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 블룸
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 SFIO소속으로는 최초로 프랑스의 총리를 지냈다.
2. 초년기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었고 드레퓌스 사건을 보고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장 조레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SFIO에 가입해 활동한다. 조레스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하다가 극우파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 이후 당내에서는 조레스의 제자인 블룸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공화국에서 10월 혁명을 통해 볼셰비키 정부가 세워지자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양자택일의 선택지 앞에 서게 된다. SFIO 내에서도 이에 따라 큰 갈등이 있었다. 블룸은 테러리즘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점, 모스크바에 대해 무조건적인 굴종을 요구하는 점, 러시아식 혁명 모형을 무차별적으로 강요하는 점을 이유로 들어 볼셰비키를 비판했고 당내의 갈등은 레닌주의 당원들이 1920년 프랑스 공산당을 창당해 분리되어 나가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3. 인민전선
스페인의 인민전선 집권,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 등 역사적 바람을 타고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SFIO(프랑스 사회당) 최초의 총리가 되었다. 여성의 투표권도 없던 프랑스[2] 에서 여성 장관을 입각시키고 노동조합조차 인정되지 않던 시기에 주 40시간 노동, 연 2주의 유급휴가, 상당한 임금 인상, 단체행동권 인정, CGT[3] 의 인정 등을 골자로 하는 마티뇽 합의를 체결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상승시키는 등 진보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다. 평화주의를 외치던 SFIO출신임에도 독일의 위협을 꿰뚫어보고 국방예산을 크게[4] 증액했다. 식민지에 대해서는 알제리 문제의 해결을 위해 모든 알제리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블룸-비올레트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집권 기반이던 인민전선 자체가 좌파인 SFIO와 극좌파인 공산당, 중도파인 급진당이 한데 모인 불안한 연합이어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의외로 모두가 폭탄으로 생각했던 공산당은 생각보다 협조적이었다. 공산당도 의회에서 나름의 세력이 있었음에도 내각에서는 단 한자리도 요구하지 않았고 마티뇽 합의가 도출되자 고조된 노조의 분위기를 스스로 나서서 꺾기도 했다.[5] 발목을 잡은 곳은 급진당이었다. 예를 들어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도와 개입하려던 시도는 급진당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며 무산되었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했음에도 경제가 지지부진했던 것도 레옹 블룸 내각이 좌초했던 원인이었다. 극우파들은 유대인 총리를 수치로 여기면서 더욱 설치고 다녔다.[6] 야심차게 발표한 블룸-비올레트 선언은 알제리에서의 이권을 잃고 싶지 않았던 피에 누아르들이 급진당에 로비를 넣어 표결도 붙이기 전에 폐기되었다. 결국 이리저리 치이던 블룸 내각은 스페인 내전 지원 문제로 리더십을 완전히 상실했고 집권 1년만에 급진당의 카미유 쇼탕에게 총리를 넘겨주며 인민전선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대신 부총리로 입각했다.
1938년 3월에는 쇼탕 총리가 물러나며 다시 총리가 되었고 이전 내각에서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급진당을 무시하고 강경한 정책[7] 을 폈지만 그만큼 더 빨리 내각이 붕괴되어 한 달도 안 되어 실각했다. 급진당의 달라디에가 후임 총리가 되었고 인민전선은 완전히 해체되었다.[8]
4.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 이후에는 유대인 + 사회주의자라는 환상의 조합 덕택에 나치에게 걸릴 경우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불보듯 뻔했음에도 망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패배주의나 좌절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필리프 페탱의 항복 결정이나 페탱 정권의 설립에도 거세게 반대했다. 비시 정부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덮어씌우고 반대파들을 숙청하기 위한 보여주기 재판인 리옹 재판을 열었다. 블룸은 에두아르 달라디에, 모리스 가믈랭, 조르주 망델[9] 등과 함께 피고로 서게 되었다. 리옹 재판 최대의 목표는 단연 유대인이자, 사회주의자이자, 반페탱파인 블룸이었고 이 때문에 각종 날조된 혐의와 증거로 날선 공격이 들어왔지만 블룸은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변호할 뿐만 아니라 다른 피고들의 변호까지 해주는 등 화려한 활약을 펼쳤고 재판을 보도한 중립국의 언론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논리가 궁색해지자 재판은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끌었고 그 상황에서 연합군이 횃불 작전으로 북아프리카를 탈환하면서 히틀러는 비시 프랑스를 폐지시키고 프랑스를 완전히 점령했다. 재판은 중지되었고 다른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의 이터 성으로 들어갔지만[10] 유대인인 블룸과 망델은 부헨발트 수용소로 끌려갔다. 블룸을 사모하고 있었던 잔 레비리예르는 블룸을 지키기 위해 자청해서 수용소로 따라갔고 두 사람은 수용소에서 혼인관계를 맺었다. 서부전선이 무너지며 연합군이 진군해오자 부헨발트보다 더 후방인 다하우로 이송되었고 히틀러가 자살하고 카를 되니츠가 항복한 1945년 5월이 되어서야 겨우 구출받았다.
이 시기 동안 블룸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다른 유대계 프랑스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재판 이후 계속 함께 움직였던 망델은 밀리스에게 총살당했고 동생인 르네 블룸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했다.
5. 전후
[1] 현 '''프랑스 사회당'''의 전신[2] 전쟁 후인 1946년에야 남녀 평등한 투표권이 주어졌다.[3]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노동총연맹. 프랑스 최대의 노동조합 연맹[4] 군에서 90억 프랑을 요구해 국방장관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재무장관 뱅상 오리올이 충돌했는데 블룸은 오히려 예산을 140억 프랑까지 증액했다.[5] 국내의 우파들이나 해외의 눈치를 봐서 SFIO와 급진당이 공산당을 자제시킨 것도 있었고 공산당 자체적으로도 독일 공산당이 발목잡기만 하다가 나치가 집권하게 만든 것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크렘린의 장녀답게 스탈린이 인민전선에 협력할 것을 명령하자 이를 철저하게 따랐다.[6] 다만 이런 극우파들의 준동을 멈춘 것도 인민전선의 업적이었고 종국에는 온건노선으로 전환한 드 라 로크의 프랑스 사회당(현 프랑스 사회당과는 무관한 극우 정당)만이 생존하게 된다.[7] 그 덕에 블룸 2차 내각에서는 스페인 공화파에 무기를 지원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이미 대세가 기운 상황이라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8] 인민전선의 해체 시점이 언제인지는 조금씩 이견이 있다. 이르게는 블룸 1차 내각의 실각 시점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고, 가장 늦게는 공산당의 뮌헨 조약 보이콧을 해체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9] 전간기부터 반독파로 유명했고 패전 후에도 대독항전을 주장하며 모로코로 갔다가 피에르 라발에게 체포되어 프랑스로 되돌아왔다. 레지스탕스의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친독 의용대인 밀리스가 처형했다. 반독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유대인이었기 때문.[10] 이들은 전쟁 최후 시점에 이터성 전투를 통해 구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