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르 왕조

 





'''이란 숭고국'''
'''دولت علیّه ایران'''
''Dowlat-e Elliye-ye Irā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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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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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년 ~ 1925년
표어
Salamati-ye Shah
(임금의 평안을 위하여)
국가
황실 찬양가
위치
서아시아
수도
테헤란
정치체제
전제군주제→입헌군주제
국가원수
샤한샤
주요 황제
아가 모함마드 샤
(1789~1797)
파드 알리 샤
(1797~1834)
언어
페르시아어, 아제르바이잔어
종교
시아파
민족
페르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주요사건
1794년 건국
1796년 테헤란 천도
1892년 담배 폭동
1906년 입헌혁명→헌법제정
1925년 왕조 교체
통화
토만
성립 이전
잔드 왕조
멸망 이후
팔라비 왕조
러시아 제국
1. 개요
2. 역사
2.1. 건국 이전
2.2. 아가 모하마드 칸
2.3. 초창기
2.4. 중기
2.4.1. 러시아 제국에게 영토 상실
2.4.2. 영국에 의한 이권 침탈
2.4.3. 바비교 반란
2.5. 후기
3. 역대 황제
4. 미녀?
5. 여담

언어별 명칭
페르시아어
دولت علیّه ایران
(''Dowlat-e Elliye-ye Irān'')
아제르바이잔어
Məmalik-i Məhrusə-yi İran
영어
Sublime State of Persia
러시아어
Пе́рсия (''Pérsija'')

1. 개요


1794년~1925년 사이에 페르시아에 존속한 아제르바이잔 튀르크계 이란 왕조.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팔라비 왕조가 토착 이란계 왕조이므로, 이란 최후의 튀르크계 왕조이기도 하다.
궁정 언어도 페르시아어가 아니라 아제르바이잔어였다고 한다.
19세기 페르시아는 한때 라이벌이었던 오스만 제국와 함께 비록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는 되지 않았지만 심심하면 얻어 터지는 샌드백으로 전락했다.
카자르 왕조가 페르시아를 다스리던 시대는 전통적인 중앙아시아 내륙 무역이 급속히 붕괴되던 시점[1]이었으며, 동시에 수천년간 농사를 지어온 많은 농토들이 염화와 사막화로 버려지면서 경제적으로 오히려 퇴보하던 시점이었다. 한 술 더 떠서 페르시아인들은 중동 내에서도 유별난 골초라고 놀림받을 정도로 니코틴 중독이 심했는데들, '''지력을 많이 소모하는 담배 농사를 열심히 지은 나머지 농업 생산성도 가파르게 감소하고 담배마저 영국으로부터 비싼 값에 수입해야 했다.''' 당시 서민층은 수입의 3분의 1을 가장의 담배를 구입하는데 썼다...
이란 농민들은 오히려 중세시대보다도 더 가난해졌지만, 카자르 왕족들은 일반인들의 생활 수준 따위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고 해상 무역이나 광산 채굴권을 영국, 프랑스인, 네덜란드인들에게 헐값에 팔아 받은 돈으로 흥청망청 악기나 술 같은 사치품들을 수입하기 바빴다. 여러모로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파탄 국가들을 연상시키는 왕조이지만, 서유럽 입장에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따로 없었다. 본의아니게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왕조이기도 한데, 1900년대 초반에 영국인 사업가에 의해 발견되어 '''영국이 카자르 왕조에서 거의 공짜로 뽑아쓴 석유가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1차 대전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이다.[2]

2. 역사



2.1. 건국 이전


카자르 일족은 몽골 침략 이후 카스피 해 남안에 정착한 튀르크 아제리계 부족으로, 사파비 왕조 건국에 공헌했던 키질바시 가문 중 하나였다.

2.2. 아가 모하마드 칸


1747년, 아프샤르 왕조의 아딜 샤에게 아버지의 세력이 패배해 포로로 잡혔을 때,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거세당해 어린 나이에 고자가 되었다. 이후 아프샤르 왕조가 완전히 무너지고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나가던 아버지는 결국 잔드 왕조와 맞붙어 패배, 사망하고 아가 모하마드는 카림 칸의 궁정에 끌려와 그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정치적 조언자로 일하게 된다.
그렇게 카림 칸에게 인정받아 출세를 거듭한 아가 모하마드는 마침내 잔드 왕조에 반역, 잔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전역을 장악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1794년 잔드 왕조의 마지막 왕 로트프 알리 칸을 고문하고 죽였다.
페르시아를 장악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1794년 사파비 왕조의 멸망 이후 반독립적인 칸국들이 들어서며 떨어져 나갔던 캅카스 일대를 다시 평정했고 1796년 아프샤르 왕조마저 멸망시키며 그 패권을 더욱 공고히 했으나 1797년 캅카스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암살당했고 왕위는 그 조카가 이어받는다.

2.3. 초창기


초창기에는 위 지도와 같이 크고 아름다운 판도를 차지하였다. 테헤란이 처음 페르시아/이란의 수도가 된 것도 이 때다.
그러나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층들은 대항해 시대 해상무역에 대해 전혀 이해를 못했으며, 유럽 국가에서 뇌물만 조금 찔러주면 항구 이용권 자원 채굴권 등을 공짜나 다름없이 퍼주었다. 이 와중에 페르시아인 농부들은 점점 사막화되는 땅에 담배나 경작하며 지력이나 소모시키는 등, 마치 오늘날의 예멘[3]이나 석유 판매 이권이 극소수 부패 지도층들의 뇌물 및 서구 다국적기업의 이윤으로 분배되는 나이지리아같은 막장 국가로 치달았다. 카자르 왕조의 역사는 영토 상실과 이권 침탈의 과정으로 점철되었다.

2.4. 중기



2.4.1. 러시아 제국에게 영토 상실


1813년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캅카스다게스탄조지아 동부 뿐만 아니라 근거지인 아제르바이잔까지 넘겨주었으며, 1828년에 러시아 제국한테 또 패해서 아르메니아아르차흐, 1881년 페르시아령 투르키스탄(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남부)까지 할양하였다. 카자르 왕조가 러시아에 패배해서 변경된 국경선은 오늘날 카프카스와 서투르키스탄과 이란의 국경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2.4.2. 영국에 의한 이권 침탈


대영제국에게는 사파비 왕조 때 아프가니스탄을 회복하려 헤라트를 점령하려는 시도가 저지되고 19세기 중엽 발루치스탄 땅을 빼앗겼다. 한 술 더 떠서 영국에서는 카자르 왕조가 소유하고 있는 해상 무역 요충지들을 뇌물만 조금 바치고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이용했으며 페르시아 현지인들은 전혀 이득을 얻지 못하고 철저히 배제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카자르 왕조 구성원들이 뇌물로 선물 몇 개 받고나서 영국 BP plc에 석유를 무상으로 60년 채굴할 권리를 팔아먹는 등 막장 외교와 정치를 일삼았다. 그런데 상술했듯 왕족이 현명해서 석유 관련 외교만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갔다면 세계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페르시아를 놓고 서로 각축을 벌이는 통에 어느 한 나라에 완전히 종속되는 식민지 신세는 피할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산업혁명을 달성한 유럽 열강의 경제적 침탈과 무능한 군주들의 시너지 효과 + 사막화 + 민간 경제 뿌리를 뽑는 대중적인 담배 중독으로 카자르 왕조 치하의 페르시아는 사실상 파탄 국가가 되었다.

2.4.3. 바비교 반란


19세기 중반 이란의 카자르 왕조가 영국과 러시아의 반 식민지 상태가 되어 개혁을 진행하는 상태에서,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소유하던 토지 기득권이 해체되고 샤리아 율법 대신에 서구식 법이 채택되자,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를 중심으로 한 보수 율법학자들이 대대적으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자신이 시아파의 12번째 이맘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자신 스스로가 12번째 이맘이자 예수와 부처, 조로아스터와 후세인 이븐 알리의 환생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쿠란을 잇는 새로운 경전 "파르시 바얀"이 자신에게 계시되었으며, 최후의 심판의 날이 시작되었다고 천명했다. 처음에 봉기에 합류했던 다른 보수파 율법학자들마저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의 개인 우상화를 우려하며 봉기에서 이탈하자 반란은 수만여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진압되었으며 알리 무함마드는 1850년 처형당했다.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가 체포되어 처형당하자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아잘리파의 경우 카자르 왕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다가 1905년 혁명에 동참하였으며, 두 번째 집단은 샤바크교에 영향을 받았던 수피 지도자였던 바하올라를 추종하면서 바하이교가 시작되었다.[4]

2.5. 후기


수입 담뱃값 인상에 분노한(...) 민중의 저항으로 유럽인들에게 내줬던 몇몇 특혜가 취소되는가 했더니[5] 얼마 안 가서 왕족들이 '''페르시아 국토 대부분에서 60년동안 무상으로 석유를 채굴할 권리'''를 영국에 헐값에 판 뒤 그 돈마저 술 마시고 놀면서 금새 탕진해버렸다(...). 1906년 입헌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제가 자리잡기도 했다만 이미 나라는 앵글로 페르시안 오일 컴퍼니사의 식민지가 되어버리다시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왕조와 고위층의 사고 방식은 중세 유목 제국 체계에만 머물러있었으며, 이러한 지도층 사고 방식의 한계로 인해 카자르 왕조는 왕족에게 뇌물만 조금 찔러주면 아낌없이 자원 채굴권을 내주고 항구도시도 마음대로 점령해쓰는 막장 국가로 전락했다. 입헌주의를 타도하려는 러시아 및 열강의 획책과 제1차 세계 대전 등으로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1차 대전 중에는 중립국 이란 영토 내에서 오스만군과 러시아-영국 연합군이 교전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세력이 철수하자 영국은 이란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결국 1921년 레자 칸쿠데타로 인해 어린 왕 아흐마드 샤 카자르는 신병치료라는 명목으로 1923년 유럽으로 떠났고, 결국 1925년 10월 31일 폐위됨으로써 카자르 왕조 시대는 막을 내리고 팔라비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 이후 역사는 팔라비 왕조 항목으로.

3. 역대 황제


  • 아가 모함마드 샤(1742-1797, 재위: 1794-1797)
  • 파드 알리 샤(1772-1834, 재위: 1797-1834)
  • 모함마드 샤(1808-1848, 재위: 1834-1848)
  • 나세르 알 딘 샤(1831-1896, 재위: 1848-1896)
  • 무자파르 알딘 샤(1853-1907, 재위: 1896-1907)
  • 모함마드 알리 샤(1872-1925, 재위: 1907-1909)
  • 아함마드 샤(1898-1930, 재위: 1909-1925)

4. 미녀?


카자르 왕조가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왕조이다 보니 후궁이나 공주들 사진이 많이 남아있는데, 후궁들이 콧수염이 많이 나 있는 상태에서 면도도 안 하고 찍은 사진이라던지, 고도비만 상태의 공주가 미니스커트를 입어 무다리가 훤히 드러나보이는 상태로 찍은 사진 등이 많다. 이런 사진들은 중동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 중 그로테스크한 것을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종종 이란을 싫어하는 외국인들이 이란인들을 놀리고 약올리는 용도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카자르 왕조 최고의 미인이라던가, 13명의 남자가 청혼했다가 거절당했고 자살당한 사람이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근거없는 것이라고 한다.참고.
특히 나세르 알 딘 샤 (Naser aI-Din, 1831~1896)의 11남 10녀 중 8번째 딸 타지(Tadj, 1883~1936)의 사진이 어마어마한 인기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권운동에 적극 나서고 작가로도 이름이 있던 인물이다. 시인인 아리프 카즈딘이 찬양시를 쓴 것도 그런 맥락.

5. 여담


사실상 신분제 국가였으며 12 이맘파 율법학자와 지주들이 소작농이나 일용직 노동자, 소상인들에게 대출을 해줄 때 연이율을 30~75%을 받는 방식으로 신분 이동을 차단시켰다. 이슬람에서 고리대를 강력 금지하는데 어떻게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직접 고리대를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명목상으로는 이자가 아니라 빚을 빌린 벌금(...), 빨리 갚지 못한 벌금 등 갖가지 핑계를 대며 합법화시켰다...
오늘날 이란 교과서에서는 물론 쉬아파 율법학자들은 고리대금업을 한 적이 없고 야만스런 투르크계와 외국인들이 유대인들과 손을 잡고 고리대금업을 해서 농민들이 고통받았다고 써놓았다.

[1] 무굴 제국에 말을 수출하며 번영하던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무굴 제국의 말 수요가 감소하자 말 그대로 거지가 되었다. 이 상태에서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쳐들어가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중앙아시아 무역의 이득은 전부 러시아 제국이 차지가 된다.[2] 1차 대전 당시 영국에서는 따로 유전지대를 갖춘 식민지도 없었을 뿐더러, 미국에서 수입하는 석유는 가격도 비싼데다가 그마저도 독일군의 잠수함 작전 때문에 충분한 양을 공급받기 힘들었다고 한다.[3] 카자르 왕조 시절 페르시아인들은 소득의 3분의 1을 담배 구입에 썼다. 오늘날 예멘에서 까트 중독으로 나라 망하는 거랑 비슷한 수준.[4] 아잘리파가 결국에는 급진적인 해석을 포기하고 다시 12이맘파로 합류한 것과 다르게, 바하이교도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이슬람의 분파가 아닌 별개의 종교라고 창립 초기부터 주장했기 때문에 이슬람과는 아예 다른 종교로 분류되고 있다. 바하이교 신도들은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를 바압이라고 부르며, 그가 예수와 후세인의 환생이라 주장한 적이 없고 대신 에녹요한을 계승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5] 대표적으로 예로는 영국이 가지고 있던 담배 전매권을 다시 얻어내었다. 하지만 영국은 이에 대한 위약금을 요구했고 위약금을 일시불로 낼 수 없었던 카자르 왕조는 여러 번에 나눠서 이자와 함께 원금을 지불해야 했고 이는 페르시아 경제가 영국에 더욱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