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파
Cathars, Cathari, Catharism
Albigenses, Albigensians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기독교의 이단. 어원은 '청정한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타로스καθαρὀς = katharos'에서 유래하였다. 프랑스 왕국 남부의 알비를 중심으로 퍼졌다고 하여 '알비파'라는 별명도 있지만, 실제 중심지는 알비가 아니라 툴루즈였다고 한다. 그 외에 '바타리니파', '랑그독파' 등이라고도 불린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그룹인지, 혹은 다른 그룹인지는 아직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불가리파(불가리아파)라는 별명도 있었다.
프랑스 왕국 남부와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걸쳐서 널리 퍼졌으나,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단죄되고 집중공격을 받아서 멸망하였다. 카타리파에 대한 공격은 십자군 전쟁과 같이 여겨졌으며, 이를 '알비파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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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파의 사상은 동유럽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불가리아 제1제국과 동유럽에 퍼져 있던 바오로파, 보고밀파와 관련이 깊다는 추측이 있다.
처음 기록이 나타난 것은 1181년 쾰른이다. 이 무렵 독일 지역에서 카타로스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남프랑스에서 1012년에서 1020년에 걸쳐서 카타리파가 증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1022년에 카타리파 신도의 첫번째 처형이 이루어졌다. 카타리파는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선언되었지만, 기세는 죽지 않고 점점 전파가 이루어졌다. 1100년대부터 성직자, 설교자들이 카타리파의 세력이 커진 지역으로 들어가서 가톨릭에 복귀시키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그러나, 카타리파는 당시 프랑스 왕권에서 독립된 세력이었던 툴루즈 백작 등 남프랑스 지역 귀족 제후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소멸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가톨릭 원복 시도는 성공 사례가 적었다.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1179년)에서 카타리파 금지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교황은 처음에는 특사를 프랑스 남부에 파견하여 카타리파 신도들을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도록 호소하였다. 하지만 남프랑스의 영주들은 프랑스 왕권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 있었고, 교황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도 싫어한 지역 주교들도 교황 사절의 개입을 거부하였다.
결국 카타리파 문제는 점차 정치문제로 비화되기 시작했다.
1209년, 카타리파 및 카타리파를 비호하는 영주들을 모두 공격하기 위하여 십자군이 편성되었다. 이것이 알비 십자군이다. 이 십자군의 결성된 배경에는 프랑스 남부를 완전히 왕권 아래에 두고 싶어했던 당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의중이 크게 작용했는데, 이러한 프랑스 왕의 의도가 카티라파(알비파)의 확대에 고민하던 교황청의 의도와 일치하였다.
알비 십자군은 비교적 순조롭게 성과를 거뒀다. 남프랑스의 영지와 도시는 차례차례 점령되었고, 카타리파는 각지에서 학살, 처형되었다. 1209년 말에는 난공불락의 요새 카르카손이 함락될 정도였다. 일시적으로 툴루즈 백작 레몽 6세가 세력을 회복하기도 했으나, 레몽 6세는 아들 레몽 7세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점령군의 폭정 때문에 민심이 악화되자 다시 영국에서 돌아와 툴루즈를 회복하고 세력을 확대하기도 했지만 레몽 6세가 죽은 뒤 레몽 7세 시기에 완전히 패배하였다.
1228년, 툴루즈가 완전히 함락되고 레몽 7세가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항복하면서 십자군 전쟁은 종결되었다. 툴루즈 백작령의 항복으로 카타리파를 비호하는 세속 영주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1229년부터 카타리파에 대한 종교재판이 실시되었다. 붙잡힌 카타리파 지도자들은 종교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영주에게 인도되어 처형되었다.
마지막 남은 카타리파의 거점은 산악 지역에 있는 몽세귀르(Montségur)의 산성 요새였다. 카타리파는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마지막 저항을 계속했다. 1244년 3월 16일, 십자군은 바스크 산악지대 출신의 병사들을 고용하여 요새를 함락시켰고, 농성하던 카타리파 신도 2백 명 이상은 화형에 처해졌다.[1]
1321년에 마지막 완덕자(Perfecti) 기욤 베리파스토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1330년 이후 이단심문소의 자료에서 카타리파의 이름은 사라졌다.
한편 십자군이 알비파의 거점인 베지에(Béziers)를 점령할 당시, 어느 병사가 알비파를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질문하자 현장에 있던 교황 특사인 아르노 아모리(Arnaud Amalric)가 남긴 말이 매우 유명하다.
카타리파의 조직은 알기 어렵지만, 크게 완덕자(perfecti)와 일반 신도(credentes)로 나누어진다. 완덕자는 소수이며, 카타리파의 교리를 완전히 실행하여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고 노동을 하지 않으며 세속과 단절된 생활[2] 을 보냈다. 이들이 지극히 금욕적이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보였기 때문에 당시 가톨릭의 부패에 염증이 난 민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완덕자는 지도자로서 신도들을 이끌었으며, 남성과 여성 모두 완덕자가 될 수 있었다.
현재 카타리파의 사상은 알기 어렵다. 카타리파는 소멸했고, 그들 자신이 남긴 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카타리파의 사상은 주로 반박자들의 문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3]
전체적으로 세상을 악으로 보는 영지주의적인 색채가 강했으며, 카타리파는 이를 보고밀파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카타리파는 세상을 악한 존재가 창조했다고 생각하였는데, 고대 영지주의와 다른 점은 세상을 창조한 악한 존재를 곧 사탄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카타리파는 환생을 믿었다.
영지주의에서 믿듯이, 물질 세계에 갇힌 영혼은 세상을 벗어나서 영적 세계인 천국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러운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금욕 생활을 보내는 것이다. 이 완전한 금욕생활을 보내는 신도가 완덕자(Perfecti)이다.
예배 의식으로 엔두라(endura)가 있었으며, 죽음 직전에 안락식(Consolamentum)이라는 의식을 하였다. 그 이외의 가톨릭에서 하는 7성사는 일절 거부하였다.
카타리파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고,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손을 번식하는 것은 '육체의 노예'를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톨릭 측에서는 이들이 '생식에 연결되지 않는 성행위'를 장려하였다고 비난하였다.[4]
채식주의 생활을 하였다. 고기는 생식활동의 결과이므로 먹지 않았고, 생식활동의 결과물인 다른 음식(달걀, 치즈, 버터) 역시 금지하였다. 단, 야채와 과일 이외에도 생선을 비롯한 해산물은 뭐든지 먹어도 좋았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해산물은 생식활동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타리파에서는 '맹세'를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봉건질서를 파괴한다고 여겨져서 세속 봉건 영주들에게도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일체의 상업적 행위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카타리파가 급속도로 세력이 확산되고 광범위하게 퍼질수있던 비결은 당시 서유럽의 가톨릭과 교황청이 세속화가 이뤄지면서 부정부패와 연관되고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해갔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인 교회에 반발심을 가지게 된 귀족, 가톨릭의 교리상 성직자가 될 수 없던 여성, 그리고 라틴어를 모를 뿐만 아니라 문맹으로 인해 라틴어로 집전되는 미사를 이해할 수 없던 서민층 등이 가톨릭에 비해 훨씬 교리적으로 가볍고 입문하기 쉽던 카타리파 등의 이단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서민들은 내용을 알 수 없던 교회에서의 예배보다 집에서 개인적인 예배를 보는 것을 중시하게 되면서 신앙이 올바른지에 대한 검토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보고밀파, 카타리파와 같이 이단으로 부를만한 교단들이 발생하거나 침투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게 되었다.
즉 어떻게 보면 카타리파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벌어진 알비 십자군 전쟁은 이후 벌어질 교황청 권위의 추락과 종교개혁의 서막과도 같은 사건이라고 볼수도 있다.
현대에는 십자군과 보편교회에 대한 반발로서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Albigenses, Albigensians
1. 개요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기독교의 이단. 어원은 '청정한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타로스καθαρὀς = katharos'에서 유래하였다. 프랑스 왕국 남부의 알비를 중심으로 퍼졌다고 하여 '알비파'라는 별명도 있지만, 실제 중심지는 알비가 아니라 툴루즈였다고 한다. 그 외에 '바타리니파', '랑그독파' 등이라고도 불린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그룹인지, 혹은 다른 그룹인지는 아직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불가리파(불가리아파)라는 별명도 있었다.
프랑스 왕국 남부와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걸쳐서 널리 퍼졌으나,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단죄되고 집중공격을 받아서 멸망하였다. 카타리파에 대한 공격은 십자군 전쟁과 같이 여겨졌으며, 이를 '알비파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2. 역사
2.1.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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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파의 사상은 동유럽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불가리아 제1제국과 동유럽에 퍼져 있던 바오로파, 보고밀파와 관련이 깊다는 추측이 있다.
처음 기록이 나타난 것은 1181년 쾰른이다. 이 무렵 독일 지역에서 카타로스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남프랑스에서 1012년에서 1020년에 걸쳐서 카타리파가 증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1022년에 카타리파 신도의 첫번째 처형이 이루어졌다. 카타리파는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선언되었지만, 기세는 죽지 않고 점점 전파가 이루어졌다. 1100년대부터 성직자, 설교자들이 카타리파의 세력이 커진 지역으로 들어가서 가톨릭에 복귀시키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그러나, 카타리파는 당시 프랑스 왕권에서 독립된 세력이었던 툴루즈 백작 등 남프랑스 지역 귀족 제후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소멸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가톨릭 원복 시도는 성공 사례가 적었다.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1179년)에서 카타리파 금지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교황은 처음에는 특사를 프랑스 남부에 파견하여 카타리파 신도들을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도록 호소하였다. 하지만 남프랑스의 영주들은 프랑스 왕권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 있었고, 교황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도 싫어한 지역 주교들도 교황 사절의 개입을 거부하였다.
결국 카타리파 문제는 점차 정치문제로 비화되기 시작했다.
2.2. 알비 십자군
1209년, 카타리파 및 카타리파를 비호하는 영주들을 모두 공격하기 위하여 십자군이 편성되었다. 이것이 알비 십자군이다. 이 십자군의 결성된 배경에는 프랑스 남부를 완전히 왕권 아래에 두고 싶어했던 당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의중이 크게 작용했는데, 이러한 프랑스 왕의 의도가 카티라파(알비파)의 확대에 고민하던 교황청의 의도와 일치하였다.
알비 십자군은 비교적 순조롭게 성과를 거뒀다. 남프랑스의 영지와 도시는 차례차례 점령되었고, 카타리파는 각지에서 학살, 처형되었다. 1209년 말에는 난공불락의 요새 카르카손이 함락될 정도였다. 일시적으로 툴루즈 백작 레몽 6세가 세력을 회복하기도 했으나, 레몽 6세는 아들 레몽 7세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점령군의 폭정 때문에 민심이 악화되자 다시 영국에서 돌아와 툴루즈를 회복하고 세력을 확대하기도 했지만 레몽 6세가 죽은 뒤 레몽 7세 시기에 완전히 패배하였다.
1228년, 툴루즈가 완전히 함락되고 레몽 7세가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항복하면서 십자군 전쟁은 종결되었다. 툴루즈 백작령의 항복으로 카타리파를 비호하는 세속 영주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1229년부터 카타리파에 대한 종교재판이 실시되었다. 붙잡힌 카타리파 지도자들은 종교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영주에게 인도되어 처형되었다.
마지막 남은 카타리파의 거점은 산악 지역에 있는 몽세귀르(Montségur)의 산성 요새였다. 카타리파는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마지막 저항을 계속했다. 1244년 3월 16일, 십자군은 바스크 산악지대 출신의 병사들을 고용하여 요새를 함락시켰고, 농성하던 카타리파 신도 2백 명 이상은 화형에 처해졌다.[1]
1321년에 마지막 완덕자(Perfecti) 기욤 베리파스토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1330년 이후 이단심문소의 자료에서 카타리파의 이름은 사라졌다.
한편 십자군이 알비파의 거점인 베지에(Béziers)를 점령할 당시, 어느 병사가 알비파를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질문하자 현장에 있던 교황 특사인 아르노 아모리(Arnaud Amalric)가 남긴 말이 매우 유명하다.
번역에 따라 '주님께서 가려내실 것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발언은 알비 십자군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적 광기를 비판할 때 자주 인용된다.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모두 죽여라. 주님께서는 누가 당신의 백성인지 아신다.
3. 조직
카타리파의 조직은 알기 어렵지만, 크게 완덕자(perfecti)와 일반 신도(credentes)로 나누어진다. 완덕자는 소수이며, 카타리파의 교리를 완전히 실행하여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고 노동을 하지 않으며 세속과 단절된 생활[2] 을 보냈다. 이들이 지극히 금욕적이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보였기 때문에 당시 가톨릭의 부패에 염증이 난 민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완덕자는 지도자로서 신도들을 이끌었으며, 남성과 여성 모두 완덕자가 될 수 있었다.
4. 사상
현재 카타리파의 사상은 알기 어렵다. 카타리파는 소멸했고, 그들 자신이 남긴 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카타리파의 사상은 주로 반박자들의 문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3]
전체적으로 세상을 악으로 보는 영지주의적인 색채가 강했으며, 카타리파는 이를 보고밀파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카타리파는 세상을 악한 존재가 창조했다고 생각하였는데, 고대 영지주의와 다른 점은 세상을 창조한 악한 존재를 곧 사탄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카타리파는 환생을 믿었다.
영지주의에서 믿듯이, 물질 세계에 갇힌 영혼은 세상을 벗어나서 영적 세계인 천국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러운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금욕 생활을 보내는 것이다. 이 완전한 금욕생활을 보내는 신도가 완덕자(Perfecti)이다.
예배 의식으로 엔두라(endura)가 있었으며, 죽음 직전에 안락식(Consolamentum)이라는 의식을 하였다. 그 이외의 가톨릭에서 하는 7성사는 일절 거부하였다.
카타리파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고,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손을 번식하는 것은 '육체의 노예'를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톨릭 측에서는 이들이 '생식에 연결되지 않는 성행위'를 장려하였다고 비난하였다.[4]
채식주의 생활을 하였다. 고기는 생식활동의 결과이므로 먹지 않았고, 생식활동의 결과물인 다른 음식(달걀, 치즈, 버터) 역시 금지하였다. 단, 야채와 과일 이외에도 생선을 비롯한 해산물은 뭐든지 먹어도 좋았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해산물은 생식활동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타리파에서는 '맹세'를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봉건질서를 파괴한다고 여겨져서 세속 봉건 영주들에게도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일체의 상업적 행위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카타리파가 급속도로 세력이 확산되고 광범위하게 퍼질수있던 비결은 당시 서유럽의 가톨릭과 교황청이 세속화가 이뤄지면서 부정부패와 연관되고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해갔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인 교회에 반발심을 가지게 된 귀족, 가톨릭의 교리상 성직자가 될 수 없던 여성, 그리고 라틴어를 모를 뿐만 아니라 문맹으로 인해 라틴어로 집전되는 미사를 이해할 수 없던 서민층 등이 가톨릭에 비해 훨씬 교리적으로 가볍고 입문하기 쉽던 카타리파 등의 이단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서민들은 내용을 알 수 없던 교회에서의 예배보다 집에서 개인적인 예배를 보는 것을 중시하게 되면서 신앙이 올바른지에 대한 검토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보고밀파, 카타리파와 같이 이단으로 부를만한 교단들이 발생하거나 침투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게 되었다.
즉 어떻게 보면 카타리파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벌어진 알비 십자군 전쟁은 이후 벌어질 교황청 권위의 추락과 종교개혁의 서막과도 같은 사건이라고 볼수도 있다.
5. 미디어
현대에는 십자군과 보편교회에 대한 반발로서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 11eyes - 메인 빌런인 리제롯테 베르크마이스터는 원래 카타리파의 일원으로, '리젯트 벨토르'라는 이름의 순수한 소녀였다. 교황청의 베지에 대학살과 이후 겪은 막장스런 일들로 인해 세계를 저주하는 악녀가 된 것.
- 다빈치 코드
- 성혈과 성배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가톨릭의 이단으로 등장한다. 별개의 교황을 가지는 프라티첼리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다른 가톨릭 이단들과 달리 카타리파는 교황이 없지만 관용 기술 레벨과 무관하게 남녀평등 상속제를 실시할 수 있고 여성도 사제, 자문위원, 군사지휘관이 될 수 있어서 능력치 좋은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상 게임 내에서 가장 개성적인 이단이기에 이단 플레이를 하는 유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단이다. 그러나 EU4에 컨버트해서 등장시키는 경우 참된 신앙 관용도 +2, 안정도 비용 -10%라는 심심한 특성을 가지는 복붙 종교가 된다. 비공식 한글패치의 구버전 번역명은 원뜻을 직역한 순결파.
- l'Abbaye des Morts - 인디 게임 제작사 Locomalito에서 제작한 고전 플랫폼 스타일의 횡스크롤 게임으로 배경이 알비 십자군에 의해 카타리파가 학살당하던 시기이며, 주인공인 장 레이몬드는 카타리파의 수도사라는 설정.
[1] 다만 이때는 베지에 함락과는 다르게 개종을 한 사람들은 무사히 성을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화형을 당한 이 200명은 그러한 관대한 조건에도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불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어 죽어갔다.[2] 성직자와 평신도가 각각 '선택된 자'와 '듣는 자'로 구분되었던 마니교와 유사한 요소이다.[3] 개신교계 일각에서는 카타리파가 재세례파와 유사했으나 가톨릭 측에서 왜곡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일각'이며, 개신교계에서도 대다수는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본다.[4] 여기에서 영어 비속어 "Bugger"가 나왔다. 카타리파가 불가리아인들의 이단종파로 알려져서 "불가르"파로도 불렸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