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슬로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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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Alexander Slotin
루이스 슬로틴
'''
'''본명'''
루이스 알렉산더 슬로틴
'''출생'''
1910년 12월 1일 캐나다 매니토바위니펙 [image]
'''사망'''
1946년 5월 30일 미국 뉴멕시코로스 앨러모스[image]
'''국적'''
캐나다 [image]
'''학력'''
매니토바 대학교
킹스 칼리지 런던
'''직업'''
물리학자
'''분야'''
물리학
1. 소개
2. 로스 앨러모스 핵실험 사고
2.1. 실험에 참여했던 다른 동료들
2.2. 슬로틴 사후


1. 소개


물리학자화학자.
제정 러시아의 박해를 피해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으로 이민한 유대인계 출신이다. 삼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재능을 보였다. 만 16세가 되던 해 매니토바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동 대학에서 1932년과 1933년에 각각 물리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1936년에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생화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 시카고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사이클로트론에 관련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그 공로로 1942년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어렸을 때부터 공부 잘한 여느 과학자와 다를 것 하나 없다. 그런데 별도로 항목이 있는 이유는 이 사람이 겪은 사고 때문이다. 이 사고로 인해 슬로틴은 '''역사상 가장 심한 피폭을 받은 과학자 중 하나'''가 되었다.[1]

2. 로스 앨러모스 핵실험 사고


사고가 난 곳은 로스 앨러모스에 있는 로스 앨러모스 국립연구소로 원자력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던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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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과학자들의 피폭량을 알아보기 위해 증언에 따라 사고상황을 재현한 그림이다.
1946년 5월 21일, 슬로틴과 그의 동료 7명은 중성자 반사재인 베릴륨으로 만들어진 2개의 반구로 각각 플루토늄 코어를 감싸, 중성자 반사재가 얼마큼 닿아야 연쇄 반응이 시작되는지 예측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가운데의 플루토늄-갈륨 합금은 약 5% 정도로 임계질량에 미치지 못하지만, 두 중성자 반사재가 붙을 경우 밖으로 튀는 중성자를 가운데로 모아 임계질량 이하에서도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플루토늄은 핵실험에 사용될 예정이었으므로 이런 확인이 필요했다.
임계에 이르지 않은 플루토늄 덩어리 자체는 체내로 들어가지 않는 한 치명적으로 위험하지는 않다. 자연상태의 플루토늄은 알파붕괴를 해서 알파입자(헬륨 원자핵)을 방출하는데, 이 입자는 피부 각질도 관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파인만은 조그만 플루토늄 덩어리를 가리키며 손으로 만지면 은근히 따뜻한 정도라고 한 적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방사능 차폐를 위해 도금을 한 상태일 때의 얘기이다. 문제는 이 알파입자의 에너지가 베타, 감마선보다 월등히 커서 체내에 들어가면 큰 피해를 입힌다는 점이었다.
슬로틴은 엄지를 위쪽 구멍에 넣어서 왼손으로 위쪽 반구를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스크류 드라이버를 밀어넣어 반구의 높이를 조절하고 있었다. 이렇게 스크류 드라이버를 쓰는 것은 지침에 규정된 정식 방법이 아니었다. 원래는 엄지만을 이용해 높낮이를 조절하고, 가운데에는 사고를 막기 위해 쐐기를 끼워 놓았어야 했다.
사실 크고 작은 원자력 사고들은 대개 규정 위반으로 발생한다.[2] 슬로틴은 해당 실험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러 번 시연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만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쐐기 없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청바지와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상태로 참여했다고 한다.[3] 소문에 따르면 이러한 행위를 지켜보던 엔리코 페르미는 '''시연을 이런 식으로 하면 1년도 못 살고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고, 리처드 파인만도 '''잠자는 용의 꼬리를 간질이는 행위'''(tickling the tail of a sleeping dragon)라며 못마땅해했다.
원래대로라면 두 개를 붙인 후 측정이 끝나면 떼어내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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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드라이버가 미끄러져나가면서 위쪽에 있던 반구가 덜컥 떨어졌다.''' 두 중성자 반사재는 완전히 닫였고, 임계량을 초과한 플루토늄은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곧바로 푸른 빛과 열파가 방을 휩쓸기 시작했고, 슬로틴은 입 안에 시큼한 맛과 왼손에 작열감을 느꼈다.
이때 슬로틴이 위쪽 반구를 왼손으로 직접 들어내[4] 바닥에 던지자 두 개의 덩어리가 분리되면서 연쇄반응은 중지되었다.
슬로틴은 연쇄반응이 일어난 곳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무려 21시버트라는 어마어마한 방사능 피폭을 당했다. 이게 얼마나 많은 양이냐면,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에서 어마어마한 피폭을 당해 83일간 집중치료를 받다 끔찍한 몰골이 되고 극한의 고통에 시달리다 사망한 오우치 히사시(大内久)가 입은 피폭량이 18시버트였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당시 수석 연구원으로서 폭발 이후 냉각수 밸브를 열어 냉각을 시켜야 한다는 판단으로 피폭을 무릅쓰고 장시간 작업하다 돌이킬 수 없는 피폭을 당해 끔찍한 몰골이 되어 고통 속에 사망한 알렉산드르 아키모프(Alexander Akimov)가 15시버트의 피폭을 당했는데 그것보다도 각각 3시버트, 6시버트나 더 심하게 피폭당한 것이다.
3시버트만 피폭돼도 반이 죽는 정도이니 21시버트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으며,''' 의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슬로틴의 통증을 덜어주려고 시도하는 것 뿐이었다. 참고로 일반인이 1년에 받는 방사선의 총량은 1밀리시버트가 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다. 21시버트는 21,000 밀리시버트이니 다시 말해 슬로틴은 보통 사람이 21,000년에 걸쳐 받아야 할 방사선을 한순간에 뒤집어쓴 것이다.
슬로틴은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방사능 피폭의 영향으로 구토를 하기 시작했고, 곧바로 동료들과 함께 병원으로 실려갔다. 동료들은 모두 살아났지만 슬로틴은 살아날 수 없었고, 집중치료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으며 9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1989년도 영화 "멸망의 창조(Fat Man And Little Boy)"에서 그려진 사고장면. 사고 경위가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슬로틴 역할을 맡은 배우는 존 쿠삭. 젊은 시절의 쿠삭의 모습과 슬로틴의 생전 모습이 많이 닮아 있다. 이 영화에서 배역 이름은 마이클 메리맨(Michael Merriman)으로 설정되어 있다.

2.1. 실험에 참여했던 다른 동료들


당시에 이 실험에는 루이스 슬로틴 외에 라이머 에드거 슈라이버, 앨빈 쿠시먼 그레이브스, 스탠리 앨런 클라인, 매리언 에드워드 시에슬리키, 드와이트 스미스 영, 시어도어 펄먼과 패트릭 J. 클리어리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 동료들의 피폭량은 각각 3.6시버트, 2.5시버트, 1.6시버트, 1.1시버트, 0.65시버트, 0.47시버트, 0.37시버트이다. 위에 열거한 이름순은 아니다.
대부분 회복했지만 슬로틴의 바로 뒤에 서 있었던 앨빈 C. 그레이브스과 슬로틴을 마주보며 가까이 서 있었던 드와이트 영은 급성 방사능 증후군을 보였고, 그레이브스는 몇 주간 입원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레이브스의 경우 이 사고로 만성적인 신경질환과 시력문제를 얻게 되었고 이 사고로부터 20년 후, 54세의 나이에 이 사고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다소 씁쓸한 것은 그레이브스는 이 사고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낙진피해에 대한 우려를 꾀병부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 등, 방사능의 위험성을 간과하는 발언을 많이 남겼다는 점이다.
클리스리키는 이 사고로부터 19년 후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42세에 사망하며, 영은 27년 후 재생불량성 빈혈과 세균성감염으로 83세에 사망한다.
로스 앨러모스 핵실험 사고가 그들의 직접적인 사인이 아니라고 보는 의견도 있으나, 이 사고가 그들의 건강과 생명단축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허나 루이스 슬로틴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그들은 이 사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남은 시간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2. 슬로틴 사후


이 사건은 처음에는 군 시설에서 일어난 일이라 기밀로 취급되었지만 슬로틴의 부모에게만은 사건 직후 아들의 예정된 죽음이 통보되어 임종 순간을 함께 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세상에 알려졌으며 사람들은 슬로틴을 영웅으로 칭송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그의 실수로 인해 다른 이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시선도 있을 수 있고,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지며 타인을 구한 그의 정신을 기리는 시선도 있을 수 있다. 다양한 관점이 양립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 상황이나 전후사정 등을 모른 채, 영화 몇 장면 텍스트 몇 줄로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일 것이다. 판단은 개인의 몫으로 남기도록 하자.
아래는 Thomas P. Ashlock가 로스 앨러모스 타임즈에 기고한 시다. 시의 제목은 "Slotin - A Tribute"이다.
May God receive you, great-souled scientist!
While you were with us, even strangers knew
The breadth and lofty stature of your mind
Twas only in the crucible of death
We saw at last your noble heart revealed.
신께서 그대를 받아주실 것이오. 위대한 혼을 지닌 과학자여!
그대가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이방인들조차 알고 있었소
그대의 마음의 관용과 고결함을
죽음의 시련이 닥친 후에야
우리는 그대의 숭고함을 알게 되었소.
해리 K. 더그힐란 2세의 사고 등 몇 차례의 사고에 이 사고가 결정타가 되어, 미국은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방사능 관련 실험에 전면적으로 기계를 도입하게 되었다. 물론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을 쓰는 나라근처에 있다. 공밀레 항목 참조.
그리고 13년 후 이 로스 앨러모스에서 원자력 기술자로 일하던 세실 켈리가 불의의 원자력 사고로 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120 시버트의 피폭을 당해 35시간만에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슬로틴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는 원자력 사고를 다루는 소설이나 TV드라마에 종종 나오게 되었다.
슬로틴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도 있다. "루이스 슬로틴 소나타"라는 작품으로, 사고에서 죽음까지의 9일간을 다루고 있다.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작품이지만 대본은 아마존닷컴 등에서 입수할 수 있으니 흥미가 있다면 읽어보자.
루이스 슬로틴을 죽음에 이르게 한 플루토늄은 "데몬 코어"라는 별명이 붙었고, Operation Crossroads에서 첫 번째 폭탄인 에이블에 탑재되었다.
2002년에 슬로틴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생겼다. 1995년에 발견된 소행성이 12423 Slotin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더 자세한 정보는 영문 위키피디어 루이스 슬로틴 항목에 가면 볼 수 있다.

[1] 전체적으로 확장하면 로스 앨러모스 핵 시설 직원으로서 1958년 12월 30일에 급작스런 사고로 상반신에 120시버트라는 현존 최다의 피폭을 당하고 35시간 만에 사망한 세실 켈리가 있다.[2] 그 유명한 체르노빌 사고 역시 여러가지 안전 수칙과 안전 장치, 그리고 연구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댜틀로프가 독단적으로 실험을 강행하여 발생했다.[3] 이미 고인이 된 슬로틴을 생각해서였는지, 이 사실은 오랫동안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동안 루이스 슬로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과학의 발전을 위해 희생한 과학자" 정도로 좋은 편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그린 연극 작품이 있을 정도. 그러나 이러한 행실이 드러나며 이제는 그에 대한 호의적 시각은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4] 루이스 슬로틴이 손으로 직접 잡은 것은 플루토늄 합금이 아니라 베릴륨 반사재였다. 플루토늄 코어는 두 베릴륨 반구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반사재이기 때문에 덜 피폭되었으면 덜 피폭되었지, 손으로 반사재를 잡은 것이 피폭사의 원인은 아니다. 베릴륨 반구 위에는 엄지손가락을 넣고 움직이라고 작은 구멍까지 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