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 스톤스

 


'''롤링 스톤스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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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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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롤링 스톤스
THE ROLLLING STONES
'''
'''멤버'''
'''브라이언 존스, 믹 재거, 키스 리처즈, 빌 와이먼, 찰리 와츠,
이언 스튜어트, 믹 테일러, 로니 우드
'''
'''입성 연도'''
'''1989년'''
'''후보자격 연도'''
'''1989년'''
<bgcolor=#0c0000> '''후보선정 연도''' ||<bgcolor=#0c0000> '''{{{#ffd700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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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Rolling Stones'''
'''출신지'''
잉글랜드 런던
'''현재 멤버'''
키스 리처즈 (기타)
믹 재거 (보컬)
찰리 와츠 (드럼)
로니 우드 (기타)
'''장르'''
, 하드 록, , 블루스, 로큰롤
'''활동 기간'''
1962년 ~
'''데뷔'''
1963년 싱글 ‘Come On’
'''링크'''

1. 개요
2. 멤버
3. 역사
3.1. 1960년대
3.1.1. 데뷔 초기
3.1.2. 브리티시 인베이전
3.1.3. 사이키델릭 시기
3.1.4. 암흑기
3.2. 1970년대
3.3. 1980-90년대
3.4. 현재
4. 음악 성향
5. 대표적인 악동 이미지의 밴드
5.1. 사건 사고
5.2. 전설적인 바람기로 유명한 믹 재거
5.3. 악담가로 유명한 키스 리처즈
6. 대중매체 속 롤링 스톤스
7. 디스코그래피
7.1. 앨범
7.2. 싱글
7.2.2. 빌보드 핫 100 2위
7.2.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7.2.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7.2.5. 그 밖의 싱글


1. 개요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1962년, 런던에서 결성되었으며 지금까지 단 한 번의 해체 없이 여전히 활동 중인 밴드이며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록 밴드 중 하나로 불린다.
''''악동 이미지'의 세계적인 대표 아이콘'''이며 롤링 스톤스 음악의 특징은 섹스, 마약, 심지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적 내용까지도 스스럼없이 노래하는 특유의 퇴폐성과 음악 전반에 깔린 '자유'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하지 않으면서 흥겹고 풍부한, 때론 직설적이고 풍자적인 가사도 일품. 록의 정신이 '자유', '저항', '퇴폐' 등으로 요약되므로 어쩌면 가장 록다운 록을 들려주는 밴드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쉽게 말해 롤링 스톤스는 '''록이라는 장르에 거칠고 자유로운 정체성'''을 불어넣은 밴드다.
거친 흑인 스타일의 블루지한 보컬 믹 재거의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노래하는, 속된 말로 '깡패 창법'은 고음과 괴성이 아닌 진정한 보컬의 표현력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롤링 스톤스의 상징이다. 게다가 믹 재거는 오히려 90년대 이후 목소리가 더욱 파워풀해졌다. 또다른 핵심 멤버 키스 리처즈의 성에 찬 듯 거침없이 긁어대는 기타사운드와 중독성 있는 리프들 역시 롤링 스톤즈 음악의 핵심. 2000년대 라이브 공연을 보면 60년대보다 오히려 무대 장악력이 더 좋다. 60이 넘은 나이에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150만[2]'''에 가까운 인파를 휘어잡는 장악력을보면 세계적인 락밴드 대접을 그냥 받는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레논-매카트니 듀오에 버금가는 재거-리처즈 듀오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에 안주하지 않고 70년대에는 디스코,레게, 컨츄리, 펑크, 80년대에는 스타일과 일렉트로니카, 90년대에는 현대적인 록 사운드를 흡수하는 '구르는 돌'이라는 팀명답게 시대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기에 제 2의, 제 3의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또한 블루스와 컨트리, 로큰롤 등 현대 대중음악의 뿌리에 근본을 둔 사운드를 추구해왔고 개별 싱글들의 상업적 성과도 역사상 모든 뮤지션들 가운데 손에 꼽는 수준이기에 그들의 음악은 대중음악의 전범(典範)으로 여겨진다.

2. 멤버


  • 현재 멤버
    • 찰리 와츠(Charlie Watts)[3]: 드럼
    • 키스 리처즈(Keith Richards): 기타
    • 믹 재거[4] (Sir Mick Jagger): 보컬, 프론트맨, 現 리더
    • 로니 우드(Ronnie Wood)[5][6]: 기타
  • 전(前) 멤버
    • 빌 와이먼(Bill Wyman): 베이스[7]
    • 믹 테일러(Mick Taylor): 기타
    •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 기타, 前 리더
    • 이언 스튜어트(Ian Stewart): 피아노
    • 딕 테일러(Dick Taylor): 기타, 베이스[8]
    • 토니 채프먼(Tony Chapman): 드럼
1962년 리더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존스'를 중심으로 보컬인 '믹 재거',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 베이스 '빌 와이먼', 드럼 '찰리 와츠'의 5명의 멤버로 결성됐다. 1969년 리더였던 '브라이언 존스'가 퇴출되고, 후임으로 '믹 테일러'가 영입된다. 1974년에는 '믹 테일러'가 탈퇴하고 '론 우드'가 영입되고, 1994년에는 원년 멤버였던 '빌 와이먼'이 탈퇴한다. 현재 정규멤버로는 '믹 재거', '키스 리처즈', '론 우드', '찰리 와츠' 4인 체제로 구성되어있다.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는 "레논-매카트니"에 버금가는 작곡 콤비로도 유명하다.
멤버 대부분의 나이가 70세가 넘는다. 가장 어린 멤버가 2019년 기준 72세. 여담으로 밴드의 프론트맨인 믹 재거와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는 유치원 동문이라고.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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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데뷔 무렵의 롤링 스톤스
1967년 사이키델릭 시기의 롤링 스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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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롤링 스톤스
2016년의 롤링 스톤스
롤링스톤즈는 2012년 기준 데뷔 50주년을 맞은 만큼 지금까지의 앨범분량이 엄청나다. 그 많은 앨범과 곡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건 꽤 힘든 일이라 생략한다. 여기서 소개되는 앨범과 곡은 일부에 한정되며, 곡들의 자세한 정보를 보고 싶다면 롤링 스톤스/대표곡 문서 항목을 참조하자.

3.1. 1960년대



3.1.1. 데뷔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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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좌측 인물이 바로 이언 스튜어트이다.
1963년 6월 7일 척 베리의 'Come On'을 커버하면서 데뷔했다.데뷔 초반, 비틀즈와 비슷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깔끔한 스타일의 로큰롤을 하였다. 처음에는 브라이언 존스, 믹 재거, 키스 리차즈, 이언 스튜어트, 딕 테일러와 믹 어보이의 블루스 밴드로 훗날 애니멀스의 매니저가 되는 조지오 고멜스키와 계약을 맺고 고멜스키의 클럽에서 활동했다. 도중에 딕 테일러와 믹 어보이가 탈퇴하고, 빌 와이먼과 찰리 와츠가 합류했다. 하지만 아직 고멜스키와 롤링 스톤스 사이에 제대로 된 계약이 없다는 것을 이용한 앤드류 올덤이 '''고멜스키가 부친상 때문에 고향으로 떠난 사이에''' 롤링 스톤스와 정식 계약을 맺으면서 고멜스키와는 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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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스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앤드류 올덤
한 때 비틀즈의 PR을 맡기도 했던 앤드류 올덤은 비틀즈의 강점이었던 자작곡을 부른다는 것은 그대로 가져오면서, 비틀즈 및 그 유사밴드와의 차별성을 위해서 밴드의 이미지를 차별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비틀즈 멤버인 존 레논의 악동 이미지를 참고하여 밴드의 이미지를 '잘생기고 반항적인 악동'으로 만들기로 결정했고, 나아가서 다른 멤버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이도 많던 이언 스튜어트를 '''주걱턱에 생긴 것도 광부같다 라는 이유로 밴드에서 축출'''한다. 피아노 실력이 좋아서 브라이언 존스가 가장 먼저 뽑은 멤버였고, 유일하게 전화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온갖 잡일도 다했던 이언 스튜어트는 그렇게 잘렸고 정통 블루스를 지향했던 브라이언 존스 위주의 밴드였던 롤링 스톤스는 그렇게 피아노를 잃었다. 다만 이언 스튜어트에 대한 남은 멤버들의 애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0년경 있던 인터뷰에서조차 키스 리처드는 "그가 없었다면 롤링 스톤스도 없었을 것이며 나는 아직까지도 롤링 스톤스는 그의 밴드라고 생각한다." 라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이언 스튜어트 또한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롤링 스톤즈의 로드매니저'''로 활동했고 심지어 앨범 작업에도 한동안 계속 참여했다. 그러나 공연 등의 외부 노출은 없었다.
비틀즈가 써준 곡이자 밴드의 2번째 싱글 곡 "I Wanna Be Your Man"으로, 첫 히트를 기록한 롤링 스톤즈는[9] 이후 버디 홀리의 곡 "Not Fade Away"를 커버하여 영국 싱글 차트 3위에 올리면서, 영국 최고의 인기밴드 중 하나가 된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당시 절정을 달리던 비틀즈와는 상반되는 음악스타일(깔끔한 앵글로색슨적 느낌 - 흑인적인 거친 느낌)과 이미지(터프, 반항, 퇴폐) 역시 인기의 커다란 요인이었으며 이러한 이미지는 후에 롤링 스톤스의 대표적인 상징이 된다.
영국 최고의 인기밴드가 된 이후 롤링 스톤스는 그들보다 먼저 미국으로 건너가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비틀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Time Is On My Side"라는 곡이 빌보드 싱글 6위를 기록한 것 말고는 비틀즈의 인기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오히려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란 곡으로 유명한 애니멀스가 빌보드 1위를 차지해버린다.

3.1.2. 브리티시 인베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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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영국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묻혀가는가 하던 찰나, 롤링 스톤스는 키스 리처즈가 꿈에서 들었다는 멜로디를 통해 작곡했다는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발표한다. 1965년에 발표된 이 곡은 단번에 빌보드 1위를 차지했고, '세계를 뒤흔든 기타리프'라는 평가를 들으며 이후 롤링 스톤스의 대표곡이 된다. (본 곡은 VH1선정 20세기 최고의 록 음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절정의 흥겨움을 자랑하는 "Get Off of My Cloud", 아름다운 발라드 "As Tears Go By"[10]등도 히트하면서 명실상부 최고의 인기밴드로 자리매김한다.
1966년 롤링 스톤스는 전곡을 모두 자작곡으로 채운 앨범 "Aftermath"를 발표했고 앨범이 평론가들과 대중 모두에게 극찬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그들의 음악성도 주목받기 시작한다. Aftermath는 1987년 상영된 영화 풀 메탈 재킷미국 드라마인 '''머나먼 정글'''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어 유명한 곡이된 "Paint It Black''[11] 마림바가 주도하는 발랄한 멜로디와는 달리 여성 차별로 얼룩진 가사를 가진 "Under My Thumb"[12], 덜시머의 음색이 매력적인 발라드 "Lady Jane" 등의 명곡으로 채워져있다.
밴드 멤버들이 미국에 처음 왔을 당시 엄청난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들이닥쳤는데 호탤 투숙객 중 누군가가 웬 여자가 하의만 입고 수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건의 개요는 장발이었던 믹 재거가 수영을 하는데 호텔 투숙객이 그걸 여자로 착각을 했다고 했고, 경찰들 역시 장발 남자였던 롤링 스톤즈 멤버들 보고 놀랬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서 남자들은 짧은 머리인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남자가 장발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상황이었다고...[13]그 이외에 백인/흑인 전용 화장실이라던지 이런 인종차별적인 부분에서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14]

3.1.3. 사이키델릭 시기


"Aftermath" 이후 롤링 스톤스는 음악적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67년은 롤링 스톤스가 그 동안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게 사이키델릭 록을 시도한 한 해였다.
아름다운 발라드인 Ruby Tuesday, 통통 튀는 피아노 선율이 돋보이는 Let's Spend the Night Together가 수록된 Between the Buttons를 시작으로 사이키델릭 록 역작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를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재거/리처즈의 작곡 능력과 브라이언 존스의 편곡 능력 및 악기 연주 능력이 조화되어, 롤링스톤즈의 앨범들 중 유일하게 기존의 이미지를 버리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키델릭 록을 지향한 앨범이다. 해당 앨범은 심지어 커버 조차도 비틀즈페퍼상사 앨범과 흡사하여 비틀즈의 시도를 따라했다며 욕을 좀 먹었던 앨범이다. 롤링스톤즈 속 비틀즈 찾기 하지만 아름다운 피아노 인트로사운드로 광고브금으로 사용되었던 "She's a Rainbow"같은 수록곡들의 완성도와 변칙적인 박자를 사용하여 아방가르드 사운드를 실험하는 등 비틀즈의 페퍼상사와는 다른 음악적인 시도를 인정받아서 최근 들어서 재평가를 받고있다. 그리고 이 앨범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음 앨범부터 롤링 스톤스의 음악성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는 계기가 되었다.

3.1.4. 암흑기


한편 같은 1968년 싱글로 발표된 흥겨운 로큰롤 넘버 "Jumpin' Jack Flash"[15], Honky Tonk Women같은 곡들 마찬가지로 성공하면서 비틀즈의 아성에 비교할수 있는 유일한 록밴드라는 위치를 가지게 된다.
1968년 키스 리처즈의 신경질적인 기타 솔로로 유명한 "Sympathy for the Devil"과 그들만의 투쟁적이고 풍자적인 스타일의 록큰롤 넘버 "Street Fighting Man"[16][17]이 수록된 Beggars Banquet, 1969년 말도 안되는 세련된 사운드와 극적인 구성의 명곡 중의 명곡 Gimme Shelter"와 롤링 스톤스의 곡 중 가장 깊이있는 곡이라 평가받는 7분짜리 대곡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 숨겨진 명곡이라 평가받는 "Monkey Man"이 수록된 1969년Let It Bleed[18]등의 명반을 발표한다.
이러한 히트와는 별개로, 밴드의 리더인 브라이언 존스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약물에 빠져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다. 결국 브라이언은 마약 남용이라는 이유로 1969년 초, 밴드로부터 해고당하고 1달 후, 자택의 수영장에서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익사한 채 발견된다. 밴드를 떠난지 얼마 안되어 너무나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는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다, 약물 중독의 부작용으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가 고용한 정원사에게 살해당했다 등 여러 추측이 난무하다.
원래 롤링 스톤스는 브라이언 존스가 영국에 진정한 블루스를 알리겠다며 정통 블루스 밴드[19]로 만든 밴드였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키스와 믹을 내세운 밴드의 매니저인 앤드류 올덤에 의해 밴드 주도권을 빼앗겼고 밴드는 자신이 3류음악으로 경멸했던 로큰롤로 흥행, 정체성마저 그 쪽으로 바뀌게 되어버렸다. 그러자 브라이언은 우울증에 걸려서 약물 복용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롤링 스톤즈 멤버들 중 가장 먼저 마약에 중독된 멤버였다.
비틀즈의 레논/매카트니 콤비를 의식해서, 롤링 스톤스의 자작곡들은 모두 재거/리처즈의 명의로 앨범에 수록되었고 매니저 앤드류 올덤 또한 "본래 브라이언 존스는 작곡에 흥미가 없어서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브라이언 존스가 롤링 스톤스에서 작곡하거나 작곡에 참여한 곡들마저 모두 재거/리처즈의 곡으로 알려지기까지 했다. 1965년 잡지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존스에게 "당신은 작곡을 하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브라이언 존스는 "언제나 자작곡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미 상당수의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대부분 블루스 스타일이다."라고 말하며 앤드류 올덤의 발표를 직접 반박하기도 했다. 다만 브라이언 존스가 정통 블루스 곡의 커버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올덤은 자작곡 위주로 가야 성공한다라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한 모든 곡을 자작곡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롤링 스톤스가 60년대에 발표한 곡들 중에서 재거/리처즈의 이름으로 발표된 브라이언 존스의 곡들이 얼마나 있는지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하나 마리안느 페이스폴과 빌 와이먼의 증언에 의하면 브라이언이 작곡한 곡들은 주로 밴드 공동 명의인 Nanker/Phelge'(낸커/펠지)로 발표되었고,[20] <Under My Thumb>, <Paint it Black>, <Ruby Tuesday> 등의 히트곡들 작곡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더불어 빌 와이먼은 낸커/펠지'로 발표되어야 했을 곡들도 크레딧에 '재거/리처즈'로 오른 곡이 여럿 있다' 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 사실과 관계 없이 믹 재거는 여전히 브라이언 존스의 작곡을 부정하며 '내가 본 사람 중 최악의 작곡 실력을 갖고 있었다' 고 주장했고 키스 리처즈는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 멤버에게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려준 적이 없었다."며 그의 작곡에 대한 기여를 부정했다. 브라이언이 작곡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는 블루스 음악을 하고 싶어했고 엄청난 악기 실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자 했었다. 그런 악기 실력과 음악적 천재성을 다른 멤버들이 질투한 면이 있는 듯하다.
결국 1966년 즈음에 브라이언 존스는 자신의 약혼녀이자 패션 모델인 아니타 팔렌버그와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여[21] 새 출발을 하기로 마음먹고 멤버들에게 밴드에서 탈퇴한다는 통보를 한다. 하지만 매니저인 앤드류 올덤은 뛰어난 악기 연주 실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기 멤버인 브라이언 존스의 탈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브라이언에게 남아있는 계약기간 동안 밴드 활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소송을 걸겠다는 협박을 했다. 결국 그 요구를 받아들인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에 재가입하기 전에 지친 심신을 치료하고자 모로코에 위치한 요양소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아니타 팔렌버그와 키스 리처즈가 불륜관계가 되어버린다.[22]
1967년이 되자 요양소에서 퇴원한 브라이언 존스는 자신의 침대에서 둘이 뒹구는 장면을 목격하고 집기를 부술 정도로 몹시 화를 내었고 1967년 3월, 아니타는 브라이언이 자신을 폭행했다며 일방적으로 결혼을 취소한다.[23] 혼인이 결렬된 후 브라이언은 마약을 하며 1년여를 완전히 폐인으로 보내면서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녹음 작업에 열중하게 된다. 그러나 앨범이 상업적, 비평적으로 완전히 실패하자 브라이언은 음악에 흥미를 잃고 1968년 즈음부터는 스튜디오에 참석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24] 브라이언의 마약 복용은 점점 더 심해져서 자동차 사고를 연달아 일으켰고 마침내 기소를 당하게 되었다. 재판부는 브라이언에게 가벼운 벌금형으로 선처를 베풀었지만 이 문제로 인하여 브라이언이 미국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마침 미국 투어를 계획중이었던 롤링 스톤즈는 그를 자르고 새로운 멤버를 고용하기로 하였다. 1969년이 되자마자 롤링 스톤즈의 멤버들이 브라이언의 집에 방문해 그를 밴드에서 해고한다고 통보하였고 메스컴에 발표하는건 브라이언에 맡기기로 하였다. 3주 뒤 브라이언은 자신의 집 수영장에서 숨친채 발견된다.
그런데 이 시기를 즈음해서 밴드의 매니저였던 앤드류 올덤도 해고되었다. 앤드류 올덤은 <(I Can't Get No) Satisfaction> 성공 후에도 계속해서 블루스를 고집하던 브라이언 존스를 제어하기 위해서 믹 제거와 키스 리처즈를 밀어주고 이들의 능력을 과장해서 선전했지만 막상 앤드류 올덤이 원했던 그 형태의 밴드가 완성된 시점에서 믹 제거와 키스 리처즈에게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앤드류 올덤은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다만, 웃긴 것은 앤드류 올덤을 배제하기 위해서 계약을 맺은 것이 바로 ABCKO의 알렌 클라인이라는 점이다.[25] 하지만 비틀즈가 해체하게 된 원흉 중 하나로 그의 지나친 속물 근성이 꼽히듯이 롤링 스톤즈도 알렌 클라인과의 계약에 물리는 바람에 초기 곡들에 대한 상당수 저작권을 알렌 클라인에게 넘겨야 했다.
게다가 1969년 미국 순회공연의 절정을 장식하는 캘리포니아 알타몬트 고속도로에서 벌어진 무료 콘서트에서 롤링 스톤스의 호위를 맡았던 폭주족 Hell's Angels의 단원이 공연을 보던 흑인 청년 메레디스 헌터를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당시 미국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덕분에 사건의 순간 실제로 연주된 "Under My Thumb" 대신에 다큐멘터리 영화 "Gimme Shelter"에서 제목과 매칭시키기 위해 당시에 연주한 것으로 포장된 "Sympathy for the Devil"은 6년동안 연주하지 않았고 미국 순회 공연도 당분간 포기해야 했다. '알타몬트 공연' 항목 참고. 다행히 그 후 발매된 "Let It Bleed"가 상당한 성공을 거둬서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긴 한다.

3.2. 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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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그들이 라이벌이라고 여겨지던 비틀즈가 해체된다. 빈 왕좌를 차지한 롤링 스톤스는 그대로 '''록 음악계의 제왕이 된다.'''
1971년 발표된 "Sticky Fingers"와 1972년 발표된 "Exile On Main Street"는 그들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자리잡았다. 앤디 워홀이 디자인한 앨범커버로 유명한 "Sticky Fingers"는 그들만의 퇴폐적인 로큰롤이 담긴 명곡 "Brown Sugar"를 포함해 새로 영입된 '믹 테일러'와 '키스 리차즈'의 기타 솜씨를 엿볼수 있는 하드 록 넘버 "Can't You Hear Me Knocking, 영미권에서 가장 사랑받는 발라드 넘버 "Wild Horses" 등 다양하면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롤링 스톤스다운 음악을 확실히 보여주며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과 평론가들의 극찬을 모두 받았다. 연달아 발표한 두 명반으로 인해 롤링 스톤스는 비틀즈가 없는 록음악계의 1인자로 잠시 우뚝선다.
하지만 "Exile On Main Street" 앨범 녹음 중 믹 테일러와 다른 멤버들의 불화가 일어났고, 결국 믹 테일러는 1974년 밴드를 탈퇴한다. 믹은 탈퇴한 직후 롤링 스톤스에서 활동할 시기, 앨범에 수록된 곡들 대부분에 자신이 작곡한 리프들이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작곡자명에 재거/리처즈로 표기되어 있다면서 무단 도용으로 키스와 믹을 고소한다. 믹 테일러 탈퇴 이후, 1000:1의 경쟁률을 뚫고 론 우드가 롤링 스톤스의 새 기타리스트로 발탁된다.
론 우드 가입 이후 1979년까지 발표한 앨범들은 분명 풍부한 사운드와 감각을 가진 훌륭한 앨범들이었지만 이전에 발표한 명반들이 너무 대단한 나머지 이전에 비해 평론가들의 평가는 좋지 못했다.
다만 이 시기에 "Angie"라는 롤링 스톤스 대표 발라드 넘버를 빌보드 1위에 올려 놓았고, "Doo Doo Doo Doo Doo(Heartbreaker)"라는 롤링 스톤스 최고의 하드록 넘버 역시 히트시키는 등 싱글 넘버들로만 친다면 이 시기도 매우 훌륭한 곡을 쏟아낸 시기로 평가받는다.
그러던 도중 1978년 롤링 스톤스가 제대로 사고를 쳐버린다. 디스코가 빌보드를 장식하던 시기, 하드록/로큰롤 밴드였던 롤링 스톤스가 디스코에 입각한 앨범인 "Some Girls[26]"을 내놓은 것! 초특급 히트곡인 "Miss You"를 포함해, "Beast Of Burden", "Shattered" 등의 명곡들이 대거 실린, 롤링 스톤스 특유의 스타일과 디스코, 펑키, 컨츄리 사운드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이 앨범은 평단의 극찬은 물론, 거의 모든 곡이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대중들에게 사랑받는다. 당시의 최신장르인 디스코와의 크로스오버까지 완벽하게 성공시킨 롤링 스톤스는 "이젠 늙었다"라는 평단의 평을 노래로 화끈하게 날려버리고, 최고참이면서 가장 감각적이고 세련된 곡을 쏟아내며 화려하게 부활, 여전히 록씬의 1인자임을 다시금 확고히 했다.

3.3. 1980-90년대


"Some Girl"의 메가톤급 대성공에 이어 1980년 "Emotional Rescue"를 통해 상당한 호평을 이끌어내면서 위치를 확고히 다졌고, 1981년 발표한 "Start Me Up", "Hang Fire" 등의 록큰롤 명곡을 수록한 80년대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는 "Tattoo You"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면서 당시 순회공연이 당대 최고의 수입을 거두는 등 제 2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후 잠시 롤링스톤즈는 음악적으로 방황한다. "Undercover Of Night"가 수록된 1983년 앨범 "Undercover" 앨범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세상에서 가장 거칠고 자유로운 음악을 했던 롤링 스톤스가 점차 팝적인 성향을 띄고 심지어는 대세 장르를 선호하던 믹과 락을 고수하던 키스가 음악적으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9년 다시 의기투합해서 제작한 "Mixed Emotion"이 수록된 "Steel Wheels"가 다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멋지게 복귀하였다. 라이브 앨범 발표 직후 1994년에 발표한 "You Got Me Rocking" 등의 곡이 실린 "Voodoo Lounge" 앨범은 1995년 그래미 최우수 록 앨범"을 수상하였고, "Anybody Seen My Baby" 등이 수록된 1997년 앨범 "Bridges To Babylon" 역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제 3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98년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락밴드였던 메탈리카를 제치고 수익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3.4. 현재


지난 2005년 발표된 정규앨범인 "Bigger Bang"으로 다시금 세계에 롤링 스톤스 열풍이 불게 만들었으며, 앨범에 수록된 "Rough Justice", "Rain Fall Down" 등의 신곡들은 도저히 환갑을 넘긴 할배들의 노래라고는 믿겨지지 않을만큼 세련됨을 자랑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들의 콘서트는 언제나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며, 2006년 월드 투어의 일부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콘서트는 무려 수십만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2006년~2007년의 "The Bigger Bang" 투어로 단일 콘서트 역대 수익 1위와 아티스트 중 투어수익 총합 역대 1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50년동안이나 콘서트를 했으니 당연한걸지도 모른다. 다만 현재 단일 콘서트 역대 수익 1위는 U2의 360도 투어에 빼앗겼다.
이들이 가진 콘서트 관련 최고기록은 바로 브라질에서 열렸던 공연. 이 공연에서 "최소 100만~130만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무료공연(!)에다 카니발 등 축제를 좋아하는 브라질이라 가능한 숫자겠지만, 숫자만봐도 경이로울 정도다. 이 콘서트는 기네스북에 오른 "최다 관객이 모인 콘서트"로 선정되었다.
당연하지만 지금도 활동 중이다. 2016년 들어서는 남미에서 라이브를 돌고있다. 2012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베스트앨범 "Grrr!"을 발표했다. 위에 차례대로 언급한 명곡들이 3CD로 수록되어 있다.
2016년 3월 25일 쿠바에서 라이브 공연을 가졌다. 쿠바는 원래 고립주의 정책을 펼쳐서 서구 록음악이 단속되던 국가인만큼 엄청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일부 언론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방문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정도.
2016년 12월에 신보 Blue & Lonesome이 발매되었다. 자작곡이 아닌 기존 블루스 곡들을 리메이크한 앨범이다.
아직까지 건재하신데 2018년에 열린 월드 투어 'No Filter Tour'에서도 28회 공연에 200만명을 동원하며 총 2억5천달러의 수익을 벌여들였다.
2020년 미공개들이 추가된 Goats Head Soup의 Delux Edition이 재발매가 되었는데 이게 영국 차트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써 스톤스는 데뷔한지 60년이 다 되가는 현 시점에도 본인들이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줬다. 이쯤되면 이 할배들은 노익장을 넘어서 불사조급 괴력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4. 음악 성향


기본적인 음악적 뿌리는 어디까지나 로큰롤과 리듬앤블루스 및 블루스였다. 특히 척 베리는 키스 리처즈를 비롯한 멤버들의 가장 큰 음악적 우상이었다. 70년대엔 글램록과 디스코, 80년대엔 댄스뮤직 등 당대에 유행하는 최신 음악 트렌드를 받아들이며 유행에 재빠르게 적응,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동시대 뮤지션들 중에서는 키스 리처즈가 특히 좋아했던 뮤지션이 모드밴드였던 스몰 페이시즈의 리더 스티브 매리어트였다. 브라이언 존스, 믹 테일러 등이 빠져서 롤링스톤즈 멤버의 결원이 생길 때마다 키스가 스톤즈의 새 멤버로 스티브 매리어트를 꼭 데려오고 싶어했었지만, 자기보다 더 튀는걸 견제한 믹 재거의 반대로 영입이 번번이 무산되기도 했다.
키스 리처드는 인터뷰에서 롤링스톤즈를 제외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다섯 록밴드는 누구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Hillbilly Cats[27], Dave Bartholomew’s band[28], 비틀즈, 스몰 페이시즈, Humble Pie 이렇게 다섯을 꼽았는데, 이 중에 스몰 페이시즈와 험블파이 두 밴드가 모두 스티브 매리어트가 리더로 있던 밴드였다.
반면, 위 인터뷰에서 키스 리처즈는 사람들이 많이들 꼽는 레드 제플린, 더 후, 블랙 사바스의 경우는 모두 괜찮은 연주자들이긴 하지만 대단할 것까진 없는 밴드들이라고 평가절하하고 개인적으로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키스 리차드: 언더 인플루언스에 의하면 원래 롤링 스톤즈는 블루스 밴드를 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록큰롤을 연습해도 흑인 특유의 "롤"이 안돼서 결국은 록적인 성향에 템포를 좀더 빨리했더니 지금의 스타일이 됐다고 한다. 인터뷰에서도 본인은 계속 블루스 기타리스트이며 원래 록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5. 대표적인 악동 이미지의 밴드



5.1. 사건 사고


롤링 스톤스는 록 역사상 최고의 밴드 중 하나임과 동시에 사건사고를 저지르는 것도 1위를 달렸던 밴드이다. 불성실한 태도와 마약은 기본 섹스 스캔들, 폭력 어느 곳이든 빠지지않는다. 펄펄 날던 시절 그렇게 음주, 마약, 섹스 등 막장짓을 거리낌없이 했어도 현재 70세가 넘은 멤버들이 젊을적 못지않게 건강함을 유지한다는 건 어쩌면 신기한 일.[29]
위에 언급했듯이 알타몬트 공연에서 경찰도 무서워서 도망간다는 미국 최악의 바이커 갱단 '헬스 엔젤스'를 콘서트장 경비원으로 고용했다가 메레디스 헌터라는 18살 팬이 사망한 사건도 있다. 정확히 따지면 메레디스 헌터가 스테이지로 올라오려는 것을 헬스 엔젤스 경비원 중 한명이 밀어냈고 두번째로 올라오려는 것을 또 밀어내자 헌터가 리볼버를 꺼내들어 경비원이 그를 칼로 찌른 것이다. 이 장면은 다큐필름에 그대로 찍혔다. 메레디스 헌터를 죽인 헬스 엔젤스는 정당방위로 풀려났다.
전성기에는 공연 때마다 관중 난동이 많이 벌어지는 것도 유명했다. 동시대에 비틀즈가 여성팬이 많았던 것에 비해 롤링 스톤스는 청소년 남자 관객이 많았던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당시 65년 네덜란드 공연영상 . 근데 실은 롤링스톤즈 역시 (비틀즈만큼은 아니지만) 여성팬이 꽤 많긴 했다. 예를 들어 이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소녀팬들의 괴성이 장난 아니다.

5.2. 전설적인 바람기로 유명한 믹 재거


당대 최고의 섹스심볼답게 '악마'라고까지 표현되는 믹 재거의 극심한 여성편력과 바람기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그 자체로, 지금까지 4000명이 넘는 사람과 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30]. 다행히 나이 들어서는 사고를 안 친다고는 하지만 환갑을 넘어서도 여전히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하는 믹 재거를 보면 '개 버릇 남 못준다'는 말이 틀린게 아닌가 보다. 믹 재거의 여성 편력을 보면 사람으로서 평가는 정말 박해진다. 그나마 한가닥 양심은, 자기 자식들은 엄청나게 챙기는 편이라고 한다. 전처나 동거녀와의 관계에서 낳은 자식이라도 꾸준히 연락을 하고 결혼식에도 꼬박꼬박 참가한다고.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영국 귀족가문 출신[31]의 여성 가수 '마리안 페이스풀 (Marianne Faithful)[32]'와의 관계인데 믹 재거 때문에 인생 망친 대표적인 케이스로 꼽히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으나 이는 믹 재거 - 마리안 페이스풀 간의 관계의 극단성에 집착하는 대중 때문에 왜곡된 이미지이다.
기록에 의하면 믹은 마리안에게 자신이 작사한 곡인 "As Tears Go By"를 준 계기로 인연을 맺어[33] 그녀와 동거를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마리안은 이전에 결혼해서 자식까지 두었던 남편과는 이혼했다. 이 때 나이가 19세. 참고로 전 남편 John Dunbar도 가수였고, 1965년 5월에 결혼했다. 이 때 나이 18세. 아들을 그 해 11월에 낳았으니 속도위반으로 인한 이른 결혼이었다. 믹 재거와 동거를 시작한게 19세여서 이전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고 믹 재거와 바로 연인이 된 것처럼 묘사하는 글이 많다.
마리안 페이스폴은 마약왕이던 롤링스톤즈와 어울리다보니 자연히 마약에도 중독되었으며 롤링스톤즈 멤버들과의 집단 섹스 스캔들에도 연루되었다. 이게 이른바 레드랜즈 별장 사건이다. 1967년, 별장에서 매일같이 마약 혼음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경찰이 별장에 들이닥쳤는데, 여기서 키스 리처즈를 포함한 다수의 인물들과 마리안이 나체로 발견된다. 이 사건으로 마리안의 이미지는 완전히 박살이 났지만, 롤링 스톤즈는 악동기믹이 더 강해져서 오히려 인기가 더 올라갔다. 모든 비난은 유일한 여성 참가자였던 마리안에게 집중되었고, 음탕한 창녀라는 멸칭이 거의 공식화 되었다. 심지어 구글에서 이 사건 관련 자동검색어 중에는 'redlands marianne faithfull '''mars bar''''가 있는데, 저 마즈바는 영국의 유명한 초콜릿바 브랜드이다. 저 초콜릿 바와 관련된 더러운 루머[34]가 이 사건을 타고 돌면서 마리안의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망가졌다. 당시 마리안 페이스풀의 이미지는 그녀를 해픈 여자라고 비난하는 내용의 곡인 더 홀리스(The Hollies)의 Carrie Anne이 1967년 영국 차트에서 3위에 오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35] 하지만 믹재거와 키스 리차드가 밝힌바에 따르면 난교 파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마리안이 마약에 취한 채로 벌거벗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경찰이 도착했을때 마리안은 단지 샤워하고 나왔을 뿐이었다고. 또한, 그날 경찰이 오긴 하였으나 들어오기전 대문을 세게 노크하였고 믹 재거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어 맞이하였다고 하였다. 사실 경찰이 체포영장없이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 없으므로 믹 재거와 키스 리차드의 해명이 맞겠지만 이 소문은 페이스풀을 계속 따라다녔다.
믹 재거의 바람기와 스캔들 이후 충격받은 페이스풀은 믹 재거의 아이를 유산했고 결국 1969년 믹 재거에게 이별 통보를 내린다.[36] 마리안은 당시 마약중독이 너무 심해서 잠깐 정신병자에 노숙자로 전락하지만[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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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79년 BROKEN ENGLISH로 최우수 여자 락 보컬 퍼포먼스 부문 그래미 상 후보로 지명되며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다.
여담으로 마리안느 페이스풀은 코로나19에 감염되어서 병원에 입원했었으나 현재는 퇴원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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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 재거와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섹스 스캔들 하면 역시 마가렛 트뤼도와의 사건을 꼽아야 할 것이다. '''당시 캐나다 수상 피에르 트뤼도의 부인'''이었던 마가렛 트뤼도가 캐나다 공연을 왔던 유부남 믹 재거[38]에게 꽂혀서 미국까지 따라갔고, 이후는 뭐... 이 때 믹 재거는 '''나는 절대 그녀를 부추기지 않았지만 그만두라고 한 적도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딸의 친구와도 사귀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딸이 제발 그만둬달라고 부탁했지만 믹 재거가 '그 친구는 자신과 만나기위해 너와 친구가 된거다.'라는 사실을 딸에게 얘기해줬다고한다(...)
2016년, 72세의 나이로 27살의 미국 버지니아 출신의 발레리나 여자친구를 임신시켰다 한다.[39] 참고로 첫번째 자식은 70년 생이다.
마룬5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불러서 초대박을 터트렸던 "Moves Like Jagger"[40]에 나오는 '재거'가 바로 이 사람이다. 실제로 재거의 움직임은 일흔이 넘은 지금도 굉장히 꿀렁꿀렁하다. 이외에 케샤의 히트곡 "Tik Tok"에도 등장한다. 한마디로 믹 재거는 영미권 대중문화 전반에서 '''매력적인 나쁜 남자'''혹은 '''막장남''' 이미지의 상징으로 통한다.

5.3. 악담가로 유명한 키스 리처즈


키스 리처즈 역시 친구 못지않은 악동이었다. 오히려 믹 재거가 "내가 키스 리처즈의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막장이 되었다." 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더 막장이다. 위에 언급했듯이 브라이언 존스가 병원에 잠시 입원했을 때를 틈타서 브라이언의 약혼녀 아니타 팔렌버그와 몰래 불륜을 저질렀고 70년대에는 마약소지자로 검거되었다가 자선공연을 조건으로 풀려난 적도 있고 심지어 무허가 총기를 차에 싣고 다니다가 걸린 적도 있다. 각종 마약과 술 담배에 중독된 탓에 예전과 비교하면 얼굴이 정말 많이 망가졌다.[41][42] 또한 키스 리처즈는 캐리비안의 해적의 주인공 잭 스패로우의 모델이기도 하다. 덕분에 잭 스패로우의 아버지 역할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
키스 리처즈는 공식적인 인터뷰에서 50년대 로커빌리 뮤지션 등 신성불가침 수준의 선배급 뮤지션들을 제외한 타 뮤지션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한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악담가로 유명하다. 2015년 솔로 앨범을 발표할 즈음에 가진 인터뷰들에서도 모던록, 하드록, 헤비메탈, 힙합, 비틀즈의 페퍼상사 앨범 등 질문받은 모든 대상에 대해 예외 없이 악담을 늘어 놓았다. 모던록에 대해선 바운스나 싱코페이션이 부족한 형편없는 음악, 블랙 사바스메탈리카 등의 하드락. 헤비메탈은 그냥 거대한 조크에 불과하며, 힙합은 말만 많고 들을 건 없는, 귀머거리들을 위한 음악이라며 깠다. 페퍼상사 앨범은 똥이라고 깠으며, 그 페퍼상사 앨범에 영향을 받은 자기들의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앨범에 대해선 비틀즈가 저런 똥을 싼다면 우리도 그런 똥을 쌀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앨범이라고 말했다.
사적으로 친한 이들에게도 악담은 예외가 없었는데, 70년대 중반경에 같은 마약책에게 마약을 공급받으며 같이 환각파티도 자주 했던 마약 친구였던 레드 제플린지미 페이지에 대해서도 음악적으론 냉혹한 평가를 내려서 "기타리스트로서는 뛰어나지만 작곡자로서는 별로다"라든가 "대체 그가 작곡한 곡이 있기나 한가?"[43]라는 발언으로 폄하하였다.
심지어 오랜 동료인 믹 재거에 대해서도 속물적이라는 등 여러 차례 험담을 해왔다. 2010년에 발매된 키스 리처드의 자서전인 'Life'에선 믹 재거가 가진 섹스킹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불알만 크고 꼬추는 무척 조그맣다는 걸 폭로(...)해서 믹 재거를 분노하게 했다. 한마디로 나만 최고고 나머진 다 쓰레기다라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애티튜드.
그런데 인터뷰 등 저런 대외적인 멘트들은 비타협적이고 반항적인 록커라는 자신의 위악적인 이미지를 고려한 쇼맨쉽 차원의 요인도 어느정도 있으므로 저런걸 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저 위에 온갖 장르들과 뮤지션들을 모조리 깐 자극적인 악담도 2015년 솔로앨범 발매 때의 프로모션 언론 인터뷰들에서 뜬금없이 쏟아낸 것이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으로 볼 수 있는데, 어쨌든 그 덕에 영,미의 여러 매체마다 그 인터뷰가 메인 톱기사로 오르며 화제가 됐기 때문에 신보 앨범의 홍보는 성공적이었다.

6. 대중매체 속 롤링 스톤스


  • 머나먼 정글(Tour of Duty, 1987~1990)의 인트로로 'Paint It Black'이 쓰였다. 이후 이 곡은 전쟁물을 상징하는 곡 중 하나가 되었다.

  • 2014년 7월 31일 방영되었던 SBS 예능 프로그램 "백년손님"에서 남재현 일행이 캠핑카 여행을 떠났을 때 나온 브금Under My Thumb이다.
  • Windows 95의 영어권 국가 TV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Start Me Up"가 사용되었다.

  • 맨 인 블랙 3에서 J가 1969년으로 타임워프한 초반에 2000 Light Years From Home이 나온다.
  • 짱구는 못말려 16기 1화, 2화 '볼링 대결을 해요' 에서도 장미반 치타 친구로 나오는 아이가 본인은 롤링 스톤즈 음악만 듣는다고 언급한다.

7. 디스코그래피



7.1. 앨범




7.2. 싱글



7.2.1. 빌보드 핫 100 1위



7.2.2. 빌보드 핫 100 2위


  • 19th Nervous Breakdown (1966)
  • Start Me Up (1981)

7.2.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 Time Is on My Side (1964) - 6위
  • The Last Time (1965) - 9위
  • As Tears Go By (1965) - 6위
  • Mother's Little Helper (1966) - 8위
  • Have You Seen Your Mother, Baby, Standing in the Shadow (1966) - 9위
  • Jumpin' Jack Flash (1968) - 3위
  • Tumbling Dice (1972) - 7위
  • Fool to Cry (1976) - 10위
  • Beast of Burden (1978) - 8위
  • Emotional Rescue (1980) - 3위
  • Undercover of the Night (1983) - 9위
  • Harlem Shuffle (1986) - 5위
  • Mixed Emotions (1989) - 5위

7.2.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 Heart of Stone (1964) - 19위
  • Dandelion (1967) - 14위
  • Doo Doo Doo Doo Doo (Heartbreaker) (1973) - 15위
  • It's Only Rock 'n Roll (But I Like It) (1974) - 16위
  • Ain't Too Proud to Beg (1974) - 17위
  • Waiting on a Friend (1981) - 13위
  • Hang Fire (1982) - 20위

7.2.5. 그 밖의 싱글


  • It's All Over Now (1964) - 영국차트 1위
  • Little Red Rooster (1964) - 영국차트 1위
  • Living In A Ghost Town (2020)

7.2.6. 대표곡




[1] 믹 재거두꺼운 입술을 소재로 삼아 존 패슈(John Pasche)가 디자인한 롤링 스톤스의 로고. 롤링 스톤스는 몰라도 티셔츠 등 각종 머천다이징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 로고는 많이들 알아본다. 여담으로 나무위키 관련 틀에 이 로고와 유사한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다. [2] 롤링 스톤스의 코파카바나 해변 공연은 추정치 150만이며 최소 120만의 인원이 운집된 것으로 추산된다.[3] 1941년 생. 현 멤버 중 최연장자로, 본래는 재즈 드러머 출신이지만 60년 가까이 로큰롤 밴드의 드럼을 담당하고 있다. 드러머로 활동하기 전의 직업은 그래픽 디자이너. 여담으로 영입 일화가 꽤 골 때리는데, 원래 드럼을 잘 연주하기로 유명했던 와츠에게 브라이언 존스가 원래 직장보다 더 많은 돈을 줄테니 자신의 밴드에 가입하길 권유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영입 일화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그 당시 존스에겐 돈이 없었다는 것. 그런데 와츠가 망설이자 그가 밴드에 들어올 것 같이 분위기를 조성하고 원래 있던 드러머를 해고하는 강수까지 두며 와츠를 영입했다. 그럼에도 한번의 탈퇴 없이 쭉 활동하는 걸 보면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초창기 멤버 중에서도 연장자 라인에 속했고, 멤버들 중 가장 점잖은 성격이다. 다만, 훗날의 인터뷰에서 롤링 스톤즈의 전성기 시절에 알콜 중독이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망나니로 악명이 높은 믹과 키스를 데리고 60년간 밴드를 함께 한 것도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로 밴드의 무게중심 역을 맡고 있다. 후두암에 걸려 투병할 당시 키스가 '우리 밴드는 찰리가 드럼을 칠 수 있을때 까지 간다'고 언급했고 믹도 그가 평생공로상을 받을 때 프론트맨인 자기에게 쏟아지는 조명을 피해다녔을 정도로 멤버 전원에게 존중을 받고 있다.# 자유연애를 추구하고 염문이 끊이질 않던 그 당시 락스타들 중 드물게 그루피들의 성적 호의를 거절하며 배우자와의 신뢰를 지킨 사람 중 한명으로, 데뷔 전 결혼한 부인과는 지금까지도 함께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플레이보이 멘션에 스톤즈 멤버 모두가 초대받았을때 다른 멤버들은 모델들과 시간을 보냈지만 와츠는 휴 헤프너의 게임 방 으로 자리를 피했다는 일화가 있다.[4] 케샤, 마룬 5, JAY-Z 등의 노래에 등장하는 그 사람 맞다.[5] 1947년 생. 현 멤버 중 유일하게 원년 멤버가 아닌 멤버이며, 롤링 스톤즈에 들어오기 전에는 제프 벡, 로드 스튜어트와 밴드를 했다. 베이시스트 출신이라는 말이 있지만 베이스 기타를 잡은건 제프 벡 그룹 한정이다. 여담으로 더후피트 타운젠드, 프레디 머큐리와 같은 미대 출신. 지금도 전시회를 여는 등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부모 세대부터 영국에 정착한 집시 집안 출신이라고 한다.[6] 사담이지만 영입 일화가 사람마다 말이 다른데, 작가 김기범 저서인 '롤링 스톤즈 50년의 악행, 50년의 로큰롤'에 따르면 브라이언 존스를 대신할 기타리스트로 일찌감치 낙점되었지만, 같은 밴드 소속의 동명이인 멤버가 (우드가 받아야 할) 영입 제안 전화를 대신 받고 거절하는 일이 일어나 불발되었다. 그 뒤로 믹 테일러가 탈퇴하고 새 기타리스트가 필요했던 스톤즈의 작업실로 초대받아 멤버들의 협박과 회유(...)를 받고 새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우드가 스톤즈의 작업실에 놀러간 날 때마침 믹 테일러가 탈퇴를 선언해 그 자리에서 캐스팅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스톤즈의 영입 제안이 들어왔을때 그는 이미 '페이시스'(Faces)라는 밴드에 소속되어 있었고, 스톤즈에 합류하려면 페이시스를 탈퇴해야 했다. 결국 우드는 페이시스를 탈퇴하여 스톤즈의 정식 멤버가 된다. 이와 관련해서 페이시스의 보컬로 활동했던 로드 스튜어트가 우드의 스톤즈 가입 여부를 놓고 그가 스톤즈에 가입하지 않을거라며 사람들과 내기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페이시스는 해체하지만, 1986년 경 재결합한다.[7] 원년 멤버 중 하나로서, 40년대생 위주의 멤버 사이에선 유일하게 1936년 생으로 최연장자였다. 결성 당시 25세. 조용한 성격이였지만 기록벽이 있어 사소한 것도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자면 그루피라는 단어는 그가 멤버들과 잠자리를 함께 한 여성들을 지칭했던 것에서 유래된거라고. 은퇴 후엔 영국에서 'Sticky Fingers' 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보다시피 이름의 유래는 롤링 스톤즈의 동명의 앨범 Sticky Fingers. 멤버들과는 여전히 교류하며 지내는 듯.[8] 밴드 극초창기 시절 본래 기타를 맡으며 베이스로도 스위칭 가능한 만능이었으나, 기타 세션이 점차 정립되면서 베이스에 주력하던 멤버였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학업을 이유로 탈퇴하며 또다른 역사적인 밴드였던 프리티 씽스를 결성하기도 한다. 물론 결성후엔 기타로 복귀.[9] "I Wanna Be Your Man"은 후에 비틀즈의 앨범 With The Beatles에도 링고 스타의 보컬로 수록된다.[10] 본래 마리안느 페이스풀에게 준 곡이었지만, 비틀즈Yesterday의 히트에 편승하여 자기네들도 현악을 끼고 녹음을 한 것이다.[11] 영국 발매판에는 없고, 미국 발매판의 1번트랙으로 실려있다.[12] 믹 재거 본인도 이 곡의 가사를 셀프디스 했다. 후술할 알타몬트 공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 연주한 곡도 바로 이곡.[13] 물론 영국에서도 장발 남자들에 대한 차별이 꽤 있었다. 데이빗 보위 역시 이에 대한 반발도 했었다[14] 영국은 미국보다 몇백년 일찍 노예제 폐지를 했고 흑백 인종 차별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롤링 스톤즈와 비틀즈가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도 흑인 음악을 핍박하던 미국과 달리 영국인들은 인종에 대한 편견없이 흑인 윽악을 자유롭게 접했기 때문이다.[15] 가왕 조용필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기도 했다.[16] 그들의 노래 중 사회운동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곡이다. 1968년, 믹 재거는 런던에서 일어난 베트남 전쟁 반대시위에 참여했었고, 그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곡이다. # 심지어 믹 재거는 좌파 매거진 "블랙 드워프"에 직접 손수 쓴 이 곡의 가사를 보내기도 했다.[17] 브이 포 벤데타 엔딩 크레딧에 사용됐다.[18] 앨범커버는 '피 흘리게 하라(Let It Bleed)'라는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데, 옛날 축음기의 음관이 LP판 위에 올려져있고, 그 위로 양철로 된 테이프 상자, 시계판, 피자, 고무 타이어, 롤링 스톤스 멤버들의 미니어쳐 인형이 올려져있는 케이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 사진은 유쾌하고 귀엽다. 이것은 앨범의 가제였던 ‘자동 교환기(Automatic Changer)'를 시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앨범에는 거친 록과 대단히 폭력적인 내용의 가사, 조용하고 예쁜 컨트리 송 등이 뒤섞여 있다. 커버 이미지는 이런 앨범의 다채로움을 즐기라는 의미를 담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종 제목이 바뀌는 바람에 제목과 가장 동떨어진 커버를 가진 앨범이 되었다.[19] 브라이언은 밴드 초창기만 하더라도 블루스만이 진정한 음악이라고 생각할만큼 블루스를 좋아했다.[20] 믹 재거에 의하면 브라이언 존스는 평소 레논/매카트니, 재거/리차즈 같은 콤비 스타일을 부러워했다고 한다.[21] 이 시기 브라이언은 아니타 팔렌버그가 주연한 아방가르드 영화 <A Degree of Murder (Mord und Totschlag)>의 사운드트랙을 맡았다.[22] 키스는 자서전 Life에서 밝히기를 원래 자신은 모델인 린다 키스(Linda Keith)와 사귀고 있었는데 린다가 미국에서 지미 헨드릭스를 보고 반해서 키스를 차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린다에게 차여서 마음고생을 하고있던 중 브라이언이 모로코의 요양소에서 아니타에게 폭행을 가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런 그녀를 도와주려다 서로 눈이 맞아서 영국으로 같이 돌아온 것이 관계의 시작이었다고 한다.[23] 브라이언 사후, 키스 리처즈와 아니타 팔렌버그는 1980년까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 결별한다.[24] 1968년 즈음 촬영된 <Sympathy for The Devil>의 녹음 과정을 찍은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 되었는데 스튜디오에 오랜만에 찾아온 브라이언 존스에게 믹과 키스가 곡조를 흥얼거리고 이것을 들은 브라이언이 혼자 고개를 숙이고 리듬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확연히 보인다. 참고로 최종곡에서는 브라이언의 연주 분량이 삭제되고 니키 홉킨스의 피아노로 대체되었다.[25] 알렌 클라인은 이 당시 흩어진 저작권을 되찾아주는 음악계의 로빈 훗으로 유명했고 비틀즈와의 계약에도 성공한 상태였다.[26] 스티브 잡스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앨범으로 꼽았었다.[27] Scotty Moore, DJ Fontana, Bill Black으로 구성된 엘비스 프레슬리 전속 백밴드의 별명[28] 패츠 도미노와 리틀 리처드 등의 백밴드로 활동했던 밴드[29] 다만 전직 리더 브라이언 존스27세로 사망하였다.[30] 믹 재거를 유명하게 만든 표현이 '''4000명의 여자 그리고 400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했다'''라는 것이다. 믹 재거 본인은 숫자에 문제가 있다고 불평을 했다고.[31] 엄밀하게 따지자면 아버지 메이저 로버트 글린 페이스풀은 영국군 예비역 장교이자 런던 대학에서 이탈리아 문학을 담당하는 교수이고, 어머니 에바가 오스트리아 귀족가문 폰 자허마조흐 남작가문 출신이다. 일명 에리소 남작부인 에바 폰 자허-마조흐. 본인도 17세까지 수도원 기숙사에서 공부했다고 하는 그야말로 아가씨.[32] 메탈리카의 7집 "Reload"에서 "The Memory Remains"라는 곡 중간에 나오는 기묘한 목소리의 피처링이 바로 이 분이다. 원래 초기 곡을 들어보면 상당히 맑은 노래를 들을 수 있지만, 믹 재거에 엮여서 약에 찌들게 된 이후에는 노랫소리가 완전히 탁해진다.[33] 정확하게 쪼개자면, 마리안 페이스풀이 17살 때, 롤링스톤즈 론칭 파티에 갔다가 롤링 스톤스의 매니저를 만나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2년여 정도 별도로 가수 생활과 결혼 생활을 하다가 다시 믹 재거와 엮이게 된다.[34] 스톤즈 멤버들이 마리안의 성기에 '''초코바'''를 넣다 뺐다 하며 장난치고 있었고 마리안은 마약에 취해 해롱대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확인이 되지않았으며, 항간에서는 롤링 스톤스 멤버들과 마리안의 관계로 돌았지만, 일단 그 사건에 엮인 진짜 인물은 키스 리처즈 정도로 알려져 있다.[35] 로큰롤의 역사라는 다큐를 보면 작사를 했던 그래험 내쉬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부끄러워 감히 대놓고 마리안을 지칭할 수 없어 듣도보도 못한 캐리 앤이란 이름을 붙여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윗 내용과 다르게 동경했던 대상에 대한 노래라고 말했고 마리안 역시 인터뷰에서 '그 노래가 날 지칭하는걸 알았지만 새침하게 아닌척을 했다.'라고 말한바 있다.[36] 직후 믹 재거는 마사 헌트와 2년 정도 사귀었다. 둘 사이에 자녀도 한명있다.[37] 이 때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두었던 아들과 프란시스 베이컨 등의 도움으로 일주일만에 노숙 생활을 벗어나게 된다.[38] 당시 비앙카와 결혼한 시기였다.[39]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6&no=511308[40] 사실 이 노래는 마룬5의 보컬 애덤 러빈과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심사위원을 맡고있는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용 싱글로 발표했는데 엄청난 대박이 나버려서 마룬5와 아길레라 모두에게 최대 히트곡이 되었다. '나는 믹 재거같은 간지를 가지고 있으니 넌 나한테 빠질 수밖에 없을거임' 이런 내용의 노래. 우리나라 CF에도 자주 등장했던 노래이다. 여담으로 애덤 러빈도 안 건드려본 여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여성편력으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다.[41] 당장 그의 문서에 들어가보면 1964년과 1974년 비교사진이 있는데, 10년만에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크게 달라졌다.[42] 롤링 스톤스 멤버 중 가장 전형적인 미남에 가까웠던 덕분에 믹 재거 다음가는 얼굴 마담이었던 드러머 찰리 와츠는. 늙어서도 가장 얼굴이 안 변한 케이스. 다만, 키스 리처즈 못지않게 흡연을 하는 바람에 현재는 후두암 투병 중이다.[43] 지미 페이지의 상습적인 표절습관을 비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