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보예 마니치
1. 개요
세르비아 국적의 공격수로 부산과 인천을 거치며 8시즌을 K리그에서 뛰었다. K리그 통산 62득점 39도움을 기록.
2. 커리어
2.1. K리그
1996년 부산 대우 로얄즈에 입단하며 한국 프로축구 무대에 데뷔했으며, 1997년 부산 대우 로얄즈의 전관왕의 주역으로 대활약하였다. 1998년엔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에 1년간 임대되기도 했으며, 1999년 임대 복귀하여 부산을 리그 준우승으로 이끄는등 로얄즈의 최전성기를 함께한 선수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이 시기의 좋은 활약으로 베스트 11에 뽑힌다. 이후 2000년 1월, 대우가 망해서 팀이 매각되고 팀의 이름이 새로 바뀌는 와중에도 계속 부산의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2년 올스타전 하프 타임 이어달리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당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겪기도.. 이후 2004년 전반기를 끝내기 직전 안종복 단장과의 인연으로 인천 유나이티드 FC에 합류한다. 인천에서도 변함없는 활약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2005년에는 제난 라돈치치, 아기치와 함께 삼치로 불리며 인천의 돌풍을 이끌었다.
2005년 5월에는 한국으로 귀화를 선언, 인천 강화도에 있는 마니산을 따 한국 이름을 짓고 한국 선수로 등록이 됐지만 자녀의 교육비 문제로 결국 시즌 중에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한국과의 인연을 정리한다.[1] 2007년 은퇴후에는 세르비아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축구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굉장히 빠른 스피드를 가진 선수였다. 사이드 돌파 위주의 플레이를 선보이며 상대 수비수들을 애먹였는데, 마니치가 사이드를 흔들어주면 중앙으로 다른 선수들이 쇄도해들어가며 득점을 기록하는등 재미를 쏠쏠하게 봤다. 여기에 반칙 유도 능력도 좋아, PK를 많이 얻어내기도 했던 선수.[2] 여기에 정확한 킥 능력까지 보유해, 선수로서는 노장에 접어든 셈이었던 2005년까지 주전 조커로 기용되었다. 하지만 욱하는 성질이 있어 상대방과 신경전으로 쓸데없는 카드를 많이 받는게 단점이었다.[3]
[1] 국제학교의 교육비가 워낙 비싸다보니 감당하기도 어려워 인천 구단 측에 교육비를 요청했지만, 재정이 넉넉하지 못한 인천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고. 결국 마니치의 은퇴 후 구단 코치직을 보장해주었지만 이중 국적자인 마니치는 2005년 10월까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적을 정리해야했고 결국은 고심 끝에 한국 귀화를 포기하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돌아간다.[2] 여담으로 부산 시절 마니치가 얻어낸 PK는 거의 우성용이 전담해서 찼다.[3] 그나마 인천에 와서는 많이 나아진 편이지 대우 시절에는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시한폭탄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