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colbgcolor=#8c8c8c> '''이름'''
하나 아렌트 (Hannah Arendt)
'''출생'''
1906년 10월 14일
독일 제국 하노버
'''사망'''
1975년 12월 4일 (69세)
미국 뉴욕
'''국적'''
[image] 독일 제국 / [image]바이마르 공화국 / [image]나치 독일 (1906 – 1937)
[image] 미국 (1937 – 1951)
'''직업'''
철학가, 사상가
'''학력'''
마르부르크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PhD, 1929)
'''지역'''
서양 철학
1. 개요
2. 생애
3. 공공성론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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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때 그것은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이 된다.'''

- 전체주의의 기원(1951)

한나 아렌트는 독일계 미국인 정치철학자이다. 본명은 요하나 콘 아렌트(Johanna Cohn Arendt)이다. 공화주의공동체주의 사상가로 유명하다. 아렌트 자신은 항상 철학은 "단독자인 인간"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그러한 호칭을 거절했으며, 정치 '철학자'보단 정치 '이론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2. 생애


1933년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파리로 이주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1941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국적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미국 시민권을 따기 전까지 무국적 상태였으며 실제로도 독일 출생이지만 독일 국민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유부남이었던 스승과 연인사이였지만(스승의 부인도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스승이 나치당원이었던 이유로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훗날 스승이 노환으로 앓아눕게되자 스승의 부인이 직접 하나 아렌트에게 편지를 보내 "남편이 임종을 앞두고 당신을 보고싶어한다"며 초청하였고, 한나 아렌트는 그 초청에 응하여 독일로 날아가 스승을 만난 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정작 임종 직전이던 스승보다 본인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나치의 대표 전범으로 유명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약 12년간의 도주 끝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잡히자 당시 뉴욕에 거주 중이었던 그녀는 기자로서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에 참석하였고, 그곳에서 아이히만을 관찰하면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다. 종전 후 하이데거를 위해 증언하였다.

3. 공공성론


아렌트는 "폴리스(polis) = 공공적 영역, 오이코스(oikos) = 사적 영역"이라 하는 고전적 구분을 답습했다. 이때 중요한 건, 공공적 영역이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전제로하는 "활동(活動)"이라는 거고, 국가의 지배나 경제적 이익을 받을 만한 건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모여서 얘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아렌트의 이러한 구분은 국가와 경제적 시장(market)에게 공공성의 대표자를 원하는 근대의 정치사상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공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중간에 위치하는 "사회적 영역(社會的 領域)"을 주장했는데, 여기에선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하거나 결사나 집단을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아렌트의 이런 사회적 영역을, 사람들이 "활동(活動)"이라고하는 상호행위를 전개하는 장소가 아닌, 오직 획일적인 행동으로서 생(生)의 욕구를 해소하는 장소로 생각하고, 공공적 영역과는 준별(峻別)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사회적 영역의 요구가 그대로 정치에 입력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1]

4. 기타


  • 하이데거의 제자였으며, 사귀는 사이였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유부남이었다는 게 함정(...). 하지만 이 관계는 그리 길지 못했고 일년 여의 기간 뒤 헤어진다. 이후 독일에서 나치당이 득세하면서, 하이데거는 유대인 제자가 교수가 되는걸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등 나치당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치전범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 애인이자 유대인인 아렌트와 동료였던 야스퍼스에게 도움을 청하며, 프랑스 철학자들의 지지로 겨우 구속을 면하고 강의권만 박탈 당한다. 이후 아렌트와 하이데거는 지적인 동료 관계를 회복했으며, 그 후로 아렌트가 죽을 때까지 둘 사이에 편지가 오갔다. 1975년 아렌트가 먼저 죽자 하이데거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 망명 시절 만나 결혼했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전향 공산주의자 학자였던 하인리히 블뤼허와의 결혼 생활에 자식은 없었지만 원만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충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블뤼허는 스탈린주의에 실망하여, 독일 공산당 안에서 반스탈린 연맹을 조직하기도 한다.
  • 아렌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화국의 위기 등이 있다. 이 중 전체주의의 기원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인간학, 철학적 면모에서 전체주의의 원인과 특성에 대해 서술한 명작이며,[2] 인간의 조건은 인간의 정치적인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철학서이다.
  • 위의 사진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엄청난 골초였다.
  • 2012년 독일에서 그녀의 전기 영화가 개봉했다. 15회 서울 국제 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하였다.


[1] 이는 9월 전국연합학력평가에 출제되었다.[2] 여담으로 전체주의에 관한 다른 측면의 분석으로는 프리드리히와 브레진스키, 노이만의 사회과학적 분석이 유명하다. 현대에서는 소련에 대한 배척 명분을 얻기 위한 너무 냉전적인 연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