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9세

 



[image]
'''이름'''
성왕 루이(Saint Louis)[1]
'''생몰년도'''
1214년 4월 25일 ~ 1270년 8월 25일 (56세)
'''재위기간'''
1226년 11월 8일 ~ 1270년 8월 25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푸아시
'''사망지'''
하프스 왕조 튀니스
'''시성식'''
1297년 7월 11일
1. 개요
2. 생애
3. 독실한 가톨릭 군주
4. 기타


1. 개요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무엇보다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아들아,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즉 온갖 대죄를 멀리해야 한다. 어떤 대죄를 범하기보다는 온갖 고통을 당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야 한다.

(...)

가난한 사람과 비참한 사람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네 힘이 닿는 데까지 그들을 돕고 위로해 주어라. 하느님께서 네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드려라. 그러면 한 층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리라. 네 수하 사람들을 언제나 정의롭게 대하며 좌우 어느 쪽으로건 기울어지지 말고 중도를 택하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못할 때에는 부자보다 가난한 자 편에 있어라. 너의 모든 수하 사람들 특히 성직자나 수도자들 가운데 평화와 정의가 깃들이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라.

루이 9세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Acta Sanctorum Augusti 5 [1868], 546)

프랑스 왕국의 국왕, 프란치스코회 제3회원, 가톨릭의 성인(聖人). 카페 왕조의 9대 왕으로 루이 8세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오랜 재위 기간을 누렸다.
별명은 "성왕(聖王) 루이"(Saint Louis)로, 죽은 후에 가톨릭 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시성되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그에 걸맞게 루이 9세는 실제로도 프랑스 역사상 가장 기독교적이며 도덕적인 왕으로 손꼽힌다.

2. 생애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모후 블랑카에게 섭정을 받았으나 친정을 한 이후에는 '''중세 시대의 완벽한 왕'''으로 칭송받았다. 감찰관을 파견하여 행정관을 감독하였고, 파리에 항구적인 법정인 고등법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너무 신앙심이 깊은 나머지 십자군 전쟁에 지나칠 정도의 열정을 쏟았는데 1248년 참가한 제7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그 이듬해에 포로가 되었으며, 1270년 제8차 십자군 전쟁 때는 튀니스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를 프랑스로 데려오기 위해서 시신을 삶아 살은 발라내고 뼈만 골라내어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루이 9세 치하에서 프랑스는 번영과 안정을 누렸으며, 서유럽의 중심 국가로 부상한다. 특히 루이는 스스로가 프란치스코회 제3회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프란치스코회의 이상에 공감하였기에 금욕과 청빈, 자선을 직접 실행했다. 복장과 식사에서 왕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청빈과 금욕적 태도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나병 환자와 맹인들을 왕실에서 세운 구호소에서 직접 돌봐주고 빈민들의 발을 씻어주는 등 중세인들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군주로 존경을 받았다.[2]
국외에서 참가한 십자군 원정은 성과가 없었지만, 내치는 성공해서 파리에 대학교를 세웠으며 알비 십자군에 참가해 남프랑스에 뿌리내렸던 이단인 카타리파를 소탕했다. 알비 십자군은 1229년에 성공했지만 아직 카타리파 잔당이 남아 있었는데, 루이 9세 때 잔당을 소탕하면서 14세기에 카타리파는 소멸했다. 이 과정에서 남프랑스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즉 루이는 개인으로서는 신심이 깊은 인물이고, 왕으로서는 통치 이데올로기로 그리스도교식 도덕 군주를 내세워서 신념에 따른 통치에 성공했고, 세속적으로는 부국강병을 이루었기에, 당대 그리스도교 군주가 보여줘야한다고 여겨지던 덕목들을 모두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3]
카페 왕조의 국왕이었기에 동시에 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의 시조에 해당하기도 한다. 발루아와 부르봉 모두 작위명일 뿐, 카페 왕조의 방계 집안이다. 그 것도 살리카법에 적용되지도 않는 부계 후손들이다. 한국,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개념에선 다 한 가문, 한 왕조인 셈. 이 사람의 자식들에게서 카페 왕조와 부르봉 왕조로 나누어졌다. 그의 차남 필리프 3세는 카페 왕조의 왕이 되었고 막내아들이자 6남 로베르는 클레르몽 백작이 되었는데, 그 로베르가 부르봉-라르샹보(Bourbon-l'Archambault) 시(市)를 다스리던 소영주 가문이던 부르봉 가문[4]의 상속녀, 베아트리스와 결혼, 아들을 낳으면서 그 아들인 루이가 부르봉 공작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그의 먼 후손인 앙리 4세가 부르봉 왕조를 창건했다. 더불어 자신의 후계자였던 필리프 3세의 막내아들, 발루아 백작 샤를의 아들 필리프 6세는 발루아 왕조를 창건했다.

3. 독실한 가톨릭 군주


[image]
걸인들의 발을 씻어 주는 루이 9세(14세기 채색 삽화)
프랑스 군주 중 유일하게 시성된 왕으로 미국의 세인트루이스 시, 프랑스의 생 루이 섬, 브라질의 상루이스 시 등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 루도비코'로 표기하고 있으며 축일은 8월 25일. 다만 현재 가톨릭에서 흑역사 취급하는 십자군 공적(알비파 십자군 포함, 다만 알비파 십자군 시절에는 아직 어려 섭정중이었다.)이 시성에 영향을 주었고 반유대주의자 였는데다가[5] 후손 필리프 4세가 막나갈때의 "너 조상 좀 본받아라"라는 교황청의 정치적 의도가 시성에 영향을 주었다. 정치적인 이유가 시성에 영향을 주고는 했기 때문이다.[6] 루이가 이미 살아있던 시절에 성인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신심이 매우 깊은 군주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시성이 사후 27년만에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의 신심과 후대의 정치적 상황 등이 모두 시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었겠지만 말이다.[7]
지금도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 에콰도르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대통령과 함께 통치자·정치인의 이상으로써 특별히 존경하는 성인이다. 전통 가톨릭 단체의 사제들이 강론 중에 자주 언급하는 성인 중 한명이라고 한다.

4. 기타


징기스칸 4에서 나왔는데 오리지널에서는 모든 능력치가 60대이며 특기도 애매하지만 PK에서 상향되었다. 능력치는 PK 기준 74/72/68.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플레이할 수 있으며, 확률이 랜덤이지만 플레이하기에 따라 게임에서도 성인으로 시성받을 수 있다.
[1] 영어로는 세인트 루이스, 프랑스어로는 생 루이[2] 이 부분은 네이버 지식백과를 출처로 했다.[3] 종교적인 수사법을 쓰지 않더라도, 가장 성공한 정치인이란 '정치적 이득'과 '신념'과 '국가의 번영'이 일치하는 유형이다. 루이는 이것을 해내었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군주'라 불린 것이다.[4] 이 때의 부르봉 가문은 카페 왕조와 아무 상관 없던 가문이었다. 로베르와 베아트리스가 결혼하면서 개창된 카페-부르봉 가문이 카페 왕조의 방계 가문이 된 것이다. 카페 왕조의 부계 후손이라지만 카페-부르봉 가문의 영지는 모계 조상인 부르봉 가문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다스리던 영지의 이름을 가문명으로 삼던 중세시대 작명 특성상 계속해서 부르봉 가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다만 더 정확히는 베아트리스의 아버지가 카페-부르고뉴 가문 출신이었기에 부르봉 가문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단순히 카페-부르고뉴 가문의 방계 가문의 영지 중 하나가 부르봉-라르샹보 시(市)였다.[5] "유대인과 토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칼을 휘드르는 일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나치시대 처럼 유대인에게 가슴에 노란별을 달고 다니라고 강제한것은 루이 9세의 조치가 원조다. 다만 한나 아렌트은 중세시절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한 반유대주의와, 이미 유대인이라고 할만한 특성이 사라진 사람들에게 발동한 근대의 반유대주의를 구분하여 둘의 동일시는 피하고 있다. 물론 이는 전자가 잘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후자가 그만큼이나 병맛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반면 20세기 종교학자 겸 유대인 랍비 이스마 엘보겐은 저서 독일 유대인의 역사에서 중세시절 십자군과 흑사병 시기 유대인 학살이 근대 이후의 반유대주의와도 크게 연관되었다고 본다[6] 물론 시성이 취소되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중세 사람이 시대적 한계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현대인과 동일한 책임을 묻기도 어렵고 루이가 당대의 군주들 중에서도 신심이 깊은 인물이였다는 것에는 크게 이견이 없다. 다만 십자군이 "루이의 신심을 돋보이게 하던 요소"에서 "루이의 신심이 보여주었던 안타까운 오류"로 평가가 바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7] 위에서 인용한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고 있는데, "물론 이 시성식은 이 당시 프랑스 왕인 필리프 4세와 교황 사이의 정치적 협상의 결과였지만 루이 9세가 당대인들의 생각에 충분히 성자(聖者)로 시성될만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는 점 또한 사실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