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2공화국

 


<color=#fcde02> '''에스파냐 공화국'''
'''República Española'''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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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cde02> 국기
국장
[image]
<color=#db0a13>1931년 ~ 1939년
<colbgcolor=#630356><colcolor=#fcde02>국가
리에고의 노래(El Himno de Riego)
위치
오늘날의 스페인, 아프리카 식민지
수도
마드리드(1931년~1936년)
발렌시아(1936년~1937년)
바르셀로나(1937년~1939년)
정치체제
공화제(대통령제)
국가원수
대통령
주요 대통령
니세토 알칼라사모라
마누엘 아사냐
언어
스페인어[1]
종교
가톨릭
민족
스페인인
주요사건
1936년 스페인 내전
통화
에스파냐 페세타
성립 이전
스페인 왕국
멸망 이후
스페인국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
1. 개요
2. 역사
2.1. 설립
2.2. 이념 충돌
3. 제2공화국 체제의 이념 대립
4. 평가
4.1. 긍정
4.2. 부정
4.2.1. 공화주의 정권의 무능
4.2.2. 인민전선 일부 파벌의 법치와 자유민주주의 원칙 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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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르본 왕조스페인 왕국을 무너뜨리고 1931년 탄생한 스페인 역사상 두 번째 공화정.
알폰소 13세가 해외로 망명한 이후 공화주의자들이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공화정을 선포하면서 탄생했다. 새로 탄생한 공화정은 토지 개혁과 같은 일련의 사회 개혁 작업을 시도했지만 기득권을 지녔던 지주층과 가톨릭 세력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고 이러한 불만 세력을 등에 업고 1936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고 만다. 3년에 걸친 치열한 내전 끝에 스페인 제2공화국은 프랑코의 반란군에게 붕괴된다. 이후 스페인 전역을 접수한 프랑코는 총통(Caudillo)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내전에서 살아남은 잔존 공화파 세력은 파리로 망명해 그곳에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스페인 제2공화국을 계승한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는 프랑코가 사망하고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에 의해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1977년 자발적으로 해체된다.

2. 역사



2.1. 설립


스페인은 노동자들의 공화국이다 - 스페인 제2공화국의 헌법 1조 1항.

1923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정권은 1929년 전세계를 휩쓴 대공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붕괴되고 만다. 이후 새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1931년 4월 12일 스페인 전역에서 지방 자치 단체 선거가 열렸는데 여기서 공화주의 세력이 대승을 거둔다. 국왕 알폰소 13세는 망명을 떠났고, 퇴위 직후 주요 도시의 거리에서는 군중들이 "공화국!"을 외쳤다. 선거 이틀 후인 4월 14일 스페인 제2공화정이 공식적으로 선포된다. 가톨릭 신자이면서 중산층을 대표하는 중도세력 니세토 알칼라사모라가 총리직에 올랐고 일련의 토론을 거쳐 같은 해 12월 헌법이 개정된다.
새로운 헌법을 통해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귀족들이 지니고 있던 각종 봉건적 특권은 철폐되었고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2] 또한 새로운 헌법은 공화파와 여러모로 애증의 관계였던 스페인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는 것에도 초점을 맞췄다. 정교분리를 목표로 교회의 재산은 정부의 감시를 받았고 가톨릭 사제들이 교육을 맡는 것 역시 엄격히 금지되었다. 심지어 가톨릭 사제들에게는 스페인의 시민권을 행사하는 것조차도 제한(...)[3]하는 조치가 명시되어 교황 비오 11세가 격렬하게 비난할 정도였다. 그리고 스페인 개혁을 위한 결정적인 움직임으로 새로운 헌법은 공공재, 토지, 은행 등을 국유화하는 절차를 마련할 것을 명시했다.

2.2. 이념 충돌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에 지주층, 가톨릭 세력, 보수파 지식인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가톨릭 사제들은 공공연히 국가의 교회 장악 움직임에 반항했고 지주층은 조세 피난처, 탈세 등의 방식으로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자 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도 나름대로 새로운 헌법과 공화국 정부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불만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잦은 충돌을 빚어 냈고 1932년부터 1934년에 걸쳐 스페인 전국의 성당이 방화에 노출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토지 개혁을 실시했는데 농민과 지주 모두의 눈치를 봐야 했던 정부는 지주들에게 일정액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절충안을 선택했지만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불만만 더 크게 만들었다. 토지 개혁을 놓고 정국이 갈리던 상황에서 1933년 총선이 시행되었고 여기서 보수주의 세력들이 뭉친 스페인 자치 우익연합(CEDA)이 승리를 거둔다. CEDA의 지지를 받은 공화주의 우파 정권은 일련의 토지 개혁을 모두 보류했고 덤으로 지방자치제를 축소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해 카탈루냐는 유이스 콤파니스를 중심으로 독립파들이 카탈루냐국을 수립했고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아나키즘,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킨다.[4] 그러나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고[5] 우파 정부는 지방 자치 폐지, 토지 개혁 중단과 같은 정책을 써서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좌파 공화주의자들에게 원성을 샀다.

2.3. 스페인 내전


이러한 정책에 이를 갈던 좌파 세력들은 '인민 전선'이라는 이름으로 1936년 총선에서 대단결을 이룬다. 원래 이 당시 스페인 좌파들은 아나키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자유주의) 등으로 분열되어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고 특히 좌파 중 가장 비중이 컸던 아나키즘 노동조합 CNT의 경우 아나키스트답게 선거 불참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좌파 정권 창출이 힘들었다. 그러나 중도우파 정권 3년 동안 안달루시아 일대의 아나키즘 소작농 공동체들이 지주들에게 크게 두들겨 맞고 이것에 반발해 들고 일으킨 아스투리아스 반란도 작살을 내면서 다른 정파들과 타협하지 않고 독불장군식으로는 우파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인식이 CNT 내에 퍼지면서 결국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해서 아나키스트까지도 총괄한 좌파 연립 정권인 인민전선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반대로 CEDA를 중심으로 한 우파세력도 반혁명국민전선을 결성했지만 공화주의 우파들의 미적지근한 반응과 파시스트(팔랑헤)의 반대로 흐지부지하게 끝났다.[6]
그리고 이 단결이 결실을 이루어 인민전선은 집권을 이루어낸다. 인민전선 내각은 정치범 석방, 농민 보호(토지 개혁, 조세 개혁, 지대 인하 등), 노동자 권리 증진(임금 인상, 노조 설립 등)과 같은 정책을 다시 펼치면서 개혁에 시동을 건다. 하지만 인민전선에서도 공화주의 좌파같은 온건파들만으로 내각이 구성되었고 라르고 카바예로 같은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은 정권에 참여를 거부하는 등 선거 후에는 연합이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톨릭/지주/군부가 주축이 된 극우 세력들은 중도좌파 정부의 정책을 방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노조를 향한 백색테러가 난무했고 군부에서는 공공연하게 쿠데타 음모가 튀어 나왔으며 지주와 가톨릭 교회는 정부의 개혁에 대놓고 '배째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팔랑헤의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공공연히 애국세력들의 쿠데타를 외쳤다.
이런 상황에서 왕당파(RE: 에스파냐 혁신) 지도자였던 호세 칼보 소텔로를 공화국이 새로 창설한 국가헌병대 조직이었던 돌격 경찰대(Guardia de asalto) 대원들이 암살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구실로[7]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스페인 내전이 터졌다.
반란군의 주도자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였다.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코의 반란에 크게 놀랐다. 본래 인민전선 정부 역시 군부의 쿠데타를 우려해 쿠데타를 일으킬 것 같은 성향의 장군들을 모두 오지로 좌천시켜버렸다. 이때만 해도 프랑코는 산후르호, 고데드, 호세 안토니오 데 리베라 등 스페인 군부와 우익의 지도자 중 하나에 불과했고 오히려 이전에는 공공연하게 극우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스페인 군부 내에서 그나마 정치적인 발언을 안 하고 자기 하는 일만 묵묵히 하는 사람으로 통했기 때문에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다.
3년의 걸친 피비린내나는 내전 끝에 결국 1939년 바르셀로나마드리드프란시스코 프랑코팔랑헤당이 이끄는 반란군에게 함락되면서 스페인 제2공화국은 붕괴된다.

3. 제2공화국 체제의 이념 대립


스페인 좌파 공화주의자(IR, UR)들은 사회주의자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반면 우파 공화주의자(PRR, DLR, PRC)들은 가톨릭/왕당파와의 반목으로 서로 협력하지 못했다.[8]
제2공화국 헌정 질서는 내전 이전에는 극단적인 좌우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우선 제2공화국 정부를 세운 공화파 내부에도 자유주의/공화주의를 대표했던 양대 대통령 니세토 알칼라사모라(DLR 계열)나 마누엘 아사냐(IR 계열) 같은 인물들도 많았고 이들은 당연히 본격적인 좌익 인민 공화국 정권을 기대했던 사회주의자들과 크게 충돌했다. 또한 공화국 초창기(1931년~1933년)에는 AR의 아사냐 정권, 그리고 그후 2년간의 우파 정권때는 PRR의 레룩스 정권, 인민전선 총선 승리 이후에도 IR이 정권을 주도해서 온건한 공화주의적 통치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머릿수로만 따지면 좌파 내에서 가장 강력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무정부주의자 CNT 입장에서는 중앙 권력과 국민국가라는 개념 자체에 반대했다. 이들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해봐야 큰 의미가 없다는 입장에서 다른 좌파, 공화파 정치 세력과 연대도 지극히 제한적으로 하며 1936년 내전 발생까지 그대로 제 갈 길 갔다. 게다가 무정부주의자들을 차치하고도 PSOE와 POUM, PCE, UGT 등의 사회주의 좌파들 역시 서로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PSOE 내부의 프리에토를 필두로 한 온건파[9]와 라르고 카바예로의 강경파[10]간의 분쟁이 극심했으며 그와중의 공식적 산하 노동조합인 UGT와도 파벌투쟁이 지속되었다. POUM과 PCE의 공산주의 내부 투쟁의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아울러 인민전선을 비판한다고 모조리 수구 꼴통으로 몰고 가기는 어렵다.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프랑코 정권이 굉장히 잔인한 정부 체제이기는 하지만 당시 스페인인들 전부가 인민전선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제2공화정 당시에도 1933년에서 1936년까지는 우파 정부가 다스렸고 공화주의 우파 계열은 1936년 선거에서 공화주의 좌파와 CEDA에게 표를 빼았겨서 절멸되기 전까지만 해도 공화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심지어는 동시대 스페인 극우 중 프랑코와 같이 국가군에서 싸운 인물들 중에서만 골라도 실패한 바르셀로나의 쿠데타 사령관이었던 마누엘 고데드, 그나마 스페인 군인들 중에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독일군에게 칭송받은 후안 야구에, 세비야를 먹고 남부에서 혼자 동네 왕초 노릇하다가 프랑코에게 깨갱한 케이포 데 야노 등도 '좌익은 당연히 때려잡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왕정까지 복고할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할 만큼 왕정이란 기관 자체에는 딱히 애착이 없었고, 팔랑헤 사상가 오네시모 레돈도, 라미로 레데스마 같은 본격 사상적 파시스트들에겐 왕정도 '퇴폐하고 썩어빠진' 청산해야할 적폐란 입장이었다. 공화주의 헌정 체제를 선호했던 우파 인사들 또한 충분히 있었다. 스페인 정치에서 공화주의가 좌파의 전유물이 된 것은 스페인 내전과 공화주의를 불온 사상으로 보고 말살하고자 했던 프랑코 통치 이후의 유산이다.

4. 평가


스페인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는 이를 무력으로 뒤집어엎은 프랑코 정권에 대한 평가 및 현재의 입헌군주국 체제의 정치대립과도 연관되어 민감한 주제이다.

4.1. 긍정


제2공화국 정부는 다양한 정파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뭔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었고 이 다양한 정파 중에서는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니세토 알칼라사모라와 마누엘 아사냐, 사회노동당 당수로서 민주적 과정에 대한 존중을 주장하며 카바예로의 파벌과 대립한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당시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인 유이스 콤파니스[11] 같은 진실성 있는 민주주의자들도 충분히 있었다.[12] 2공화국 체제를 공공연히 뒤집고자 했던 극우 파시스트 국민 진영이나 프랑코 정권보다는 훨씬 나았다.
스페인 제2공화국이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불안정은 사실 전간기 유럽 국가 치고 영국 빼고 내전을 우려할 만큼 정치적 테러와 극단주의, 이념적 증오가 팽배하지 않았던 나라가 없었고 영국도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단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물론 좌파, 그 중에서도 카바예로[13]와 같은 급진파들의 반교회적 개혁은 중도우파 지식인들과 평범한 민중들도 당혹시킬 정도이기는 했다. 그래도 제2공화국은 유의미한 민주주의와 세속주의 헌정 질서에 대한 실험이었고 공화국 이념의 근대성은 우파 내에서도 내전 발생 직전까지도 받아들였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좌파 내에서는 CNT가 거의 독단적으로 1934년 아스투리아스 혁명을 일으켰고 라르고 카바예로같은 ''스페인의 레닌''은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좌파 중에서도 비교적 중도적인 이들 대다수는 이를 부정하고 정부 진압에 협력했다. 반면 극우파 세력은 군부, 가톨릭 교회, CEDA, 알폰소 왕당파, 카를로스파, 팔랑헤 불문하고 적법하게 성립된 정부[14]를 무력으로 뒤집는데 반발하지 않았다. 또한 내전 직후 장악한 쿠데타 세력에게 넘어갔던 갈리시아, 카스티야 라 비에하 같은 지방에서는 전쟁을 거의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시아의 예를 들면 내전 발생 후 5년 만에 공식적으로 처형한 것만 3천 2백명, 비공식적으로 살해한 수만 4천명이 넘었다. 굳이 이 지역들의 통계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친프랑코 성향 인사들이 종종 가지고 오는 주된 레퍼토리가 아래 항목에서 서술된 "누가 이겨도 내전은 터졌고 좌파가 이겼으면 그만큼 심했을것이다!"인데, 파시스트 진영이 벌인 정치적 학살이 그리 순진무구하게 '자위적 성격'이라면 애초에 내전이고 할것도 없이 거의 무혈점령한 지방에서도 수천 단위의 학살이 벌어진거 자체가 말이 안된다.
스페인의 현대사에서 제2공화국과 프랑코 정권의 관계를 '쿠데타와 그로 인해 중단된 민주주의'로 보는 데에는 거의 학계의 합의가 이루어져왔다. 기존 학계 내에서 스페인 내전의 해석에 대해 가장 우파적인 자세를 취하는 스텐리 페인, 줄리어스 루이즈[15] 같은 학자들이 그나마 인민 전선도 알고 보면 나쁜 짓 많이 했다 정도의 수준에서나 반박한다. 현재 활동하는 학자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노골적으로 친프랑코 사관을 주장하는 피오 모아 같은 경우 학계의 야인[16][17]이고 리카르도 데 라 시에르바 같은 극우파 학자들은 프랑코 정권이 살아있을 때나 정권의 공식 사관 역할을 했지 민주화 이후에는 남아 있는 프랑코 추종자들 상대로만 글쓰고 팔아 먹는 자기들만의 리그다.
사회적 기반 측면에선 아무리 민주주의적 절차가 난항을 겪었다 한들 1930년대는 민주주의란 제도 자체가 성숙하지 않았던 시대였고, 시대적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 제2공화국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이었던 민주 정부는 아니었다. 공화 진영과 쿠데타군 양쪽 모두 현대 민주주의와 관계 먼 인간들도 많았지만, 전자의 경우 반대로 정치적 테러, 물리력을 통한 헌정 질서 위협 같은 근본적인 방법론 면에서 진실성있는 민주주의자들의 영향력도 강했기에 34년 좌파만의 독단적인 무장 봉기는 아스투리아스의 CNT와 UGT 좌파만의 지역적 반란으로 끝난 반면, 우파의 36년 쿠데타는 전면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좌파와 인민전선 진영의 통합성이 너무 약했다거나 기반이 취약했다는 것은 능력의 문제지 도덕, 명분의 문제가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누가 선빵 때렸냐'''라는 문제를 무시하고 '알고보니 이만큼 공화파도 못한거 많더라'라는 논리를 펴는 것은 쿠데타 진영의 원죄를 은폐하는 주장이다. 전체주의적이라는 스탈린주의자 스페인 공산당이 전쟁 중간에 막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제 2공화국이 처음부터 망할 것이 예정되었기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구국의 쿠데타' 사관의 본질은 피해자 탓하기에 불과하다. 공산당이 권력을 얻어가는 과정을 구축한 것은 국민진영이 일으킨 내전이다. 프랑코 정권의 개국공신이자 친척이며 권력 2-3위를 왔다갔다한 라몬 수녜르는 프랑코가 죽은 후 쓴 회고록에서 승전 이후 정권의 숙청, 테러, 보복 원칙은 "사법 정의를 머리부터 거꾸로 뒤집으며 ("justicia al reves")" 오히려 합법 정부를 반란군 취급하는게 원칙이었다.
극우파의 쿠데타와 파시스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서방 각국은 프랑코의 승리가 절대적이었던 1939년 2월 전까지도 공화국을 정통으로 인정했다. 1936년 대선 당시에 CEDA의 기권에도 불구하고 PRR, PCR 등의 공화주의 우파 정당은 인민전선-마누엘 아사냐의 대통령 당선을 지지했다.[18] 쿠데타 당시와 이후에도 미겔 마우라[19] 같은 사람은 공화국을 지지했다.[20] 다만 알레한드로 레룩스[21]가 초기에 쿠데타를 찬양하는 등 공화주의 우파 세력은 공화국 지지에 대한 명확한 일관성은 없었다. 알칼라사모라 역시 인민전선 민병대에 의해서 집이 털리자 해외에 그대로 있었다.

4.2. 부정


스페인 제2공화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학자들[22]도 어느 정도 있다. 일종의 수정주의(Revisionism)인데, 이에 대해서는 신프랑코주의라고 폄하하는 입장[23](orthodox)이 대부분이다.[24]
그러나 제2공화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학자들이라도 반드시 프랑코 정권을 더 정당하다고 보거나 더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Payne 같은 사람도 정통성이나 도덕성에 있어서 공화국이 정당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4.2.1. 공화주의 정권의 무능


출범 당시에야 국민적인 지지를 입어 공화국이 출범한 것은 맞지만 그 공화국은 분명 취약했고 초기의 중도 정권과 중도우파 정권 그리고 다시 중도좌파 정권으로 바뀌는 혼란기를 겪으면서 정부가 안정적으로 굴러가기에 필요할 정도의 충분히 많은 이들을 정치적으로 포용하지 못했다. 당장 1936년 총선만 해도 제2공화국을 부정했고 민주주의는 그저 피 안 흘리고 집권을 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 CEDA를 포함한 우파는 좌파 인민전선에 비해 1% 남짓한 차이[25]로 겨우 밀리다시피 했다. 유사한 사례는 여성정책에 대해서도 있었는데 제2공화국은 여성에 대한 투표권 인정이나 여권 신장 등에 대해서도 많은 배려를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수혜를 받은 대부분의 여성들은 대부분 가톨릭의 영향을 깊이 받아 신부님들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이들[26]로 반공화국적 성향을 띄는 게 대다수였다.
1931년의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은 상당히 우발적으로 이루어졌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니세토 알칼라사모라도 상당히 당황했었다. 7년간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때 탄압받았던 UGT CNT 등의 사회주의/아나키즘 노조는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카탈루냐/바스크/갈리시아 등의 지방은 독립을 꿈꿨다. 반대로 왕당파와 교회, 지주 및 군부로 대표되는 구 기득권층은 정권을 되찾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산후르호의 1932년 쿠데타 등)이를 어찌어찌 임시로 봉합하고 공화주의 좌파-우파 세력의 타협을 통해서 마누엘 아사냐를 필두로 한 온건한 정권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사회 개혁에 대한 입장에서 좌우의 극한 충돌이 이어졌다.[27] 지진부진한 개혁에 사회주의자들은 정권 지지를 포기했고 보수주의자들은 CEDA[28][29] 를 결성해서 단합해서 선거에 나섰다. 직전의 충돌로 공화주의 우파는 좌파와의 타협을 포기했고 CEDA와의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으나 반교권주의와 국체 문제(공화정이냐 군주정이냐)로 파열음이 계속 일어났으며 장관 자리를 안주면 정권을 뒤엎겠다는 CEDA의 협박으로 급진공화당의 레룩스는 CEDA에 일부 장관직을 양보했다. 그리고 그걸 계기로 극좌파에 의한 아스투리아스 폭동이 일어나는 등 중도우파 정권은 개판으로 흘러갔다. 결국 중도우파 정권은 정권 내부의 분열과 급진당의 각종 부패 스캔들로 몰락하고, CEDA에 정권을 넘기기는 싫었던 정부가 조기총선을 실시한다.
1936년 총선거 승리로 집권한 중도좌파 정권 역시 정치적 기반이 굉장히 취약했다. 공화주의 우파와의 사이가 끝장난 만큼 공화주의 좌파는 자유주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당 정치와 민족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에게 표 구걸을 해야 했었다. 이점은 스페인의 많은 정치 세력의 인정을 받지 못한 인민전선 정권의 취약함을 드러낸다. 또한 카탈루냐나 바스크 정부는 기본적인 목표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이었고 따라서 이를 두고 중앙정부와의 마찰은 필연이었다.[30]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군부에 대해서도 항시 긴장상태를 유지했고 종래 가톨릭 교회와의 화해는 물건너 갔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들어갈 때도 총기를 휴대하고 들어갔고, 항상 쿠데타를 갈망했던 군부는 제쳐두고서라도 '스페인' '중앙정부'와 따로 놀고 싶어하던 아나키스트나 카를로스파, 분리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유달리 강했다. 특히 국가 주권 자체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이 내전 발발 당시 공화진영에서 1, 2위를 다투는 실세집단이 된 것은 스페인만의 특수성이라 할 수 있다. 분명 군부 쿠데타가 제2공화국 붕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인 것은 맞지만 제2공화국 공화진영은 스페인 내전을 치르면서도 바르셀로나의 5월 사태나 내전 막바지 카사도와 미아하의 쿠데타 등 자기들 내부에서도 두 번씩이나 내전 중의 내전을 겪었다.
사실 1936년 쿠데타가 내전으로 비화된 데에도 당시 제2공화국 정부에서 주요 각료 자리를 차지한 공화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좌파 간 갈등이 주요했다. 쿠데타로 식민지와 주요 거점들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공화좌파는 쿠데타가 일어난 현실을 직시하길 거부했다.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닫자 제2공화국 정계에서 중도파격인 공화좌파가 약해지고 제2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되는 사회주의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는 초동 대응에 실패했고[31] 그 대가로 공화주의 좌파는 내전 발발 직후 사실상 무력화되고 사회주의인 라르고 카바예로가 수상이 된다.
결국 공화주의 정권은 중도우파(1933~1935)정권이든 중도좌파(1936) 정권이든 공화주의-자유주의자들끼리의 협력을 피하고 우파와 좌파 각각의 극단파(CEDA, 팔랑헤 및 PSOE, 공산당, 아나키스트)와 협력을 한 끝에 극단파에게 잡아먹히는 등의 비극을 나았다. 이는 정치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스페인[32]에서 국민들 사이에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한 합의가 거의 부재했고[33] 그에 따라서 공화정부 합법성에 대한 호소가 별로 먹히지 않는 정치환경에 비추어볼 때 더욱 두드러진다.

4.2.2. 인민전선 일부 파벌의 법치와 자유민주주의 원칙 무시


크게 PSOE 좌파[34]/UGT/CNT/POUM등의 혁명세력의 과격한 입장과 PSOE 우파 일부[35]/PCE의 권위주의적 태도로 나눌 수 있다.
국민전선의 극우파 뿐만 아니라 인민전선에서도 PSOE의 강경파 일부가 총선에서 국민전선이 이기면 볼셰비키식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에 무력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36] 하필 선거에서 진 게 국민전선이었고[37] 따라서 극우파가 반란을 일으켰을 뿐이다. 이는 굳이 스페인 극우파만 한 이야기도 아니고 앤터니 비버도 한 이야기다. 스페인 내전의 원인을 설명할 때 단지 우파와 프랑코의 쿠데타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스페인 역사의 흐름을 무시한 지나치게 정치적인 설명이다. UGT/CNT/POUM 등의 혁명세력 또한 국가 자체에 비판적이었고 정권 내에서도 계속해서 과격한 행동을 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양상이 다를 뿐 스페인 내전의 공화진영 정파 중 힘 좀 쓴 정파 치고 적색테러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정파는 없다. 공화주의자들이나 POUM이나 카탈루냐, 바스크 지역주의자들 정도가 '비교적'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힘이 없었거나 조기에 프랑코에 정복당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제2공화국의 입장''에서 말하면 쿠데타를 일으킨 우파나 정부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이나 ''법적'' 정당성[38]이 없다고 하기 충분하다.
그리고 전쟁 후반기에 가면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소련과 공산당[39], 카바예로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네그린에 유린당하다시피 하게 된다. 의회는 무력화되었고 주요 의사결정은 거의 전적으로 총리인 네그린과 공산당 손에 결정되었다. 스페인 공화국 군 수사국 SIM은 NKVD를 모델로 비공산당계 정치인, 군인, 기타 정파들을 제5열이나 트로츠키주의자, 간첩으로 몰아 숙청과 팀킬을 일삼았고 네그린은 심지어 프랑코의 국민진영을 벤치마킹해 공화국 내 정당을 단일당으로 통합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 시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네그린의 권력은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40]에 비견될 정도였다는 기록 역시 있다. 프랑코 정권보다 나았다는 말은 따지고 보면 선 대 악 중의 양자택일이라기보다 최악 대 차악 중의 양자택일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진영만큼은 아니지만 공화진영 역시 범죄를 저질렀다. 예를 들어 공화국이 보유한 금이 부족해지니 국민진영 지지자들로부터 재산을 몰수해 예산으로 쓴다던가[41], 다른 목적으로 들어온 외국인들을 강제로 징집해 국제여단[42]에 집어넣는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

[1] 이외에도 바스크어, 카탈루냐어 등 각 언어가 해당 지역에서 통용.[2] 이전까지 스페인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3] 과장 좀 섞으면 가톨릭 사제는 스페인 국민으로 인정 안 하겠다는 것이다.[4] 일설에는 힐 로블레스를 비롯한 CEDA 의원들의 입각을 계기로 일어났다고 한다.[5] 이 때 반란을 진압한 인물이 바로 프란시스코 프랑코였다. 프랑코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모스크바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기 때문에 조국을 이들로부터 구해야겠구나'라고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고...[6] 통념과는 다르게 공화주의 우파 정권(1933~1936)에서 CEDA와 정부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반좌파라는 것에만 의견이 일치했지 가톨릭 교회에 대한 견해, 공화정 국체에 대한 찬반여부 등 다른 대부분 요소에서는 의견이 많이 갈렸다. 따라서 공화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공화정이라는 국체에 공감하면서 비교적 쉽게 단결할 수 있던 것에 비해서 공화주의 우파와 보수주의자들은 공화정이냐 왕정이냐를 놓고 끝까지 갈등을 벌였다.[7] 구실인 이유는 이 암살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산후르호, 몰라, 프랑코, CEDA 당수 힐 로블레스, 팔랑헤를 중심으로 쿠데타 계획을 36년 총선 때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8] 프랑스 혁명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유럽의 정치 스펙트럼을 (독특한 포지션인 전체주의를 제외하고) 좌우 1차원으로 분류하면 대략 '사회주의&아나키즘-공화주의-자유주의적 입헌군주주의-보나파르트주의-······-봉건주의 왕당파' 정도가 된다. 스페인 가톨릭 교회와 공화주의자들의 반목은 이런 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9] 자유주의 공화국에 온정적인 계파[10] 급진 사회주의적 경향을 띈 계파[11] 콤파니스가 내전 발발 이전 기성 온건 우파 성향의 카탈루냐 부르주아, 급진 좌익 노조세력 사이 왔다 갔다 하면서 전형적인 정치 협잡꾼 모략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민주주의 정치에서 법외 수단이 아닌 정치 모략을 부정하지는 않는다.[12] CNT/POUM와의 타협은 실질적 권력을 쿠데타 막은 CNT가 있는 상태에서 본인은 최소한 기존 '정부'의 명함이라곤 유지하겠다고 손잡은 것이다. 쿠데타군을 공화국의 정규 군대, 경찰이 아니라 독립 무장 노조가 몰아내고 시를 점령한 상황에서 콤파니스가 협력 안한다고 뻣대면 내전이 일어날 거고 콤파니스도 CNT가 당시 상황에선 가장 주도적이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좌파, 공화파 세력을 다 쓸어버리고 진짜 권력을 독점하기엔 본인들 이념적 모순도 있고, 그만큼의 세력은 안된다는걸 통찰하고 일부러 두루티, 올리베르를 초청하여 "오늘의 승자는 댁들이오, 도시의 통치권은 당신들에게 있소" 같은 드립을 치며 권력을 '넘겨주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이렇게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 많은 지방 정부 수반이 아니키스트 혁명가들에게 숙여 드가는척 하면서 보존했던 '국가'의 서류상 존재는 37년 넘어가면서 공화국 정부가 다시 내부 통제력을 어느정도 회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 이 사람은 CNT가 일으킨 34년 아스투리아스 혁명도 지지의사를 보내기도 했다.[14] 다만 왕당파들의 경우 정당성 면에서는 할 말이 있다. 따지고 보면 왕에게 충성하는 입장에서 스페인 제2공화국은 역적패당이기 때문이다.[15] Juilus Ruiz, 에딘버러 대학 역사학과로 재직중이고 스페인계지만 영국에서 나고 자란 영국 시민이기 때문에 영어식으로 표기한다.[16] 폴 프레스턴같이 전통적인 사관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사역사학자 취급을 하는 반면, 스탠리 페인같은 수정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고평가받았다. 스페인의 과거사에 관련한 이러한 전통주의 vs 수정주의 논쟁은 스페인 국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을 망라해 거의 전세계레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17] 피오 모아는 프랑코 사망 즈음에는 스페인 공산당 소속 민병대원이었다가 우파로 전향했다. 한 때는 우파와 폭력 충돌도 벌였던 적이 있었다고.[18] 다만 PPR은 물러나는 니세토 알칼라사모라의 정당이라 기권(사실상 반대)했다.[19] 보수공화당(PCR)의 대표[20] 쿠데타 직후 아사냐는 원래 마우라를 임시 총리로 임명해서 우파의 지지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혁명세력의 폭동 협박으로(대충 케렌스키처럼 만들어 버리겠다는 말이다) 그 계획을 포기하고 마르티네스 바리오를 총리로 임명해서 몰라와의 협상을 하게 한다.[21] 아마 레룩스는 그저 1936년 쿠데타가 흔한 프로눈시아미엔토의 일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랑코 독재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억압적이고 오랜 기간동안 지속되었다.[22] Stanley Payne, Julius Ruiz 등[23] Paul Preston, Helen Graham, Julian Casanova 등[24] 일례로 Payne은 쿠데타가 칼보 소텔로의 암살을 계기로 일어났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군부가 CEDA에 선거자금을 지원한 구 귀족층이나 자본가들이 기부한 돈으로 이미 5월부터 무기를 해외로부터 반입하고 있었다. 다만, 칼보 소텔로의 암살이 주도층이 아니라 참여를 머뭇거렸던 군인들의 쿠데타 가담을 촉진했을 가능성은 있다.[25] 구체적인 득표율이나 의석 비중은 학자마다 다르다.[26] 이를 베아타라고 한다.[27] 다만 반교권주의는 대통령 알칼라사모라 같은 소수의 가톨릭 신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공화주의 정파(AR, PRR, PCR 등)가 동의했다.[28] 사실 팔랑헤가 생기기 이전에도 스페인 우파는 이념은 몰라도 적어도 행태상으로 볼 때 이미 충분히 파시즘 코인을 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로마식 경례를 하거나 훗날 유명해질 Arriba Espana같은 구호를 외친다던가. [29] CEDA와 공화우파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공화우파는 그래도 가톨릭이 국교가 아닌 공화국을 지키자는 주의였지만 CEDA는 제2공화국을 부정했고 가톨릭을 국교로 보던 그 때 그 시절로의 복귀를 여겼다. 단지 민주주의를 정권을 얻기 위한 평화적이고 합법적 수단으로 여겼다. 다만, 제2공화국 외에 어떤 정부를 대안으로 여길지에 대한 뚜렷한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30] 아사냐 대통령이건 네그린 총리건 간에 특히 카탈루냐 독립이라는 선택지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 점은 프랑코 장군을 비롯한 국민진영 측 인사와 의견이 일치했다.[31]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 같은 공화주의자는 쿠데타 발발 직후 몰라 같은 쿠데타 수장격 인물과 대화를 시도했다. 따라서 노동자에 대한 무기 지급과 같이 당시 주요하리라 여겨졌던 결정적 대응을 하는 것은 훨씬 늦은 뒤에 가서 하게 되었다.[32] 19세기 이래 혁명, 반란, 쿠데타같은 정치적 격변이 수십차례에 걸쳐 일어났다.[33] 나면서부터 민주공화정체가 자리잡은 미국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는 비교적 불안정했던 프랑스 제3공화국 같은 경우도 60년 이상 이어지면서 공화정부가 확실히 자리잡았다.[34] 카바예로 계열[35] 네그린 계열, 일부라고 표시한 이유는 프리에토 계열이 있기 때문이다.[36] UGT 수장인 스페인의 레닌-라르고 카바예로가 대표적이다. 국민진영만큼은 아니지만 공화진영에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았다. (네그린과 PCE 등) 그리고 제2공화국 출범 이전 왕정시기부터 스페인은 쿠데타가 빈발했는데 좌파의 역사적 시조이기도 한 자유주의자들 역시 쿠데타를 일으켰다.[37] 당시 선거 결과는 15만 표 차로 박빙의 승부였으나 선거 규칙상 의석 대부분은 좌파가 차지했다.[38] 러시아 혁명당시에도 아나키스트들은 최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와 적대했지만 그 이전에는 볼셰비키와 손잡고 의회민주주의를 타도하는데 열의를 보였다.[39] 내각은 여전히 스페인의 기존 정당들이 차지했지만 이미 스페인 공산당은 정부 대신 스페인의 실세 집단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40] 왕정 말기의 독재자, 팔랑헤당의 수장 호세 안토니오의 부친이다.[41] 이렇게 확보한 예산은 제2공화국이 망하고 프리에토같은 일부 거물급 정치인이 확보해 망명지에서 자기 생활비로 쓰게 되었다.[42] 처음에는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 공화국을 돕겠다는 명목 하에 전세계에서 자발적으로 스페인에 입국해 나름 성과를 거뒀지만 소련은 입국하면서 이들의 여권을 입국하고 이들의 휴가나 제대 후 귀국은 시간이 갈수록 제한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숙청은 국제여단원이라도 예외는 아니었고(소련인들조차도 수틀리면 소련으로 끌려가서 숙청되던 시기였다.) 심지어 국제여단원을 대상으로 한 수용소도 있었다. 결국 국제여단으로의 입대는 갈수록 시들해졌고 이들은 38년 네그린이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단으로 송별연과 함께 전부 귀국시킨다. 이 때 귀국한 이들은 7800여명이었다. 나머지 귀국이 어려운 이들은 외인부대로 편입되었거나 행정상 미비로 여전히 수용소에 있는데도 카탈루냐가 39년 초 국민진영에 넘어갈 때까지도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