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존슨

 



'''Robert Johnson
로버트 존슨'''
[image]
'''본명'''
로버트 르로이 존슨
(Robert Leroy Johnson)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11년 5월 8일
미시시피 주 헤이즐허스트
'''사망'''
1938년 8월 16일 (향년 27세)
미시시피 주 그린우드
'''직업'''
가수
기타리스트
하모니시스트
송라이터
'''활동'''
1929년 ~ 1938년
'''장르'''
델타 블루스
1. 개요
2. 죽음 관련
3. 사진
4. 그 외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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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블루스 음악가. 블루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하나로 꼽히며, 초기와 현대 블루스의 기초를 닦은 음악가로 평가받는다. 오픈 코드 형식의 작법이나 소울 창법 등 블루스에 널리 쓰이는 기법을 최초로 체계화 해서 정립했으며, 흔히 말하는 27세 클럽의 원조이기도 하다.

2. 죽음 관련


죽음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당시 동료들과 떠돌아 다니다 한 술집 주인의 부인을 꼬셨는데 이에 화가 난 술집 주인이 그가 주문한 위스키에 독약을 타서 사망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1] 그 외에도 오만가지 설이 있다.
악마와의 계약 설은 유명한데, 당시 흑인들에겐 사거리에 악마가 살고 있고 자정에 사거리에 가면 악마를 만날 수 있는데 이때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원하는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로버트 존슨은 악마와 거래하여 기타 실력을 얻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자신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그러한 소문에 대한 곡을 남겼다 (Crossroad[2], Me and the Devil Blues)
또한 부두교에 관심이 많아 부두교 의식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악마에 관한 이런 전설은 그 당시의 인종차별과 연관이 많다. 그 당시에 흑인들의 블루스나 다른 문화들이 조금씩 백인 젊은층에 스며들면서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탐탁치 않게 여기던 보수층들은 흑인들이 젊은 사람들의 정서를 해친다며 이런 소문을 내곤 하였다. 그렇다보니 기독교 사회에서 블루스나 락음악은 악마의 음악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긴 것.
다만 로버트 존슨보다 앞서 악마와 거래한 음악가라고 불리던 토미 존슨이라는 기타리스트가 있었다.

3. 사진


[image]
가장 잘 알려진 로버트 존슨의 사진[3]

4. 그 외


상당히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
태어난 집 자체도 유복한 집이 아니었고 아내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며 시댁에서는 로버트 존슨이 블루스[4]를 하기에 자신들의 딸이 죽었다며 로버트 존슨을 쫓아낸다. 이후에도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하고 떠돌이 인생을 살았으며 결국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그는 공연을 할때 특이하게도 관객에 등을 돌린 채 자신의 손을 감추고 연주를 했는데 이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기타 기술을 훔치는걸 원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라고 한다.
그는 당시 다른 블루스 음악가들처럼 떠돌아 다녔기에 생전 단 2번의 녹음 세션을 거쳤는데, 그 세션물에 오늘날 대중 음악에 널리 쓰이고 있는 기법들이 거의 다 들어가 있다. 이 녹음물들은 생전에도 발매되긴 했으나[5]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고[6] 그나마도 절판된지 오래였다.
그러다 1961년, 곡들을 간추려 내놓은 'King of the Delta Blues Singers Vol. 1'라는 컴필레이션 음반이 나오면서 재발견되었다. 당시에도 판매량은 시원치 않았으나 밥 딜런을 위시한 유명 음악가들이 열광하며 대중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에 1970년 남아있던 녹음물을 모아서 2탄이 나왔으며, 1990년엔 저 두 컴필레이션을 묶고 다른 테이크판을 리마스터링한 'The Complete Recordings'가 나왔을땐 빌보드 80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7]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11년에 저 The Complete Recordings를 최신 음향 기술로 리마스터링한[8] 'The Centennial Collection'이 나왔다. 기적처럼 음원이 재발굴 되지 않는 이상 더 추가될 가능성도 없으니 입문용으로는 'The Centennial Collection'을 추천하는 편이다. 재발굴 이후로는 로버트의 형제자매 중심으로 로버트 존슨 재단이 설립되었고 재단에서 저작권을 관리하고 있다.
초기 블루스의 전설로 평가되다보니 여러 유명 음악가들이 굉장히 존경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에릭 클랩튼이 독보적이다. 어느 정도냐면 어릴때 로버트 존슨의 음반을 여러개 사서 판이 망가질정도로 많이 들었다고하며 또 '''로버트 존슨의 트리뷰트로만 채운 앨범을 하나 낼 정도'''. 앨범 제목은 Me and Mr.Johnson. 게다가 그의 라이브에서 Crossroads[9]꽤나 자주 등장 하는 레퍼토리이다.
또한 손이 굉장히 커서 혼자 쳐도 풍부한 소리가 난다고 한다. 롤링 스톤스키스 리처즈가 동료 브라이언 존스[10]와 로버트 존슨의 노래를 듣다가 리처드가 존스에게 "같이 연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라고 물었고 로버트 존슨이 혼자 연주했다는 대답을 듣고 리처드가 데꿀멍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5. 기타


법적으로 인정된 후손이 있다. 이름은 클로드 존슨으로, 미시시피에서 트럭 운전사로 일하면서 살았다고. 그러다 1992년, 클로드의 어머니인 버지니아 제인 스미스가 공표하면서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졌고 당연하게도 로버트 존슨의 다른 유족들과 애인이 소송을 걸었다. 상술했듯이 로버트 존슨의 시체는 물론이고 유언도 없었던지라 친자 증명 과정에 꽤나 애를 먹었지만, 결국 인정되었다.[11] 클로드는 2015년 사망했으며, 5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런데 버지니아의 집안은 꽤나 완고한 종교인들이었고 로버트를 악마의 종이라고 싫어했다고 한다. 클로드 본인은 자신을 만나러 왔다가 거절당한 뒤 떠난게 부자 간의 유일한 만남이었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멋쟁이였지만 그닥 출세 욕심이 없어보이는 인상이었다고 밝혔다.참조
일본 만화중엔 로버트 존슨의 악마계약설을 토대로 한 '나와 악마의 블루스'[12]라는 만화도 있다. 후에 감옥학원으로 코단샤 만화상을 수상하게 되는 히라모토 아키라가 그렸다. 악명 높은 은행강도 클라이드 배로우가 겨우 살아난 뒤 악마와 계약해 오른손 손가락이 10개로 늘어난 존슨과 여행하게 된다는 내용. 여기서 관객에 등을 돌리고 연주하는건 자신의 손가락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란 설정이다.
20세기 소년에 나오는 십자로에서 만난 악마에 관한 이야기 역시 위의 악마와의 계약 이야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엘튼 존의 노래 The Wasteland가 악마와의 계약 설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왠지 모르지만 넘버 3에서 송강호가 무대뽀 정신을 강변할 때 이 사람의 이름을 예로 든다.#

[1] 해당 주장은 로버트 존슨과 동행하던 블루스 음악가들이 증언한 내용인데 당시 로버트 존슨은 위스키에 독약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면서도 그냥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심한 복통에 시달리다 죽었다고(...)[2] 동명의 영화도 있는데, 로버트 존슨의 전설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이다.[3] 위의 두 사진이 현존하는 그의 유이한 사진들로 알려졌으나 그의 의붓자매가 그에 관한 연대기를 출판하면서 새로운 사진을 공개했다. 배경을 보아 위의 프로필 사진을 촬영한 장소와 같은 곳에서 찍은 듯[4] 당시 기독교에서는 블루스를 악마의 음악이라며 멸시했다.[5] 사실 현재 통용되는 LP 앨범 개념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싱글처럼 곡 하나를 담은 판이 중심이었다.[6] 공식적으로는 5000장 팔렸다고 알려져 있다.[7] National Recording Registry에 오른 것도 이 음반이다.[8] 당연하겠지만 쨍한 음질은 기대하면 안 된다. 그래도 기존반보다 많은 개선이 이뤄졌다고.[9] 로버트 존슨의 Crossroad Blues를 재해석한 클랩튼의 히트곡[10] 공교롭게도 그도 27세로 사망한다.[11] 버지니아의 친구가 로버트 존슨과 버지니아가 같이 자는걸 봤다고 증언한게 결정적이었다고. 또한 클로드 본인이 재발굴되기 한창 전에 성을 존슨으로 바꾼것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항소 얘기도 있었으나 2000년대 이후 얘기가 없는걸 보면 결국 포기한듯 하다.[12] 로버트 존슨의 곡 Me and the Devil Blues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