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사건

 



[image]
[image]
암살 당시 타고 있던 차
1. 개요
1.1. 이름에 대해
2. 배경
2.1. 오스만 제국의 후퇴
2.2. 황위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민족자유적 성향
2.3. 군사훈련 참관: 6월 28일
3. 경과
3.1. 우연의 연속
4. 결과
5. 여담
6. 매체에서
7. 같이 보기


1. 개요


"작금(昨今)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오토 폰 비스마르크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황태자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1]과 그의 부인 조피 폰 초테크가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a)'라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9세 대학생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동료 5명이 같이 참여)에게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살해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든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1.1. 이름에 대해


'''영어'''
Assassination of Archduke Franz Ferdinand of Austria[2]
'''보스니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
Сарајевски атентат
Sarajevski atentat[3]
'''프랑스어'''
Attentat de Sarajevo[4]
'''독일어'''
Attentat von Sarajevo[5]
'''헝가리어'''
Szarajevói merénylet
'''러시아어'''
Сараевское убийство
'''스페인어'''
Atentado de Sarajevo[6]
'''일본어'''
サラエボ事件[7]
한국에서 이 사건이 흔히 사라예보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일본에서 サラエボ事件이라고 부르던걸 그대로 번역해 들고오며 한국에 자리잡은 것이다. 다만 당사국인 보스니아나 세르비아는 물론, 영어를 제외한 대다수 어권에서 사건 발생지인 사라예보에 초점을 맞춘 표현을 쓰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2. 배경



2.1. 오스만 제국의 후퇴


오스만 제국은 1878년 독일과의 베를린 조약으로 후퇴하며 세르비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방이 떨어져 나갔고, 세르비아는 독립한 반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합병되었다. 세르비아 왕국은 때마침 민족주의의 열기가 꽃피기 시작했고, 그 열기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주민에게 전달해주었다.

2.2. 황위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민족자유적 성향


한편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190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복잡다단한 민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당시 관점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대오스트리아 합중국'론을 제창했다. 이는 제국 내의 각 민족에게 광범위한 주권을 부여해 독일계, 헝가리계와 동등한 대우를 보장하는 연방제 형태였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재정, 국방, 외교를 제외하면 사실상 별개의 국가나 마찬가지인 이중제국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이를 각 민족 단위로 확대하는 안이었다. 이는 독일계와 헝가리계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특히 헝가리계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지만 반대로 루마니아계, 이탈리아계, 슬라브계 민족들에게는 지지를 받았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있는 남슬라브계를 규합하여 자국으로 포함하기를 원했었던 세르비아 왕국 입장에서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론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부의 영토에서의 슬라브계가 제국에 우호적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고령이었기 때문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2.3. 군사훈련 참관: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국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그날을 1914년 6월 28일로 잡은 것이었다. 이날은 세르비아 인들에게 치욕인 동시에 영광의 날로 1389년 암셀펠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세르비아 왕국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날이자,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 군대가 터키인들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과거의 패배를 갚아준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도브난(성 비투스의 날)'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르비아 사람들은 가슴 깊이 기억하고 있는 날이다.[8]
'젊은 보스니아'는 이때를 노려 그를 암살하기로 했고 검은 손이 또한 그들의 공작을 도와주기로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날은 또 황태자의 14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함정은 민족 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민족/언어권에 따라 행정 구역을 분할한 연방국가로 만들려 한, 즉 '''독일계와 황실'''의 기득권도 내놓는 대인배스런 발상을 한 장본인이 바로 이 사건으로 암살당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는 것이다. 아래 항목을 보면 알 법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무한한 자비심(?)을 보이는 등 페르디난트 대공은 굉장히 대인이었다.

3. 경과


1914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태자비 조피 폰 초테크는 9시 20분 사라예보 역에 도착했다. 이후 황태자는 오스카 포티오레크(Oskar Potiorek) 보스니아 총독과 함께 하라히 중위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올랐다. 한편 가브릴로 프린치프 등 검은 손 단원들도 권총수류탄, 그리고 자살용 청산가리를 챙겨서 각자 자신의 위치에 배치되었다.
이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아내인 조피와 굳이 동행한 것은 프란츠 본인의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하였다. 왕족 출신이 아니었던[9] 조피는 엄격한 귀천상혼 제도로 인해 오스트리아 황실 내에서 큰 차별을 받았다. 공식석상에서 황태자와 마주할 수도 없었을 정도였다. 프란츠는 이런 아내의 정치적인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서 조피와 함께 참석을 했던 것이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직함 중에는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총감찰관'도 있는데 이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었던 것. 참관 날짜가 결혼기념일인 것에는 이점 또한 있었다.
황태자 부부가 아펠 강둑[10]에 도착했을 때 첫 번째 단원인 무하메드 메흐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가[11] 암살에 실패했다. 이후 10시 10분경 두 번째 단원인 네델코 차브리노비치(Недељко Чабриновић)가 기어코 수류탄을 던졌지만 다행히 차를 맞고 튕겨나가서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12] 이 때 수행원 2명과 구경꾼 10명이 다쳤다. 황당한 것은 네델코는 암살에 실패하자 자살하려고 바로 독약을 삼킨 후 옆의 강으로 뛰어들었는데 독약은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이라 효과가 없었고 강은 말라서 깊이가 1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덕분에 바로 생포되고 곧이어 자백하게 되는데, 나머지 단원들은 폭탄 투척이 실패하자 암살을 포기하고 만다.
이후 시청에서 황태자는 이 암살시도를 두고 페힘 추르치치(Fehim Čurčić) 사라예보 시장에게 폭탄으로 환영받았다고 분노했지만 아내 조피가 말려서 그만두었다. 이후 영접행사가 끝나고 그와 동승했던 포티오레크 총독은 빨리 군사지역으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갑자기 페르디난트 대공이 폭탄테러로 다친 수행원의 위문을 위해서 그들이 입원한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황태자는 이를 강행했는데 아마 암살 시도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갈등이 커지는 것을 막을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도는 좋았지만 이것이 프란츠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image]
사라예보 시청에서, 황태자 부부가 암살 몇분 전에 찍은 마지막 사진
결국 포티오레크 장군은 암살을 피하기 위해 지름길로 가기로 했지만 '''정작 운전기사 하라히 중위에게는 지름길로 가야 한다는 말을 알리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예정된 길로 갔고, 포티오레크 장군은 길을 잘못 들었다고 운전기사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길이 V자 모양으로 되어있는 밀랴츠카(Miljacka) 강의 라틴 다리에서는 반드시 서행을 해야 했고, 후진을 하던 차에 멈추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암살에 아무런 참여도 못하고 있던 프린치프가 '''하필''' 자기가 자주 가던 모리츠 실러(Moritz Schiller) 카페 주변을 서성거렸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황태자 부부가 탄 자동차가 나타났던 것이다.
'''결국, 이 기회를 노려서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준비해뒀던 FN M1910 자동권총을 꺼내서 자동차 앞에 뛰어들며 황태자 부부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image]
암살당시 사용된 FN M1910. 현재 오스트리아 빈의 군사(軍史) 박물관(Heeresgeschichtliche)에 있다.
사실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380ACP를 막을 수 있는 실크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으며, 이 방탄조끼는 1901년에 이미 알폰소 13세의 목숨을 살리면서 효용성을 입증한 바 있었다. 하지만 프린치프의 총탄은 방탄조끼가 아니라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목에 명중해 경동맥을 끊어버리며 이 방탄조끼는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프린치프의 첫 발은 황태자를, 두 번째 발은 조피를 맞췄으며, 피격 직후 황태자 부부는 시청으로 옮겨졌다. 당시 운전기사 하라히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프란츠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Sopherl! Sopherl! Stirb nicht! Bleib' am Leben für unsere Kinder!(조피, 조피 죽으면 안 되오! 아이들을 위해 꼭 살아주시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조피는 시청에서 숨을 거두었고 프란츠 황태자도 몇 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사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두 번째로 노렸던 사람은 황태자비가 아니라 동승했던 보스니아 총독이었던 육군보병대장 오스카 포티오레크(Oskar Potiorek, 1853.11.20 ~ 1933.12.17)였고 프린치프는 조피의 죽음에는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했다. 한편, 겨우 목숨을 구한 포티오레크 장군은 황태자 부부의 암살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 계속 괴로워했고, 이후 술에 의존하다가 1차 대전 패배 이후 보스니아 총독 및 군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낙향한 뒤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민족적인 문제가 같이 터지면서 사라예보에서 보슈냐크인크로아티아인들이 반세르비아 폭동을 일으켰다.

3.1. 우연의 연속


원체 극적인 사건이었고 정말로 우연의 연속이라 할 만한 사건이라 갖가지 역사적 가정(假定)이 가능하다. 당장 사건 당일에도 암살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분기점이 5가지가 있었다.
  • 만약 프란츠 황태자가 문병가지 않았다면?
  • 운전기사가 샛길로 가지 않았다면?
  • 운전기사가 길을 잘못 들어 후진하지 않았다면?
  • 프린치프가 카페 근처에 없었다면?
  • 프란츠 황태자가 가슴에 총을 맞았다면?
역사에 우연이 없다고는 하지만 어이없게도 이 5가지의 우연이 완벽하게 겹쳐져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목숨을 잃었다 보니, 만약 이 5가지의 우연들 중 단 하나라도 불발되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해지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에는 이미 방탄조끼가 등장했던 시기였고 페르디난트 대공은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다.[13]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발의 총탄은 방탄복을 절묘하게 피해서 급소에 박히고 말았는데, 하필 황태자를 맞힌 한 발은 '''목을 맞혀, 경동맥을 끊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려고 모인 단원은 7명이었는데, 그 중 단 두 명만이 시도했고, 한 명이 성공시켰다. 그 한 명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최후 위치. 한마디로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실패했더라면 그냥 그날 황태자는 무사하게 살았을 것이고, 어쩌면 1차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더라도 늦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암살 성공에 대해서도 황태자에겐 이보다 재수가 없을 수 없던 것이, 처음으로 암살을 시도한 네델코 차브리노비치가 투척한 폭탄에 피해를 입은 수행자 에리크 폰메리치 중령을 보려고 황태자는 진로를 바꿔[14] 병원으로 가자고 했는데, 아무도 이걸 기사에게 이야기 안했다. 때문에 갈림길에서 지나쳐 버린 기사는 후진했는데 마침 후진한 곳이 바로 프린치프 정면.
역사가 존 키건은 제1차 세계 대전을 '''불필요한 전쟁'''으로 규정했을 정도다. 존 키건처럼 극단적으로 말하는 이는 적지만, 신두병 전 유고슬라비아 주재 한국대사는 '''"사라예보 사건이 세계대전까지 유발할 이유는 없었다."'''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사라예보 사건이 아니라면 다른 문제로 참전하려 했을지는 의문이다.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친독일 성향이긴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달리 국력에 제약이 있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발언권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강하긴 해도 그도 많이 늙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외에 후계자가 없었기에 황태자의 발언권 역시도 무시할순 없다. 만약 사라예보 사건이 아닌 다른 쪽으로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면 오스트리아의 운명이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암살사건에 의문과 의혹이 넘쳐나서 '''"혹시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전쟁을 빨리 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이 암살을 계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고 그걸 토대로 독일에서는 '사라예보'라는 드라마를 제작했다. EBS에서 사라예보 사건 발생일에 이걸 방영했다.

4. 결과


[image]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체포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
당장 암살범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그 자리에서 수행원에게 붙잡혀서 그야말로 완전히 초주검이 되도록 복날 개 패듯이 구타를 당한 뒤 군 영창으로 보내졌고, 이후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한편 세르비아 정부는 자국 내 검은 손을 숙청, 암살사건 관련자들에게 사형 및 기타 중형을 선고했다.
[image]
주범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의 사진. 얼굴을 보면 상처투성이인데 붙잡힌 직후 너무 많이 맞아서다. 당시 19살이었다. 이후 감옥에서도 제대로 대우를 못받으며 복역 생활을 하다가 결핵성 척추증으로 오른팔을 절단하고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해 사망 했다. 사망 당시 영양실조로 몸무게는 40kg 미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암살 피해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세르비아와 검은 손의 관계를 알고는 세르비아 정부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으며, 한달 뒤인 1914년 7월 23일에 다음과 같은 총 10개의 최후통첩을 보내고 48시간 안에 답장하라고 요구했다.

'''세르비아 왕국은 아래와 같은 사항을 실천에 옮긴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증오심이나 경멸감을 조장하거나 그 영토의 보존에 반대하는 경향을 띤 일체의 출판물을 금지한다.

2. '인민의 방어'와 같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단체들을 즉시 해체하고 그 선전수단들을 몰수한다.

3.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세르비아 내의 공공 교육 활동을 지체 없이 제거한다.

4.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가담한 인물들을 군대 및 행정 조직 전체로부터 축출한다.

5.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영토 보존에 반대하는 전복 활동의 제거를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 대표의 세르비아 내 활동의 협조를 수락한다.

6. 6월 28일의 음모에 가담한 방조자들에 대한 사법절차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의 대리인들이 참여토록 한다.

7. 사라예보에서의 정부 조사단의 결과를 손상시킨 보야 탄코비치 및 밀란 치가노비치 두 사람의 관리를 지체없이 체포한다.

8.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을 넘는 무기 및 화약류의 불법거래를 방지하고 사라예보 사건 당시 무기 거래를 방치했거나 방조한 관리들을 처벌한다.

9. 6월 28일 범죄 이후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적대적 발언을 자제하지 않았던 세르비아 고위 관리들의 정당화할 수 없는 발언에 대한 설명을 촉구한다.

10. 앞서 제시된 조치들의 집행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에 지체 없이 보고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7월 25일(토요일) 저녁 6시까지 세르비아의 답변을 기대한다.

세르비아 정부는 5항과 6항을 제외하고 전원 들어주기로 결정하여 수상이 직접 공문서를 들고 오스트리아의 대사관에 문서를 전달했지만 이미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정부가 요구조건을 모두 수용하지 않으면 외교관계를 끊고 전면전을 펼치기로 결정을 냈다.[15] 결국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왕국에 단교를 선언한 후 1914년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침공하기 시작했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권총 한 자루와 총알 두 발은 유럽의 열강들을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처넣었고 유럽 대륙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패싸움터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이 전쟁의 영향으로 그 뒤의 재앙이 또다시 탄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image]

오스트리아 ,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왕립정부는 주 베오그라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를 통해 1914년 7월 23일 귀국에 통보한 요구에 대해 귀국이 만족스러운 회답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정부왕국정부는 스스로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도록 강요받은 상태에 놓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국은 무기에 의지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세르비아 왕국 정부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통보한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세르비아 왕국에 통보한 선전포고전보. 세르비아에서 제출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링크

이때 오스트리아가 최후통첩과 선전포고를 선포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 것을 두고 오스트리아의 최대 실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 여부를 확인하느라 한 달이나 시간이 걸렸는데 그 바람에 다른 나라들도 머리를 식히고 정치적으로 저울질한 끝에 참전을 선택해서 줄줄이 말려들어가고 말았다. 만약 빡친 오스트리아가 암살사건이 터지고 곧바로, 길어봐야 1주일 정도 이내에 독일이 돕건 말건 세르비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면 러시아든 프랑스든 개입하지 못하고 그냥 오스트리아 vs 세르비아 1:1 매치로 전쟁이 끝났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기 나라 황위계승자가 암살당한 것은 개입여지와 선전포고 이유로 충분하고 특히 세르비아의 후원국인 러시아도 군주국이라 황실테러를 함부로 옹호했다가는 자기가 똑같은 일을 당하더라도 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16] 그런데 오스트리아가 시간을 너무 끌어버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일주일 안에 공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게르만인, 헝가리인, 체코인, 폴란드인, 유대인 등 수많은 민족들이 뒤섞인 다민족 국가였으며, 중앙집권체제가 아닌 각 지역마다 자치권이 부여된 국가였다. 그러니 병력 동원이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질 리 없어서, 아무리 빨리 동원해도 16일은 족히 걸렸다. 게다가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 내에는 전쟁을 반대하는 각료들도 꽤 있었고[17] 각 민족 대표들의 의견을 합치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더욱 오래 걸렸다. 이런 상황에서 일주일 안에 세르비아를 공격했어야 했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한편, 이 사건의 주범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전 세계의 수백만명이 전쟁터로 끌려가서 죽어가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테레진슈타트[18]교도소에서 지냈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가브릴로를 사형시키고 싶었지만 당시 오스트리아의 법으로는 만 20세가 넘어야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수 있었는데 가브릴로는 만 20세에 27일이 모자라서 미성년자였던 관계로 사형을 선고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감형 사유를 적용하고 징역 20년이 확정되었다.
이때 가브릴로는 체포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잘 치료하지도 못한 채 독방에 감금되었고, 외부와 단절된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허약해져 지독한 결핵과 함께 합병증으로 피부궤양까지 앓게 되면서 결국 자살극을 벌이기까지 하다가 1916년 정신과의사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가브릴로는 세계대전이 일어날 줄은 알았다고 하지만 그 대전을 자기가 일으켰다는 사실에는 당황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면담 당시 세르비아는 붕괴하여 전 국토가 점령을 당하는 국난을 겪는 중이었고 이 소식을 접한 가브릴로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가브릴로는 1918년 교도소 안에서 유대인 의사의 치료를 받다가 끝내 병사했다.
가브릴로 말고도 다른 공범 4명이 더 있었고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증언에 따라 주동자들이 하나 둘 체포되면서 재판으로 넘겨졌는데 이들 역시 암살 계획에만 가담했고 피살자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징역을 선고받았다. 암살을 저지른 프린치프가 사형이 아닌 판국에 이들을 처형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이긴 했지만...어쨌거나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도 가브릴로 프린치프처럼 1916년 교도소 안에서 21살 나이로 병사했으며, 다른 3명도 교도소에서 갇혀 지내야만 했다. 차브리노비치는 죽기 전, 암살자들 중 유일하게 심경 변화를 일으켜 암살을 후회하고 사죄한다고 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유자녀들이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1명인 바소 추브릴로비치(Васо Чубриловић)는 1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차 대전이 끝나고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들어서면서 살아서 석방되었고 1939년 베오그라드 대학 교수를 지냈다가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지만,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유고연방에서는 영웅으로 칭송받으면서 유고슬라비아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농업장관과 삼림장관까지 지냈다. 그 후 60년이나 더 살면서 1990년 6월 11일 93살에 병사하면서 범인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다. 본인에게는 다행인지 조국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는 것은 못 보고 갔다.[19] 아이러니하게도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만년에는 청년 시절의 이념들과 거리를 두면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을 후회하는 말도 했다고 한다.

5. 여담


[image]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시절에 사건 장소에 있던 명판의 모습이다. 사진은 1987년에 촬영되었다. 명판의 내용은 '''「1914년 6월 28일 이곳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격으로 폭군에 대한 인민의 항쟁과 수세기에 걸친 우리 인민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었다.」'''이다. 프린치프가 황태자를 저격할 때의 발자국 모습까지 본을 떠 놓았다.
[image]
위의 명판과 발자국은 보스니아 내전 때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파괴되고, 지금은 새 명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키릴 문자 대신 라틴 문자로 바뀌었으며, 명판의 서술도 가브릴로 프란치프가 이 자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다는 사실관계만 적어 중립적으로 바뀌었다.
20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10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세르비아에서는 주범 프린치프를 영웅으로 기리는 쪽도 있지만, 반세르비아 감정이 강한 보스니아 쪽에선 단순한 테러범으로 비하하는 인식도 있는 듯하다. 기사 기념식의 일환으로 이 날 암살 대상이었던 황태자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초빙되어 암살 장소 근처에 있는 사라예보 국립 도서관 로비에 마련된 특설 무대에서 공연을 가졌고, 이 실황은 2015년 5월에 소니 클래시컬에서 DVD로 발매되었다. 관련 사이트

6. 매체에서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올훼스의 창에서도 짧게 지나가듯이 등장하는 사건이다.
2014년, 덴마크 만화가 헨리크 레르가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삶에서 사라예보 사건까지를 조명한 그래픽 노블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내놓았으며 한국에도 정발되었다. 만화 자체는 대단한 수작인데 먼나라 이웃나라로 유명한 이원복 교수가 서평을 쓰면서 이를 단순히 제국주의 수괴에 대한 식민지 청년의 통쾌한 의거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역덕들에게 한소리 들었다. 책 내용부터가 그런 내용이 아닌데...

7. 같이 보기


[1] 황태자이기는 했지만,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친아들이 아닌 조카였다.(프란츠 요제프 1세의 막내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아들.) 본래 황태자였고 황제의 외아들이었던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면서 그가 황태자 자리를 넘겨받은 것이다.[2] 영어판 위키백과의 사라예보 사건 항목명이다. 번역하면 ‘오스트리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사건’.[3] 사라예보의 암살[4] 사라예보의 테러[5] 사라예보의 암살[6] 사라예보의 총격[7] 사라예보 사건[8] 노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으로 개편해 민족/언어권에 따라 행정권 분할을 위해 헝가리 쪽 인사들과 씨름 중이었으니까(당연히 이 계획은 세르비아계 주민에겐 큰 호재였다. 하지만 오히려 극단주의자들을 자극한 점에서 아이러니). 결국 결과가 정말 안습하기 그지 없었지만 말이다.[9] 조피도 명색이 백작 가문의 여식이었지만, 오스트리아 황실은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풍토가 강해서 이조차 특이한 사례였다. 이후 입장 차이는 있으나 일본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된다.[10] Appel quay. 아펠 키로 발음된다.[11] 이후의 삶이 기구한데 암살 시도 이후 탈옥을 실행했다가 몬테네그로에서 붙잡히게 된다. 이후 1919년에 사면받았지만 1945년 우스타샤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12] 여기에 또 다른 설이 있는데, 단순히 폭탄을 알아채고 가속하여 빗나갈 수 있었다고 하는 설과 황태자가 '''폭탄을 도로 던져(?!) 무사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13] 현대적인 케블라 방탄복은 아니었고, 비단 재질이었다.(천연섬유 중에서는 비단이 제일 튼튼하다) 소총탄이나 고위력 권총탄은 막을 수 없었지만 이 암살에 사용된 .380 ACP와 같은 호신용 권총탄 정도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14] 황태자를 수행하던 포티오레크는 이미 암살시도가 벌어졌으니 빨리 오스트리아군 주둔지로 몸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문병을 가겠다는 황태자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황태자가 멍청했다기 보다는, 위의 일화들을 볼 때 지나칠 정도로 대인배인 성품이 작용한 듯 하다.[15] 오스트리아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빌헬름 2세 문서를 참고할 것.[16] 실제로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문제로 영국과 프랑스에 조언을 구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니가 잘못했으니까 그냥 수용하고 빌어라.'라는 입장을 보였다. 당장 영국도 입헌군주국이었고, 프랑스도 제2제국이 멸망한 지 얼마 안 됐었다.[17] 당장 당시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독일의 의사를 확인할 때까지 보복 계획을 세우는 것을 주저했다. 오헝제국의 현실 상 세르비아를 직접 치기보다는 외교적인 압력을 가해, 세르비아와 러시아 간 동맹 관계를 단절하고 배상금을 받는 선에서 피해보상책을 받는게 좋겠다는 각료들의 제안도 있었다.[18] 지금의 체코 북부에 있는 테레진(Terezin). 테레진슈타트(Theresienstadt)는 독일식 이름이다.[19] 사망 만 1년 후인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연방을 탈퇴한다. 추브릴로비치 등 사라예보 사건의 주도자들은 세르비아인보다 더 큰 단위의 남슬라브족을 모두 아우르는 민족국가를 원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이들이 지향하던 남슬라브인의 민족국가에 아주 근접하는 데 성공했던 국가였고, 따라서 바소 추브릴로비치의 입장에서는 유고슬라비아야말로 자신의 조국이라고 여길 만한 나라였다는 것. 남슬라브 민족주의의 정착 실패에 대해서는 유고슬라비아 문서나 유고슬라비아 전쟁 문서에 설명되어 있으며, 세르보크로아트어 문서 등도 참고할 만하다. 또한 요네자와 호노부안녕 요정 역시 남슬라브 민족국가운동의 처참한 말로를 소재로 삼고 있으니 흥미있는 사람이라면 봐도 나쁘지 않다.[20] 역시 직접적인 전쟁의 도화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