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란트 재무장
Remilitarization of the Rhineland
독, 라인랜드 재점거 1936년 3월 8일자 동아일보
1936년 3월,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전격적으로 단행된 사건. 한국에서는 라인란트 재점령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엄밀히 말하면 독일은 라인란트를 타국에게 잃은게 아니라 군사를 주둔할 수 없게 된 것이므로 재'''점령'''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Remilitarization of Rhineland" (라인란트 재무장) 이라는 표현을 주로 쓴다.[1]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벨기에와 프랑스는 자국의 안전 보장을 위해,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독일의 라인 강 서쪽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 일부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였으며 이를 베르사유 조약에 명문화시켰다. 뒤이어 1925년 로카르노 조약으로 라인란트 비무장지대화는 다시 한 번 명문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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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라인란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국경은 모두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접하고 있었고, 독일-프랑스 국경의 절반 역시 이 지역과 접하고 있어 프랑스의 국가안보 위협을 크게 경감시켰다.
하지만 독일인들에게 라인란트는 단치히 및 단치히 회랑과 함께 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자 트라우마였다. 그나마 단치히 및 단치히 회랑은 독일 영토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곳이지만, 라인란트는 명백히 독일 영토였고 독일의 주권이 행사되는 지역임에도 군대의 주둔 및 무장은 불허되었다. 이는 1차 대전 때 공격 받은 벨기에와 프랑스에겐 지극히 당연한 조치였으나, 배후중상설이 지배하던 독일에서는 치욕스런 일이었다.
1935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했지만 비무장지대는 그대로 뒀는데, 여기의 재무장은 로카르노 조약까지 파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벨기에와 프랑스가 이를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연합국의 공동 대응 전선인 스트레사 체제가 무너지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하자 히틀러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라인란트에 독일 국방군을 주둔시키더라도 연합국은 1935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끝내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할 것이라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1936년 2월, 히틀러는 외교부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군부에 라인란트 재무장의 뜻을 밝혔다. 군부는 국방장관이며 군부의 1인자인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Werner von Blomberg) 원수를 중심으로 한 세력만 찬성하고 나머지는 결사반대하였는데, '''우리도 라인란트 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프랑스가 쳐들어오는데 절대 못 막는다'''가 핵심 반대 논조였다. 군부에게도 라인란트 재무장은 숙원 중의 숙원이었으나 최소한 이들은 현실적인 감각은 충분했다. 외교부에서도 군부 만큼은 아니지만 반대 기류가 강했는데, 베르사유 조약 파기로 분위기가 형성되어 몇 년 지나면 외교적으로 기회가 올 수 있는 상황에서 괜히 서두르다간 역풍만 맞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반대에도 히틀러는 '''프랑스는 겁이 많고 나약해서 절대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밀어붙였다. 결국 군부는 타협하여 최소한의 병력만을 보내고, 만약 프랑스가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면 즉각 철수하고 화해 신호를 보내기로 하였다.
한편, 독일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시도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히틀러는 이미 1935년 영국 및 프랑스 외교관들과의 접견에서 '''아, 님들 내가 실수했음. 베르사유 조약 파기하면서 라인란트도 같이 원래대로 돌렸어야 했는데 까비까비'''하면서 떠 보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영-프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을 해결하는 것을 우선하고 있었기에, 히틀러의 예상대로 라인란트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영국에서는 1936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이후인 10월 즈음에 독일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그들은 독일이 외교를 통해 라인란트를 재무장할 것이라 여겼지 군사적인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군대를 라인란트로 진입'''시켰다. 히틀러와 군부의 타협대로 투입한 병력은 독일군 22,000명, 지역 경찰 14,000명이었다. 그 중 3천여 명만이 라인 강을 건너고, 나머지 2만 7천여 명은 라인 강 동쪽의 비무장지대에 머물렀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대응할 경우 즉각 비무장지대를 벗어나기로 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라인란트 진입을 강행한 것은 바로 이탈리아 왕국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는 1935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1차 대전 승전국의 공조체제에 따르고 있었으나,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에 대한 영프이 3국 공동대응체제인 스트레사 체제는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무너졌다. 이에 이탈리아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영국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패전국인 독일의 재군비마저 허용되는데 '''승전국인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는 용납하겠지?'''란 생각으로 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라인란트 문제에 공동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이 성공리에 끝나가자, 이후 이탈리아가 다시 대독 공동대응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침략이 채 마무리되기 직전인 36년 3월 초에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진주를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의 예상대로 이탈리아와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조져버리는데에 정신이 팔렸고, 침략 과정에서 프랑스와는 영국한테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데다가 영국은 상술했던 조약 때문에 라인란트 문제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예상을 벗어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영국'''이었다. 히틀러는 영독 해군협정 체결 등으로 영국이 '''독일의 정당한 권리 회복'''에 간섭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영국은 독일 강경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영국의 문제는 실제 전쟁수행을 위한 '''지상군 병력이 형편없이 적다'''는데 있었다. 결국 대 독일 전쟁 수행을 위해선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을 받게 되는 프랑스와 벨기에, 특히 대규모 지상군을 갖춘 프랑스가 동조해야 했다. 또한 그당시 영국은 지중해 에서의 패권을 가지고 이탈리아와 다투고 있었으며 지중해의 해군을 독일로 보내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애당초 독일로 군대를 보낼 물자도 부족했으며 보내도 최소한 2달은 소요될 것으로 예측했다.
벨기에는 1차 대전 이후 오랜 중립 정책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맺어 대독전선에서 공동대응을 하고 있었기에 이제 모든 것은 프랑스에 달려 있었다.
독일에 대한 대비 때문에 거금을 들여 국경지대에 마지노선까지 구축한 프랑스가 독일군이 국경 너머에 나타나는 일을 반가워할 리 없었다. 그러나 군 수뇌부에서는 절망적인 보고를 했다. 총참모장 모리스 가믈랭 장군은 수뇌부의 의견을 종합하여 '''세계 대공황 이후 국방예산 삭감으로 프랑스군은 크게 약화된 반면, 독일군은 질적으로 숫적으로 크게 증강되어 우리보다 우세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때문에 프랑스군 수뇌부는 대독 공동대응에 나서는 기존 연합국 및 군사동맹국 간의 공동작전을 생각했다. 그러나 '''벨기에를 제외하면 믿을 놈이 하나도 없었다'''. 이탈리아는 상술했듯 라인란트 문제에 관심이 없었고, 독일의 동쪽에서 양면전쟁을 강요할 프랑스의 또 다른 군사동맹국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라인란트? 먹는 건가?'''인데다[2] , 프랑스가 라인란트로 진공하는 것은 '''독일이 먼저 침략하는 것이 아닌 독일 영토에 대한 프랑스의 침략'''이라며 대독 군사행동에 동참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강력한 대응을 천명한 영국은 '''이미 작년에 프랑스를 배신한 전례'''가 있는데다, '''애초에 지상군도 얼마 없는 놈들'''이었다.
그래도 프랑스 정부는 안보위협 문제를 간과하지 않고 군부에 어떻게든 대응방안을 모색해 보라고 했으나, 군 첩보부가 라인란트에 투입된 독일군 병력을 '''30만 이상'''으로 오판하는 바람에 의지를 상실했다. 사실 어떻게든 군사행동에 나설 수는 있었겠지만, 이기더라도 1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병력 피해가 우려되었다. 이는 '''곧 있을 프랑스 총선거'''에서 집권 내각에 커다란 악재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프랑스는 대독 강경대응을 포기'''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하고 말았다. 혼자 목소리 높이던 영국은 메인 탱커 프랑스가 빠지자 같이 침묵했다.
전 독일, 나치와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조차도 '''퓌러'''를 연발하며 히틀러를 찬양했다. 라인란트 재무장은 히틀러 최대의 업적으로 소개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지난 패전의 울분을 상당부분 떨쳐낼 수 있었다. 당시 망명 중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국내 지하 조직마저 '''독재자에 대한 국민들의 열광적 지지는 진짜'''라며 한탄했다.
이러한 열광적 지지와 히틀러의 주장대로 프랑스가 대응을 포기했다는 점 때문에, 히틀러 독재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군사적, 외교적 이유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반대했던 관료 및 군부는 '''총통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라인란트 재무장에 가장 두려움에 떨었던 국가는 벨기에였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순망치한의 관계라는 건 제1차 세계 대전 때 이미 증명됐다. 벨기에는 다시 한 번 독일의 군홧발에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은 프랑스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와 방위조약을 맺었던 건데 문제는 이 프랑스가 라인란트 재무장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대독일 포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는 벨기에였다. 영국은 바다 건너에 있고, 이탈리아는 제법 군사력도 갖추고 있는데다 앞에 알프스 산맥이 있었다. 폴란드의 경우 벨기에를 능가하는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중부유럽에서 독일군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3] 그렇다면 프랑스는? 여차하면 마지노선에 들어가 방어전에 들어가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군이 라인란트에 진주한 것이다. 당시 벨기에는 프랑스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경악했다. 이제 벨기에는 독일 앞에 발가벗겨졌다. 이들이 느꼈을 배신감이 어떠했을까? 실제로 벨기에 안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팽배해 있었다. 최후의 순간 전쟁이 일어난다면 벨기에는 제일 먼저 희생될 것이다. 프랑스의 지원 없이는 벨기에는 국가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을 게 뻔했다. 프랑스에게는 마지노선이란 믿을 구석이 있었지만 벨기에는 믿을 구석이 없었다.[4] 이제 대독포위망 중 제대로 작동하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벨기에는 결국 '''저런 못 믿을 놈들과 동맹하느니 차라리 중립정책으로의 회귀가 더 안전하겠다'''는 '''치명적인 오판'''을 내려 프랑스와의 군사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선언한다.
여러모로 사건 이전 및 이후의 전개가 마오쩌둥의 6.25 전쟁 참전 결정과 닮아 있다. 마오쩌둥과 히틀러 둘 다 주위 사람들이 극구 말린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의외로 큰 성공[5] 을 거두어 그 둘의 권위 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더욱 높아진 권위와 폭주가 더해진 결과는 뭐 다들 아시다시피...
독, 라인랜드 재점거 1936년 3월 8일자 동아일보
1. 개요
1936년 3월,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전격적으로 단행된 사건. 한국에서는 라인란트 재점령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엄밀히 말하면 독일은 라인란트를 타국에게 잃은게 아니라 군사를 주둔할 수 없게 된 것이므로 재'''점령'''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Remilitarization of Rhineland" (라인란트 재무장) 이라는 표현을 주로 쓴다.[1]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벨기에와 프랑스는 자국의 안전 보장을 위해,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독일의 라인 강 서쪽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 일부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였으며 이를 베르사유 조약에 명문화시켰다. 뒤이어 1925년 로카르노 조약으로 라인란트 비무장지대화는 다시 한 번 명문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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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라인란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국경은 모두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접하고 있었고, 독일-프랑스 국경의 절반 역시 이 지역과 접하고 있어 프랑스의 국가안보 위협을 크게 경감시켰다.
하지만 독일인들에게 라인란트는 단치히 및 단치히 회랑과 함께 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자 트라우마였다. 그나마 단치히 및 단치히 회랑은 독일 영토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곳이지만, 라인란트는 명백히 독일 영토였고 독일의 주권이 행사되는 지역임에도 군대의 주둔 및 무장은 불허되었다. 이는 1차 대전 때 공격 받은 벨기에와 프랑스에겐 지극히 당연한 조치였으나, 배후중상설이 지배하던 독일에서는 치욕스런 일이었다.
1935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했지만 비무장지대는 그대로 뒀는데, 여기의 재무장은 로카르노 조약까지 파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벨기에와 프랑스가 이를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연합국의 공동 대응 전선인 스트레사 체제가 무너지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하자 히틀러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라인란트에 독일 국방군을 주둔시키더라도 연합국은 1935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끝내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할 것이라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3. 독일의 행동
1936년 2월, 히틀러는 외교부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군부에 라인란트 재무장의 뜻을 밝혔다. 군부는 국방장관이며 군부의 1인자인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Werner von Blomberg) 원수를 중심으로 한 세력만 찬성하고 나머지는 결사반대하였는데, '''우리도 라인란트 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프랑스가 쳐들어오는데 절대 못 막는다'''가 핵심 반대 논조였다. 군부에게도 라인란트 재무장은 숙원 중의 숙원이었으나 최소한 이들은 현실적인 감각은 충분했다. 외교부에서도 군부 만큼은 아니지만 반대 기류가 강했는데, 베르사유 조약 파기로 분위기가 형성되어 몇 년 지나면 외교적으로 기회가 올 수 있는 상황에서 괜히 서두르다간 역풍만 맞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반대에도 히틀러는 '''프랑스는 겁이 많고 나약해서 절대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밀어붙였다. 결국 군부는 타협하여 최소한의 병력만을 보내고, 만약 프랑스가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면 즉각 철수하고 화해 신호를 보내기로 하였다.
한편, 독일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시도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히틀러는 이미 1935년 영국 및 프랑스 외교관들과의 접견에서 '''아, 님들 내가 실수했음. 베르사유 조약 파기하면서 라인란트도 같이 원래대로 돌렸어야 했는데 까비까비'''하면서 떠 보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영-프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을 해결하는 것을 우선하고 있었기에, 히틀러의 예상대로 라인란트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영국에서는 1936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이후인 10월 즈음에 독일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그들은 독일이 외교를 통해 라인란트를 재무장할 것이라 여겼지 군사적인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군대를 라인란트로 진입'''시켰다. 히틀러와 군부의 타협대로 투입한 병력은 독일군 22,000명, 지역 경찰 14,000명이었다. 그 중 3천여 명만이 라인 강을 건너고, 나머지 2만 7천여 명은 라인 강 동쪽의 비무장지대에 머물렀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대응할 경우 즉각 비무장지대를 벗어나기로 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라인란트 진입을 강행한 것은 바로 이탈리아 왕국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는 1935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1차 대전 승전국의 공조체제에 따르고 있었으나,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에 대한 영프이 3국 공동대응체제인 스트레사 체제는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무너졌다. 이에 이탈리아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영국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패전국인 독일의 재군비마저 허용되는데 '''승전국인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는 용납하겠지?'''란 생각으로 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라인란트 문제에 공동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이 성공리에 끝나가자, 이후 이탈리아가 다시 대독 공동대응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침략이 채 마무리되기 직전인 36년 3월 초에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진주를 시작한 것이다.
4. 주변국의 대응
히틀러의 예상대로 이탈리아와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조져버리는데에 정신이 팔렸고, 침략 과정에서 프랑스와는 영국한테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데다가 영국은 상술했던 조약 때문에 라인란트 문제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예상을 벗어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영국'''이었다. 히틀러는 영독 해군협정 체결 등으로 영국이 '''독일의 정당한 권리 회복'''에 간섭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영국은 독일 강경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영국의 문제는 실제 전쟁수행을 위한 '''지상군 병력이 형편없이 적다'''는데 있었다. 결국 대 독일 전쟁 수행을 위해선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을 받게 되는 프랑스와 벨기에, 특히 대규모 지상군을 갖춘 프랑스가 동조해야 했다. 또한 그당시 영국은 지중해 에서의 패권을 가지고 이탈리아와 다투고 있었으며 지중해의 해군을 독일로 보내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애당초 독일로 군대를 보낼 물자도 부족했으며 보내도 최소한 2달은 소요될 것으로 예측했다.
벨기에는 1차 대전 이후 오랜 중립 정책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맺어 대독전선에서 공동대응을 하고 있었기에 이제 모든 것은 프랑스에 달려 있었다.
독일에 대한 대비 때문에 거금을 들여 국경지대에 마지노선까지 구축한 프랑스가 독일군이 국경 너머에 나타나는 일을 반가워할 리 없었다. 그러나 군 수뇌부에서는 절망적인 보고를 했다. 총참모장 모리스 가믈랭 장군은 수뇌부의 의견을 종합하여 '''세계 대공황 이후 국방예산 삭감으로 프랑스군은 크게 약화된 반면, 독일군은 질적으로 숫적으로 크게 증강되어 우리보다 우세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때문에 프랑스군 수뇌부는 대독 공동대응에 나서는 기존 연합국 및 군사동맹국 간의 공동작전을 생각했다. 그러나 '''벨기에를 제외하면 믿을 놈이 하나도 없었다'''. 이탈리아는 상술했듯 라인란트 문제에 관심이 없었고, 독일의 동쪽에서 양면전쟁을 강요할 프랑스의 또 다른 군사동맹국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라인란트? 먹는 건가?'''인데다[2] , 프랑스가 라인란트로 진공하는 것은 '''독일이 먼저 침략하는 것이 아닌 독일 영토에 대한 프랑스의 침략'''이라며 대독 군사행동에 동참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강력한 대응을 천명한 영국은 '''이미 작년에 프랑스를 배신한 전례'''가 있는데다, '''애초에 지상군도 얼마 없는 놈들'''이었다.
그래도 프랑스 정부는 안보위협 문제를 간과하지 않고 군부에 어떻게든 대응방안을 모색해 보라고 했으나, 군 첩보부가 라인란트에 투입된 독일군 병력을 '''30만 이상'''으로 오판하는 바람에 의지를 상실했다. 사실 어떻게든 군사행동에 나설 수는 있었겠지만, 이기더라도 1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병력 피해가 우려되었다. 이는 '''곧 있을 프랑스 총선거'''에서 집권 내각에 커다란 악재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프랑스는 대독 강경대응을 포기'''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하고 말았다. 혼자 목소리 높이던 영국은 메인 탱커 프랑스가 빠지자 같이 침묵했다.
5. 결과
전 독일, 나치와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조차도 '''퓌러'''를 연발하며 히틀러를 찬양했다. 라인란트 재무장은 히틀러 최대의 업적으로 소개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지난 패전의 울분을 상당부분 떨쳐낼 수 있었다. 당시 망명 중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국내 지하 조직마저 '''독재자에 대한 국민들의 열광적 지지는 진짜'''라며 한탄했다.
이러한 열광적 지지와 히틀러의 주장대로 프랑스가 대응을 포기했다는 점 때문에, 히틀러 독재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군사적, 외교적 이유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반대했던 관료 및 군부는 '''총통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라인란트 재무장에 가장 두려움에 떨었던 국가는 벨기에였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순망치한의 관계라는 건 제1차 세계 대전 때 이미 증명됐다. 벨기에는 다시 한 번 독일의 군홧발에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은 프랑스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와 방위조약을 맺었던 건데 문제는 이 프랑스가 라인란트 재무장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대독일 포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는 벨기에였다. 영국은 바다 건너에 있고, 이탈리아는 제법 군사력도 갖추고 있는데다 앞에 알프스 산맥이 있었다. 폴란드의 경우 벨기에를 능가하는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중부유럽에서 독일군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3] 그렇다면 프랑스는? 여차하면 마지노선에 들어가 방어전에 들어가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군이 라인란트에 진주한 것이다. 당시 벨기에는 프랑스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경악했다. 이제 벨기에는 독일 앞에 발가벗겨졌다. 이들이 느꼈을 배신감이 어떠했을까? 실제로 벨기에 안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팽배해 있었다. 최후의 순간 전쟁이 일어난다면 벨기에는 제일 먼저 희생될 것이다. 프랑스의 지원 없이는 벨기에는 국가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을 게 뻔했다. 프랑스에게는 마지노선이란 믿을 구석이 있었지만 벨기에는 믿을 구석이 없었다.[4] 이제 대독포위망 중 제대로 작동하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벨기에는 결국 '''저런 못 믿을 놈들과 동맹하느니 차라리 중립정책으로의 회귀가 더 안전하겠다'''는 '''치명적인 오판'''을 내려 프랑스와의 군사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선언한다.
6. 기타
여러모로 사건 이전 및 이후의 전개가 마오쩌둥의 6.25 전쟁 참전 결정과 닮아 있다. 마오쩌둥과 히틀러 둘 다 주위 사람들이 극구 말린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의외로 큰 성공[5] 을 거두어 그 둘의 권위 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더욱 높아진 권위와 폭주가 더해진 결과는 뭐 다들 아시다시피...
[1] "라인란트 진주"라고 부르기도 한다[2] 폴란드는 원래 프랑스와 함께 독일을 쌈싸먹으려고 했다. 당시 폴란드 지도자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히틀러가 집권할 때부터 '''이미 히틀러 정권의 싹수가 노란 걸 알아보고''' 프랑스에 대독 공격을 제안했지만, 프랑스에서 상큼하게 씹자 그냥 히틀러의 독일을 '''용인'''했다. 이후 서로 불가침조약 맺고 서로 좋게 지내다가 그가 1935년에 죽은 지 4년 만에 폴란드 침공을 당했다.[3] 폴란드군 육군과 체코슬로바키아 육군의 병력수는 비슷했으나, 질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압도했고, 공군력 역시 그러했다. 또한 전차를 비롯한 각종 총기류 생산대국으로 분류됐던 체코슬로바키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성비 대비 최고의 구축전차로 분류되는 '헤처'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군의 38(t) 전차를 모태로 만든 것이었다.[4] 심지어 프랑스는 마지노 선을 벨기에-독일 국경뿐만 아니라 벨기에-프랑스 국경에 이어 지으려다가 벨기에의 반발에 취소한 적도 있었다.[5] 중국이 6.25 전쟁에서 상당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결국 '순망치한'의 고사에 따라 북한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 공산 진영 내에서의 발언권을 크게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