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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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분열을 보여주는 만평.[1]

1컷: "절대!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해선 안 되오!" (Surtout ! ne parlons pas de l'affaire Dreyfus !)

2컷: "... 했군..." (... Ils en ont parlé...)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1894년 9월
3.2. 1896년
3.3. 1898년 1월
3.4. 1898년 여름
3.5. 1899년 9월
3.6. 1906년 7월
3.7. 1995년 9월
4. 여파
5. 기타
6. 창작물에서의 등장
7. 같이 보기


1. 개요


프랑스어
L'affaire Dreyfus
영어
Dreyfus affair
19세기 말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국가적으로 한 명의 개인인 장교 드레퓌스를 매장시키려고 한 사건이다.
독일과의 전후 관계에 반유대정서에서 유대인 혈통 장교에게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씌워 실형을 살게 한 뒤 수년에 걸쳐 밝혀진 다른 증거와 직접적 용의자를 눈가림하고 긴 세월을 거쳐 재심을 하게 되어 사면했으나 진범 용의자는 도주하여 천수를 누렸고, 오랫동안 국민 국론이 분열되어 백년 정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나름 인권과 연대를 모토로 하던 프랑스에서의 반유대주의가 극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이며, 후대의 인권운동과 시오니즘의 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배경


발단이 터져나온 시기는 1894년으로, 당시 프랑스는 이전 1871년의 보불전쟁에서의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독일의 통일을 이루려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던 나폴레옹 3세프랑스 제국이 가열차게 충돌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가 패함으로써 스트라스부르와 메스를 상실하고, 마침내 독일은 통일을 달성,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는 50억 프랑의 보상금을 요구하였기 때문. 그리고 결정적으로 보불전쟁의 패배는 '''프랑스가 더이상 서유럽육군 최강국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보불전쟁이 패배로 끝나자 프랑스의 여론은 들끓어올랐다. 즉 패배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이었는데, 프랑스 패배의 원인이 암묵적인 반역 행위에 있었다는 결론과 함께 정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사회에 다시 한번 쇼비니즘의 바람이 불어닥치게 되었다.[2]
당시 프랑스독일은 치열한 첩보전을 바탕으로 유럽에서의 실권을 장악하려 애썼기에 프랑스가 이러한 분위기로 흐르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특히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룩해온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신생 독일 제국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당시 프랑스인들의 인식도 여기에 한몫을 한 듯하다.
물론 프랑스는 여러 차례의 혁명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개인의 인권을 중요시하였고, 가장 먼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만큼 민족이나 인종을 넘어서는 포용력을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3공화정 치하인 1890년대 프랑스 사회 내부에서는 아직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뚜렷했다. 특히 “라 리브르 파롤”과 같은 반유대주의 신문의 창간은 프랑스 국민사회의 민주주의에 반하는 인종차별적인 정서를 고조시키고 있었고, 1892년 프랑스 정국을 발칵 뒤집은 파나마 스캔들에 유대계 자본이 관여한 것이 밝혀지면서 대중들 사이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고조되어 갔다.
더불어 독일이 통일된 후, 유럽 내 국가 간의 세력이 균형을 잡아감에 따라 이전 프랑스의 영광[3]을 그리워하던 프랑스인들은 강력한 군대와 국가를 열망하였고, 이러한 국가주의적인 정서는 반유대주의 사상 등과 더불어 점점더 배타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패전으로 인한 혼란 + 국가제일주의 + 반유대주의 정서의 혼합 짬뽕이 결국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탄생시키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3. 전개



3.1. 1894년 9월


1894년 9월, 프랑스군 육군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익명의 발신인이 보낸 편지 안에는 프랑스 육군의 기밀문서에 해당하는 한 장의 명세서가 들어있었으며,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의 무관 막스 폰 슈바르츠코펜 육군 대령(Maximilian von Schwartzkoppe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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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년 10월 9일 ~ 1935년 7월 12일)
군 정보국은 조사끝에 알자스 태생[4] 유대인으로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육군대학(École Supérieure de Guerre)을 졸업하고 수습참모로 근무하던 촉망받는 프랑스 육군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지목하였다. 1894년 12월 19일 파리 근교의 한 궁전 건물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은 공개여부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는데 드레퓌스의 변호인인 데망즈는 유죄의 증거가 명세서 하나뿐이며 그것도 그를 범인으로 몰기에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여론의 반전을 노리고 공개재판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당시 드레퓌스는 진술 순서가 되자 그는 명세서에 언급된 내용을 통보받은 사실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자신은 명세서에 언급된 마다가스카르 원정과 120mm 포와 그 지원부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하다고 차근차근 진술하였다. 국방성에서 나온 참관인도 드레퓌스의 무죄를 생각했으나 상황은 갑자기 반전되었다. 드레퓌스의 동료들이 모두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한편 드레퓌스의 필적이 명세서의 필적과는 다르다는 사실은 ''' "그가 명세서를 쓸 때 남의 필적으로 가장했음을 입증하는 것" '''이란 희한한 논리를 앞세웠다.
사실 이때 핵심증거가 된 필적은 '''그저 조금 유사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발견된 종이는 13개 다음절 단어로 되어 있었는데 이 중 4개의 단어가 드레퓌스의 필체와 비슷했고 이것이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로 제시된 것이다. 이런 희박한 증거만으로 반유대주의에 물든 군 상층부는 유대인인 드레퓌스 대위를 범인으로 단정해 버렸다.[5]
재판이 시작된 지 나흘 만에 심리는 종결되었다. 재판관들이 판결을 논의하기 위해 퇴정하려 할 때 재판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힌 봉투가 정해졌다. '''판결을 심의하는 동안 작은 봉투 안에 든 내용을 재판관들에게 읽어준 다음에는 다시 봉인해서 그 봉투를 전한 장교에게 되돌려 달라'''. 한마디로 상부가 재판관들에게 외압을 행사해 이미 재판을 결정낸 셈이다. 논고와 최후변론을 들은 후 드레퓌스는 호송되어 나갔고[6] 재판관들은 만장일치로 드레퓌스에게 반역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7] 1895년 1월 드레퓌스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Île du Diable)'에 유배당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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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TRAITRE: Degradation d'Alfred Dreyfus''' '''(반역자: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강등식)'''
이때 프랑스군, 가톨릭 교회, 보수우익 언론들이 일제히 드레퓌스를 비난하고 반유대주의 선동을 해대면서, 프랑스는 드레퓌스를 탈탈 털어 뼈도 안 남길 정도의 험악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보통 처벌당하는 장교의 경우 군의 명예를 생각해 조용히 끝내는 게 보통인데, 드레퓌스 대위는 전 포병연대원들이 도열한 가운데 연병장에서 예복을 착용한 상태에서 다른 장교가 예도를 빼앗아 부러뜨리고, 계급장과 훈장, 단추[9] 등을 군복에서 떼어내는 굴욕적인 강등식을 공개적으로 행했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드레퓌스는 악마섬에서 혹독한 복역을 치뤄야 했다. 24시간 내내 감시를 받았고 밤에는 두 발에 겹으로 찬 쇠사슬을 차야 했다. 적도의 무더위에도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나마 아내 루시가 편지에 써 보내 준 믿음과 사랑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의 아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요..(중략).. 이 무서운 불행이 덮치기까지 우리가 누렸던 그 완전하고 깨끗한 기쁨을 맛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중략)... 그 행복했던 생활을 되찾으려면 이 무서운 수수께끼를 푸는 것말고는 다른 길이 없겠지요...(중략).. 나는 믿어요. 내 믿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답니다.

아내 루시가 보낸 편지

어떤 악마가 정직한 우리 가족에게 이런 불행과 치욕을 안겨 주었을까...(중략)... 나는 온 세상을 향해 내 결백을 외치고 싶소.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 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나는 날마다 쉬지 않고 외칠 것이오. 나는 죄가 없다고!

드레퓌스의 편지 中

그러나 드레퓌스는 머지않아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 받는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드레퓌스의 아내 루시와 형 마티외는 드레퓌스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모두 허사였고, 당국은 루시가 남편을 위해 악마섬으로 이주하는 청원도 거부했다. 그렇게 형무소에서 병들어 죽는 것으로 드레퓌스의 운명이 정해진 줄 안 순간 한 줄기 진실이 찾아들었다.

3.2. 1896년


2년이 흐른 후, 참모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조르주 피카르 중령[10]이 우연히 당시의 문건을 열람한 후,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지목할 근거가 없다'는 것과, 정보국에서 방첩대 실무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던 헝가리 태생의 페르디낭 발진 에스테르하지(Ferdinand Walsin Esterházy)[11] 육군 소령의 문체가 명세표와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간첩 잡는 게 임무인 장교가 간첩질을 했다는 얘기.[12]
피카르 중령은 이 조사 결과를 상관인 공스 장군에 보고하고 재심을 요구하지만, 참모본부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자기들 목이 날아갈 판인데? 그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그대로 묻어버리려고 했고, 피카르 중령은 오히려 욕을 먹어야 했다.

공스: "도대체 자네는 무엇 때문에 그 유태인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나?"

피카르: " 그 사람은 죄가 없으니까요"

공스: " 이봐! 국방 장관과 참모총장이 이미 끝난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래 자네는 다시 재판을 열자는 말인가?"

피카르: "장군님, 그 사람은 무죄입니다."

공스: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진실이라고 하면 내게는 그게 진실이야. 자네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피카르: "장군님 말씀을 듣자니까 구역질이 납니다. 아직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이 비밀을 죽을 때까지 감추지는 않을 겁니다."

결국 피카르 중령은 식민지 근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발진 에스테르하지는 여론에 못 이겨 체포되었지만, 몇 달 뒤 은밀히 영국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자체가 워낙 큰 이슈였던 탓에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일단 좌천 직전에 피카르 중령이 잘 알고 지내던 변호사를 통해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유포시킨 것도 한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동생의 무죄를 위해 포기하지 않았던 마티외는 어느 신문사를 통해 속임수 기사를 실었다. 그 내용은 "반역자 드레퓌스의 죄를 증명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아직도 드레퓌스가 죄를 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그 증거를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였다. 이렇게 해서 드레퓌스란 이름이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르 마텡’이라는 보수주의 계열의 신문이 '그놈의 범죄를 입증해 보이겠다'란 식으로 명세서의 사본을 공개하면서 오히려 기름통에 불을 붙였다. 사본의 서체가 누구의 것이네, 아니네에서 불붙은 논쟁이 재심 반대파와 재심 요구파로 갈리며, 마치 내전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논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재심 반대파(즉 드레퓌스 유죄파)는 대부분 공화제, 프랑스 혁명 이념에 반대하는 왕당파들, 옛 귀족들, 군부세력과 과격한 가톨릭주의자들, 보수 우익 정치인들, 군국주의자들 및 이와 연계된 신문들로 이들은 '국가안보 위해(危害) 세력에 대한 경고와 군의 위신을 존중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 반대편의 재심 요구파에는 양심적인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일부 진보적인 정치인들, 소수의 신문들이 있었다. 또한 이 사건을 초기에는 유산 계급 내부의 투쟁으로 생각했던 사회주의자와 노동 계급이 뒤늦게 가담한다.
기득권을 형성했던 대다수의 신문들이 드레퓌스를 정죄하는 편파보도를 하는 동안, 피가로#s-3. 신문이 처음으로 에스테르하지를 진범으로 주목하는 보도를 냈다.[13] 하지만 이런 소수 신문들의 의견은 대다수의 보수신문들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 가톨릭과 보수 세력은 군의 위신을 국가의 생명으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하게 보는 군국주의 사고방식에 찌들어서 "군은 절대 무오류의 조직이며 군의 위신이 곧 국가의 위신이다. 따라서 군부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곧 국가의 멸망이다" 같은 어처구니없는 주장들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
결국 에스테르하지는 존재하지도 않는 유대인 국제 비밀조직에 대항한 영웅(...)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한직으로 좌천당했던 피카르 중령은 군사기밀 누설죄로 잡혀들어갔다.
또한, 드레퓌스가 체포된 지 3년 만에 우연히 명세서의 필적과 에스테르하지 소령의 필적이 동일함을 알게 된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가 에스테르하지를 고발하지만, 당국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기만 했다.

3.3. 18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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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cuse...!: Lettre au President de la Republique, Par Emile Zola''' (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가 프랑스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Voilà donc, monsieur le Président, les faits qui expliquent comment une erreur judiciaire a pu être commise; et les preuves morales, la situation de fortune de Dreyfus, l’absence de motifs, son continuel cri d’innocence, achèvent de le montrer comme une victime des extraordinaires imaginations du commandant du Paty de Clam, du milieu clérical où il se trouvait, de la chasse aux «sales juifs», qui déshonore notre époque. [중략] Je n’ai qu’une passion, celle de la lumière, au nom de l’humanité qui a tant souffert et qui a droit au bonheur. Ma protestation enflammée n’est que le cri de mon âme. Qu’on ose donc me traduire en cour d’assises et que l’enquête ait lieu au grand j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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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각하. 바로 이렇게 해서 사법적 오판이 저질러졌습니다. 게다가 드레퓌스의 도덕성, 부유한 환경, 범죄 동기의 부재, 끝없는 무죄의 외침은 그가 뒤파티 드클람 소령의 기발한 상상력, 그를 둘러싼 종교적 환경, 우리 시대의 불명예인 ‘더러운 유태인’ 사냥 등의 희생자였음을 더욱 확신하게 합니다. [중략] 저는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인류, 바야흐로 행복 추구의 권리를 지닌 인류의 이름으로 오직 하나의 열정, 즉 진실의 빛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불타는 항의는 저의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하여 푸른 하늘 아래에서 조사하시기 바랍니다![14]

에스테르하지가 유대인 국제비밀조직에 대항한 영웅으로 추앙되고 군국주의와 국가주의가 사회에 만연하자, 이에 큰 충격을 받은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나는 고발한다...!>'''[15]라는 제목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냈다.[16][17] 졸라는 이 글에서 아무런 근거 없이 드레퓌스를 유죄로 몰아간 첫 번째 군사법정과 증거가 명확한 스파이 에스테르하지를 무죄석방한 두 번째 군사법정을 고발하는 동시에,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을 강하게 요구했다.
로로르의 창간자이자 편집장인 조르주 클레망소[18]는 “프랑스를 치명적 위기에서 구한 것은 사상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였다”라고 말했고,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은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끝없는 찬사를 보낸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라며 에밀 졸라를 옹호했다. 그 밖에 홍당무로 알려진 작가 쥘 르나르도 졸라를 옹호하며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이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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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심 반대파는 졸라의 기사를 길거리에서 불태우는가 하면 초상을 목매달았으며, '''졸라를 죽여라!''', '''유태인을 죽여라!''', '''군대 만세 ''' 따위의 구호를 외치며 군중을 선동하여 유대인 상점을 약탈하거나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일상을 팽개친 프랑스인들은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말다툼과 주먹다짐으로 시간을 보냈고[19], 각계각층의 지도자들도 인간의 권리와 국가의 이익이라는 대전제 사이에서 극렬한 논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군부는 에밀 졸라에게,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이유로 유죄선고를 내렸고 졸라는 런던으로 망명했다. 나중에 프랑스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1902년 갑자기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마는데, 지금도 살해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 이 많이 나오고 있다.
당시 에밀 졸라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상원과 하원, 문민 권력, 군부 권력, 거대 신문, 거대 신문이 중독시킨 여론 등 모든 것이 저에게 적대적입니다. 제 편으로는 오직 하나의 관념, 즉 진실과 정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은 너무나 평온합니다. 저는 승리할 것입니다. 저는 정녕 우리나라가 거짓과 불의 속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저는 유죄 선고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프랑스가 자신의 명예를 구해준 데 대해 제게 감사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20]


3.4. 1898년 여름


이 사건은 이미 세계적인 이슈가 되어, 진보적 지식인들의 항의와 비난이 이어지고 졸라를 옹호하는 각국의 여론이 줄을 이었다.
그러던 중 1898년 8월 30일, 드레퓌스 사건의 모의자 중 하나인 위베르 앙리 중령이 피카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테르하지와 함께 조작한 증거가 거짓으로 밝혀질 위기에 처하자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21] 이 사건의 분수령이 되었다. 같은 시점에서 에스테르하지는 영국으로 도망쳤다.[22]
앙리 중령의 자살은 재심파에 유리한 국면을 열어주었다. 군의 명예와 국가주의를 부르짖었던 가톨릭계의 재심 반대파들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양심적인 재심파의 거센 재심요구에 다시 부딪히게 되었다.

3.5. 1899년 9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고등법원의 재심은 1899년 6월 3일에 열렸다.
법원은 명세서가 드레퓌스가 아닌 에스테르하지에 의해 쓰인 것임을 근거로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던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 드레퓌스는 브르타뉴 지방의 소도시 렌에서 다시 군사재판을 받았다.[23] 그러나 증인으로 출석한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여전히 증거날조와 위증으로 일관했고, 법원은 정상을 참작하여 드레퓌스에게 '''10년형'''을 언도했다.[24]
"드디어 진실이 승리하는구나!" 하고 기대했던 여론이 또다시 끓어올랐다. 이 충격은 프랑스 내 지식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까지 미쳐서, 각국 프랑스 대사관에 시위대들이 진을 치고 항의하는가 하면, 프랑스 국기 공개 화형식에, 프랑스의 모든 것에 대한 보이콧 결의안까지 나왔다. 에밀 졸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혐의가 풀려 영국에서 귀국했던 졸라였지만, 다시 펜을 들어 재심판결의 부당함을 폭로하면서 여론을 주도해 나갔다.
결국 국내/외 여론에 밀린 프랑스 군부는 드레퓌스에게 유죄 판결을 인정하는 대신에 즉각적인 사면을 제안함으로 사건을 일단락하려 했다. 많은 재심파의 인사들은 유죄 인정에 대해 반대했지만, 정작 드레퓌스는 5년간의 수감생활 동안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라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 드레퓌스는 말라리아에 걸려 투병하고 있었으며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렸다. 결국 드레퓌스가 군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사건의 한 막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드레퓌스의 항복으로 인하여 드레퓌스파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군경력을 걸고 그의 복권을 위해 노력한 피카르 중령은 한동안 드레퓌스에게 절연을 선언했고, 조르주 클레망소 역시 드레퓌스에게 '''"우리가 지난 10년간 싸운 건 단순히 당신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로운 조국의 건설을 위해서였다. 당신은 당신의 편안함만 생각하느냐?"'''라고 항의했고 샤를 페기는 "우리는 드레퓌스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드레퓌스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했다.
정작 프랑스 유대계는 드레퓌스 사건의 장기화가 반유대주의를 강화할 것이라 여겨 드레퓌스의 사면 수용을 지지했고 드레퓌스 본인도 극도로 지친 나머지 자신을 비난하는 재심파들에게 "제발 잠자코 있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자백해 버리겠소.'''", "당신들도 알겠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소?'''"라고 빈정대면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3.6. 1906년 7월


사건이 일단락되었다고는 하지만 불완전 연소에 불과했다. 결국 1899년 친 드레퓌스파가 정부를 구성하였고 계속된 지식인들의 격려에 힘입어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만인 1904년 3월, 드레퓌스는 형 마티외의 도움으로 새로운 증거들을 첨부하여 최고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했다.
결국 1906년 7월 12일 최고재판소는 렌 군법회의의 유죄판결을 오판으로 파기,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드레퓌스와 피카르를 복권시켰다.[25]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에게 소령 특진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사죄한다.[26]
드레퓌스는 복권되어 잠시 군에 복무하였지만 유형기간 내내 쇠약해진 몸 때문에 다음 해 전역을 해야 했다. 한편 피카르 중령은 대령을 건너뛰고 단숨에 준장으로 진급하여, 이후 국방장관까지 지냈다.[27] 그 후 드레퓌스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소집되어, 갈티에리 장군 휘하의 파리 방위군 포병참모가 되었다.
이후 중령으로 진급하여 포병병과 후방지원임무에 종사, 베르됭 전투프랑스군의 굵직한 전투 다수에 참가했다. 종전 후 퇴역하여 파리에서 살다가 1935년 7월 12일에 사망했다. 엄청난 고통과 수모를 준 국가를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전쟁까지 나간 진정한 애국자.
그러나 드레퓌스의 손녀 마들렌 레비는 비시 프랑스 시기 나치 독일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서, 1943년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드레퓌스의 복권은 프랑스의 반유대주의가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드레퓌스가 복권된 것을 본 많은 프랑스 우파들은 '''강력한 유대인 비밀조직이 드레퓌스를 후원했기 때문에''' 드레퓌스가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여겨 프랑스 사회에 암약하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쉽게 말해 드레퓌스는 무죄가 아닌데 여론과 유대인들의 압박에 못이겨 사법부가 죄가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무죄를 선고했다는 주장. 이 때문에 프랑스 유대계가 드레퓌스에게 사면안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일을 끝내자고 권고한 바가 있으며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브리삭 가문, 로슈푸코 가문, 뤼네 가문, 위제스 가문을 비롯한 파리의 유력 귀족 사회는 유대인 음모론을 적극 수용하며 프리메이슨과 무신론자들이 프랑스를 파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28] 이후 프랑스 우파는 비시 프랑스 수립에 적극 가담, 프랑스 유대인의 색출과 학살에 협조했다.
이와 연관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42년의 벨디브 사건. 벨디브 사건이란, 1942년 7월 16일부터 17일까지 프랑스 경찰이 13,152명의 유대인을 일제 검거한 뒤 파리 제15지구에 위치한 자전거 경기장인 벨로드롬 디베르(Vélodrome d'Hiver, 약칭 벨디브(Vel d'Hiv))에 수용한 사건으로, 이들은 제대로 된 음식이나 거처도 제공받지 못하다 그냥 끌려갔으며, 이들 중 12,884명은 남녀노소로 갈라진 뒤 차례로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학살당했다. 프랑스에서 최초로 성인 남성이 아닌 아동, 여성, 노인 유대인이 대규모로 체포된 사건으로, 당시 체포된 아동만 해도 4000명이 넘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 일제 검거는 독일의 요청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직접 실시했다는 것. 프랑스는 이 사건의 조사에 대해 공공연하게 압력을 가하는 등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다[29][30] 1995년이 되어서야 당시 대통령 자크 시라크에 의해 인정되었고, 사건 발발 70주년인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한편 문제의 에스테르하지는 판결이 나왔을 땐 이미 변장 후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영국으로 도주한 뒤였으며, 1932년까지 반 유대인성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의 삶을 살며 천수를 누리다 갔다. 유해는 그가 거주하던 마을 인근의 성 니콜라오 성당[31] 무덤에 묻혀 있다고 하나 진실은 저 너머에….

3.7. 1995년 9월


1995년 9월 12일자 <리베라시옹>에는 드레퓌스 사건 이후 100년 만에 처음으로 프랑스 육군이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라는 사실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기사가 실렸다[32]. 이 해에, 프랑스 군사(軍史) 담당이었던 육군의 장 루이 무뤼(Jean Louis Mourrut) 장군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논란이 끝났다.
1906년 당시 대법원에 의해 드레퓌스가 복권되기는 했지만, 당시 프랑스군은 군법회의가 음모와 조작에 의했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저 법원에서 무죄라고 했으니 무죄 취급을 할 뿐이라고 우긴 것이다. 프랑스군은 예로부터 초특급 보수적 성향을 견지하는 입장에 서왔다가 마침내 그가 무죄라고 시인한 것. 물론 당시 사건을 주도한 군인들은 이미 다 죽었으니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이로써 한 개인의 인권을 말살시킨 것이 군 정보기관의 음모라는 사실이 인정되는 데 100년이 걸렸다.'''

4. 여파


흔히 19세기 반유대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지만, 모순되게도 드레퓌스 자신은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본인을 유대인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듯.
당시 서유럽에서는 사실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분이 매우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많은 유대인들이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문화적, 혈연적으로 서유럽에 거의 '동화'되어 버려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대인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동유럽러시아인들을 비웃거나 인종차별에 분노하는 게 당시 서유럽의 풍토였다.''' 그랬기에 드레퓌스도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인식 자체를 갖지 않았던 것인데, 정작 유대인이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자마자 전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의 광풍이 일었던 것.
1900년대 초 사건이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정계에서는 일부 보수 인사들이 아직도 드레퓌스가 유죄임을 주장했고 심지어 '나는 그가 아직도 유죄임을 믿는다'라는 투의 논문과 서적도 수차례 발간되었다.
국가와 군을 모든 것의 우위에 두는 군국주의 세력, 극우파의 선동에 휩싸인 대중의 광기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으로 말 그대로 프랑스가 두 개로 쪼개졌다. 실제 재심 판결 전에 드레퓌스를 지지하던 대학 교수들은 대학에서 쫓겨나고,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모조리 낙선하는 등 한때 진보파가 거의 궤멸당하기 직전까지 몰렸다.
여담이지만 드레퓌스 사건이 프랑스에서 논란이 되자 결투가 급증했다. 이 당시에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일이 생기면 결투로 해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드레퓌스 사건 이전과 비교해보면 배 이상으로 늘었다고 한다. 사건의 관련자였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진범인 에스테르하지까지도 이 사건으로 인해서 결투를 했다고.
한편 프랑스 혁명 이후 인권과 평등을 외치면서 전 유럽에서 가장 유대인에게 관대했던 프랑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개인을 완전히 말살하고, 유대인 전체를 잠재적인 반국가집단으로 낙인찍는 행태를 보인 것은 엄청난 후폭풍을 야기하였다. 전 유럽의 유대인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중세 시대부터 유럽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거주 구역에 모여 살았는데 교육, 육아, 결혼, 취미생활 등 모든 것을 랍비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 공동체 안에서만 해결하는 폐쇄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700년대 후반과 1800년대 초반에 이르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많은 유대계 인사들이 "우리는 (우월한) 유대인. 우리는 우리끼리만 산다"라면서 주류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스스로 고립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회에서 차별 받는 이유라고 결론을 내렸다.[33] 이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아예 종교에 연연하지 않는 삶을 통해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희석시키고, 스스로를 독일인 혹은 오스트리아인으로 규정지으면서 사회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많은 유대계들은 개종 이후에 유대계라는 의식이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져서 2차대전 때 나치에 의해 자신이 유대계라는 것을 알고 충격으로 까무러친 사람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의 희생자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 가족을 살펴보면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1차대전 시기 독일 제국군에서 육군 보병장교로 복무하면서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고, 전후 은행가로 성공하면서 독일에서 기독교를 믿는 주류인사들과 어울리면서 상류층 생활을 하였다. 유대교를 믿긴 하지만, 딱히 신앙심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일상생활에서도 이디시어히브리어가 아니라 독일어를 사용했다. 자식들에게 유대교 관습이나 이디시어를 교육하는데 그렇게 열성적이지도 않았다. 안네의 일기네덜란드어로 쓰여져 있다. 유대인이라기보다는 유대계 독일인 정도로 인식하면서 살다가 나치가 집권하고 유대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네덜란드로 이민을 간 것이다.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인 <>를 보면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어느 노인이 '나는 유대인이 아니오! 나는 오래 전 독일 황제에게 훈장도 받은 몸이란 말이오!' 라고 하소연하다 죽임을 당하는 게 나온다. 아우슈비츠에는 '''독일인(독일계 유대인이 아니다!!)'''도 있었다. 따라서 위에서 자신이 유대인임을 부정하던 사람이 실제로 독일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유대인임을 부정했는데도 나치에게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 유대계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 비유대인 사회에 융화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유대인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고, 이럴 바에는 주류사회에 동화되느니 유대인의 정체성을 살려서 우리들끼리 모여 사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침 이 사건을 취재하던 유대인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인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독자적인 유대인 국가 건설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전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이 여기에 동감하면서 결집하기 시작했다. '''바로 시오니즘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오니즘 운동은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유대인들을 결집시켰고, 이것이 1차 세계대전 와중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보장하겠다는 영국의 '''밸푸어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지금까지 세계의 화약고라는 중동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게다가 영국은 벨푸어 선언이 나오기 전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독립에 대해 맥마흔 서한을 제시해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에 서로 모순된 약속을 남발하여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팔레스타인/역사#s-5 항목 참조.
또한 이 드레퓌스 사건으로 다시 드러난 반유대주의가 이번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바이마르 공화국)로 전이되는 바람에 이른바 배후중상설이 떠올랐고 이 음모론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라는 최악의 유대인 학살'''을 야기했고, 시오니즘은 국제적인 동정 여론까지 얻으면서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귀결되었다.
여하튼 드레퓌스 사건은 현재는 인권탄압 등의 사례로 주로 인용되며, 국가가 일단 결정한 사안을 일개 개인이 뒤집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되기도 한다. 다수의 악이 소수의 진실을 억압하고 덮으려 했다는 점에서 근대식 마녀사냥의 전형적인 틀을 이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34] 이는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 때문에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이 구도는 달라지는 것이 없을 거란 점이다. 다수를 와해시킬 소수의 힘이 존재한다면 모를까, 그것이 쉽게 가능할까?

5. 기타


  •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건 니콜라스 할라즈가 쓴《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35]이 1982년에 출간되면서부터였다. 그 후 1988년에 유시민이 출간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내용이 일부 편역되었는데 유시민의 책이 인기를 끌면서 해당 내용도 많이 알려지게 된다. 1990년대 들어선 위기철의 논리야 시리즈에 드레퓌스 사건이 등장해 꽤 많은 어린이들에게 알려졌다.
  • 진범이었던 페르디낭 에스테르하지의 경우 영국에 망명한 뒤 그대로 눌러앉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았는데 프랑스 정부에서 끝끝내 그를 잡아다 재판하려 하지도 않았고 진범으로 인정하지도 않은 점[36]을 보면 '이중간첩 아니었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전술했던 것처럼 에스테르하지는 영국으로 도망친 이후 자신은 상부의 명령으로 독일무관에게 접근한 이중첩자였다는 내용으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 떡밥을 던진 것은 '진 도이세'라는 프랑스 역사학자로 이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를 여러 가지로 수집하였다. 도이세가 제기한 근거 중 하나는 에스테르하지는 독일에게 포병대의 정보를 누설하였는데 이 정보를 '앙리'라는 장교로부터 제공받았다. 그런데 앙리도 첩보부에서 일하는 장교로 포병대의 핵심정보에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인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앙리가 제공한 정보는 첩보부에서 독일에게 일부러 넘기기 위해 정성들여 작성한 가짜 정보이고 이를 이중첩자였던 에스테르하지가 독일에게 진짜인 것처럼 속이고 넘겼다는 것이다.

만일 에스테르하지가 이중첩자였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아주 심각한데, 그 이유는 프랑스 정부가 진상을 알면서도 국익을 위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드레퓌스가 무죄인 것과 별개로 이 또한 심각한 사안이 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드레퓌스에 대한 무죄와 당시 군 수뇌부의 음모가 있었음은 프랑스 군과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이중첩자 여부에 대해서는 지금도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당시 에스테르하지가 이중첩자이고 그가 누설한 기밀이 프랑스 정부가 조작한 것이라면, 범인이 누구인가 이전에 애당초 기밀 누설 자체가 없었고 프랑스 정부도 이를 알면서도 반유대주의를 부채질하기 위해 드레퓌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 물론 군부 내에서 정보교환이 꼬여서 한 쪽에서 착각하고 기밀 누설이라고 크게 떠들었다가 수습하기 위해 만만한 희생양을 골랐을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점을 확고하게 알면서 누명을 씌웠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프랑스 정부는 이를 끝까지 부정할 테니 진실은 저 너머에
  • 이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끝내 드레퓌스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 무관 막시밀리안 폰 슈바르츠코펜은 1917년 죽기 직전에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회고록에서 자신은 드레퓌스를 알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
  • 훗날 대한민국에서도 이와 매우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과 2012년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이다. 유서대필 조작 사건은 오랜 법정 공방 끝에 2015년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간첩 조작 사건도 간첩죄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또한 간첩 조작에 가담한 자들 역시 현재 법정에 넘겨진 상태다.
  • <킬빌>에서 소피 파탈 역을 맡은 프랑스의 여배우 쥘리 드레퓌스가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방계 후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남자 형제 중 한 명이 줄리 드레퓌스의 조상이다. 또 1960년대를 풍미한 프랑스 스타 아눅 아메의 원래 성이 드레퓌스인지라, 이쪽 역시 드레퓌스 후손 아니냐는 얘기도 좀 있다. 아눅 본인은 별다른 얘길 하지 않았다.

6. 창작물에서의 등장


  • <프라하의 묘지>에서 작품 후반에 주요하게 다루는 사건 중 하나이다. 문제가 되는 문서는 위조된 것이며 범인은 작품의 주인공인 시모네 시모니니. 다만 문서 위조 의뢰를 받아들였는데 일감이랍시고 온 필적견본은 드레퓌스가 아니라 에스테르하지의 것이었다. 이는 실수가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것으로, 이중 스파이였던 에스테르하지를 기회가 될 경우 좌천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던 것.
  • 미국 영화에도 큰 궤적을 남겼는데, 해당 사건을 영화화하여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에밀 졸라의 생애》가 그것. 에밀 졸라의 열변과 논리적인 변호로 드레퓌스 측이 승리할 것 같은 법정 다툼이 패배로 끝날 때의 반전은… 올리버 스톤 감독이 JFK를 연출할 당시 《에밀 졸라의 생애》를 많은 부분 참고했다고 한다.[37]
  •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오랫동안 영화 장교와 스파이로 만들고 싶어했는데, 2018년 개봉 목표로 제작에 들어갔다가 연기되었다. 2019년에 개봉 날짜가 잡혔고 장 뒤자르댕과 루이 가렐이 각각 피카르 중령 역과 드레퓌스 대위 역으로 출연한다.
  • 2014년 영화 로보캅에서 인공지능에게 치안을 맡기지 않는다는 법률인 드레이퍼스 법률이 언급된다. 본 작품의 로보캅은 대기업 OCP에서 로봇 장사로 큰 이득을 보는데 걸림돌인 이 법률의 헛점(사이보그면 인공지능이 아니니...)을 파고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로 나온다.본 작품에서 로보캅을 만든 박사의 배우가 저 명배우 게리 올드먼인데, 우연히도 이분이 같은 해에 찍은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서 맡은 배역 이름도 드레이퍼스.

7. 같이 보기



[1] 1898년 2월 14일 피가로지에 실린 카랑 다슈의 삽화.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가족 간의 저녁 식사임에도 저 꼴이라는 풍자이다.[2] 웃기게도 이 시기에 불어 역사상 특이한 언어 운동도 일어났는데 ''''유성 구개수 마찰음'으로 발음되던 r을, 라틴어처럼 '치경 전동음'으로 발음하자는 복고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적대국인 프로이센/독일을 위시한) 주변국에서 유럽의 중심이라면서 정작 대부분 유럽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전동음을 구사할 수 없다고 깐 적이 있기 때문이다. 패전한 뒤에 얼마 안 있어 1888년 국제음성기호가 막 발표되던 참이라 음성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태동되고 있던 시기였다.[3] 프랑스는 중세가 끝나면서부터 서유럽 내에서 단일국가로는 언제나 육군 최강국이었다. 특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절에는 한때 서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였고, 나폴레옹 3세 시절에는 최소한 표면으로라도 해외진출 및 경제발전, 국위선양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보불전쟁의 패배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고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믿었다.[4] 오랭 주 뮐루즈 출생. 즉, 프랑스가 알자스-로렌을 상실할 당시 프랑스로 이주한 실향민이다.[5] 한 저명한 범죄학 전문가(참고한 책의 저자도 저명한 범죄학 전문가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는 "한 단어에서 우연히 필체가 일치할 확률은 0.2이고, 따라서 4개 단어에서 필체가 일치할 확률은〖0.2〗^4=0.0016이다"라고 증언하였는데, 군사재판이 그 증언을 수용한 것이다. 1896년 진범이 잡혔으나 비밀리에 방면되었고, 1899년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에서 군사재판은 원심을 확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필요한 확률은 단순히 4개 단어가 우연히 모두 일치할 확률이 아니라, "13개 단어 중에서" 4개 이상의 단어가 우연하게 일치할 확률인 0.253이다. [image] 이라는 과정을 통해 계산이 가능하다.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가정과 상관없이, 우연히 필적이 일치할 확률은 25.3%나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드레퓌스는 정당한 증거에 의해 죄가 정립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출처: 허명회, 『법과 통계학』, 한나래, 2011[6] 이 때는 판결문을 낭독할 때 피고인의 출석은 허락되지 않았다.[7] 구속되어 있던 형무소에서 텅빈 법정으로 돌아와 판결을 들은 드레퓌스는 다시 감방으로 돌아온 후 자살을 시도했으나 형무소 책임자의 설득과 아내 루시의 위로로 포기했다.[8] 영화 <빠삐용>의 그 곳이다. 중간에 "드레퓌스 대위의 자리"라는 대사가 나온다.[9] 당시 프랑스 육군의 단추에는 소속 연대 등을 나타내는 숫자나 문양이 들어갔다. 단추를 뗀다는 것은, 더이상 그를 연대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10]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 대위가 다닌 육군대학의 교관 출신으로, 드레퓌스도 피카르에게 교육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11] 성씨를 프랑스식 발음으로 읽으면 발쟁 에스테라지.[12] 소련의 간첩 로버트 핸슨이나 올드리지 에임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원래 방첩 책임자가 간첩이 되는 사례는 생각보다 흔하다.[13] 재미있게도 오늘날의 르 피가로는 우파 신문의 대명사,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일보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진실을 밝히는 데 좌우가 따로 있는 건 아니긴 하지만, 당시 보수 진영의 절대 다수가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입장이었음을 고려하면 꽤나 아이러니한 일화.[14] 편지의 마지막 문장. 프랑스어 원문의 출처는 위키문헌(영어/프랑스어판), 한국어 번역본의 출처는 여기.[15] 혹은, <나는 탄핵한다(J'accuse!)>. 일본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여담이지만, 서한의 제목이 "드레퓌스는 무죄다!"라던가 "프랑스군과 사법당국은 반성하라!"가 아닌 "'''나'''는 고발한다!"라는 점에서 서양의 개인주의를 볼 수 있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16] 당시 에밀 졸라는 공개편지를 들고 주요 대형신문을 찾아다녔으나 모두 거절 당했고, 군소신문인 <로로르>에서 간신히 승낙을 받았다. 모든 언론이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군부와 보수세력에 완전 쫄아 있었던 것. 완전 듣보잡이었던 <로로르>는 에밀 졸라의 편지가 실린 날, 평소보다 10배가량 많은 30만 부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클레망소 본인이 파장을 예상하고 이 정도로 부수를 늘렸음에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17]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그 공개편지의 제목에 관한 것이다. 본디 에밀 졸라가 쓴 공개편지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아주 온건한 것이었다. 그런 것을 <나는 고발한다!>라는 매우 강렬하고 도발적인 제목으로 바꾼 건 <로로르>의 편집장인 조르주 클레망소였다. 클레망소는 이 글이 불러올 어마어마한 파장을 각오하고 좀 더 호소력을 더하기 위해 제목을 바꾼 것이다.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고 하겠다. 이로써 명성을 얻은 클레망소는 나중에 프랑스의 총리를 지냈다.[18] 조르주 벵자맹 클레망소(Georges Benjamin Clemenceau)/1841~1929. 뒷날 총리 겸 육군장관을 맡아 제1차 세계 대전을 지휘했다.[19] 본 항목 맨 위의 신문만평이 당시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20] 그래서 이에 대한 화답으로. 현재 에밀 졸라가 영면 중인 팡테옹의 정면에 '''AUX GRANDS HOMMES LA PATRIE RECONNAISSANTE(조국이 위대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정말로 그의 예언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다.[21] 자살이 아니라 프랑스 육군의 높으신 분들이 사건 은폐를 위해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다. 앙리 중령은 왼손으로 자살했는데 생전의 앙리 중령은 오른손잡이였기 때문.[22] 사족으로 그는 영국의 어떤 출판사에서 많은 돈을 받고 자기 이야기를 책으로 썼는데, 자기는 상부의 명령을 따라 독일의 기밀을 캐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한 이중첩자였다는 내용이었다.[23] 이때 드레퓌스는 5년 동안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24] 재판관 7명 중 단 2명만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인정했다.[25] 유감스럽게도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의 복권을 보지 못한 채 수면 중 난로에서 불완전 연소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26] 드레퓌스는 무죄선고를 받은 뒤 열흘 만에 군대로 돌아왔고,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는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27] 이는 드레퓌스 사건이 없었더라면 그가 중간에 군대를 나가지 않을 것을 감안하여 호봉을 인정해준 매우 파격적인 조치인데, 정작 핵심 피해자 드레퓌스는 지난 10년간의 공백기를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이 사건을 겪고도 프랑스 군부 내에 얼마나 반유대주의가 횡행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28] 다만 폴리냐크 공작은 예외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드레퓌스가 유배된 동안 그 잘난 유대인 비밀결사는 뭘 하고 있었냐고 빈정댔다고 한다. 프루스트는 에밀 졸라를 강력하게 지지하기도 했다.[29] 흔히 독일이나 프랑스 등은 나치를 완벽하게 청산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나라들도 실은 나치 세력이나 부역자 처벌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면이 없지 않았다. 일례로 프랑스의 겨우, 제일 '만만했던' 독일군의 아이를 낳았던 여성들이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고, 레지스탕스들 중에서도 정치적 사유로 부역자로 몰려 사형당한 사람들이 상당했다.[30] 이 때문에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벨디브 추모 행사에 참석했다 유족들에게 거하게 욕을 얻어먹었다.[31] 같은 이름의 성당이 유럽 전역에 많으니 주의할 것. 즉 영국 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프랑스 등 다른 국가들에도 이런 이름의 성당이 많이 있다.[32] 이 대통령은 위에서 언급된 벨디브 사건을 최초로 인정한 대통령이기도 하다.[33] 당시 유대인들은 상업과 금융업 혹은 의사같은 전문직에 종사했는데, 벌어들인 돈을 오직 유대교 공동체 내에서만 소비했다. 이들의 모든 생활이 철저하게 유대교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지니 당연한 상황. 비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돈이 유대교 공동체로 빨려 들어가기만 할뿐, 나오지를 않으니 짜증이 날 수 밖에...[34] 그러나 어찌 보면 더욱 무서운 것이, 드레퓌스 사건은 '''국가'''가 직접 이 광기를 주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으로서는 국가에 대항할 힘이 전혀 없기 때문.[35] 1998년에《나는 고발한다 - 드레퓌스 사건과 에밀 졸라》란 제목으로 재출간[36] 가령 조금만 건들면 불어버릴 테니 프랑스 정부는 필사적으로 보호해야만 했다.[37] 클레이 쇼를 법정에 세우고, 다양한 증거와 논리로 그가 케네디 암살범임을 증명했음에도, 무죄가 선고된다. 당시 관객들이 매우 당황했다고. 물론 음모론일 뿐, 실제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