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앨런 앱셔

 


[image]
Larry Allen Abshier (1943년 ??월 ??일 ~ 1983년 7월 11일)
일리노이 주 어배나 출생.
한국전쟁 이후에 최초로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보다 먼저) 1962년 5월에 월북한 미합중국 육군 병사이다. 그 후에도 5명의 미군이 더 월북, 공식적인 월북 미군은 총 6명(전원 육군 사병)이다.
월북 사유가 가관인데, 이미 그당시 대마초 흡연 6회(미국에서 대마초 소지, 흡연이 불법이던 시절) 전과로 처벌 받기가 두려워 월북을 하였다.[1]
제임스 드레스녹과 비슷하게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드레스녹의 증언에 의하면 매독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월북 초반에 선전도구로 이용되는 대신 호의호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 곳이 못된다고 느꼈는지 드레스녹을 포함한 몇 동료들과 소련 대사관으로 가서 망명신청을 했으나 '''그냥 북한에서 살아라!'''고 거절당한다. 한 술 더떠 북한 당국에 고발을 해버려서 망명은 실패하였으나 '''사회주의의 광택제''' 역할을 할 이들을 처벌은 하지않고 사상교육만 철저하게 시킨다. 그 뒤로는 반미영화를 찍으며 조국을 신나게 팔아먹으며 스타로 살았다.[2] 처음에는 같은 처지의 드레스녹과 친하게 지냈으나 후에 미 육군 보병병장 출신 젠킨스가 월북을 하면서 드레스녹과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드레스녹은 월북한 주제에 군계급을 들먹이는 젠킨스가 고까웠으나 나머지 동료들은 젠킨스를 상사로 대우해주고 잘 지냈다고 한다. 결국 드레스녹을 무리에서 쫓아내고 공식활동(선전영화 촬영 등)에서 마주치는 것을 제외하고는 죽을때까지 교류가 없었던 듯하다.
1983년 7월 11일 한국나이로 41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쓰러지고 아내가 이웃집에 살던 젠킨스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으나, 젠킨스가 도착하자마자 사망했다. 장례식은 북한정부가 지원했으며, 나름대로(?) 잘 치러졌다고 한다. 물론 그 잘치뤄졌다가 '''사회주의의 낙원, 지상천국 인민공화국을 홍보해준 동무에게는 우리는 이렇게 보답을 해드립니다!'''라는 체제선전용이니, 어찌보면 마지막까지 단물만 빨리다 간 사람이다.
생전에 고향은 그리웠는지 월북 미군 동료들끼리 모여서 수다를 떨면 전부 고향 얘기 밖에 안했다고 한다.
드레스녹의 말에 의하면 제리 웨인 패리시는 워낙 쾌활하고 말솜씨도 좋아 영화를 찍을때도 연기력이 아주 뛰어났다고 했던데 반해, 앱셔는 평소에도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격이라 영화에 출연했을 때 연기력이 별로였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출연 영화를 보면 앱셔의 대사가 유독 적은게 눈에 띈다.
[1] 한국에도 살인자가 처벌이 두려워 월북을 한 경우가 있다. 월북에는 성공했는데, 뭐... 감옥가기 싫어서 지옥을 간 케이스니 셀프처벌이라고 볼수도 있겠다.[2] 월북 초기에는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적대적이었다고 한다. 그당시의 북한의 반미교육은 미국인을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 보듯이 가르쳤기 때문에 세뇌당한 입장에서는 악당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