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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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Joseph Dresnok (북한명: 홍철수)[1]
1941년 11월 24일 ~ 2016년 11월
1. 개요
6.25 이후에 한국에 파병된 주한미군 출신으로 탈영해 월북한 미국계 북한인. 월북 이후 영화배우로 정착하였다.
2. 생애
1941년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의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드레스녹의 부모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개와 고양이처럼 매일 싸워댔다. 결국 어머니는 드레스녹과 형제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어머니가 술집에서 일하는 동안 차 트렁크에서 자면서 아무거나 먹었다.
하지만 드레스녹의 아버지가 쫓아와서 형제들을 도로 집으로 데려왔고 다시 고모네 집으로 보내져서 지내다가 아버지가 재혼하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고모네 집에서도 괄시당했고 새어머니는 드레스녹을 보자 아들이 하나라더니 왜 하나가 더 있냐고 화를 냈다. 결국 드레스녹은 친척집에 보내져서 사실상 고아가 되었다. 드레스녹은 20달러와 자전거를 훔쳤는데, 법원은 그에게 소년원 대신 집행유예 6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오갈데 없는 드레스녹을 오버스트리트란 목사가 거둬들였는데, 오버스트리트는 오갈데 없는 아이들을 받아들여 키우고 여러 아이들을 위탁받는 봉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나이를 먹은 뒤 미 육군에 입대했는데, 곧 철저한 규율과 빡빡한 군생활에 환멸을 느꼈다. 입대 이후 드레스녹은 교회에서 만난 캐서린 링우드란 여자와 결혼했다. 혼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레스녹은 서독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2년간 그 곳에서 아내를 생각하며 과거에 비해 성실하게 복무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는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통보했다. 드레스녹은 크게 상심했고 둘은 자연스레 이혼했다. 드레스녹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때를 회상하며 부모 없이 자란 과거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는데, 캐서린 링우드와 아이가 없었는게 다행이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3. 한국에 오다
완전한 실의에 빠진 그의 마음에는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가득찼다. 그는 이젠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심정에 육군에 재계약[2] 하여 1962년 5월에 육군 일병의 신분으로 주한미군에 배치되었다. 그때는 DMZ를 경계로 주한미군과 조선인민군 육군 사이에 정기적으로 충돌이 일어났고, 더불어 북한군은 자주 매복을 하고 함정을 설치하여 당시의 DMZ는 사실상 전쟁터였다. 이 시기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1976년에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DMZ를 포함한 휴전선 일대는 기나긴 기간동안 굉장히 살벌한 지역이었다.
1주일에 순찰만 60회를 도는 고된 근무가 이어지자, 지친 드레스녹은 군부대 근처의 사창가를 오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는 드레스녹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미군들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이에 미군 지휘관들은 "저 놈들 얼마 안가서 죄다 성병에 걸릴 것"이라고 혀를 찼다고 한다. 자신의 모든 급여를 그 곳에서 다 썼는데, 호감이 가던 한국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주가 넘는 강도높은 경계 태세가 내려진 가운데, 드레스녹은 중대장에게 애인을 만나게 외출을 허락해달라고 했지만 중대장은 "다들 고생하는데 너만 빼줄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에 드레스녹은 부사관의 서명을 위조하여 허락없이 외출하였는데, 당시 휴가를 나갈 수 있던 중대의 중사가 부대 바깥에서 드레스녹을 보고 이를 윗선에 보고했고 본부로 송환된 드레스녹을 중대장은 강하게 추궁했다. 이에 드레스녹은 당당히 허락받고 나간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드레스녹의 거짓말에 대노한 중대장은 허락없이 부대를 나간 것에 상관에게 거짓말을 한 죄를 보태어 드레스녹을 군사재판에 넘기려고 했다.
드레스녹은 무단 외박 1번 했다고 자신을 군사재판에 넘기려는 상관의 모습이 자신이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이라 무시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겨 분노했으며, 그의 삶 전반에 회의를 느끼던 드레스녹은 월북을 결심해, 1962년 8월 15일 정오에 다른 부대원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에 북으로 넘어갔다.
4. 월북
까짓거 죽어도 상관없다라는 생각에 거침없이 경계를 넘어 북으로 나아갔지만, 지뢰밭 사인을 만났을때는 겁에 질렸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에 가면 새 삶이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무작정 넘어가기 시작했다. 드레스녹의 부재를 눈치챈 동료들이 그의 뒤를 따라와 돌아오라며 권고하였으나, 그는 "지옥에나 쳐 가라, 개새끼들아!"라며 욕을 퍼부으며 산탄총을 동료들을 향해 발포했다. 한편 조선인민군 육군 민경부대도 이 소동을 눈치채고 키 큰 자[3] 가 넘어오고 있다는 보고에 즉각 병력을 출동시켰다. 드레스녹은 인민군 초소를 보고는 바로 그 초소로 걸어들어갔고, 초소를 지키던 인민군 중 한국전쟁 참전자로 미군에 큰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사관 한 명이 웬 키가 장대한 미군을 보고 크게 당황하며, "원쑤 미국놈이구나!"라며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체포됐으니 건드리지 말라며 인민군 중대장이 명령을 내려서 드레스녹은 살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 당시 드레스녹의 중대장과 인터뷰를 했는데, "나는 드레스녹이 월북했을 때 며칠 뒤에 "사냥 갔다가 길을 잃었다"는 둥 이딴 핑계를 대면서 돌아오면 재판에 그를 회부하여 '''총살시켜 버리려고 했는데''',[4] 지금은 40년도 넘었지, 아마?"라며 그 당시 일을 회고했다.
한편, 북한으로 간 드레스녹은 하루 뒤에 평양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지만, 일개 육군 보병 병 신분이었던 드레스녹이 군 기밀을 알고 있을 리는 없었고, 따라서 북한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었다.[5] 심문이 끝난 다음에 드레스녹은 미리 월북했던 또 다른 미 육군 병사 래리 앨런 앱셔를 만났다. 이후 1963년 12월에는 제리 웨인 페리시가 합류했고, 다시 1965년에 찰스 로버트 젱킨스 병장이 합류하였다. 드레스녹은 주한미군들에게 북한이 지상낙원이니 얼른 넘어오라며 월북을 종용하는 방송을 하여 옛 동료들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물론, 대부분의 장병들은 드레스녹의 조국을 배반한 행위에 분노했으므로, 드레스녹을 힐난하며 선전 내용을 무시하였다. 미국 정부는 드레스녹의 월북 사실이 확인된 이후 그의 미국 국적을 말소시켰다.
5. 소련 대사관 사건
하지만 북한에서 그들은 조선민족이 아니었고 언어도 달랐으므로 주변 북한 사람들로부터 이질감에 시달렸고 차별을 당해야 했다. 결국 북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1966년에 같은 백인들이 많은 소련이 좀 낫겠다는 생각에 소련 대사관에 망명 요청을 했는데, 소련 대사관에서는 계속 북한에서 살라며 그들을 설득하여 돌려보냈다. 화가 난 드레즈녹은 "개같은 이반들, 이거나 먹어라!"라고 중지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망명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소련 대사관이 북측에 통보하는 바람에 이제 죽었다 싶었는데, 북한 당국은 그들을 이용한 선전활동을 중단하고 외부 접촉을 금지하는 수준에서 처벌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그들은 이제 우리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며 굉장히 불안해했다. 이후 북한 당국은 조선인민군 육군 소속 관리인들을 그들에게 배정하여 북한 사회에 적응할 사상교육에 주력했다. 당신들이 북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해서 불편함이 없도록 살게 하겠다는 것이 생활 방식의 제한과 교육의 목적이었다. 이후 몇년동안 별다른 일을 갖지 못한채 그저 원하는게 있으면 로동당에서 보낸 관리인에게 청하는 식으로 낚시, 수영, 음주, 독서[6] , 잡담[7] 으로 소일하며, 말 그대로 먹고 놀았다.
드레스녹, 앱셔, 페리시 등은 바깥 소식이 매우 궁금했지만 북한 당국에서는 그들에게 바깥 소식을 가르쳐주는데 그다지 열성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바깥 소식에 대해서는 모두 다 기계적으로 무시하게 되었다.
6. 젠킨스의 합류
1965년, 미 육군 보병병장 찰스 로버트 젱킨스가 북한에 체류중인 미국인들에게 합류하게 된다. 드레스녹의 주장에 따르면 젱킨스는 제멋대로인 사람이라 마음대로 행동했고, 그 때문에 미국인들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사관 출신인 젱킨스는 계급을 내세워서 병 출신이었던 나머지 미국인들에게 명령을 하며 이래라저래라 부렸는데, 앱셔와 페리시는 그러려니 하면서 젠킨스와 친해졌지만 성질이 괴팍하고 괄괄한 드레스녹은 크게 반발했다. '''"탈영한 주제에 무슨 군인이냐, 어디서 감히 명령질이냐?"'''며 드레스녹은 늘 불만을 토로했는데, 앱셔와 페리시는 드레스녹을 늘 따돌렸다.
드레스녹은 그들이 곧 젠킨스의 본성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이 젠킨스에게 복종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는데, 그 '본성'을 깨닫기 전에 그 둘은 죽었다. 결국, 젠킨스가 또 계급 부심을 부리자, 화를 참지 못한 드레스녹은 젠킨스에게 주먹질을 했다. 드레스녹은 젠킨스에 비해 신체적으로 월등했으므로, 젠킨스는 한 방에 고꾸라져서 덤비지 못했다고 한다. 드레스녹은 젠킨스 얘기는 하기만 하면 짜증이 난다며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잇지 않았다. 반면, 젠킨스는 "드레스녹이 체구를 이용해서 나머지 셋을 함부로 대했고, 결국 참다 못한 우리 셋이 어느 날 작정하고 힘을 합쳐 그에게 덤벼들자 그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그들만이 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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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유일한 월북 미군들이라며 늘그막에 같이 사진을 찍었지만, BBC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는 같이 있을 때에는 수십 년을 지낸 친구라고들 해놓고 막상 둘이 떨어져 있을 때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7. 영화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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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영웅들에서 "아서 콕스터드"로 나왔을 때의 사진.[8]
1972년, 북한 당국은 이들에 대한 사상 교육이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그들에게 공민증을 주고 북한 주민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집, 배급권, 승용차를 지급했다. 그런 뒤 북한 당국은 그들을 다시 선전에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1978년부터 그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덕분에 드레스녹을 비롯한 이들 미국인 월북자들은 전국적인 대스타가 되었다. 드레스녹은 자신이 연기에 재능이 있으리라 생각치 않았지만, 선전영화에 등장시킬 서양 배우가 없었으므로 그들이 동원되었고[9] , 촬영장에 나가보니 드레스녹은 자신이 의외로 연기에 소질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본인 뿐 아니라 현장의 북한 감독과 스태프들도 별 기대 안 하고 데려왔는데, 드레스녹이 예상 이상으로 연기를 잘 해서 놀랐다고 한다. 드레스녹의 호연에 북한 당국은 그들이 진정으로 인민을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게 됐다. 이는 영화 애호가이자 영화의 선전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중시하던 김정일의 사고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은 한국 영화계 최고의 스타들이었던 최은희와 신상옥을 납치해올 정도로 영화에 환장해 있었고, 남한으로부터 넘어온 미국인 간첩들을 잡는 내용인 20부작 선전영화 '이름 없는 영웅'에 그들 월북 미국인들을 등장시켰다. 드레스녹은 이 영화 내용은 다 사실임을 굳게 믿은 채 악랄한 포로 수용소장 '아서 콕스터드'를 연기했고, 북한에서 대인기를 얻어 오늘날까지 평양 시민들에게 아서 선생이라고 불리는 입지를 쌓았다. 이 밖에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다룬 영화 <대결>에도 음모와 흉계를 꾸미는 미합중국 해군 장교로 출연하였다.
8. 말년
북한을 떠나기 직전까지 한국말을 거의 못하던 찰스 젠킨스나 래리 앱셔와는 달리 드레스녹과 페리쉬는 문화어도 빨리 배우고 북한의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드레스녹은 자신의 고향에 사는 것처럼 편안하다고 BBC 방송국 기자들 앞에서 몇번에 걸쳐서 이를 강조했을 정도다. 본인은 군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다 은퇴하였으며, 자식은 평양외국어대학에 다녔다고 한다.[10] 본인 스스로 "미국에 있었으면 잡일이나 했을 텐데 내가 자식들 대학 근처나 보낼 수 있었겠냐?"라며 북한 정권을 찬양했다.
드레스녹이 살아온 배경 자체가 불우하였으므로 이는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에도 미국 대학 입학률은 50%가 채 못되며, 드레스녹이 살았던 농촌 지역은 30%마저도 안된다. 미국 변두리의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마을 생활 수준을 생각하면 되려 미국에서는 지금 북한에서 받는 대우나 생활 수준을 영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올리버쌤의 '미국인이 무식한 이유'
2001년에 제임스 드레스녹이 60번째 생일을 맞았을때 김정일은 환갑 축하한다고 그에게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하사해주었다.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유복한 삶을 살았으며 드레스녹은 이 일에 대해서 김정일을 찬양하며 미국과 서방을 비난하는 북한의 프로파간다를 열심히 답습했다.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 나온 드레스녹은 현지인 수준의 유창한 한국어를 선보인다. 평양 시민들과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이다. 살도 꽤 찐 것으로 봐서는 북에서 받는 대우는 좋은 것 같다. 되려 폭식과 폭연으로 인하여 건강을 헤칠 정도였는데, 특권층인 평양 시민들조차 비만으로 인한 성인병에 걸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후한 대우를 받고 산다는 것인지 알 수 있다.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을 찍는 와중에도 기침을 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잠시 인터뷰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고, 드레스녹의 주치의가 드레스녹의 건강이 영 좋지 않다고 설명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래도 76세까지 생존하여, UN 통계에 의한 북한 남성의 평균 수명인 70세보다 오래 살았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젱킨스와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늦게 월북했던 젱킨스가 북한에서도 계급을 내세워 선임 노릇을 하려 하자 다 같이 탈영한 처지에 계급은 얼어죽을 계급하며 젠킨스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고 한다. 이후로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고, 젱킨스가 너무 늙어 기운이 없는데 반해 그의 아내는 아직 성관계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지만[11] 눈치가 없었던 젱킨스는 그걸 몰랐고, 이에 본인이 젱킨스의 아내를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12] 그것을 젱킨스가 봤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다시는 젱킨스네 가족이 드레스녹의 집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젱킨스가 일본에서 펴낸 자서전에 서술한 자신에 대한 묘사를 읽고는 '어따 대고 사기를 쳐? 젱킨스를 죽여버리고 싶다.'라며 화를 냈다. 드레스녹은 "그 자식이 나한테 서른 번이나 맞았다고? 개자식! 탈영죄로 30년형에나 처해져라!"라며 그를 저주했는데, 미 육군은 고작 젱킨스 병장을 30일간 영내 대기(외출 금지) 처분했고, 이후 고령을 이유로 퇴역시켰다.[13] 법적으로 육군 보병병장 계급을 유지하고 있던 젱킨스는 새 육군 피복과 그간 밀린 급료 일체를 지급받고 얼마 뒤 퇴역할 때까지 보직도 받아 그에 따른 급여와 수당까지 받으며 사실상 영내에서 생활하는 것 빼고는 다른 군인들처럼 근무했다고 한다. 거기에 육군 사병들이 3년에 한 번씩 일정 수준의 징계를 받지 않으면 자동으로 받는 "Army Good Conduct Medal" 메달도 받았다. 다만 탈영에 대한 벌로 계급은 이병(private)으로 강등되어 퇴역했다.
@JamesDresnok이라는 해시태그를 쓰면서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트위터 계정이 있으나, 평양의 일반 인터넷은 외부와는 연결되지 않으므로 드레스녹 본인이라기보다 일부 장난기 있는 유저들이 드레스녹을 사칭하는 유령 트위터 계정일 확률이 높다. 애당초 이 양반이 죽기 전 나이가 70줄이었는데, 그 나이에 IT에 크게 관심이 없다면 쓰기 힘든 트위터를 폐쇄 사회에서 수십 년간 있던 사람이 쓸 리가 없다. 이런 장난 계정은 페이스북의 고려항공 계정 및 김정은, 김정일 등도 있다.
결국 중풍으로 한동안 투병한 끝에 2016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평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일부 인사들을 통해 들은 대북매체가 밝혔다.#
2017년, 북한 당국이 그가 중풍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고, 그의 아들 두 명이 종북 재미언론인 노길남의 생전에 그와 대담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들은 전형적인 서양인 외모임에도 북한에서 태어나 꽤 우대받으며 자란 만큼 매우 유창한 북한말로 미국을 비방하며 김정은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여러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14]
9. 월북 미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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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드레스녹, 젠킨스, 앱셔, 페리쉬 순이다. 월북한 순서는 앱셔, 드레스녹, 페리쉬, 젠킨스 순.
래리 앨런 앱셔는 몰래 대마초(...)를 피다 들킨데다 총기마저 분실한 통에 처벌이 두려워 제일 먼저 월북하였고,[15] 드레스녹이 그 두 번째, 제리 웨인 페리쉬는 이 두 명이 잘 살고 있다고 하는 대남방송을 듣고 "거지같던 가정사 때문에 이렇게 살 바에 차라리 넘어가는게 낫겠다." 라고 생각하여 월북, 젠킨스는 월남전에 끌려가고 싶지 않아 두려워하다 맥주 10캔을 마시고 수색을 지휘하다 M14 소총을 들고 넘어갔다. 그런데 정작 젠킨스가 있던 부대는 월남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게다가 젠킨스는 북한 -> 소련 루트로 가서 소련에서 살 생각이었기 때문에 다른 3명을 설득하여 북한 주재 소련 대사관에 가서 망명요청을 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소련 대사관에서는 거부하여 역으로 설득해 그들을 돌려보냈고, 할 수 없이 돌아온 그들은 후일 대사관에서 당국에 이 일을 알렸다는 소식을 듣고 처벌을 매우 두려워 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당국은 교육만 더 강화하고 외부접촉을 차단하는 선에서 끝냈다고 한다. 상술했던 대사관 사건의 전말. 젠킨스는 북한에서 여생을 보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한국말도 거의 익히지 못해서 월북한 것을 매우 후회하였다고 한다.[16]
10. 가족 관계
1978년 이탈리아에서 납북된 루마니아 출신의 도이나 붐베아라는 여자와 결혼했으나, 도이나는 1997년에 암으로 사망했다.[17] 이후 토고 외교관+북한인의 혼혈 여성과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 아들은 아래 설명할 테드나 제임스와는 달리 나이가 워낙 어린 관계로 아직 공직에 있지 않아 언론에 노출하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도이나 붐베아와 결혼하기 전에 북한 여자와 잠시 결혼생활을 한적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납북 외국인들끼리만 결혼시킨 것은 외국 혈통의 유입을 기피하는 북한의 순혈주의 때문으로 추정되는데, 김정은 대에서는 이런 순혈주의가 누그러졌는지[18] , 드레스녹의 아들들인 테드와 제임스는 각각 북한인 여성과 결혼해서 아이를 두었다고. 제임스와 테드도 가끔씩 아버지 드레스녹처럼 선전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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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납북되어 북에서 그와 결혼한 도이나 붐베아. 오른쪽은 드레스녹이 붐베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차남 제임스 가브리엘 드레스녹이다.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 인터뷰하던 모습. 여기서 '''미국 출신 아버지를 둔 제임스 드레스녹이 어눌하게 영어를 배우고 있는''' 어색한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외교관이 되어서 전쟁과 테러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아들이 세명 있는데, 도이나 붐베아와의 사이에서 테드와 제임스를, 이후 재혼한 토고인 혼혈 여성에게서 토니를 낳았다. 테드와 제임스는 귀화인 자손임에도 장남 테드(북한명 홍순철, 1980년 출생)는 북한 외무성 관료, 차남 제임스(북한명 홍철, 1982년 출생)는 푸른눈의 평양시민을 찍는 시점까지만 해도 대학생이었고 졸업 후 군사교육기관에서 일하다가 2014년에 군에 입대하여 인민군 육군 군관(푸른 눈의 평양시민 촬영 당시 계급은 상위)으로 근무한다고 한다. 북한이 인종 가지고 차별하는 나라가 아님을 홍보하기 딱 좋은 이들이라[19] 여러가지로 우대해주고 있다보니, 이들도 북한 사회에 딱히 불만 가질 이유가 없어 별다른 문제없이 잘 사는 듯 하다. 기사 아들 둘이 모두 아버지에 비해 건강 관리를 잘 하는지 호리호리한 편이며, 꽤 미남이다.[2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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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드레스녹(左) 테드 드레스녹(右)
외무성 관료였던 테드는 인민군 육군 군적을 받았는지, 2017년 인터뷰 때는 육군 군관복을 입고 나왔다. 이 동네는 문관에게 군관 계급을 주거나 반대로 군관에게 문관 직책을 주는 일이 빈번하다. 본업 외에도 서양인 배우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영화에 상당히 출연하는 모양이다. 북한 당국의 허가하에 외국인 감독이 찍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아버지에 이어 제임스가 푸에블로 함에서 찍는 푸에블로 사건 관련 영화에 함장 버처 중령으로 추정되는 미 해군 장교 역을 맡아 연기를 하는데, 아버지와 달리 연기력이 떨어져 북한 감독에게 계속 한소리를 듣고 있다(...).
위는 둘의 인터뷰 보도 영상. 풀버전은 여기서.
[1] 홍은 한자 (붉을 홍/紅)자인데, 북한에서 좋아하는 색깔이기 때문.[2] 미군은 결격 사유 없는 예비역들을 선발해 재계약 형식으로 예편 당시의 계급부터 다시 군생활을 시작하게 해 주는 제도가 있다.[3] 드레스녹은 키가 196cm로 매우 크고 키와 함께 덩치도 큰 사람으로, 드레스녹의 중대장은 그에 대한 첫인상에서 "굉장히 크구만" 하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중대장은 나중에 월북자가 덩치 큰 사람이라는 보고를 듣고 "드레스녹 이 새끼가 또 사고쳤구만" 하며 월북자가 드레스녹인지 바로 알아챘을 정도였다고 한다.[4] 그러나 미국 군법에서는 무장탈영이라고 해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한 총살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1976년 이래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도 한번도 집행한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법이 달라서 군대에서는 연방법이 적용된다.[5] 드레스녹 스스로도 자신이 아는 정보라고 해봐야 한국 어딘가에 전술 탄도 미사일, 핵무기가 배치된 것이 고작이라고 말했다.[6] 김일성의 저서나 소설 등이었다고 한다.[7] 주로 고향, 즉 미국 얘기였다고 한다.[8] 여담이지만, 저 콧수염은 분장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기르던 것이다.[9] 웬만한 북한 영화에서 미국인 역할로, 흑인도 아니고 히스패닉도 아닌 해괴한 분장을 한 북한 배우들이 즐비한 모습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반미와 쇄국정책에 미친 북한이 미국 배우를 섭외할 수 있을리도 만무한데 북한 체제에 순응하는 미국인들의 존재란 이런 면에서 단비라 할 수 있었다.[10] 북한에서 외국어대학을 졸업하면 즉시 외교관으로 임용된다.[11] 젠킨스의 아내 소가 히토미는 젠킨스보다 19세나 어렸다.[12] 소가 히토미의 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고 한다.[13] 젱킨스의 형이 선고되기 직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워커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젱킨스에게는 천운이었다. 일본 정부에서 부시에게 젱킨스를 선처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부시는 젱킨스에게 선처를 베풀었다.[14] 링크된 동영상의 경우 종북 논란을 빚고 있는 재미언론인 노길남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기에 내용을 어느 정도 가려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15] 이때 드레스녹이 넘어오고 얼마 안되서, 앱셔가 드레스녹을 만나자 매우 반가워 했다고 한다. 막상 드레스녹은 앱셔가 누군지 몰라 버벅대다 신문에 앱셔의 소식이 있던걸 기억해냈고, 둘은 당시 유이한 북한 내 백인이었기 때문에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16] 드레스녹은 2016년 75세의 나이로 타계, 젠킨스도 2017년 77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나머지 두명은 드레스녹과 젠킨스보다 일찍 세상을 떴는데, 앱셔는 1983년, 향년 40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돌연사하였고 페리쉬는 30대 부터 앓아오던 신부전증으로 인해 20년 동안 투병하다 1996년, 앱셔의 뒤를 이어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17]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 드레스녹은 도이나의 이름이나 국적에 대해서도 언급을 회피했다. "유럽에서 왔다고는 들었는데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는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물어보니까, 입 닥치라고 하더니 다신 묻지 말라더라."며 어물쩡 넘어갔는데 아무래도 북한 정부에서 부부 중 하나 혹은 둘다 입막음을 시킨듯 하다. 다만, 젱킨스의 자서전에서 도이나의 이름과 유언까지 다 서술된 것을 감안하면, 북측에서 드레스녹에게만 주의를 준 모양이다.[18] 김정은은 혼혈 출신이 널리고 널린 서구권에서 유학한 사람인데다, 본인부터가 북한 사회에서 사실상 외국인 취급받는 재일 한국인인 어머니를 둔 터라 실질적으로 혼혈인이나 다를 바 없는 처지다. 당연히 순혈주의에 대한 반감이 어떤 식으로든 있긴 할 것이다.[19] 실상은 인종차별이 엄청 심한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 공식 외교 석상에서 보츠와나 외교관에게 '''검둥이(Nigger)'''라는 멸칭을 써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혼인한 자국민에게 더러운 피를 들였다며 수용소로 보내는 나라가 인종차별이 없다는 얘기는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다. 결국 이들 형제는 이러니저러니해도 북한 당국의 살아있는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는 뜻이다.[20] 전형적인 미국인처럼 생긴 두 명이 나와 한국어로 북한의 체제선전을 하는 것이 충격적이었는지, "쟤네는 태어날 때부터 외부와 격리되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다."고 북한 전문가가 나와 맥락을 해설해주기도 했다. CNN 2017년 8월 21일[21] 이러한 부분 때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는 로버트 할리의 세 아들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심지어 할리의 세 아들들 역시 미국계 한국인이라는 점을 본다면. 심지어 하일의 장남과 차남인 하재선(로버트 할리 주니어)과 하재욱(케빈 할리)는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병장'''이다.(다만 하일의 세 아들들은 홍철수의 두 아들들과는 달리 한미 혼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