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1. 개요
2. 위서 구분법
3. 목록
3.1. 위서로 결론난 문서
3.2. 위서 논란이 있는 문서
4. 같이보기


1. 개요


위서01 (僞書) 「명사」
「1」가짜 편지.
「2」=위본(僞本).[1]
「3」=위조문서.
「4」남의 필적을 흉내 내어 씀.
① 옛날의 책, 글씨, 그림 따위를 가짜로 꾸민 것.
② 가짜 편지.
③ 가짜로 꾸민 문서.
④ 남의 필적을 흉내내어 씀.
표준국어대사전
『고려대 한국어대사전』[2]
보통 위서라고 하면 그릇된 역사서만을 일컫는 경우가 많으나, 역사서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역사서 이외에도 책이나 편지, 공식문서 등 위조본, 윤색본은 모두 위서라 칭한다. 이 때문에 표준국어대사전을 포함한 상당수 국어사전에서는 가짜 편지가 표제어일 정도. 위조지폐도 종이니깐 위서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이건 보통 위서와는 매우 안 좋은 쪽으로 엄연히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위서로 보지 않는다. 위조지폐 항목 참고. 다만 위서라고 현재 논란을 벌이는 분야가 대표적으로 역사 쪽이기 때문에 주로 역사서에 한정되어 언급될 뿐이다. 애초에 이는 문헌학적 개념이다.
다만 여기서 거짓되었다는 것은 역사서의 성립연대ㆍ저술자ㆍ성립과정과 같은 서지사항이 거짓되고 주작되었다는 말이지, 절대로 안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한마디로 잘못된 내용이 있다고 위서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진서라도 잘못된 내용이 있을 수 있다. 간혹 환빠들이 "삼국사기에도 잘못된 내용 있잖아! 그러니까 삼국사기도 위서야!"라고 말하는데, 더 들을 것도 없는 헛소리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는 성립연대도 그렇고, 그것을 참고한 후대의 서적도 있어 서지사항이 조작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니 위서가 아니다. 좀 더 혼란이 심한 예로는 일본서기가 있는데, 일본서기도 쓰인 연대와 저술자 등은 사실이므로 진서가 맞다. 내용이 역사 판타지 소설로 자꾸 넘어가서 그렇지(...) 역사서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박씨전도 실제 역사와는 달리 '청나라군에게 통쾌하게 모욕을 주었다'고 뻥을 치고 있지만 조선 후기에 쓰인 책임은 확실하므로 위서는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어떤 사람이 이런 내용을 써놓고 '당대의 진짜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가짜다'라고 주장하면 박씨전도 위서이다.
간단하게 "현대에 아무리 좋은 역사책이 나와도, 그 책이 스스로 천 년 전에 쓰였다고 주장하면 내용에 관계 없이 위서이다."
'위서지만 안에 진실이 있다' 하는 경우에도 책의 내용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다. 최소한 당대 저작되었다는 말은 개드립이고, 후대에 저술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책 안에서 무언가를 뽑아내려 하더라도 훨씬 더 엄격하게 검증해야 하는데, 절대다수는 알아서 배제된다. 오히려 그 위작된 시대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정도의 가치만 있다.[3]
즉, 위서고 아니고를 판별하는 것은 사료의 외적 비판에 해당한다. 사료의 내용의 잘잘못과 교차검증 같은 것은 내적 비판에 해당한다. 따라서 둘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착각하지 말자.
반대말은 진서(眞書)이다.

2. 위서 구분법


이 구분법은 청나라말의 학자인 량치차오가 제시한 위서 구분법이다. 아래는 그의 저서 <중국역사연구법> 제5장 '사료의 수집과 감별' 중에 나오는 내용.

1. 그 책이 전대(과거)에는 저서 속에 보이지 않거나 혹은 결코 다른 사람이 인용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것은 10중 9는 거짓이다.

  • 환단고기를 예로 들어보면, 환단고기는 신라시대의 '삼성기'(안함로/원동중), 고려시대의 '단군세기'(이암), 고려시대의 '북부여기'(범장), 조선시대의 '태백일사'(이맥)를 근대에 묶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성기'가 세조실록에 단 한번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기록에서 이들이 언급된 바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세조실록에 단 한번 등장하는 이 삼성기도 문제인 것이, 해동고승전에는 신라시대의 승려 안함(安含)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안함(安含)·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기록을 교차검증하면 세조실록의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것처럼 "안함로와 원동중이 지은 삼성기"가 아니라 "안함·노원·동중이라는 세 성인의 기록"이 된다.

2. 그 책이 전대(과거)에 저서 속에 보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산일되었다가 갑자기 이본 하나가 돌출되어 편수 및 내용 등이 구본과 완전히 다른 것은 10중 9는 거짓이다.

  • 화랑세기를 예로 들어보면, 화랑세기라는 책 자체는 삼국사기 편찬 과정에서 참조한 사료 가운데 하나로 그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근대에 박창화가 남긴 화랑세기 필사본은 일부 문구를 제외하면 정작 삼국사기에 전하는 화랑 관련 기록과 내용이 거의 겹치지 않는다.[4]

3. 그 책의 구본이 있으나 없느냐는 따지지 않으나 금본의 내력이 명확하지 않으면 바로 경솔하게 믿어서는 안된다.

  • 단기고사를 예로 들어보면, 유응두가 중국에서 발견한 것을 김두화가 입수한 경위가 불분명하고 1959년 이전까지 단기고사라는 책을 언급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실상 갑툭튀한 것이다.

4. 그 책이 유전된 실마리는 다른 분야로서 고견할 수 있으나 이로써 금본에 아무개가 예전에 쓴 것이라면 증명이 불확실한 것이다.

5. 진서의 원본이 전인의 인용을 거쳐 확실히 증거가 있는데 금본이 이것과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금본은 필연코 거짓이다.

6. 그 책에서는 아무개가 찬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책속에 기록된 사적이 본인보다 나중의 사람의 것이라면 그 책은 전부가 거짓 혹은 일부분이 거짓이다.

7. 그 책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그 일부분이 후인에 의해서 고치거나 바뀐 흔적이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그 책의 전부에 대해 신중하게 감별해야 한다.

8. 그 책 속에 언급한 것이 사실과 확연히 상반된다고 하면 그 책은 틀림없이 거짓이다.

  • 화랑세기를 예로 들어보면, 화랑세기에는 용수(龍樹)가 진평왕 말년에 동생 용춘(龍春)에게 아내와 자식을 부탁하고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황룡사 9층 목탑지에서 수습된 찰주본기에는 진평왕 다음의 선덕왕이 재위 14년에 용수를 시켜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고 기술하였다.

9. 두 책이 동일한 사안을 기록한 것이 절대적이 모순이 된다면 틀림없이 하나가 거짓 아니면 둘 다 거짓이다.

  • 화랑세기를 예로 들어보면,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모두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이 동일인물의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화랑세기에는 용수와 용춘이 개별적인 인물이며 형제 관계로 나타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모두 구해왕의 아들이 삼형제로 기록되었지만, 화랑세기에는 한 사람이 누락되었으며 누락된 사람은 이사부의 아들로 처리되었다.

10. 각 시대의 문체는 자연스럽게 구분되는 것이니,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스스로 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후인이 거짓으로 만든 책은 자구에서 지엽적인 반증을 찾을 것까지도 없이 그저 문체를 한번 보기만 해도 금방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후연서[5]를 예로 들어보면, 기재된 한문의 어휘와 문법 자체가 근대의 것이다. 대표적으로 적(的)을 현대 한국어의 조사처럼 범용하고 있으며, 지(之)를 현대 한국어의 접미사처럼 남용하고 있다.[6]

11. 각 시대의 사회 상태는 우리 대에서 각 분야의 자료에 의해서 항상 그 개략적인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아무 책에서 그 시대 상황을 말한 것이 사리에 있어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라면 바로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 환단고기를 예로 들어보면, 한민족은 구석기 시대에 환국#s-3, 신석기 시대에 배달과 조선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국가를 세웠다 카더라. 그러나 구석기 시대는 빙하기로 이동생활을 하던 가족 단위의 사회에 지나지 않았으며, 신석기 시대에 빙하기가 끝나고 정주생활이 시작되면서 여러 가족이 한 지역에 모여서 마을 단위로 응집되고, 이후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한정된 자원의 독점을 바탕으로 상하관계가 고착화되어 국가 단위가 형성되는 것이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12. 각 시대의 사상은 그 진화 단계에 있어 저절로 한결같이 정해진 것이 있기 마련인데, 만약 아무아무 책에서 표현된 사상이 그 시대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바로 거짓으로 단정할 수 있다.

  • 단기고사를 예로 들어보면, 고조선의 유위자라는 사람은 도가의 지식을 설파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세포, 원자, 성운, 항성, 혹성, 스펙트럼까지 통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항성이나 혹성과 같은 어휘들은 서양 과학이 일본을 통해 번역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전근대에 저런 어휘는 해당하는 개념과 연결되지 않는다. 후대에 근대적 어휘로 수정한 것이라면 원문이 어떻게 되었길래 근대과학에 해당하는 어휘인 줄 알 수 있었단 말인가.(...)[7]

3. 목록



3.1. 위서로 결론난 문서


  • 관자(管子): 위서라도 그 자체로 역사적 의미를 있을 수 있다는 대표적인 사례. 전국시대 제나라의 명상인 관중의 저작으로 칭하지만, 실제로는 관중의 행적을 바탕으로 제나라의 다른 사상가들은 물론이고 한나라 시대의 영향까지 포함하므로 위서이다. 하지만 위서라고 해도 그 시기가 워낙 이르고, 당대의 사상과 시대상을 엿볼 수 있으므로 좋은 사료로 인용된다. 특히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는 고조선에 대해 언급된 몇 안되는 사료이므로 특히 중요하다.
  • 위고문상서:유교의 경전인 상서를 위조한 책. 한나라때 발견된 고문상서가 망실되자, 진나라의 매색(梅賾)이 여러 유교경전의 내용을 짜집기하여 위고문상서를 만들고, 고문상서가 발견됐다고 거짓말하며 황제에게 바쳤다. 그래서 위고문상서가 알려졌고, 수천 년 동안 내로라하는 유학자들을 낚았다.
  • 위서(緯書): 유교의 가짜 경전. 저자를 공자라고 칭하지만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위서(僞書)이다. 내용이 음양오행술과 도참사상을 기반으로 하므로, 공자의 사상과는 내용이 그야말로 극과 극이다.
  • 육도삼략: 비록 위서지만 내용 자체는 훌륭하다. 이순신장군이 애독한 책이다.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중세서양사의 가장 대표적인 위서.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유명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보낸 칙령 형식을 취하였다. 자신이 동로마로 이주하면서 서로마를 로마 교황에게 맡기고, 스스로를 교황보다 낮추는 내용이기 때문에 교황령의 법률적 근거로 활용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피핀이 로마 교황에게 교황령을 넘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등 교황권을 뒷받침하는 상징적 문건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세시대에 조작된 문서로, 르네상스 시대에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8]. 처음에는 조작을 주장한 책 자체를 금서로 묶기도 했던 교황청도 결국은 조작사실을 인정하였다.
  • 환빠 계열의 환단고기단기고사부도지천부경 등등의 서적 및 자료들[9]


3.2. 위서 논란이 있는 문서


  • 규원사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공식적으로 1972년에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의 3인이 심의하여 조선 왕조 숙종 1년인 1675년에 작성된 진본이라 판정하였고 현재까지도 뒤집어진바가 없어 진본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2003년 3월에 서지 전문가들이 재감정을 실시한 바 있는데 이땐 대체적으로 진본이 아니며 일제 때 필사되어 제본된 것으로 판단한 바 있다. 북한이나 일부 국내 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국내 사학계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 도덕경: 과거에는 '노자라는 인물 자체가 가공의 인물이 아니냐' 하는 말까지 나왔으나, 기원전 3세기 무렵의 판본이 발견되어 위서설은 많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본래 책의 내용 중 일부만이 기록되었으며, 그 내용마저도 알려진 판본과 차이가 많아 후대의 조작이 심하게 들어갔음은 부정할 수 없다.
  • 대승불교 경전 전체: 여기서 위서라는 것은 문헌학상의 '위서'와 개념이 다르다. 문헌학상의 위서 정의를 댄다면, 대승경전 거의 대부분은 석가모니의 친설이 아니라고 의견이 모이므로 위서이다. 다만 이것이 '종교의 경전으로서' 가치가 있느냐,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연결되느냐 하는 문제인데, 자세한 내용은 대승비불설 참조
  • 이수성자술: 태평천국의 충왕 이수성이 체포된 뒤 죽기 전 작성한 자술서이다. 일단 이수성이 체포된 뒤 죽기 전 자술서를 작성한 뒤 증국번의 명령으로 처형된 것까지는 역사적인 사실인데, 현재 전해지는 자술서가 이수성이 작성한 원본 그대로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증국번이 세상에 알려지면 본인과 집안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일부 부분만 수정했다는 설이 있으며, 아예 증국번이 원본은 없애 버리고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술서 전체를 위조했다는 위서설까지 있다. 다만 이수성자술이 태평천국 내부 사정을 꽤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증국번이 자술서 전체를 위조했다고 하더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게 아니라 실제 작성된 이수성의 자술서를 뼈대로 하여 본인에게 유리한 형태로 재창작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 편의십육책: 제갈량이 저술한 책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진수가 편찬한 제갈량집에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위서 논란이 있다. 항목 참조.
  • 화랑세기 필사본: 화랑세기 자체는 분명히 당대에 쓰였던 사서로 삼국사기에도 언급된다. 문제는 현대에 발견된 필사본.
  • 후출사표: 제갈량집에는 없는 이야기이므로 논란이 있다. 게다가 내용 상 제갈량이 아닌 제갈각이 했을 법한 이야기가 나온다.
  • 이 책의 저자가 실제로 이름 붙여진 사람이 썼는지 논란이 있지만, 책 자체에 "아무개가 썼다." 하는 내용은 없다. 단지 구전으로 어떤 책을 누가 썼더라는 말이 전해졌을 뿐이므로 위서라고 볼 수는 없다. 모세오경에는 모세가 죽는 내용도 등장하는데 죽은 모세가 썼을 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의 제자들 대부분은 천하고 무지한 자들이라고 했는데, 사실 유대를 비롯한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전체 인구의 무려 90%가 문맹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의무교육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비싼 수업료를 내지 않으면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문맹률이 굉장히 높았다. 심지어 로마의 관리들조차 글씨를 제대로 쓸 줄 몰라서 글씨를 쓸 줄 아는 지식인들한테 돈을 주고 자기들 대신 글씨를 쓰게 하는 일조차 있었다. 이런 이유로 성서학자들은 사도 파울로스(바오로, 바울)가 썼다는 몇몇 문헌들을 제외한 나머지 신약성경에 포함된 문헌들 대부분은 사도들의 이름을 빌려서 후세에[10] 누군가가 쓴 위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다.

4. 같이보기



[1] 역시 표준국어대사전 기준 정의 = '위조하여 만든 책.' [2]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9. 4756쪽.[3] 예를 들어 20세기 초 등장하여 요즘에는 역사왜곡 문제를 일으키는 대종교 계통 사서 등의 경우, 고대사 사료로는 가치가 없지만 일제강점기 민족감정을 고취시키기 위해 고대사를 동원하는 지적 분위기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의미는 있다. 즉 고대사 사료가 아니라 근현대사 사료인 셈.[4] 단, 예시문에서 들고 있는 화랑세기의 사례는 아직 진위 논란이 있으므로 가려서 볼 것이 요구된다. 이하의 예시문은 위서론에 입각하여 작성되었다.[5] 정립의 소설 '광개토대제'에 사료로 인용된 책이라고 하나,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서가 있다는 말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사실관계가 어긋나는 점도 많아서 정립이 자의적으로 구절을 지어내고 실존하는 사서인 것처럼 설정놀음한 것이 확실시된다.[6] 예시에서 든 것은 한문에 있어 고대-근대 문법의 차이지만, 이외에도 상고-고대, 상고-중세, 고대-중세, 중세-근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문제이다. 극단적으로 갑골문이 고대나 중세의 문법으로 작성되어 있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다만 환단고기와 같은 경우에는 아예 중간에 원문을 유실하고 전적으로 기억에 의거하여 재구성했다고 하므로, 문체를 따질 것도 없다. 7번을 보자.[7] 이와 관련된 대목이 전적으로 근대에 가필된 거라고 한다면 자신의 사료적 가치를 스스로 깎아먹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7번을 보자.[8] 당시 학자가 언어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콘스탄티누스 시절에는 사용되지 않은 어휘가 한가득이라는 게 밝혀졌다[9] 환빠들의 경우 이러한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10] 사실 12사도 대부분(사도 파울로스를 제외한)은 그들 스스로 문헌 기록을 쓰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12사도들은 그들 살아생전에 세상의 종말이 올테니 문자 기록을 남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이유에서였고, 다른 하나는 이미 설명한 대로 당시 문맹 인구가 굉장히 높은 데다가 사도들 대부분도 문맹이어서 기록을 남길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12사도들이 죽고, 그들을 따르는 신도들도 늙어서 하나둘씩 죽어가자 교단을 계속 존속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그리스어 같은 고급 학문을 배운 지식인들이 비로소 문헌 기록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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