 올리는 송상현의 뒷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 좌측 상단에 백마를 탄 장수는 경상 좌병사 이각으로 전투에서 도망가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다만 일본군이 단한명도 갑옷을 입지않았다는 고증오류는 아쉬운 점인데 일본인을 왜놈이라 부르며 폄하하던 조선 분위기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조선군도 장수를 제외하곤 병사들이 갑주를 입지않은 고증오류가 있다.참고[7] 불과 하루만에 양산과 울산의 병력들이 이미 동래성에 들어와있었다.[8] 나중에 동래성이 함락된후엔 울산의 경상좌병영도 버리고 도망친다. 주변 병력들이 이미 집결한 상태인데도![9] 당시 동래성 인생문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뒷산(망월산)을 우회하여 성곽을 넘어 동래성에 진입한다.[10] 실록의 기록은 大鎭不救라 되어있으나 청주 충렬사에 있는 혈선발에는 列鎭高枕이라 되어 있다.[11] 물론 예외도 있어서 항복이고 뭐고 다 죽여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학살당하지 않으려고 피난가는 경우도 흔했다.[12] 비슷하게 제주도에서는 제주 4·3 사건의 여파로 4월경 제주도에 가 보면 촌락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 치러진다. 대부분 같은 날 학살당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제삿날이 겹치는 것.[13] 임진왜란 이후 수백년간 쌓여 조성된 부분이므로 전쟁과 관련없는 백자나 옹기 파편, 기와 파편, 동물뼈 등이 출토되었다.[14] 유럽의 당시 남유럽인들 평균 신장과 비슷한 수치이다. 지금도 한국인과 남유럽인의 평균 신장은 매우 비슷하다. 한국인: 173~4cm, 남유럽인: 172~175cm.[15]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당시 조선인 남성의 평균 신장을 163.4cm라고 적었는데 이로 볼 때 조선인 남성들은 300년 동안 계속해서 163~164cm 정도의 평균 신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16] 사실은 고니시가 소수의 병력으로 탐색전을 벌인 것이다. 특히 이 탐색전에서 동래성의 조선군 병력이 일본군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알아차렸다.[17] 이와중에 부산진에서 동래까지는 부산 도시철도 1호선으로 이동했다.(도보 2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