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루

 

'''관등'''
'''대사자(大使者)'''
'''직위'''
'''영북부여수사(令北夫餘守事)'''
'''이름'''
모두루(牟頭婁)
'''조부'''
염모
'''생몰연도'''
? ~ ?
1. 개요
2. 가문 내력
3. 그 외에


1. 개요


고구려광개토대왕 때의 관료.
할아버지인 대형(大兄) 염모의 공이 큰 덕분에 광개토대왕에 의해 북부여 수사(守事)(일종의 지방장관과 같은 직책으로 추측)가 되었다.
모두루는 왕명을 받들어 선대의 뒤를 이어서 북부여 수사가 되었으며, 이후 임지에서 광개토대왕이 사망했을 당시에 크게 통곡하였다고 한다. 사망하였을 당시의 관등은 대사자(大使者)였다.
모두루의 묘지명에 적힌 가문 내력에 따르면 모두루 일족의 출신지가 동명성왕과 같은 북부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선조가 동명성왕이 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부터 고구려 왕실을 따랐다고 한다. 즉 전통과 뼈대가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
이후 고국원왕 대의 인물인 할아버지[1]염모에 의해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또한, 할아버지인 염모 이후로 그 선조들이 대대로 북부여 수사를 지냈다고 한다. 모두루 역시 선조들의 뒤를 이어 북부여 수사가 된 것이다. 때문에 모두루 일족이 왕권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중요 귀족층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 귀족층으로 보기에는 염모가 지낸 대형이나 모두루가 지낸 대사자의 관등이 낮은 편이다. 따라서 대귀족이라기보다는 고구려 왕가 직속의 가신 가문으로 보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사서에는 모두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학계에서는 한동안 이런 사람이 존재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2][3] 그러나 1935년, 중국 길림성에 있는 하양어두(下羊魚頭)라는 언덕에서 모두루의 생애와 가문 내력이 기록된 모두루 묘지명이 발견되어 마침내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 가문 내력


[image]
모두루묘
[image]
모두루 묘지명. 전문과 해석은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참고
모두루의 생애와 가문의 내력은 모두루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으나, 비문의 대부분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 상태인지라 그 내용을 자세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세로 10자, 가로 80자라 총 800자에 달하나 알아볼수 있는 글자는 250여자에 불과할 정도. 파악되는 내용은 대략 도입부와 4부분으로 나뉜다.
1부
1~2행
대사자 모두루 묘지의 제기(題記)
3~9행
모두루 집안 시조의 사적
2부
10~40행
모두루 할아버지 염모의 사적
3부
40~44행
모두루 바로 전대의 사적
4부
44~81행
모두루 본인의 사적
내용은 자신의 가문의 내력에서 조상의 치적, 마지막에 자신의 치적을 적는 전형적인 묘지명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모두루의 관등인 대사자를 표기하였으며, 1부에서는 동명성왕이 북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웠던 일을 기술하면서 모두루 일족의 조상도 동명성왕을 도와 건국에 이바지했다는 내용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부에서는 할아버지 염모고국원왕 대에 모용선비(전연)의 침입에 맞서 전공을 세우고 반역 음모를 저지한 공으로 북부여 수사로 임명되었던 내용이 적혀 있다. 그 다음의 3부에서는 이후로 모두루보다 바로 선대의 인물이 염모의 공적을 이어 북부여 수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마지막의 4부에서는 모두루 본인이 광개토대왕의 은덕으로 북부여 수사로 임명된 일과 광개토대왕의 승하 소식을 듣고 크게 애통해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비문에 막상 모두루 본인의 사적보다는 염모 이야기가 더 많이 적혀 있어서 처음에는 무덤 주인이 염모이고 모두루는 그의 부하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훗날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아차산 일대 보루군 고구려 유물 중 염모라고 표기된 유물이 발견된 바가 있는데, 때문에 장수왕 대에 모두루의 후손이 한성백제 공략에 참여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3. 그 외에


남아있는 기록을 봐도 광개토대왕대에 그리 대단한 공을 세우거나 하지는 않은것 같은데, 광개토대왕대의 인물로 알려진 사람이 모두루를 제외하곤 장수왕이나 유주자사 이 전부일 정도로 알려진 사람이 극히 적어서, 광개토대왕 관련 작품에서 거의 이사람한테서 이름만 따오고 하는짓은 전혀 딴판인 캐릭터가 등장하곤 한다.
2012년 KBS 1TV에서 방영된 사극광개토태왕에서도 등장. 그러나 역시 실제로 기록된 역사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선보였다. 무려(?) '''관미성 성주'''가 되었다가 백제의 관미성 탈환 시도 때문에 인질이 되어 리타이어...
[1] 묘지명에 '할아버님이신 대형 염모'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뒤의 기록을 보면 모두루 자신은 염모의 손자뻘이 된다고 기술되어 있다.[2] 별다른 업적이 없어서 안 알려진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조선시대와 달리 광개토대왕 시기는 업적은 고사하고, 본인 이름'만'이라도 한중일 사서에 등장하는 고구려인은 채 20명이 안 될 정도로 매우 적다....[3] 어차피 사료부족으로 한국의 삼국시대 인물의 대다수는 이런 운명이다. 당장 고구려 시대에 왕족을 제외하면,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는 사람은 7명 (을지문덕, 창조리, 연개소문, 온달, 밀우, 유유, 명림답부) 뿐이며, 밀우, 유유 두 명은 동천왕이 도망가는 과정에서 활약한 일회성 인물들에 불과하다. 그나마 을파소와 연개소문을 제외하고는 조상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다. 최소한 조상이 누군지는 아는 모두루만도 알려진 게 없는 것이다. 사족으로 사마천이 위대한 것이, 그 동안은 역사에 기록될 일도 없었던 도적, 의사, 자객 이런 사람들의 사적을 가능한 한 기록한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