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

 


'''보덕국 초대 국왕'''
'''報德王 | 보덕왕'''
'''시호'''
보덕왕(報德王)
'''봉국'''
보덕국
'''관등'''
소판(蘇判)
'''성씨'''
고(高)(?) · 연(淵)(?) / 김(金)
''''''
안승(安勝) / 안순(安舜)
'''왕비'''
왕비 김씨(金氏)
'''부친'''
보장왕(寶臧王)(?) / 연정토(淵淨土)(?)
'''조카'''
대문(大文)
'''생몰년도'''
음력
? ~ ?
'''재위기간'''
음력
669년 ~ 670년(부흥운동)
674년 ~ 683년(보덕국왕)
1. 개요
2. 생애
2.1. 출신
2.3. 보덕국왕
2.4. 이후
3. 평가
4. 같이보기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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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왕족으로 고구려부흥운동옹립된 고구려의 비정통 국왕이자 보덕국의 국왕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검모잠 등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고구려 국왕으로 추대되었고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주도했으나 당나라의 군대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시작하면서 결국 실패했다. 이후에 남쪽 신라로 달아나서 보덕국의 국왕이 되었고 나중에는 신라의 귀족이 되면서 완전히 신라에 편입되었다.

2. 생애



2.1. 출신


보장왕서자 또는 외손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舜)이라 기록되어 있고 신라본기에서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舜)이라 기록되었으며 신당서 고려전에서는 보장왕의 외손자 안순(安舜)이라 기록되었다.
그래서 이름도 고안승(보장왕의 서자라는 추정) 혹은 연안승(연정토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외손이라는 추정)으로 여러 서적에서 뒤섞여서 쓰인다. 임기환은 "보장왕의 외손자로써 연정토의 아들, 둘 다 맞다"라고 보고 있다.[1] 안승이 고구려 멸망 후 부흥 세력의 왕으로 추대된 점 등으로 볼 때 고구려인들이 보기에도 당나라에 끌려간 보장왕 대신 왕위를 이을만한 지위를 가진 인물, 즉 보장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더 우세하다.[2] 이성 승계 사례가 있기는 있었던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안승이 연씨 부계였다면 안승이 수많은 고씨들을 제치고 국왕으로 옹립될 수 있었을지가 의문이다.[3] 하지만 보장왕 직계가 다 끌려가서 왕위를 이을 자가 없었다면 도피에 성공했던 외손이 가장 왕통과 가까우므로 이상하지만은 않다. 고구려 고씨가 아예 남아있지 않았나?에 대해서는 안승과 함께 활동한 고연무(高延武) 등 분명 고씨가 남아있었다.[4] 하지만 고밀(高密)의 경우처럼 사성 고씨가 존재했음이 확인되며 고구려 유민들의 이름만 봐도 정말로 개나소나 고씨인 경우가 많아서 고씨라고 해도 다 왕족이었던 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승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산만한 점이 많아서 1가지만 믿기는 힘들지만 현대인이 안승의 가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는지와 별개로 당시 고구려인들은 안승을 고구려왕이 되기에 충분한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음은 확실하다. 고구려 유민들이 스스로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했다는 점에서 왕위 계승권이 분명히 있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가계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정설이다.
생몰년은 불명이나 670년 검모잠을 살해했고 671년 7월 나당전쟁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승이 나이가 어리다고 하고 있으므로 이 때 10대 후반~30대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2.2. 고구려부흥운동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안승은 서해의 사야도(史冶島)[5]에 피신하였다. 그러던 중에 670년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당나라 관리를 살해하고 남쪽으로 이동해 온 검모잠이 안승을 발견하여 한성(漢城)[6]에서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2.3. 보덕국왕


문무왕신라로 투항한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옛 백제 땅인 서쪽 금마저(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머물게 하였다. 왜 하필 고구려 고토와 가까운 곳도 아닌 백제 영역인지에 대해서는 고구려 유민의 보덕국으로 백제 유민들을 견제하기 위한 신라의 이이제이라는 것도 있고, 혹은 7세기 고구려가 기자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기자의 후손(으로 당시에 알려져 있었던) 준왕위만에게 찬탈당한 뒤 평양을 떠나 마한 땅으로 남하해서 한왕이 되었다는 전승에 근거해서 이에 연결시켜 고구려 피난민들에게 익산지역의 땅을 내준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7]
674년에는 안승을 보덕국의 왕인 '보덕국왕(報德國王)'에 봉하였다. 이어서 680년에는 문무왕으로부터 으로 만든 그릇과 비단 1백 단을 예물로 받고 문무왕의 여동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8] 교서를 받았다.
안승은 이후 10여 년간 보덕국을 통치했는데, 비록 괴뢰국으로 평가받지만, 태대형(太大兄) 같은 고구려 시절의 관직체계를 그대로 이식해 사용하고 일본에 고려의 이름으로 사신을 보내는 등 어느 정도 국가 체계를 갖추고 통치가 이뤄졌다.

2.4. 이후


나당전쟁신라의 승리로 끝나고 한반도가 어느 정도 안정된 683년 신라 신문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소판(蘇判)[9] 벼슬을 얻었으며 김씨(金氏) 성을 사성받고 진골 귀족이 되었다. 받은 소판직 자체가 6두품 이하는 오를 수 없는 진골의 관등이다.[10] 이로써 안승은 신라의 중앙 귀족이 되어 경주의 큰 저택에서 머물게 되었고 익산에 있는 보덕국과는 격리되어 버렸다. 보덕국 설치를 허락했던 문무왕이 어떤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들인 신문왕은 고구려 유민들을 흡수하기 위해 만들었던 보덕국을 이 시점에서 서서히 없애버릴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김흠돌, 김군관통일 전쟁 공신 귀족들을 숙청하고 녹읍 폐지로 왕권을 강화했다. 이렇듯 결정과 시행이 확실한 철혈 군주 신문왕에게 신라의 통일성을 해치는 구 시대의 잔재인 보덕국도 마찬가지로 제거 대상이었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684년 보덕국에서 안승의 조카였던 장군 대문(大文)은 안승이 신라 귀족으로 편입된데에 불만을 품고 신라 조정을 상대로 모반하다가 대문은 곧 처형되었고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터졌다. 이에 김영윤 열전에 따르면 반굴의 아들 김영윤을 황금서당(黃衿誓幢) 보기감(步騎監)으로 삼아 토벌군으로 보냈는데 황금서당은 옛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부대였으니 고구려인의 반란을 고구려인으로 진압한 셈. 이후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이들은 대문이 죽은 이후로도 관리들을 살해하며 읍성을 점거하였는데 김영윤은 전사했지만 곧 토벌되었다. 이로써 보덕국은 완전히 소멸되었으며 신라는 보덕국이 있었던 지역에 금마군을 설치하여 신라의 행정 구역에 완전히 편입하였다.
보덕국 사람들이 익산에서 싸울 때 경주에서 살고 있었던 안승이 어떻게 살았는가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김씨로서 진골로 편입되어 중앙 귀족 수준으로 살았거나 혹은 이미 죽지 않았다면 반란에 연루되어 처벌되었다고 추정된다.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횡성 고씨 족보에 따르면 안승의 형 인승횡성에 살기 시작하면서 횡성 고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숭조 사업으로 작성된 족보의 기록이기에 신빙성은 떨어진다.[11]

3. 평가


안승에 대한 평가는 좀 애매한 편이다. 결과적으로는 당나라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않고 신라로 달아나려고 했던 점과 함께 고구려부흥운동을 주도하였던 검모잠을 살해했던 일 등, 유능한 신하를 죽인 것도 모자라 보덕국도 결국 반란으로 망해버리는 결과로 인하여 조금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편이다. 심지어 "고구려 유민들의 편입을 위하여 신라 조정에 의해 이용만 당했다"면서 박하게 평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검모잠을 죽이고 고구려 부흥을 망친 꼭두각시 군주"로 모는 고구려 사관론자들은 물론 신라 사관론자들도, 대문의 난을 일으킨 그 안승 일당들을 역적으로 꼽는다. 백제 사관론자들 입장에서도 안승 일당들이 백제 유민들을 밀어냈다고 욕한다.
박하게 평가한 원조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인데, 안승을 부각시킨 것은 크게 2가지로 추정한다. 첫째는 고구려의 혈통적 정통성을 가지고 신라에 흡수된 안승의 존재로 통일신라론의 명분을 쌓기 위해서다. 고구려는 엄연히 고씨 왕조국가였고 현대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당시에는 대씨 같은 생판 다른 성씨보다는 보장왕 직계로 보이는 안승이 가장 높은 고구려의 정통성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12] 둘째는 고구려 폄하용인데 그래서 검모잠 참살과 덤으로 안승 일당들의 반란도 부각시켰다. 하지만 정작 안승을 받아들인 것도 문무왕이기 때문에, 더 이상 부각하다가는 문무왕의 영웅화에도 금이 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국사기를 보게 되면 신문왕의 태자 때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문무왕과 엄청난 갈등을 빚은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 이후 문무왕 이후 신문왕이 철혈군주가 되어 문무왕이 만든 보덕국마저 토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미 일부 고구려 부흥군의 힘으로는 당나라 군대에 맞설 수가 없는 형편이었으니, 당나라에 투항하기보단 신라에 의탁하고자 하였던 안승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평도 만만치 않은 편이다. 고구려 왕족인 안승이 신라 편을 든 덕에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협조하여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이기는 데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안승을 따라 신라로 투항한 고구려계 귀족들이 신라로부터 6두품을 하사받고, 신라 귀족 사회에 살아갔다는 점을 상기해보자면 안승이라는 사람 본인의 외교적인 안목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은 경순왕이 처신을 잘 해서 신라계 가문이 고려시대와 그 이후까지 번성한 것과 비슷하다. 이들 고구려계 귀족들은 나중에 후삼국시대후고구려의 중심 세력이 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국 역사상 한 인물을 통해 이렇게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일어난 사례는 후삼국시대 호족 세력의 등장 이전 그야말로 처음 있는 일이다. 또 그만큼 가장 미스테리하고 어찌보면 가장 믿음없는 인물이 안승이기도 하고, 옛 고구려인과 신라인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인물의 중심이 안승이고 당시 옛 고구려, 백제인들과 나당연합이다. 후삼국시대 이전만 놓고 보면 역사상 가장 의심스럽고 흥미로운 시대와 인물인 셈이다. 어찌보면 드라마에 주역으로 나올 인물이기도 하지만, 사료가 지나치게 부족하므로 가상시대의 가상인물로나 가능할 것이다.[13]

4. 같이보기



5. 둘러보기



'''고구려의 역대 국왕'''
28대 보장왕 고보장

'''고안승'''

부흥운동 종결

'''보덕국의 역대 국왕'''
신규 책봉

'''초대 보덕왕 고안승'''

봉국 폐지
[1] 출처: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2]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도 삼국사기에 문무왕이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한 글에서 "선왕(보장왕)의 정당한 후사(正嗣)는 오직 그대 뿐이니 제사 맡을 자 또한 그대 말고 누가 있겠는가"라고 언급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외손자라면 정당한 후사라느니 하는 말을 쓸 수 있겠느냐"고 지적하고 안승을 보장왕의 서자로 보았다. 다만 이건 다분히 유교적인 시각이고 당장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외손도 직계로 쳐줬다. 조선 전기까지도 딸이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건 제사나 친척관계의 친소에 있어서의 경우고 삼국시대부터 이미 부계 혈통 계승이 명확히 확립되어 있어서 무언가의 계승에 있어서는 형제상속이든 부자상속이든 무조건 부계가 우선시 되었다.[3] 만약 안승이 연씨 부계였다면 국왕보다는 차라리 연개소문과 같은 실권자나 모계 혈통으로 옹립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4] 현재도 남아있는 횡성 고씨의 경우 보장왕 직계를 자칭하긴 했지만 그게 정말로 맞다고 해도 전란을 피해 아예 꽁꽁 숨어있던 일족으로 보인다.[5] 현재 인천광역시소야도.[6] 한강 변의 서울이 아니라 오늘날의 황해도 재령군 부근의 땅.[7] 현대에는 고고학의 발달로 실제 마한의 중심지가 경기도 광주나 충청남도 천안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고고학이 없던 조선시대까지는 준왕이 남하해 자리잡은 곳이 익산이라고 알려져 있었다.[8] 혹은 잡찬(迊湌) 김의관(金義官)의 딸과 결혼하였다고도 기록되었다. 만약 두 기록이 동시에 참이라면, 김의관이 문무왕의 여동생과 혼인했다는 얘기가 된다. 김의관은 원성왕의 증조부이다.[9] 신라 17관등 3번째 잡찬과 동일.[10] 폐쇄적인 골품제를 시행했던 신라 역사상 외부 인사를 진골 취급해 준 것은 김유신을 비롯한 금관국 왕족,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안승 이렇게 3번뿐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신라 김씨 왕족도 똑같은 진골이기 때문에 외부인인 안승이 진골이 된 것은 신라치고는 굉장히 높은 대우를 한 것이다.[11] 강원도 횡성군의 명칭의 기원이 고구려 명칭의 횡청현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고구려계 인물들이 강원도 지방에 남아있었을 확률은 있다. 그것이 안승의 형인지는 불명이다.[12] 연정토 가계라는 다른 기록도 있지만, 어쨌든 당시 고구려인들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추대할만한 사람이라고 인증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정통성을 인정받은 사람인 건 확실하다.[13] 대조영에서는 검모잠과 같이 고구려 부흥에 힘쓰지만 현실적으로 신라에 기댄 것에 불과하기에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한다. 검모잠이 그의 비겁함을 일갈하자 흔들리는 말투로 원한 자리가 아니고 자신에게는 버겁다고 토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