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가톨릭
1. 개요
전통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가톨릭교회 내 나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의 전례·교리를 따르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Traditionalist Catholic', 'Traditional Catholic', 'Traditional Roman Catholic[1] '이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Catholic Traditionalist'로 불리기도 한다. 가톨릭에서는 그냥 'traditionalist'라 해도 그 의미는 통한다. 한국어로는 '전통 가톨릭', '가톨릭 전통주의자', '전통 로마 가톨릭'이라고 부른다[2] .
전통 가톨릭 단체들의 공통점은 트리엔트 전례를 보전하고 가능한 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교리 해석을 고수[3]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새 전례·교황청·제2차 바티칸 공의회 쟁점을 두고 전통 가톨릭 단체 간에 상당한 입장 차이가 있다. 전통 가톨릭 단체들은 크게 교황청과 화해했거나 그 허락 하에 창립된 단체·교황청과 화해하진 못했지만 가톨릭교회 일부로 인정은 받는 단체·교황공석주의자 단체 세 부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어떤 부류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새 전례·교황청·제2차 바티칸 공의회 쟁점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물론 같은 부류에 속하는 전통 가톨릭 단체 간에도 다른 문제에 있어서 입장 차이가 발생하곤 한다.
전통 가톨릭 단체 중 제일 먼저 시작된 단체 중 하나이면서 규모 ·영향력 면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성 비오 10세회(SSPX)는 전례에 있어서는 트리엔트 전례만을 온전한 전례라고 보고[4] , 교리에 있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상당수''' 결정[5] 을 수용하지 않는다. 성 비오 10세회는 교황청과 화해하진 못했지만 가톨릭교회 일부로 인정받고 있다.
전통 가톨릭 단체 중 교황청과 화해했거나 교황청 허락 하에 창립된 단체들은 새 전례의 유효성과 합법성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체에 이견을 제기하지 않는다.[6] 그러나 자(自) 단체에서 운영하는 성당·공소에서는 가급적 트리엔트 미사만을 봉헌하고, 교리에 있어서도 가능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해석을 견지(堅持)한다. 또한 일반 교구 사제나 제도권 수도회 사제 가운데서는 성소수자·페미니즘·정치적 올바름 쟁점에 개방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성직자[7] 가 있는 반면에, 전통 가톨릭 단체 소속 사제는 거의 한결같이 이런 쟁점에 부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평균적으로 전통 가톨릭 단체 소속 사제는 일반 교구 사제보다 정치·사회적으로 보수적이다. 교황청과 좋은 관계에 있거나 있지 않거나 상관 없이 전통 가톨릭 단체들은 낙태 반대 운동이나 동성결혼 반대 운동 참여에 열심을 보인다.[8]
전통 가톨릭 단체 중 원죄 없으신 여왕 마리아회(CMRI), 성 비오 5세회(SSPV) 등 일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 전부를 부정하거니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 전반을 오염시키고 교황청을 변질시켰으며 비오 12세 후 교황들은 진정한 교황이 아니라서 '''현재 교황좌는 비어있다''''고 주장한다. '교황좌가 비어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 가톨릭인을 다른 전통 가톨릭인과 구별하여 '''교황공석주의자'''(Sedevacantist)라고 부른다.
전통 가톨릭 경향을 띄는 신자들은 더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새 전례의 남용을 걱정하고 교회 내 진보 성향 움직임을 우려하며 전통 전례를 소중히 여기는 정도의 신자도 있고, 신앙생활은 교구 성당에서 하고 있으면서도 교회법상 불법적인 전통 가톨릭 단체를 지지하는 신자도 있으며, 심지어 현 교황을 제대로 된 교황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교구 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도 있다. 베네딕토 16세 후 구미(歐美)의 보수 성향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신자가 다소 증가했다고 한다.
2. 단체 목록
전통 가톨릭 단체들은 교황청과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서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교황청과 좋은 관계에 있는 단체들(Good Standing with the Holy See groups), 교회법상 불법 상태에 있는 단체들(Irregular Status in the Canon Law groups), 교황공석주의자 단체들(Sedevacantist groups). 콘클라베주의자 교회들(Conclavist churches)은 스스로 가톨릭교회와는 별개의 교회를 표방하고 있다.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 그리스도 왕 사제회 등 교황청과 좋은 관계에 있는 단체들은 교황청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Ecclesia Dei) 위원회' 지도를 받으며 활동하다가 현재는 신앙교리성 지도를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9][10]
성 비오 10세회는 전통 가톨릭 단체 중 규모와 영향력에 있어 가장 큰데 교회법상 불법 상태이긴 하지만 가톨릭교회 일부로 인정받으면서 교황청과 화해를 위한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성 비오 10세회와 교황청 간 대화는 교황청 '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 위원회'에서 맡아오다가 2019년 1월 17일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의교서로 신앙교리성으로 이관되었다.[11]
교황공석주의자 단체들은 교황청과의 어떠한 대화도 하지 않고 있다.
2.1. 교황청과 좋은 관계에 있는 단체
교황청과 화해했거나 그 허락 하에 창립된 전통 가톨릭 단체들이다. '교황청과 온전히 일치한 전통 가톨릭 단체'라고도 한다. 이들은 새 전례의 유효성과 합법성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체에 이견을 제기하지 않는다.[12][13] 그러나 이 단체 중 상당수는 성 비오 10세회 출신에 의해 창립되었기 때문에 일각에서 오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단체 중 대부분은 성 비오 10세회를 전적으로 부정(否定)하려 들지 않는다. 이견 때문에 따로 단체를 창립하여 활동하지만, 성 비오 10세회의 1987년까지의 성품성사와 2007년까지의 트리엔트 미사 봉헌 등에 대해서는 두둔하는 입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2.1.1.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
1988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허가 없이 주교 4명을 성성한 것에 반대하여, 당시 성 비오 10세회의 소수 사제와 신학생들이 탈퇴해 창립한 단체이다. 창립과 동시에 교황청 인준을 받았다. 창립자들이 다 성 비오 10세회 출신이기 때문에 성 비오 10세회의 일부 행보를 비판하면서도, 천주교 일각에서처럼 성 비오 10세회 폄하 일변도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초대 총장상이었던 비지이 신부[14] 는 창립 후에도 성 비오 10세회 및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성품성사는 불가피했다고 옹호한 적이 있으며, 성 비오 10세회가 교구장의 허락을 받지 않고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한 것에 대해서도 불가피했다고 두둔한 바 있다. 2009년에는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 차원에서 성 비오 10세회 주교 4명에 대한 파문 제재 철회를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천동설을 주장하는 로버트 선제니스(Robert Sungenis) 박사가 전통 가톨릭 성향 가톨릭 신자로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의 지지자 중 한 명이다.
2.1.2. 그리스도 왕회
2.1.3. 착한 목자회
성 비오 10세회 프랑스관구장을 역임한 필리프 샤게리 신부가 참여한 단체로 유명하다. 필리프 샤게리 신부는 착한 목자회에 가입할 당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문제 제기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2.1.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인적 직할 서리구
주로 브라질 캄포스 교구에서 활동하는 단체로서, 창립자는 공공연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지지자로 이름이 알려진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이다. 한 때 성 비오 10세회와 마찬가지로 교황청과 화해하지 못한 단체였다.
창립자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Bishop Antônio de Castro Mayer, 1904년 6월 20일 - 1991년 4월 26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등과 함께 보수파 대의원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이들을 대표하는 활동을 했다. 그는 성 비오 10세회 창립 전부터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신앙 노선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인물이었고, 1988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허가받지 않은 4명의 주교 성성식에 참석하여 파문당했으며, 1991년 르페브르 대주교와 비슷한 시기에 선종했다.
마이어 주교는 1948년 주교로 성성된 후 1949년부터 1981년까지 브라질 캄포스 교구 교구장이었는데, 69년 새 미사 공포에도 불구하고 교구에서 새 미사 봉헌을 거부하고 그를 지지하는 상당수의 교구 사제들과 함께 트리엔트 미사 봉헌을 계속했다. 1981년 교황청 압력으로 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자신을 지지하는 교구 사제들과 함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회(Priestly Society of Saint John Mary Vianney)를 창립했다. 후임 캄포스 교구장 주교가 새 미사 봉헌을 거부하는 그와 사제들에게 교구 시설 사용을 금지하자 독자적인 성당·공소·신학교 등을 건립하며 사목 활동을 강행했다. 교구장 퇴임 후 그의 사목 활동은 적지 않은 캄포스 교구민의 지지를 받았는데, 1991년 6월 그가 선종한지 2달 뒤 집전된 사제회 소속 리치니오 랭겔 신부(Fr Licínio Rangel)의 주교 성성식[15] 에는 교구청 불참 지시에도 불구하고 5만 명이 넘는 교구민이 참석했다. 2001년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회는 협상 끝에 교황청과 화해했으며, 사제회 소속 리델 신부가 콜롬비아의 다리오 카스트리욘 오요스(Dario Castrillon Hoyos) 추기경에 의해 주교로 성성되었고, 사제회는 이름을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인적 직할 서리구'로 변경하였다.[16]
2.1.5. 그리스도의 군사들
2.1.6. 성 베네딕토 센터 (메사추세츠)
성 베네딕토 센터 (메사추세츠)
공식적으로는 교황청과 화해한 단체. 사제, 수사, 수녀가 소속된 수도회이다. '티 없으신 성모신심의 종들'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한다.
성 베네딕토 센터는 1941년 예수회 소속이던 레오나드 피니(Fr Leonard Feeney) 신부가 창립했다.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를 너무 엄격히 해석하여 불순명 문제로 예수회에서 제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인 1953년에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했다. 그는 파문된 후에도 그가 창립한 성 베네딕토 센터에서 활동했다.
성 베네딕토 센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전통 가톨릭 성향을 가진 단체가 되었다. 그렇지만 1972년 레오나드 피니 신부의 파문이 철회되었으며, 1975년에는 성 베네딕토 센터도 교회법적으로 합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베네딕토 센터는 트리엔트 미사를 고수하고 가능한한 교리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유지하는 등 계속 전통 가톨릭 성향을 가진 단체로 남았다.
1978년 레오나드 피니 신부가 선종한 후, 성 베네딕토 센터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파로 분열되었다. 한 분파는 메사추세츠 주 스틸리버에 위치해 있으며, 다른 한 분파는 뉴햄프셔 주 리치몬드에 위치해 있다.
창립자 레오나드 피니 신부는 생전에 아동을 학대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2.1.7. 성 베네딕토 센터 (뉴햄프셔)
성 베네딕토 센터 (뉴햄프셔)
공식적으로는 교황청과 화해한 단체. 사제, 수사, 수녀가 소속된 수도회이다. 1941년 레오나드 피니 신부가 창립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전통 가톨릭 성향을 가진 단체가 되었다. 1978년 레오나드 피니 신부가 선종하고 수도회는 두 파로 분열되었다. 뉴햄프셔 주 리치몬드에 위치해 있는 성 베네딕토 센터도 공식적으로는 교황청과 화해한 있는 단체이다. 그렇지만 소속 수도자의 반유대주의적 발언으로 언론의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메사추세츠에 본부가 있는 동명의 다른 단체와 마찬가지로 '티 없으신 성모신심의 종들'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한다.
창립자 레오나드 피니 신부는 생전에 아동을 학대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image]
성 베네딕토 센터 - 뉴햄프셔의 남녀 수도자들(수사, 수녀)
2.1.8. 전통라틴전례회
전통라틴전례회 문서 참조. '전통라틴전례회'와 이 단체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네이버 카페 '신앙의 신비' 회원과 탈퇴자 일부는 전통라틴전례회가 언제나 성 비오 10세회와 거리를 둬 왔던 것처럼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전통라틴전례회 현 회장은 창립 전부터 트리엔트 전례를 연구하며 인터넷 네이버 카페 '신앙의 신비'를 개설해 운영 중이었는데, 이렇게 활동하던 때에는 성 비오 10세회를 통해서 자료를 구입하고 성모무염시태성당 미사에 참례하며 토마스 오노다 신부에게 트리엔트 전례 관련 자문을 구하는 등 성 비오 10세회와 교류하곤 했다. 또한 전통라틴전례회 창립 후에도 2017년까지 회장과 다른 회원들이 종종 성모무염시태성당을 방문하는 등 교류가 없지 않았다. 물론 2017년 후에도 전통라틴전례회 회원이 개인적 차원에서 성모무염시태성당 미사에 참례했던 사례가 없지 않다.
전통라틴전례회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다른 전통 가톨릭 단체와 달리 교회법상 명백한 불법 상태에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교구 인가를 받은 단체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교구 인가를 받은 단체가 아니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처럼 교회법상 인가를 받지 않은 임의단체'''에 해당한다. 수원교구에서 이 단체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곧 인가된 단체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2.2. 교회법상 불법 상태에 있는 단체
'''가톨릭교회의 일부'''이지만 '''교황청과 화해하지 못한 단체들'''이다. ‘교황청과 온전히 일치되지 못한 단체’라고도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상당수 또는 전부를 부정하지만, 그래도 현 교황 및 교황청의 지도와 권위 자체를 인정하며, 현 교회 나머지 구성원과의 친교를 원착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해당되는 단체에서 행해지는 7성사 및 트리엔트 미사는 교회법상 불법이다. 성 비오 10세회의 경우 세례성사, 고해성사, 혼인성사는 교회법상 합법으로 인정되지만 미사성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교회법상 불법으로 판단되고 있다. 2009년부터 교황청 차원에서 성 비오 10세회의 미사와 7성사 참여 가/부에 대해서 딱히 이렇다 할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지 않다가 교황 프란치스코 때 일부 성사를 교회법상 합법이라고 인정했다. 이는 성 비오 10세회와의 원만한 대화를 고려해서 취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일부 사제 및 신학자가 성 비오 10세회를 포함하여 교황청과 화해하지 못한 전통 가톨릭 단체의 미사성제와 7성사 참여 가/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적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 차원에서 내놓은 가이드라인이지 교황청 차원의 공식적인 가이드라인이 아니다.
교구 차원의 경우 한국에서는 화해하지 못한 전통 가톨릭 단체에 대해서 입장을 발표한 적은 아직까지 없다.[17] 화해하지 못한 전통 가톨릭 단체 활동이 활발한 해외 교구의 경우, 일부는 이들 단체의 미사성제와 7성사에 참여하지 말라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하지만 다른 일부는 이들의 활동이 활발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 싱가포르나 고아의 경우처럼 몇몇 교구는 침묵하는 선을 넘어서 교구장 주교가 이런 단체 간부에게 선물을 보내거나 이들 단체 행사를 위한 교구 시설 대관을 허용하는 등 묵인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한다. 교회법상 불법이기 때문에 원래는 해서 안 되는 조치이지만, 교황청과 화해하지 못한 전통 가톨릭 단체에 대한 실제 태도가 세계 어느 가톨릭 교구에서나 동일하지는 '''않으며''', 이런 단체의 활동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이에 협조하는 교구들이 있음은 분명한 '''현실'''이다.
딱히 교황청과 화해하지 못한 전통 가톨릭 단체와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게 된 성직자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카를로 비가노 대주교를 들 수 있다.
교황청에서 일하다가 좌천되어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임을 요구하는 등 프란치스코 교황과 공개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카를로 비가노 대주교(Archbishop Carlo Maria Viganò)는 아타나시우스 슈나이더 주교(Bishop Athanasius Schneider)에게 보내는 2020년 6월 9일자 공개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략)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속았습니다. 우리는 선의에서, 에큐메니즘을 장려하는 자들의 의도를 선하다고 생각하여 너무 관대하게 봐주었습니다. 그런데 에큐메니즘은 나중에 교회에 관한 그릇된 가르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더 이상 가톨릭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보면 모호함이 이런 신앙의 훼손에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 간 회동으로 시작되었지만, 하나이신 참 하느님께서 쫓겨난 상태가 될 모종의 보편 종교로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이는 모두 오래 전에 계획되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오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참으로 가톨릭다운 믿음과 풍습에 대한 갖가지 배신의 원인을 캐다 보면 쉽사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 이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지금 모든 탈선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반면, 그 문헌들은 유례없이 난해하며, 교회의 그 어떤 다른 공의회도 하지 않았던 식으로 이전의 교회 전통과 모순됩니다.[18]
(중략)
2.2.1. 성 비오 10세회
2.2.2.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
한국에서는 이 단체가 교황공석주의자 단체라고 알려진 경우가 많다. 엄밀히 말하면 이 단체는 교황공석주의를 수용하지 않고 부정하며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황들도 교황청을 수행하는 교황으로 '''일단''' 인정한다.
그렇지만, 언뜻 보면 교황공석주의자와 크게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강도 높게 교황 및 교황청을 비판·비난할 때가 잦다. 또한 이 단체를 지도하는 주교 중 한 명인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19] 는 여성의 대학 진학과 사회 진출에 부정적 발언을 한 적이 있는 등 성차별주의자라고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여성 권리에 부정적이다[20] .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는 '교황공석주의자 아니냐?'는 외부의 의혹과 모함에 《Contra Cekadam》[21] 이라는 책을 써 적극 해명했다.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의 교황공석주의 비판
2.3. 교황공석주의자 단체
교황공석주의(Sedevacantism)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톨릭교회를 변질시켰기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후 교황들은 진정한 교황이 아니고 지금까지 교황좌는 비어있다''''''는 주장을 '''핵심'''으로 하는 이론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전통 가톨릭 성향 천주교 사제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으며, 이 이론을 처음 제기하기 시작한 사제들은 주로 미국이나 멕시코에 있었지만 서유럽에도 없지 않았다. 원래 '교황 공석(sede vacante)'은 교황 사후 다음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공석 기간을 의미한지만, 현재에는 교황공석주의론과 교황공석주의자를 지칭하는 단어로 더 자주 사용되고 있다. 교황공석주의의 지지자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응오딘지엠의 큰형 응오딘툭 대주교이다.
교황공석주의자( Sedevacantist)가 된 전통 가톨릭 성향 가톨릭 사제와 신자들은 곧 사제회·수도회 등 단체를 조직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성당을 건립하고 신학교를 설립해 사제를 양성했으며 평신도 자녀를 위한 미션스쿨를 설립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 비오 10세회·교구·제도권 수도회에서 이탈한 사제 일부가 교황공석주의자 단체에 추가로 가입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그러나 교황공석주의 이론을 지지하면서 교구나 제도권 수도회로부터 이탈한 사제 일부는 특정 단체에 가입하지 않고 소속 없이 개인으로 남았다.[22][23]
교황공석주의자 단체들은 교황청과 어떤 대화도 하지 않고 있다. 종종 교황공석주의자 사제가 전향해서 현대 가톨릭으로 간 경우가 없지 않지만, 반대로 현대 가톨릭 사제가 전향해서 교황공석주의자 단체로 가는 경우도 있다.
교황공석주의자들은 비오 12세 교황 선종 후부터 교황좌의 공석 상태가 시작되었다는 인식에 있어서는 콘클라베주의자(Conclavist)들과 비슷하지만, 교황공석주의자들이 공석이 된 로마 교황좌가 언젠가 "천주의 섭리"에 의해서 다시 채워지며 자신들의 단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상 상황에 대처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한 지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콘클라베주의자들은 로마 교황좌 자체가 끝났고 이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의 '교황좌(?)'가 이를 계승했다고 생각한다.
교황공석주의자 단체 소속 사제의 미사성제와 7성사는 교회법상 불법이나 유효하다. 이들이 하는 사제 서품과 주교 성성도 교회법상 불법이나 유효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공석주의자 단체에 있다가 제도권 천주교나 성 비오 10세회 등으로 이적하는 사제는 재서품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이들의 미사성제와 7성사 역시 유효성 자체는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성 비오 10세회와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 등과 달리 완전히 분파(Schismatist)로 취급 받는다.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나 그리스도 왕 사제회 등 교회법상 합법적인 전통 가톨릭 단체만이 아니라 성 비오 10세회는 물론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도 교황공석주의자와 교류하지 않으려 한다.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도 '교황공석주의자 아니냐?'는 의혹과 모함에 《Contra Cekadam》[24] 이라는 책까지 쓰면서 자신들이 교황공석주의자가 아님을 적극 해명한 바 있다.
2.3.1. 원죄 없으신 여왕 마리아회
교황공석주의자 단체. 원죄 없으신 여왕 마리아회 총장상인 마크 피바루나스(Mark Pivarunas) 주교는 1991년 응오딘툭(Ngô Đình Thục)[25] 대주교에게서 주교로 성성받은 모이세스 카르모나(Bp Moisés Carmona) 주교에게서 주교로 성성받았다. 그는 1989년 주교 서품을 받기 전 이 단체의 총장상으로 선출되어 2020년 12월 현재까지 총장상 직에 있다.
원죄 없으신 여왕 마리아회 본부는 미국 워싱턴 주 스포캔(Spokane)에 있는데 옛 예수회 건물을 매입하여 본부 겸 사실상의 주교좌성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단체에서 운영하는 학교와 출판사 등 부속 기관과 원죄 없으신 여왕 마리아 수녀회 본원도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부설 신학교로는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Omaha)에 위치한 하느님의 어머니 신학교(Mater Dei Seminary)와 아이다호 주 래스드럼(Rathdrum)에 위치한 성 요셉 소(少)신학교(St Joseph's Minor Seminary)를 운영한다. 원죄 없으신 여왕 마리아 수녀회는 스포캔 본원을 포함해서 6곳의 수녀원을 두고 있다.
2007년 원죄 없으신 여왕 마리아 수녀회(Sisters of CMRI)의 수녀 15명이 현대 가톨릭으로 전향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스포캔 교구의 허가를 받아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수녀회(the Sisters of Mary, Mother of the Church)를 설립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위와 반대로 교구 사제 몇 명이 전통 가톨릭으로 전향하고 이 단체에 가입한 사건도 있었다. 2013년 일리노이 주 락포드(Rockford) 교구를 떠난 마이클 오스왈트(Fr Michael Oswalt) 신부[26]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원죄 없으신 여왕 마리아 수녀회(Sisters of CMRI)에는 한국인 수녀가 1명 있다. 한국에서 성모무염시태성당에 출석하다가 미국 이민 후 입회하여 수녀가 되었다고 한다.
[image]
원죄 없으신 여왕 마리아회(CMRI)의 성당
[image]
원죄 없으신 여왕 마리아 수녀회(Sisters of CMRI)
2.3.2. 성 비오 5세회
성 비오 10세회 소속이었던 클래런스 켈리(Clarence Kelly) 신부가 역시 성 비오 10세회 소속이었던 다른 신부 8명과 함께 1983년 회를 탈퇴하고 세운 전통 가톨릭 단체이다.
클래런스 켈리(Clarence Kelly) 신부는 1993년 푸에르토리코의 아레시보 교구의 전 교구장이었던 알프레도 멘데스-곤잘레스(Alfredo Méndez-Gonzalez) 주교에게 주교로 성성받았다. 이후 클래런스 켈리 주교는 2007년 같은 회 소속의 요셉 산테이(Joseph Santay) 신부를 주교로 성성했다.
[image]
성 비오 5세회의 지도를 받는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의 딸 수녀회(Daughters of Mary, Mother of Our Savior)
2.3.3. 착한 의견의 어머니회
교황공석주의자 단체. 1985년 프란시스코 리코사 신부를 중심으로 한 몇몇 성 비오 10세회 이탈 사제들이 창립하였다. 이탈리아, 벨기에, 프랑스 등 주로 서유럽에서 활동한다.
이탈리아 북부 베루아 사보이아에 성 베드로 순교자 신학교(St Peter Martyr Seminary)를 창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주교로는 2002년에 주교로 성성받은 벨기에 헨트 출신 헤이르트 얀 스타위페르(Geert Jan Stuyver) 주교가 있다.
[image]
좋은 의견의 어머니회 성직자들
2.3.4. 성녀 대(大) 제르트루다
교황공석주의자 단체. 1989년 성 비오 5세회(Society of Saint Pius V, SSPV)에서 이탈한 사제들을 중심으로 창립되었다.
성 비오 5세회를 이탈하여 성녀 대 제르트루다를 창립한 사제 중에는, 성 비오 10세회에서 서품받은 사제였던 다니엘 돌란(Daniel Dolan) 신부가 있었다. 그는 1993년에 원죄없으신 여왕 마리아회(CMRI) 주교 마크 피바루나스로부터 주교로 성성받았다. 2007년에 그는 도날드 산본(Donald Sanborn) 신부를 주교로 성성했다.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 있는 성녀 대 제르트루다 성당(Saint Gertrude the Great Church)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플로리다 주 브룩스빌(Brooksville)에 지극히 거룩한 성 삼위일체 신학교(Most Holy Trinity Seminary)를 운영하고 있다. 언론·출판 회사인 진정한 회복(True Restoration)사를 운영 중이기도 하다.
다니엘 돌란 주교는 미국에서 하는 활동 외에도 유럽과 멕시코의 전통 가톨릭 단체들과도 교류하고 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도 사제를 파견했다.
[image]
지극히 거룩한 성 삼위일체 신학교
[image]
성녀 대 제르트루다의 성직자들
[image]
성녀 대 제르트루다에서 활동하는 사제가 나이지리아에서 봉헌하는 전통미사
2.4. 콘클라베주의자 교회
교황공석주의자로 머물지 않고 자신들끼리 '교황'을 뽑은 단체들을 콘클라베주의자(Conclavist)라고 한다. 교황공석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소수가 콘클라베주의자가 되었는데, 이들은 교황좌의 공석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로 "교황 선출"을 정당화한다.
콘클라베주의자 단체들은 스스로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부'가 아닌 별개의 '교회'라고 여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의 단체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통성을 승계(?)한 후신 교회'로 여긴다. 주요 콘클라베주의자 교회 중 하나인 '팔마리아 교회'의 공식 명칭이 '거룩한 얼굴의 카르멜 팔마리아 그리스도교회(Palmarian Christian Church of the Carmelites of the Holy Face)'인 점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콘클라베주의자 교회들은 자신들의 교회 명칭에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거나 '가톨릭'이란 명칭을 사용하더라도 그 앞에 '로마'가 아닌 다른 수식어를 붙여 사용한다.
콘클라베주의자들은 비오 12세 교황 선종 후 교황좌의 공석 상태가 시작되었다는 인식에 있어서는 교황공석주의자와 비슷하지만, 교황공석주의자들이 공석이 된 로마 교황좌가 언젠가 '천주의 섭리'에 의해서 다시 채워지며 자신들의 단체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비상 상황에 대처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한 지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콘클라베주의자들은 로마 교황좌 자체가 끝났고 이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의 '교황좌(?)'가 이를 계승했다고 생각한다.
2.4.1. 거룩한 얼굴의 팔마리아 그리스도교회
일명 팔마리아 교회로, 콘클라베주의자 교회 중에서 대외적으로 가장 인지도가 높은 교단이다.
2.4.2. 무한한 사랑의 사도
캐나다의 퀘벡 주에 교황좌를 두는 콘클라베주의 교회로 공식 명칭은 '''무한한 사랑의 사도'''(Apôtres de l'amour infini)이며, 일반적으로는 콜랭파(Collinites), 콜리나이트 교회 등으로 불린다. 1952년 프랑스인 가톨릭 수사 신부인 미셸 콜랭이 설립했는데, 원래는 단순한 가톨릭 수도회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반발하는 의미에서 콜랭이 교황을 자칭하면서[27] , 공식적으로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했다.
그 뒤 1968년에 캐나다 태생 주교 장-가스통 트랑블레가 콜리나이트 교회 내 미셸 콜랭의 반대파들을 결집시켜 교황을 자칭하면서[28] , '''대립교황의 대립교황'''이 존재하는 희한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때 콜랭이 아직 교황이었던 상황이었으므로, 교회 전체가 콜랭 지지자와 트랑블레 지지자로 분열되었다. 하지만 1974년에 콜랭이 트랑블레에게 교황직을 넘겨주기로 하면서 분열은 일단락되었다.
그래서 교회가 안정되나 싶었으나, 1977년과 2001년에 캐나다 검찰이 트랑블레를 아동 성범죄 및 납치 및 아동 학대 등의 혐의로 기소하면서 교회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특히 1977년 기소 건에서는 6개월 간 구속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고, 2001년에 같은 혐의로 재차 기소되자 콜리나이트 교회는 크게 기울어졌다. 결국 2011년에 트랑블레가 경찰 조사 도중에 지병으로 쓰러진 뒤 병원에 후송되었으나 끝내 사망한 뒤로 이들은 새 교황을 뽑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가톨릭교회가 아닌 교회의 '자칭 교황'이라지만, 명색이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자가 도덕적/법적으로 용납 못할 추태를 저질렀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4.3. 기타
콘클라베주의자 교회에는 ‘콜리나이트 교회’와 ‘팔마리아 교회’ 외에도 미국의 몬태나 주에 교황좌를 두고 있는 '진정한 가톨릭교회'(True Catholic Church) 등 여러 교회가 존재한다. 그러나 팔마리아 교회를 제외하면 지속적으로 '교황 선출'을 하고 있는 교단은 별로 없다.
3. 현대 가톨릭과의 차이
현대 가톨릭과 전통 가톨릭의 차이점은 크게 1.미사·교리, 2.타 교파·타 종교, 3.정치·사회 관련, 4.정치·사회 관련으로 분류해서 살펴볼 수 있다.
3.1. 미사·교리 관련
전통 가톨릭인은 트리엔트 미사를 중심으로 한 전통 전례를 매우 중시한다. 그들이 현대 가톨릭 계열 성당에 갔을 경우 특히 눈여겨 보는 것이 '''전통 제대'''[29] 와 '''장궤틀''' 설치 여부다. 장궤틀이란 성당 의자에서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게 무릎을 받치는 용도의 밑에 있는 판을 말한다. 전통 가톨릭에서는 미사 중에서든 기도할 때든 이 무릎 꿇는 자세를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흠숭으로 여겨 자주 하곤 하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전례가 대폭 변화하면서 기도에서든 미사에서든 전에 비해 장궤를 거의 안 하게 되었다. 물론 성당 장궤틀 설치 여부는 나라마다 그리고 교구마다 달라서, 장궤틀이 남아 있는 성당도 있고 그 중 미사성제 거양성체 때 장궤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전통 가톨릭 신자들은 장궤틀이 남아있는 본당은 전통을 중시한다면서 좋아하고, 반면 장궤틀 없는 본당[30] 은 현대주의에 물들었다며 부정적으로 본다.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는 성체성사에 방식에 있어 '''입영성체'''만을 고수한다. 이들은 성체를 이루는 사제가 아닌 일반 평신도가 성체를 손으로 다룬다는 것 자체에 부정적이다. 교황청과 화해하지 못한 전통 가톨릭 단체나 교황청과 화해한 전통 가톨릭 단체나 모두 자(自) 단체에서 운영하는 성당·공소에서는 일체 손영성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自) 단체에서 운영하는 성당·공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도 손영성체를 일체 허용하지 않기를 고집한다. 물론 전통 가톨릭 성향 신자들도 손영성체에 부정적이고 이를 터부시한다. 이는 장궤 입영성체를 터부시하는 풍조가 만연해있는 한국 천주교 신자에게는 생소한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한국 천주교에서 장궤 입영성체에 부정적인 원인으로 베이사이드 성모나 나주 성모를 추종하는 이단 및 교황청과 화해하지 못한 전통 가톨릭 단체를 지목한다. 그러나 그런 집단의 존재가 한국 천주교 전반에 만연한 장궤 입영성체 거절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교황청 문헌 어느 곳에서도 장궤 입영성체를 거절할 수 있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하면, 이는 엉뚱한 데에 책임을 전가하는 매우 그릇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때 베이사이드 이단이 횡행했던 미국에서조차 장궤 입영성체가 금기시된 적이 없음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등장한 '''비정규 성체분배자'''[31] 제도에 대해서도 손영성체와 마찬가지 맥락에서 부정적이다. 전통 가톨릭에서 비정규 성체분배자 제도에 부정적인 이유는 물론 성체를 이룰 수 없는 평신도가 성체를 분배한다는 점도 있지만 이 제도가 사제가 될 수 없는 여성 평신도의 성체분배로 이어진다는 점도 있다. 이 제도 도입이 '여성 평신도가 복사를 할 수 있고 비정규 성체분배자가 될 수 있다면 사제라고 왜 될 수 없을까요?' 하는 그릇된 생각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오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교황청과 화해한 전통 가톨릭 단체 사제들도 손영성체와 비정규 성체분배자 허용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울러 현대 가톨릭에서 '''양형 영성체를 남용'''을 우려한다. 단형 영성체만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영하는 것이고 양형 영성체와 다른 점이 없음에도, 현대에는 그저 “신자들로 하여금 성혈을 영하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목적만으로 양형 영성체가 남용되면서, 양형 영성체 매뉴얼을 엄격히 지키지 않는 사제들도 늘어나고[32] 이 때문에 성체성혈이 고의·과실로라도 모독될 가능성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 가톨릭 신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 번역된 기도문과 성경을 선호하며 또한 상당수가 라틴어 기도문과 라틴어 불가타 성경 독서를 좋아한다.[33] 라틴어 기도문과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선호하는 이유는 가톨릭교회에서 오랫동안 공인하고 사용한 라틴어 기도문과 라틴어 불가타 성경이야말로 번역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오류의 위험이 끼어들 여지가 없이 신앙의 온전함을 담보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는 연구 목적 외에는 개신교 성경과 에큐메니즘 성경을 사용하지 않는다.[34] 성 비오 10세회는 개신교 성경 열람을 금지하며 평신도가 개신교 성경을 선물받았을 경우 폐기처분하거나 사제한테 폐기 처분을 부탁하라는 지침[35] 이 있다.#
전통 가톨릭 단체들은 전반적으로 성서비평학에 부정적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고등비평이라고 하는 역사비평에 부정적이다. 그래서 현대 가톨릭 성서 해석을 수용하지 않는다. 대체로 본문비평에도 부정적인 편이라 신약성경 현대 번역본들의 기반이 된 시나이 사본을 신뢰하지 않고 교부들이 비잔틴 사본을 신뢰하며, 성서 해석에 있어 역사비평 관점을 배척하고 다른 성서 해석[36] 을 수용하고 있다.[37]
3.2. 비가톨릭 그리스도교·비그리스도교 관련
'''개신교'''와 '''성공회'''에 대해서는 원론적으로 '이단 열교' 내지는 '교회적 공동체'[38] 로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현대 가톨릭이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라는 보다 순화된 호칭으로 부르며 성경 공동번역에 참여하거나 일치기도회를 갖는 등 좀 더 진보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반면에 전통 가톨릭에서는 개신교 자체를 명백한 '이단 열교'로 인식하며 개신교와의 교류와 접촉 일체에 굉장히 부정적이다. 한국에서도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의 에큐메니즘 운동에 부정적인 천주교 신자는 십중팔구 전통 가톨릭 성향의 신자들이다.[39] 그 외에도 떼제기도·성령기도·생활성가 등 개신교 영향을 받아 최근에 형성된 현대 가톨릭 신심과 문화에 부정적이다. 개신교 영향을 받은 기도보다는 가톨릭교회의 인가를 받은 성사·준성사·기도문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즉, 잊혀져가는 전통 가톨릭 신심을 보전하기도 바쁜데 남의 것을 들여올 필요가 없다는 취지에서 부정적이다.
현대 가톨릭은 에큐메니즘 교회 일치 운동 차원에서 '''타 교파와의 공동 기도회나 공동 예배'''에 신자의 참여를 조건부로 허용하고 있으나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는 공인된 일치기도회 참여조차도 완전히 금지한다.
전통 가톨릭 단체 중 교황청과 화해하지 못했거나 교황공석주의자 단체인 경우에는 개신교를 '이단 열교' 차원을 넘어서서 '프리메이슨 세력' 혹은 '사탄에 포섭된 집단'으로 본다.
그렇지만 타 종교 및 교파 신자에 대한 가치관이나 구원관에 있어서 현대 가톨릭이나 전통 가톨릭이나 교리적 요소와 교회법상 위치에서는 차이가 없다. 현대 가톨릭도 지난 신학을 부정하지 않기에 정교회를 분파(Schismatist, 한자로 떨어져나갈 '이(離)'를 쓴다.)[40] 로, 개신교를 이단으로 보는 것은 동일하다. 다른 점은 대외적 표현이나 사목적 협력 등의 사안이다. 현대 가톨릭은 여기서 좀 더 유해진 것이고 전통 가톨릭은 이전과 같이 완고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현대 가톨릭에서는 교회 내 진보 세력을 중심으로 교회의 유연한 수사(修辭)와 사목적 지침을 공식 교리라도 되는 양 설파하는 움직임이 적지 않다.
원래 가톨릭은 공의회 전에도 구원관에 있어서도 파문당했다가 철회된 레오나드 피니 신부와 그의 성 베네딕토 센터 등을 제외하면 복음을 불가항력적으로 모르는 채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선량한 비신자의 구원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아왔다. 때문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를 해석함에 있어서의 방법론도 사실 현대 가톨릭이나 전통 가톨릭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전통 가톨릭은 대외적 표현이 더욱 강경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내 진보파에서는 비신자의 구원 가능성을 종교다원주의 수준으로 지나치게 폭넓게 해석해와 이 때문에 문제가 되어왔다.
3.3. 정치·사회 관련
자유민주주의 등 '''정치제도나 세계 근현대사'''에 대한 태도도 (미묘하게) 다르다. 현대 가톨릭은 당연히 자유민주주의를 긍정한다.[41] 전통 가톨릭 성향 신자도 자유민주주의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 경우가 다수지만, 강경한 신자는 이를 현대주의의 오류 내지는 사탄[42] 의 작품이라 하여 이에 부정적이다.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제들은 프랑스의 루이 성왕(聖王)(Louis IX, 1214-1270), 에콰도르 전 대통령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Gabriel García Moreno, 1821-1875) 대통령, 포르투갈 전 총리 안토니우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 1889-1970) 등을 통치자·정치인의 모범으로서 존경한다.
전통 가톨릭 단체는 일반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대해 부정적이며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이 교과서에서 피상적으로 가르치는 대로 장밋빛 미래를 가져온 시민혁명이 아니었으며, 계몽주의의 오류로 인해 교회가 참담한 수난을 겪고 선량한 농민과 무고한 성직자가 카다란 피해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연장선상에서 루이 16세 또한 무고한 희생자로 간주한다.[43] 또한 자유민주주의·무신론 등을 계몽주의·현대주의 오류의 결과물로 규정하고 가톨릭 왕정 체제나 친(親)가톨릭 공화정을 이상적 체제로 삼는 성향이 있다.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정권 시기를 긍정하는 성향을 보인다.
전통 가톨릭 신자는 온건하면 가족 가치·성적 정결을 중시하고 상대주의·종교다원주의에 반대하는 정도지만[44] 강경하면 종교의 자유·표현의 자유·결사의 자유·정교분리 같은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진리인데 왜 오류[45] 를 허용하는가?"''' 하는 입장을 가진다. 그 중 노골적인 일부는 아예 표현의 자유(언론·출판의 자유 포함)·종교의 자유·양심의 자유 등을 철폐(=자유민주주의 부정)하고, 국교를 가톨릭으로 규정(=정교분리 부정)하고, 온갖 세속 법령을 전통 가톨릭 교리에 맞게 전면 개정[46] 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다. 가톨릭교회가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적극 개입해서 대중을 ‘오류’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구령(救靈)[47] 을 위한 교회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8]
현대 가톨릭은 '사형은 개인의 불가침성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고 가르치며, 전(全) 세계의 사형제 폐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분명히 표명했다. 2018년 8월 1일에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수정[49][50] 하여 사형 반대 조항을 포함시켰다. 그렇지만 낙태와 달리 가톨릭 신자 개인이 사형제에 찬성한다고 해서 교회가 파문 등으로 제재하지 않는다. 사형은 무죄한 태아·배아를 살인하는 낙태와 다르게 죄지은 사람에게 처벌의 형식으로 가해지기 때문에 과거에는 흉악범 처벌을 위한 필요악이라는 인식이 신자 사이에서도 다수였으며 지금도 사형제를 지지하는 신자가 적지 않다. 현대 가톨릭에서도 교리서 개정 관련하여 스스로 '전통적 가르침은 ··· 인간 생명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유일하고 가능한 방법이 오로지 사형뿐이라면, '''사형에 의존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과거 입장을 시인한 바 있다. 현대 가톨릭의 사형제에 관한 인식 변화는 '현대의 발전한 사법제도와 대외적 여건 등으로 인하여 범죄인을 사회와 격리시킨다는 목적 달성이 충분해졌기에 필요악인 사형의 필요성은 사라졌다'는 인식의 대두가 있었다. 그러나 전통 가톨릭은 현대 가톨릭의 사회 교리를 따르지 않고[51] 과거에 교황·교황청에서 사형을 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제를 필요악으로 찬성한다. 강경한 경우 사형제 폐지는 '흉악범은 사형에 처하라'는 신법(神法)을 거스르는 조치라고 주장한다.
전통 가톨릭 단체와 신자는 사해동포주의[52] 에 반대한다. 나라들이 갈라져서 상호작용[53] 하는 것이 창조질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대하는 데는 프리메이슨 음모론[54] 의 영향도 있다.
3.4. 성소수자·페미니즘 관련
동성애자[56] 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전통 가톨릭은 현대 가톨릭보다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현대 가톨릭에서는 성생활을 하고 있는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영성체를 금지하지만, 미사 참례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통 가톨릭에서는 성생활을 하고 있는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영성체는 물론 미사 참례 자체를 금지한다. 그렇지만 동성애 성향 자체에 대해서는 전통 가톨릭이나 현대 가톨릭이나 미사 참례와 영성체 자체를 못할 죄로 보지 않는다. 전통 가톨릭에서도 성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미사 참례와 영성체 둘 다 허용하고 있다. 현대 가톨릭은 친(親) 성소수자 성향의 진보주의자와 반(反) 성소수자 성향의 보수주의자가 혼재되어있는 반면에 전통 가톨릭은 일관된 반(反) 성소수자 성향을 띄고 있으며 동성결혼 반대 운동 등 반 성소수자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전통 가톨릭은 또한 트랜스젠더 성전환 수술과 트랜스젠더 관련 젠더 이론에도 부정적이다. 수술한 트랜스젠더는 되돌릴 수 없으니 재수술을 요구하지 않지만 법적 성별 정정을 한 경우에는 원래 성별로 정정을 요구한다. 전통 가톨릭 성향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대교구 보좌주교 아타나시우스 슈나이더 주교(Bp Athanasius Schneider)[57] 는 젠더 이론을 "악마로부터 나온 것"이라며 강한 어조로 비난하기도 했다.
[image]
페미니즘 관련 인터넷 네이버 카페 '신앙의 신비' 회원들의 댓글 반응
페미니즘과 그 운동 자체에 부정적이다. 페미니즘 이론 자체에 부정적인 입장은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 등 가톨릭교회 지도층[58] 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실제로는 페미니즘 자체[59] 의 정당성·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는 입장[60] 이 교회 내에 만연해있음에 반해서 전통 가톨릭 단체[61] 들은 한결같이 페미니즘과 그 운동의 정당성·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전통 가톨릭 성향 가톨릭 신자 가운데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 등 강경한 입장을 가진 사람은 여성의 대학 진학과 직업 선택의 권리에도 부정적이어서[62] 성차별주의자 아닌가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다.
페미니즘 반대 기조(基調)가 전통 가톨릭 단체 내에서 워낙 확고하기 때문에 전통 가톨릭 내에서 관련 쟁점으로 이견이 제기되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다. 물론 여성사제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움직임도 없다. 페미니즘 관련 쟁점으로 불만을 품는 신자는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조용히 공동체를 떠난다고 한다.[63]
3.5. 사제 양성
전통 가톨릭 단체들은 사제 양성을 대학교(University)가 아니라 신학교(Seminary)에서 하는데, 당연히 오직 사제가 되고자 하는 미혼 남성만이 입학할 수 있으며 여성 입학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는 현대 가톨릭에서 가톨릭계 대학교들의 신학과에 여성을 포함한 평신도를 위한 학사·석사·박사 과정[64] 을 마련해둔 것과는 대조적이다.[65]
전통 가톨릭 단체들은 가톨릭 주류와 다르게 대학교(University) 신학대학이 아니라 옛날처럼 미혼 남성 성소자 입학만을 허락하는 신학교(Seminary)에서 사제를 양성한다. 전통 가톨릭 단체의 신학교(Seminary)는 6년이나 7년 '''학사'''과정으로 커리큘럼이 짜여있으며 졸업과 거의 동시에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만 25세에 사제서품 받는 경우도 드물지만은 않다.
물론 신학교 입학을 위해서는 가톨릭 세례를 받은 미혼 남성이어야 하며 성당·공소의 미사·공소예절에 상당기간 성실하게 참례해야 하고 출석 성당이나 공소를 담당하는 사제의 허락이 필요하다. 전통 가톨릭 단체는 예비신학생 반을 운영하지 않으며, 성 비오 10세회에서는 예비신학생을 수련원이나 본당 사제관에서 1-2년 거주하게 하면서 식별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있다.
성소자에게 조당이 있으면 전통 가톨릭 단체 담당 주교로부터 관면을 받아야 한다.[66] 나이 제한은 없는 경우가 많지만, 대신 성 문제 등 그동안의 생활을 엄격하게 따지는 편이다. 그래서 만 25살에 서품 받는 사제도 있지만 이 경우처럼 예순 넘어 서품 받는 사제도 있다.[67]
전통 가톨릭 성향 일부 수도회[68] 는 신학교 교육과정 없이 종신서원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사제서품을 받는다.[69]
4. 복고 가톨릭교회(Old Catholic Church)와의 혼동
종종 전통 가톨릭과 복고 가톨릭교회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전통 가톨릭과 복고 가톨릭교회는 분명히 다른 집단이다. 두 집단의 구조와 교리가 다를 뿐 아니라, 두 집단이 형성된 시기와 맥락이 다르다. 복고 가톨릭교회는 진보적 입장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이견을 가지고 독립하여 나왔지만, 전통 가톨릭 단체들은 보수적 입장에서 로나 가톨릭교회 주류에 이견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복고 가톨릭교회는 1930년대 이미 성공회와 상통하고 1990년대에는 여성 사제 서품을 수용하는 등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진보 성향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70]
[1] 전통 가톨릭 신자가 흔히 자신들을 지칭할 때 이렇게 부른다.[2] 가톨릭 언론이든 비(非) 가톨릭 언론이든 외국의 관련 언론 보도를 보면 이런 집단에 대해 교회법상 지위를 떠나서 으레 'Traditional Catholic', 'Traditionalist Catholic','Catholic Traditionalist', 'Traditionalist'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그 뒤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서 설명하는 경우는 있다.[3] 이는 소위 '교회법상 합법적인' 전통 가톨릭 단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4] 바오로 6세 전례가 유효하지만 그 구성에 있어서는 예전(禮典)에 관한 개신교와 유사한 사고방식으로 천주교인을 유도할 수 있다고 하면서 흠결이 있는 전례라고 주장한다.[5]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성 비오 10세회가 공식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사항을 전부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의회 상당수 결정사항을 거부하는 것은 사실이다.[6] 비공식적으로는 교회법상 합법적인 전통 가톨릭 단체 내에서도 새 미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부 문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특히 성 비오 10세회 출신에 의해서 창립된 단체의 경우 그런 움직임이 계속 있다고 한다. 물론 교황의 통상 교도권 수행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자면 교회법상 합법적인 전통 가톨릭 단체들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허용하거나 촉구한 여성 세족례와 일정 나이 미만 사생아에 대한 세례성사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7] 대표적인 예로 한국에도 일부 저서가 번역된 미국인 예수회 사제 제임스 마틴 신부. 그는 단순히 성소수자 쟁점에 '열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미국에 있는 소위 '성소수자 가톨릭 신자 단체'들과 연대하여 교구나 주교회의에 이런저런 압력을 넣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8] 일례로, 2013년 프랑스에서 동성결혼 입법에 반대 운동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전통 가톨릭 단체들은 열성적으로 참여했다.[9]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는 1990년대 초 총장상 선출 문제로 '르페브르의 비오 10세 형제회원 재일치(Ecclesia Dei) 위원회'와 갈등을 빚은 적이 있었다. 착한 목자회의 필리프 샤게리 신부 또한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와 갈등을 빚은 적이 있는 등 교회법상 합법적인 전통 가톨릭 단체들과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의 관계는 일방적 지시 관계라고만 볼 순 없다.[10] '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 위원회'는 한국에서 '르페브르의 비오 10세 형제회원 재일치 위원회'로도 번역된다. 두 이름 다 해당 위원회를 지칭할 때 통용되는 이름이며, 해당 위원회는 2019년 1월 17일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의교서로 업무를 종료했다.[11] '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 위원회'는 한국에서 '르페브르의 비오 10세 형제회원 재일치 위원회'로도 번역된다. 두 이름 다 해당 위원회를 지칭할 때 통용되는 이름이며, 해당 위원회는 2019년 1월 17일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의교서로 업무를 종료했다.[12] 비공식적으로는 교회법상 합법적인 전통 가톨릭 단체 내에서도 새 미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부 문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성 비오 10세회 출신에 의해서 창립된 단체는 내부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관한 이견이 표출되는 경우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13] 여성 세족례 문제 등 교황의 일반 교도권 행사 차원의 문제 일부에 있어서 교회법상 합법적인 전통 가톨릭 단체들은 노골적으로 이에 불복하고 있다.[14] SSPX에서 성품성사를 받았다.[15] 이 주교 성성은 성 비오 10세회 4위 주교에 의해 집전되었다.[16] 카스트리욘 오요스 추기경은 성 비오 10세회에 대해서도 줄곧 "열교, 분파는 아니다"라며 일각의 과도한 낙인찍기를 경계하며 화해를 위한 대화에 힘써온 인물 중 한 명이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인적 직할 서리구는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와는 달리 자(自) 단체 소속 사제를 주교로 성성받을 수 있었다.[17] 그렇지만, 한국 천주교는 주교회의 중요 인사와 교구 대부분이 신학적으로 중도진보적 입장을 띄고 있으며, 전통라틴전례회 사례를 보듯이 사제가 전통 미사를 봉헌하려고 하면 교구장 눈치를 많이 봐야 한다. 이를 미루어 짐작해본다면 주교단은 이러한 단체에 십중팔구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단지, 한국은 전통 가톨릭 단체의 활동이 워낙 미약한 편이기 때문에 공적인 입장을 밝힐 필요성이 별로 없는 것이다.[18] http://www.mcspx.kr/board/board_view.html?board_data_id=471374&config_id=5146[19]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 외에도 멕시코계 미국인 제라르도 젠데하스 주교 등이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를 지원한다.[20] 여성의 대학 진학과 사회 진출에 부정적인 자신의 생각을 교리로서 가르친 것은 아니다.[21] Cekada는 미국인 교황공석주의자 사제이다.[22] 소속 없는 전통 가톨릭 성향 사제들은 문제가 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전통 가톨릭 성향 사제들에 비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23] 멜 깁슨이 말리부에서 전통 가톨릭 성향의 성당을 소유·운영하던 시기에 프란치스코회원이었던 특정 소속 없는 교황공석주의자 사제를 초빙해서 미사를 드렸다. 하지만 이 성당은 멜 깁슨이 이혼 즈음해서 처분했다.[24] Cekada는 미국인 교황공석주의자 사제이다.[25]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응오딘지엠의 형이다. 비오 12세 후의 교황좌는 비어있다는 교황공석주의론을 신봉하고 교황청과 화해하지 못한 전통주의자 사제를 주교로 성성해서 이 때문에 교황청이 파문했다.[26] http://www.cmri.org/02-oswalt-letter-to-rockford-diocese.shtml [27] 미셀 콜랭의 교황명은 클레멘스 15세였다.[28] 장-가스통 트랑블레의 교황명은 그레고리오 17세인데, 당연히 팔마리아 교회의 동명의 교황과는 다른 사람이다.[29] 전통 제대는 고대나 중세 시절부터 있었던 오래된 성당들에 많다.[30] 대표적으로 장궤틀을 모두 철거한 명동성당이나, 20세기 말 이후에 신축된 성당 다수.[31] 가톨릭교회에서 영성체 예식을 할 때 과거에는 사제만이 모든 신자들에게 성체를 나눠줄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일부 상황에 한해 수도자들이 성체를 분배하거나, 적절한 교육을 받고 성체 신심이 좋은 평신도들을 뽑아 미사 시간에 성체를 나눠줄 수 있게 하였다. 이를 비정규 성체분배자들이라고 한다.[32] 신자로 하여금 제대 위로 올라가 직접 성작을 들고 성혈을 영하게 하거나, 신자들이 성체를 들고 성혈에 찍어 영하게 하는 방법은 분명히 허용되지 않는 방법임에도 이런 변칙적인 방법으로 양형 영성체가 운용되는 예가 적지 않다. 신자들이 성체를 들고 성혈에 찍어 영하게 하는 방식은 성공회 감사성찬례에서나 하는 방식이며, 가톨릭에서의 정석은 사제가 성체를 성혈에 찍은 다음 신자들 입에 넣어주는 방식이다.[3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 천주교 신자도 대다수는 라틴어를 읽고 해석할 줄 몰랐듯이, 현재 전통 가톨릭 성향 천주교 신자라고 해서 다 라틴어를 읽고 해석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트리엔트 미사에 라틴어를 독해할 줄 알아서가 아니라 번역된 전례문이나 전례의 아름다움 자체 등에 감화받아서 호감을 갖는 경우도 있다.[34] 전통 가톨릭 성향 신자 개인이 이런저런 이유에서 에큐메니즘 성경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렇지만 미국의 NRSV 성경에 관해서는 '성(性) 중립적 용어' 등 페미니즘에 물들었다고 박하게 평한다.[35] "성 비오 10세의 교리문답"[3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의 공인 해석이나 후에 전통 가톨릭 단체 소속 사제가 저술한 해석 등.[37] 이런 점에서는 개신교에 있는 보수 복음주의 진영·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진영과 유사하다.[38] 가톨릭교회의 폐쇄적 입장에서 개신교는 교회라고 할 수 없고, 가톨릭 본당 내 평신도 모임과 같은 급의 모임으로 본다는 의미이다.[39] 현대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도 개신교와 에큐메니즘 운동에 교황청·교구·본당의 행보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보수 성향 신자가 적지 않다.[40] 한국 천주교에서는 흔히 '이교(離敎)'로 번역하지만, '분파(分派)'로도 번역이 가능하며, 원래 뜻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교(離敎)'라는 단어는 언뜻 보기에 '이교(異敎)'라는 단어와 헷갈리기 쉽다.[41] 사회교리서, DOCAT, YOUCAT 참조. [42] 개신교나 프리메이슨, 혹은 유대인 등을 지목한다 [43] 성 비오 10세회는 프랑스에서 매년 루이 16세 위령 미사를 봉헌한다. [44] 사회보수주의 수준[45] 개신교, 자유민주주의, 세속주의.[46] 예를 들어 이혼 절대 금지, 동성애 형사처벌 등[47] Salus Animarum. 간단하게 풀이하면, 영혼의 구원.[48] 현대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는 교권 파시즘부터 아나키즘·자유지상주의까지 정치 성향 스펙트럼이 넓지만, 전통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는 정치 성향에 있어서 자유주의 계통 성향을 띄는 경우가 드물다.[49] 사형에 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2267항 수정 - 교황 성하 알현 때에 받은 답서(2018.8.1.)[50] 사형에 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2267항 수정에 대하여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2018.8.1.)[51] 이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대수천) 지도사제 등 현대 가톨릭의 일부 사제도 마찬가지로 따르지 않고 있다.[52] Cosmopolitanism. '세계시민주의' 혹은 '세계국가주의'라고도 번역한다. 장면 전 총리가 사해동포주의적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53] 전쟁 포함.[54] 프리메이슨 음모론의 원조는 가톨릭이다. 비오 9세·레오 13세 등 역대 교황 여러 명이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사실로 믿었으며, 1917년 교회법에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는 가톨릭 신자는 파문이라는 명시적 제재 조항이 있었다. 1983년 새 교회법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프리메이슨에 대한 교회의 부정적 판단은 여전히 유효하며 1996년 프리메이슨 회원을 파문한 판례도 있다. Statement of Bishop Bruskewitz Excommunicating Certain Groups[55]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 [56] 동성 간 성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 동성애 성향 자체를 죄악으로 보지는 않는다.[57] 성 비오 10세회에 우호적인 주교. 독일계 러시아인.[58] 프란치스코 교황도 페미니즘을 '마초이즘'에 빗대 비판하거나 젠더 이론을 '이데올로기적 식민화'라고 비판하는 등 페미니즘 이론에 비판적이다.[59] 특히 자유주의 페미니즘, 그러나 진보 성향 가톨릭 임의단체 내 여성 회원 중에는 급진 페미니스트도 적지 않다. [60] 한국 천주교에도 '가톨릭 독서포럼', '천주교인권위원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등 페미니즘과 낙태 등에 호의적인 임의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총무 박은미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의 인터뷰에서 "낙태하러 가는 친구와 같이 산부인과에 가주었다" 등의 발언을 한 바 있는 '가톨릭' 페미니스트다. 교회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페미니스트들이 알게 모르게 본당·교구·주교회의 내 각종 직책에서 활동하고 있는 실정이다.[61] 교회법상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상관없이.[62] 그렇지만 이는 그가 지도하는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 단체 차원의 입장이 아니다.[63] 전통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2세 여성 신자 중 불만을 품고 떠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64] 즉, 사제양성 과정이 아닌 일반 신학 교육과정.[65] 물론 현대 가톨릭에도 오직 사제가 되고자 하는 미혼 남성 입학만을 허락하는 신학교(Seminary)들이 존재하긴 한다.[66] 그러나 일부 조당 사항은 관면을 해주지 않는다.[67] 스웨덴인 스탠 산드마크 신부. 스웨덴 루터교 사제였으나, 나이 50 넘어 가톨릭 세례를 받았으며, 만 63살에 사제로 서품 받았다.[68] 사제회 등 사도생활단이 아닌 수사들로 구성된 수도회.[69] 현대 가톨릭에서도 카르투지오회 수도자들은 신학교 교육과정 없이 사제서품을 받는 등 그 예가 없지 않다.[70] 복고 가톨릭교회는 독립한지 얼마 안 되어 자국어 미사와 사제의 회중 선출을 도입하는 등 교의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전례와 성사 등에 있어서도 진보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회 당국으로부터 징계 받은 대표적 진보 성향 신학자 한스 큉이 복고 가톨릭교회를 호평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