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싱턴-콩코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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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미국 민병대
4. 전투 경과
5. 결과
6. 여담


1. 개요


전세계에 울려퍼진 한 발의 총성(The shot heard round the world)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콩코드 찬가(Concord Hymn) 中[1]

[2]

1775년 4월 19일, 영국군과 미국 민병대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Massachusetts Bay Colony) 보스턴 근교 미들섹스(Middlesex)의 렉싱턴콩코드에서 맞붙은 전투. 미국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전투이다.

2. 배경


7년 전쟁 이후 막대한 빚에 시달린 영국 정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1764년부터 13개 미국 식민지에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설탕조례, 인지조례, 홍차조례 등 일련의 법안을 제정했다. 이에 식민지 주민들은 "대표 없는 세금은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저항했다. 특히 1770년 보스턴 학살 사건과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진 보스턴은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지였다. 이에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보스턴에 주둔한 영국군을 증강시켰고, 1774년 6월 보스턴 항구 폐쇄를 지시했으며, 보스턴이 속한 매사추세츠 식민주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그러자 영국의 조치에 분노한 메사추세츠 주민들은 영국에 맞서기 위해 보스턴 인근 지역에 민병대를 결성했다.
1775년 4월 14일, 보스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지휘관 토머스 게이지 장군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다트머스 백작 윌리엄 레지로부터 반란군의 무장 해제 및 반란 주모자들을 투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게이지는 4월 18일 아침 미첼 소령이 이끄는 20여 명의 기마 순찰대를 파견했다. 이 순찰대는 명목상으로는 메사추세츠 주의 치안을 관리하는 목적으로 파견되었지만, 과거 보스턴에서 파견된 순찰대와는 달리 해가 진 후 외출하지 않고 주민들에게 새뮤얼 애덤스존 핸콕의 위치를 물었다. 주민들은 이런 순찰대의 행동에 크게 놀랐고 영국군이 자신들을 해치려 올 거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이에 렉싱턴 민병대는 4월 18일 저녁 일찍 집결해 영국군에 맞설 태세를 갖췄다.
4월 18일 오후, 토머스 게이지 장군은 프랜시스 스미스 중령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다.

보스턴에서 최대한 은밀하게 콩코드로 가서 모든 무기창고를 제압하고 파괴하시오. (중략) 그러나 군사들이 주민들을 약탈하거나 사유재산을 빼앗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이때 게이지는 반란군 지도자들을 체포하라는 서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이는 그렇게 할 경우 폭동이 일어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스미스 중령은 명령을 받들어 700명의 영국군을 이끌고 어둠을 틈타 콩코드로 이동했다. 이때 독립파에 속했던 보스턴 시민 폴 리비어와 윌리엄 도스는 보스턴에서 탈출하여 콩코드로 말을 몰고 달려가면서 여러 마을을 지나며 "정규군이 온다!"고 외쳤다.[3] 이에 렉싱턴에 모인 민병대가 영국군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미국 독립 전쟁 최초의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지휘관: 프랜시스 스미스 중령
  • 병력: 보스턴에서 처음 출발한 700명 + 지원병 800명

3.2. 미국 민병대


  • 지휘관: 존 파커, 제임스 바렛, 존 버트릭, 존 로빈슨, 윌리엄 히스 등
  • 병력: 렉싱턴 민병대 77명 + 콩코드 민병대 400명 + 지원병 수천 명

4. 전투 경과


1775년 4월 19일, 스미스 중령은 핏케언 소령 휘하의 경보병 부대를 파견해 콩코드의 다리를 확보하게 했다. 핏케언 소령은 명령을 받들어 진군하다가 렉싱턴에서 민병대 77명과 마주쳤다. 양측은 곧 총격전을 벌였고 민병대가 18명의 시신을 남겨둔 채 패주했다. 이후 콩코드 마을 인근에 도착한 스미스 중령은 병력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병력을 나눴다. 10연대 소속 척탄병 부대는 문디 폴 대위의 지휘하에 사우스 브릿지를 장악하는 임무를 맡았고, 파슨스 대위 휘하의 제7 경보병 부대 100명은 노스 브릿지 확보에 투입되었다. 또한 4연대와 10연대 소속 2개 부대는 퇴로를 지켰고, 1개 부대는 교량을 지켰다.
얼마후, 핏케언 소령 휘하의 경보병 부대는 콩코드 마을에 진입하여 무기를 수색하여 24파운드 짜리 대포 3문을 파괴하고 총탄 몇 발을 불태웠으며, 밀가루 100배럴과 소금에 절인 음식들을 파괴했다. 반면 판슨스 대위 휘하의 부대는 무기고로 사용되었던 바렛 농장에 진입했지만 이렇다할 물자를 찾지 못했고, 얼마 후 민병대 3개 중대가 총격을 가해오자 급히 물러섰다. 이에 스미스 중령은 더이상 작전을 이어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보스턴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영국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각지에서 민병대 수천 명이 몰려와 퇴각하는 영국군을 수차례 습격했다. 영국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기를 든 민병대원이 잡히는 대로 처형했고 주변의 민가들을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했다. 스미스는 렉싱턴으로 후퇴하면서 휴 퍼시가 지휘하는 증원군 800명과 합세했지만, 자신을 쫓는 민병대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나자 전의를 상실하고 찰스 타운까지 퇴각했다. 민병대는 이들을 추격하다가 어둠이 깔리자 철수했고, 토머스 게이지 장군은 재빨리 찰스 타운의 고지에 2개의 포대를 건설하고 다가올 민병대의 공세에 대비했다. 이리하여 렉싱턴-콩코드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영국군은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19명의 장교와 250명의 병사가 죽거나 부상당했다. 반면 미국 민병대의 손실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90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군은 콩코드에서 무기와 탄약을 상당수 파괴하긴 했지만 민병대는 이 손실을 금방 복구했고, 영국군에 의해 집과 재산을 잃은 주민들의 반감만 사고 말았다. 이후 조지 워싱턴이 대륙의회로부터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보스턴 인근에 모인 민병대를 규합해 보스턴 탈환 작전에 착수한다.

6. 여담


스타크래프트 2의 유닛 해방선의 무장 '렉싱턴 미사일'과 '콩코드 포'는 이 전투에서 따온 것이다.
[1] 콩코드 다리에서 영국군과 민병대 간의 충돌로 인해 울려퍼진 최초의 총성을 의미하는데 이 충돌로 인해 렉싱턴-콩코드 전투가 벌어졌고 여기서 민병대가 승리하면서 본격적으로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이란 나라가 세워졌으며, 그 미국이 훗날 전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전세계에 울려퍼졌다'는 에머슨의 찬사가 딱히 틀린 말은 아닌 셈.[2] 이후 'The shot heard round the world'라는 표현은 전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 대사건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울려퍼진 두 발의 총성'''이다.[3] "영국군이 온다!"고 외쳤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창작된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