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

 



'''東海村JCO臨界事故'''
(とうかいむらジェー・シー・オーりんかいじこ)
東海村放射能漏出事故
Tokaimura nuclear accident in 1999
1. 개요
2. 잘못 알려진 사진들
3. 사고
3.1.1. 원인
3.2. 늑장 대응
3.3. 상황 종료
4. 사고 이후
5. 사고 피해자들
5.1. 직원 1
5.2. 직원 2
5.3. 직원 3
6. 사고 피해자들의 참담한 결말
7. 사고 전이나 이후의 사건
8. 관련 링크


1. 개요


1999년 9월 30일 오전 10시 35분에 일본 이바라키현 나카군 도카이촌에서 발생한 레벨 4 원자력 사고.
핵연료 재처리 회사인 JCO가 도카이촌(東海村)에 세운 핵연료 가공시설에서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해 현장에서 작업 중이었던 오우치 히사시[1](大内 久, 1964~1999, 당시 35세)가 18그레이, 시노하라 마사토(篠原理人, 1959~2000, 당시 39세)[2]가 10그레이, 이 둘을 지휘하던 상사 요코카와 유타카(横川豊, 당시 54세)가 1 ~ 4그레이 가량 피폭됐다.[3] 1그레이/시버트는 과거의 렘/라드 단위의 100배로, 6그레이 이상 피폭된 후 생존자는 거의 없다.[4] 오우치는 83일 만에, 시노하라는 211일 만에 사망했다. 사망자를 포함하여 피폭자는 667명이 나왔다.
18시버트가 얼마나 큰 양인지 체감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1년간 허용 방사선이 1밀리시버트이다. 1시버트가 1000밀리시버트이므로, 18시버트면 1만 8천 년 동안 받을 방사선을 한순간에 받은 것.
사건의 전개에 앞서 참고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니는 도카이 촌 방사능 피폭자의 경과 사진의 인물은 시노하라 마사토로, 피폭 전의 사진과 악화 과정의 얼굴 사진이 같이 찍혀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입원 당일이자 피폭 당일인 1999년 9월 30일부터 '''상당히 악화된 상태이자 피폭 95일째인 2000년 1월 4일'''까지 나열되어 있는 모습인데, 점차 녹아내리듯 썩어가는 얼굴을 한달마다 찍은 사진을 게시했으며, 피폭 15일째에서 주름으로 꽉 차 있는 그나마 양호한 상태의 모습부터 '''피폭 65일째에서 주름은 하나도 없고 피바다로 점철되어 기능을 상실한 큰창자와 작은창자'''의 내시경 '''컬러사진'''도 게시되어 있다.

2. 잘못 알려진 사진들


인터넷에 도카이촌 방사능 누출사고라고 치면 피폭자들의 끔찍한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나오는데 여기서 잘못 알려진 사진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피부가 까맣게 된 전신사진, 온몸이 전부 피범벅이 되어있는 전신사진, 그리고 두개의 끔찍한 얼굴사진이 있다.
먼저 피부가 까맣게 된 사람 사진은 대부분 사람들이 시노하라라 하지만 실제로 시노하라는 아니고 극심한 항생제 알레르기로 인해 사망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3명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우치라고 주장하는 온몸이 전부 박피된 전신 누드 사진의 인물은 오우치가 아닌 미국의 전신 화상 환자 치료 과정의 사진이다.[5] 우선 해당 사진의 병실은 오우치가 쓰던 병실과 다를 뿐더러, 오른쪽 다리가 절단된 사진의 인물과는 달리 오우치는 사건 전,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하반신 절단을 행한 적이 없다.[6] 오우치는 어느 정도 살이 있는 체형이지만 해당 사진의 환자는 체형이 전혀 다르다. 오우치는 산소호흡기와 함께 특수한 침대[7] 등이 있었지만 해당 사진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4chan에서 해당 환자를 치료하는 다른 각도의 사진[8]을 발굴한 적 있다.
또 눈이 감겨있는[9] 주름 없는 피투성이 얼굴로 사람의 형체를 거의 잃은 두개의 끔찍한 몰골의 얼굴사진인데 사람들은 이 사진이 오우치의 얼굴이라고 주장하지만 오우치가 아니다. 이미지 호스팅 사이트인 imgur의 몇 커뮤니티에 따르면 이 사진은 "시노하라 사후 모습"이라고 한다.[10] 해당 커뮤니티는 이에 대한 근거로 오우치는 입원당시부터 인공호흡기를 달았지만 해당 사진에는 인공호흡기가 없다는 점. 그리고 후술되어 있듯이 오우치는 눈을 절대 감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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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왼쪽 사진이 오우치가 치료받고있는모습이라 하지만 사실은 긴급 피폭자 의료 훈련이다.https://www.nirs.qst.go.jp/publication/nirs_news/200711/hik01p.htm
즉 오우치의 피폭 이후 악화된 얼굴 모습은 인터넷 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피폭 후 오우치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오직 입원직후 사진, 오우치의 악화되어 떨어져나며 검게 괴사되가는 피부 사진[11] 그리고 손 사진과 큰창자, 작은창자의 내시경 컬러사진뿐이다.

3. 사고



3.1. 안전불감증


문제의 작업은 핵연료사이클개발기구의 고속실험로 '조요(常陽)'에서 쓸 우라늄 연료를 가공하는 일이다. 농축도가 높은 이 연료는 일반 원자력발전소용 연료 가공 시설과는 다른 '전환시험동'이라는 건물에서 만들었다.
원자력발전의 연료로 사용되는 우라늄은 먼저 농축시설에서 핵분열을 일으키기 쉬운 우라늄-235의 비율을 높이는 농축 과정을 거치고 JCO 같은 핵연료 가공시설에서 연료로 쓰일 수 있도록 가공된다. 문제의 사건에서 주문은 연료를 57kg의 '질산우라닐'이라는 우라늄 용액 상태로 가공하여 납품하는 것이었는데, 작업자들은 세명 모두 경력 10년 이상의 베테랑이었으며 5% 미만의 저농축된 재료를 처리한 경험은 많았지만, 이 날 다룰 농축도 18.8%의 고농축 재료의 위험성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그렇다보니 이해도 없었다. 오우치 같은 경우, 전환시험동에서 작업을 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임게에 이를 가능성을 '''전혀''' 듣지 못했다.
3년 만에 처음 핵물질을 처리하는데도, 작업자들은 자격요건과 훈련을 제대로 확립하지 않은 채 작업을 진행하였다. 9월 10일부터 작업이 시작되어 20일째 되던 날이며,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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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의 작업자들이 작업하는 모습.[12] 오른손으로 우라늄 깔대기를 잡고 있는 인물은 오우치 히사시, 침전조에 붓고 있는 인물은 시노하라 마사토, 다른 방에서 지켜보고 있는[13] 인물은 요코카와 유타카다.
사고는 불순물 제거작업에서 시작하였다. 작업자 3명은 그러한 정규과정에 대한 숙지 없이 질산에 농축도 18.8%인 이산화우라늄 분말을 녹인 후 스테인리스 양동이에 시노하라가 '''그냥(!)''' 침전조에 부어버렸다. 오우치는 우라늄 깔대기를 잡고 처리과정을 도왔다.
물론 이것만으로 사고가 나진 않았다. JCO에서 규정한 임계제한량은 2.4kg이고 용기에 들어가는 용액의 무게는 2.3kg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업자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작업했고, 안에 들어간 우라늄의 양이 16kg(일곱 양동이째)에 달했을 때 '''임계질량을 돌파했다.''' 본디 순수한 우라늄-235라면 임계질량은 약 22.8kg 정도이지만 하필이면 이것이 수용액이었기 때문에 임계질량보다 적은 질량에서 핵분열이 일어났다.
그 다음은 '임계사고'라고 부르는 제어하지 않은 핵 연쇄반응이 시작되었다. '''도카이 마을 한가운데에 갑자기 활짝 열린 벌거숭이 원자로가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농축도 18% 내외였기 때문에 폭발적 반응으로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작업장 전체가 그야말로 방사선 전자레인지가 되어버렸다. 비록 조용하지만, 일반인이라도 위험 상황이 발생했음을 즉각 인지할 수 있는 폭발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고 치명적인 일이 일어났다. '''초보적인 더러운 폭탄'''이나 다름없는 사태였다.

3.1.1. 원인


이 세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다. 안 그래도 위법한 작업 공정을 관리자들이 임의로 더 축소해서 빚어진 '''철저한 인재'''였다. 그리고 그 결과, 해당 공정이 얼마나 소름끼치게 위험한지 알지 못했던 인부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뒤집어쓰고 죽어나가야 했다.
원래는 이산화우라늄 분말을 질산에 녹여 임계에 이르지 않도록 고안된 형상의 용기인 '용해탑'에서 잘 섞은 후 '''조금씩''' 침전조에 집어넣어야 하지만, 용해 작업에서는 용액이 남아있으면 우라늄-235가 축적되어 농도가 달라질 우려가 있어서 매번 용기를 세정해야 하는데, JCO는 1993년 1월부터 세정이 간단하고 작업시간도 줄일 수 있는 스테인리스 양동이를 쓰게 했던 것이다. 다 만들어진 제품의 균일화 공정에서도, 임계를 피하기 위해 제품을 조금씩 나누어 처리해야 하는 원칙을 깨고 품을 덜 들이기 위해 저탑이라는 가늘고 긴 용기에 넣어 혼합한 다음 휘저어 섞게 했다. 작업 현장에서 위법 행위들이 시작되었어도 회사가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안전을 생각했다면 막았어야 했는데, JCO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1995년 7월부터 이런 방법을 승인했다.''' 일명 '어둠의 매뉴얼'이다. 게다가 이 사고에서는 무려 이 '어둠의 매뉴얼'조차 무시되었다. 가공 공정을 관리하는 JCO 도카이 사무소 주임이, 저탑조차 쓰지 않고 더 낮아서 작업하기 쉽다는 이유로 구형에 가까운 침전조를 이용하는 방법을 승인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후 수사본부는 'JCO가 임계 위험성을 작업자들에게 지도하지 않은 채 양동이로 우라늄 용액을 다루는 위법행위를 계속하게 하는 등,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은 허술한 작업을 거듭했다. 게다가 여섯 명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수행해야 할 안전 교육과 감독을 소홀히 한 탓에 임계사고가 발생하고, 그 결과 오우치와 시노하라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발표했다.

3.2. 늑장 대응


체렌코프 현상으로 푸른 섬광이 발생한다. 작업자들은 이를 목격한 직후 바로 피폭당했고, 공장에는 감마선 경보가 울렸다. 비록 폭발은 없었으나 핵분열 부산물이 건물 내로 퍼져나갔다.
경보음이 울리자마자 다른 방에 있던 요코카와가 "도망치라!" 하고 외치자 다들 방사선 관리구역 바깥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계 반응이 일어난 직후 근거리로 퍼져가는 방사선 피폭은 인간의 반응속도 따위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4] 즉각적으로 방사선 피폭 증상이 나타나 탱크에 가장 가까웠던 오우치[15]와 시노하라는 즉각 통증과 구역질, 호흡곤란 등 증상을 보였고 요코카와 또한 몇 분 후 의식을 잃고 토하기 시작했다. 그 극히 짧은 순간의 중성자선[16] 피폭만으로, 오우치와 시노하라의 염색체는 산산조각나 버렸다.
쓰러진 작업자들을 구하기 위해 소방관들이 출동했지만, 오히려 방사선 피폭 사태를 악화시켰다. 신고자가 ''''임계사고 같은 게 우리 시설에서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소방관들에게 방사능 누출에 관해 어떤 경고도 하지 않았다. 방사능 대비를 하지 않고 뛰어든 소방관 3명은 당연히 피폭되었고, 사고가 발생한 지 10분이나 지나서야 사고의 정체가 밝혀졌다. '작업자들이 푸른 섬광을 봤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그런데 공장이 있는 이바라키현에 사고를 보고한 것은 사고발생 1시간이 지난 후였고,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한 때는 '''4시간 30분 후'''였다. 사고가 난 곳에서 반경 350m 이내에는 주민 40세대가, 500m 이내에는 100세대가 거주하였으며, 그 주변 도로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음을 생각하면, 책임자들이 목숨은 내다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의심스럽다.

3.3. 상황 종료


문제의 연쇄반응은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임계에 최초로 도달했을 때의 순간적인 정점이 지난 후에도 임계가 멈추질 않았던 것이다. 도카이무라는 (비록 늦긴 했지만) 350m 이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는 피난을, 이바라키현은 반경 10km 이내 거주하는 주민(31만 명에 달한다)에게 밖으로 나오지 말고 실내에 머물 것을 권고했다.
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기에 작업자들이 방호복을 입고 투입되었다. 이들은 현장에서 결사대를 조직한 JCO 사원들로, 연쇄반응을 멈추게 하려면 침전조의 냉각수를 빼야 하므로 작업자들은 우선 냉각수 밸브부터 손대었으나, 방사선이 너무 강력했기에 안전을 위해 작업시간은 몇 분 정도로 제한되었다. 몇 분 이상 노출되면 위험하므로 잠시 동안만 일하고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 교대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꾸준히 작업한 끝에, 망치를 동원하여 파이프를 부수고 침전조에 가스를 주입, 냉각수를 모두 빼냈다. 이게 오전 5시 무렵이었다. 그 후 붕산수를 침전조에 주입하여 사고 발발 '''19시간 40분''' 만인 10월 1일 아침 6시 15분에 겨우 사태는 막을 내렸다.

4. 사고 이후


사건 1년여 후인 2000년 10월 11일, JCO 소장을 비롯한 관련자 6명이 체포되었다.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일본 최초로 원자력 시설에서 일어난 사고로 사람을 체포한 혐의였다. 2003년 3월 3일 이들은 집행유예를 포함해 금고 2년에서 3년형을 받고, 이 관련자 중에는 첫 작업자 3명 중 하나였고, 오우치와 시노하라에겐 상사인 요코카와도 포함됐다. 그는 피폭량이 치명수치는 아니라서 치료 후 퇴원하고 이후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지만, 오우치와 시노하라를 이끌고 문제의 작업을 총괄하는 담당자라는 입장상 책임을 추궁받있다. 안전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이 상급자에게 있는데, 그의 관리부실로 두 명이 사망했고 후일 피폭 후유증으로 인해 간접적으로 사망한 사람은 더 많기 때문에 현장에서 본인이 피폭당해 같이 죽지 않은 이상 처벌을 면할 수는 없었다. 요코카와는 '임계를 방지하는 교육은 받지 않았다. 다량의 우라늄 용액을 한꺼번에 탱크에 넣어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해 회사의 안전교육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어쨌든 본인도 책임을 인정했고,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이 사고는 무지의 산물이었다." 하며 스스로를 크게 책망하기도 했다.
JCO에는 벌금 100만 엔(약 1천만 원)이 선고되고 회사는 문을 닫았다. 물론 단번에 닫은 것은 아니다. 2003년 4월 18일, 우선은 우라늄 연료 가공 사업 재개를 단념하겠다고 발표하고, 사업소에 보관하고 있는 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관리하고 임계사고로 피해를 입은 기업과 주민에 대한 보상을 담당하는 회사로 남았다. 그후 현장의 설비를 철거하기로 했는데, 도카이무라 마을 측에서 사고의 교훈으로서 보존을 검토해야 한다고 반발하였다. 이 분규는 1년이 넘게 갔고, 최종적으로 도카이무라가 철거 방침을 받아들였고, 사고 6년째인 2005년 6월 6일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고를 일으킨 침전조는 이때까지도 미량의 방사선을 방출하고 있어 작업은 신중히 이루어졌다. 이것의 레플리카는 2006년 4월부터 도카이무라 원자력과학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사고에도 재처리공장을 단념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32조 원을 들여 아오모리현의 롯카쇼무라에 핵물질 연간 800톤에서 핵무기 1000개 분량인 플루토늄 8톤을 분리할 수 있는 새로운 재처리 공장을 만들어 2022년부터 가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5. 사고 피해자들


사실상 이 문서가 만들어진 이유와, 이 문서에서 가장 많이 다룰 내용이다. 가장 많은 피폭을 당한 두 작업자 오우치 히사시와 시노하라 마사토는 모두 1년이 채 못 가 매우 참혹하게 사망하여, 일본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문제의 작업을 하던 세 명의 1차 피폭자는 우선 시설에서 가까운 국립 미토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스태프들에 의해 두꺼운 비닐로 덮인 상태에서 헬리콥터로 치바 현 방사선의료종합연구소로 이송되었는데[17](다시 피폭 3일째 되던 날 도쿄대학병원으로 전원한다) 그걸 목격한 기자들과 사람들은 "겉보기엔 멀쩡한 사람을 왜 저렇게 비닐로 덮은 채로 이송하는가??"라며 의아해했다고 하며[18] 처음에는 담당 의사나 간호사들마저 응급실로 온 너무나도 멀쩡한 오우치를[19] 보고 놀랐다고 한다.

5.1. 직원 1


[image][20]
오우치 히사시(大内 久)(1964~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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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사진(1982~1983년)[21]
1964년생으로 출생지는 도카이무라 가나사도정. 생전에 아내[22]와 슬하에 아들[23], 형제로 여동생[24]이 있었다. 신체는 175cm[25], 76kg인 다부진 체격. 아들이 소학교에 들어갈 즈음에 가나사도에 집을 지었다.
그는 온화한 성격에, 고등학교[26]럭비 선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후 은퇴하고 아내와 7년간 교제하다가 결혼해 아들을 얻었고, 1980년대 중반이나 후반에 JCO회사에서 일한 것으로 보인다.[27]

오우치는 피폭직후 의식을 잃고 토했으며 20~30분뒤에 깨어났다. 여러 번 설사를 했고 38도의 고열을 경험했지만 잘 참고 있었다.
입원 했을 당시 오우치는 세명의 작업자들 중 가장 심하게 방사능에 피폭되었음에도 가장 침착했고 사고로 의식을 잃은 두 작업자들과는 달리 의식에 문제가 없이 병원으로 잘만 걸어다니는 등, 매우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간호사들도 이러한 오우치를 보고 일찍 퇴원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18시버트나 되는 방사능에 피폭된 그는 가망이 없었고 결국 오우치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간다. 피폭 단 이틀만에 소변량이 줄고, 혈중산소농도가 내려가서 산소흡입 치료가 시작되었으며, 배도 약간 부풀어오르는 등...
입원한 지 약 4주후, 10월 27일에 의료진이 전신을 탈의한 오우치의 좌측에서 그의 오른손을 드는 모습이 나오는데 오우치의 팔의 상태는 많이 악화되어 있지만[28] 그 외 신체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모습이었다. 구글에 있는 사진들에 비하면 그다지 잔인하지 않지만 주의[* 사진에서 오우치의 성기가 비정상적으로 작은 이유는 피폭의 영향으로 생식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3개월의 투병생활을 보내다 결국 사망하였고 슬픔에 빠진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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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의 시신이 집으로 왔다.
이후 12월 26일 장례식에 600명이 오고 이바라키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시부야에서는 "오우치 히사시씨의 죽음" 기억하라!"라고 행진했다.

5.2. 직원 2


[image][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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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의 모습(24살)
시노하라 마사토[30](라이신)(篠原理人)(1959(40세)[31]~2000)
도카이무라 출신으로 죽기 전에 배우자와 자녀 3명이 있었다. 자료가 별로 없어서 신체정보나 생전정보가 별로 없었으며 1984년부터 JCO전임자로 근무했다. 신체는 177cm에 약 60~65kg이다
9월 30일, JCO 전환시험동에서 핵연료 불순물 제거작업에서 우라늄 용액을 넣다가 임계사고가 발생하며 "'이런 핵분열 연쇄반응이 일어나다니?"'라 한직후 푸른 빛을 보고 약간의 구역질을 일으켰으며 설사는 하지않았다. 그리고 손에서 어깨까지 무감각 상태였으며 탈의실에서 오우치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이보게 정신차리게 오우치!"'라 말했고. 이를 악물고 거품을 토하고 몸이 경직되버린 오우치 히사시는 지원으로온 T씨와 요코가와가 입을 벌리게 하고 젓가락을 물게 하여 호흡이 편하도록 하였다. 한편 시노하라 마사토는 증추신경증상으로 인해 목에서 양손까지 무감각 상태였고. 구급차에 실린뒤 구토를 시작했으며 설사는 하지 않았다.
이후 인근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약간의 의식장애가 있지만 침착한 오우치와 별 문제 없는 요코가와와 달리 시노하라는 의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32]
도카이 촌 방사능 유출사고에 대해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6개의 손 사진이 나오는데, 그건 시노하라 마사토의 사진이다. 11일부터 손은 오우치와 달리 이미 피범벅이였다. 10월 4일에 제대혈 이식을 받기 위해 도쿄대 의과학연구소 부속병원에 이송되었고 상태가 악화되자[33] 12월 20일에 피부이식을 시도했다. 이 시도는 성공했으나, 피부가 섬유화되는 부작용이 발생하며 피부가 신축성을 잃고 단단해져 버렸다.('''갑옷 같다'''고 표현했다.)[34] 아무튼 그 이후에는 점점 호전되었다.
방의연 이송직후 시노하라 마사토는 누워있었지만 오우치와 상태가 비슷했고 움직이고 있었다. 10월 3일 도쿄대학 의과학연구소에이송된 직후 삭발한 상태인 시노하라 마사토는 당일 입이 누렇게 변색된 것 이외에는 큰 이상이 없었으나 시노하라는 오우치보다는 염색체가 덜 손상됐지만 그래도 역시 망가진 상태라 일주일동안은 괜찮았지만 이후 10월 중순부터 손에 진물이 나거나 입에 점막이 손상되는 등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피폭 83일째 오우치가 죽었고, 그는 1~2주쯤 지난 뒤에야 그 소식을 형으로부터 전해듣고 시노하라는 겁에 질린 채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라고 울면서 한탄했다고 한다. 마사토의 아내와 형은 "나중에 괜찮아지면 같이 오우치의 묘에 가서 향이나 피우러 가자"고 격려했다. 12월 20일에 피부이식 후 그의 상태는 점점 나아지는 듯 했으며, 새해 첫날 휠체어로 도쿄대학 의학 연구소의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도쿄대학 미나토 연구소 의사들은 2월 초에 시노하라는 여러 개의 피부 이식을 받아 거의 모든 혈액 생산 능력을 회복한 후 침대에 앉아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도 10 시버트라는 치사량의 방사선 피폭을 당한 탓에, 2월이 되자 소화관에서 출혈이 일어나 수혈을 받게 되었다. 방사선 손상으로 인해 MRSA로 인한 간염에 걸려 기관을 절개하고 3월 2일에 인공호흡기를 착용하게 되었으며 간호사와 가족과는 필담으로 소통해야 했다. 도쿄대학병원에서 4월 10일부터 치료를 받았다. 도쿄대학병원 의사들은 그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으나 전원 1주일 후에는 오줌이 나오지 않기 시작하여 24시간 투석을 해야 했고, 폐와 간도 악화되어 갔다. 결국 4월 27일 오전 7시 25분, 병원 메모지에 "엄마..제발"[35]이라 쓰고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안타깝게 사망하게 되었다. 지인들에 의해 황금관에 실려 7개월만에 집에 오게되었다. 그후 히타치에서 4월 30일에 영결식이 열렸다.

5.3. 직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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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을 내다보는 요코가와 유타카. 오우치와 달리 마스크를 쓰고있다.
요코카와 유타카(横川豊)(1945~)
1945년 11월생 연합군 점령하 일본 간토 출신.
신체는 172~176cm, 65~70kg
피폭량은 1~4시버트로 치사량의 방사능에 피폭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세명의 작업자 중 유일하게 생존하였다.방의연으로 이송직후 오우치 히사시가 부축받으면서 방의연으로 걸어간뒤, 요코가와는자력으로 방의연에 들어갔다.입원 이후 치아가 비정상적이게 되어버리고.백혈구 수가 0이 되기도 하였지만 이내 회복하고 12월 20일에 퇴원했다.
그리고 치바의 방사선 연구소 NIRS에서 후유증 치료를 2003년 3월 15일까지 받고 회복해 2004년에 직장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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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에 사고를 일으킨 두명의 담당자라 과실치사죄등으로
사업소원 간부6명과 재판을 받았다.
2005년 9월 30일 인터뷰에서 사고의 원인은 무지라고 밝혔으며 오우치와 시노하라가 죽자 외톨이가 된 느낌이라 한다. 맞장구 쳐줄 사람 없이 혼자 임계 체험자로 살고 있다고. 오우치와 시노하라와는 서로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으로 치바에 방의연에서 오우치 시노하라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마지막에 요코가와가 "힘내라"라고 말하자 2명은 "당신도요"라며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6. 사고 피해자들의 참담한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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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에 타기 전 기다리는 오우치. 앞에는 시노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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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가 이송되는 장면[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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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3시 26분 방의연으로 걸어가는 오우치 히사시[37].
맨 처음 오우치에게서 눈에 띄는 건, 당시 우라늄 용액을 부은 깔대기를 잡고 있어 가장 심하게 피폭된 팔이 빨갛게 부어오른 정도뿐이었다. 그 외에는 여러 질문에도 정상적으로 대화를 하며 서로 쾌유를 빌기도 하는 등, 전혀 응급실에 온 환자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의료진의 술회에 의하면, 오우치는 셋 중 가장 심하게 피폭되었음에도 정신적으로는 가장 침착했다고 한다.[38] 간호사들은 밝은 성격을 보여주는 그를 "유쾌한 오우치 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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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오우치 히사시의 산산조각난 염색체 사진. 사고난 직후 저 지경이 됐다.'''[39]

10월 5일. 피폭한 지 6일째. 무균치료부의 히라이 히사마루는 오우치가 도쿄대학병원으로 옮긴 다음날 채취한 골수세포의 현미경 사진을 받았다.

그중 한 장을 들여다본 히라이는 제 눈을 의심했다.

현미경으로 확대한 골수세포의 염색체가 찍혀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사진에 담겨 있는 것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까만 물질이었다. 히라이가 지금까지 익히 보아온 인간의 염색체와는 모양이 완전히 달랐다.

염색체는 모든 유전 정보가 모여 있는, 이를테면 생명의 설계도와도 같은 것이다. 통상 23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번부터 22번에 이르는 상(常)염색체와 여성의 X, 남성의 Y와 같은 성(性)염색체가 번호별로 정해져 있어서 순번에 따라 늘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오우치의 염색체는 어느 것이 몇 번 염색체인지 도저히 식별하기 어려웠다. 순번에 맞게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잘린 채 다른 염색체에 달라붙은 것도 있었다.

염색체가 산산이 흩어졌다는 건, 앞으로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피폭한 순간, 오우치의 몸은 설계도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혈액을 전문으로 다루는 의사가 된 지 20년. 히라이는 숱한 질병들을 치료했고 그 과정에서 실로 다양한 염색체를 보아왔다. 지금까지는 '이상이 있다'고는 해도 몇 번 염색체가 어떠한 이상을 일으키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우치의 경우, 어느 염색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히라이의 지식과 경험을 훌쩍 뛰어넘는 상황이 당장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83일> P. 59~60

주치의 중 하나였던 히라이 히사마루(平井久丸)는 오우치 히사시의 혈액 샘플에서 염색체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부서진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20년차 혈액종양내과 전문의였던 히라이는, 이 때부터 이미 오우치 히사시와 시노하라 마사토의 고통스런 최후를 예상했다고 한다.[40] 남성의 염색체는 XY, 여성의 염색체는 XX인데 오우치 히사시의 혈액 샘플에선 X염색체 Y염색체 모두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긁히고 부딪히며 상처가 난 염색체는 당시는 물론이고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 의료 기술로도 '''절대로 치료할 수 없다.'''
'''염색체는 모든 유전정보가 담겨있고 위에 언급했듯이 생물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자 순번으로 나뉘어야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는데 그게 죄다 박살이 나서 더 이상 생물체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었다.''' 기본적인 단위마저도 심각하게 데미지를 입은 시점에서 오우치는 물론이고 같이 있던 시노하라도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담당 주치의 마에카와 카즈히코(前川和彦)(응급의학과, 당시 경력 30년)[41]를 필두로 일본 최고의 병원이라 할 수 있는 도쿄대학병원의 온갖 부서(무균치료부, 피부과, 소화기내과, 감염내과, 안과, 수혈부, 검사부, 방사선부 등 총 13곳) 의료진들이 총출동했어도 그들을 구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세포분열이 가장 활발한 혈액 속의 백혈구가 가장 먼저 싹 전멸했다. 특히 백혈구의 일종인 림프구[42][43]는 사고 직후부터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특히 항체를 생성하는 B세포가 속한 림프구가 거의 없어졌으므로 면역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즉 AIDS 환자 같은 상태로, 기회감염[44]에 노출되기 쉽다는 것인데 정말 지극히 위험한 상태다. 이 때문에 오우치는 멸균실에 입원해야 했고, 여러 기회감염균에 대해 실시간 중합 효소 연쇄 반응(Real-Time PCR. qPCR[45]) 시스템[46]을 사용하여 실시간으로 검사를 받게 되었고 결국 극심한 백혈병 증세가 일어났다.[47] 이와 더불어 혈소판 역시 감소하여[48] 피폭 1주일째가 되자 혈소판 수혈을 받아야 했다.
그 다음으로 세포분열이 활발한 피부가 더 이상 세포 재생이 되지 않으면서 '자멸'을 일으켜 벗겨지기 시작했다. 의료용 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자 피부가 같이 뜯겨 나오거나,[49] 수건으로 발을 닦는 수준에도 피부가 손상되었고, 나중에는 손톱도 모두 빠져버렸다.[50] 이러한 양상은 가장 피폭량이 많은 오른손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몸을 덮어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표피가 사라져감에 따라 그는 점차 격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의료용 테이프와 의료기구를 뗀 자리의 피부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을 시점의 의료 기록지에는, 오우치 히사시가 한 인내의 한계를 뛰어넘은 절규 수준의 독백들이 기록되어 있다. 읽기만 해도 환자의 격심한 고통이 느껴질 정도이다.
유튜브에 있는 오우치의 83일을 기록한 '피폭치료 83일의 기록, JCO 임계사고'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그 내용이 나오는데, '제발 그만해주라…', '집으로 돌아가겠다…', '엄마…' 등등 오우치가 남긴 말이 메모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야말로 생으로 살이 뜯겨져 나가고, 폐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서, 엄습하는 격통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저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51] 그리고 피폭 후 한 달이 넘었을 무렵에는 아예 전신을 붕대와 거즈로 싸매고 주기적으로 갈아줘야 했고, 눈을 감을 수 없게 되어서 눈에 연고를 발라주는 조치를 취해야 할 지경이 됐다. 또한 이따금씩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52]
치료 11일째, 피부가 계속 뜯어지고 숨쉬기가 힘들어지는데다가,[53] 쉴새없이 검사와 치료가 이어지며[54] 너무 힘든 시간이 이어지자 오우치는 간호사들에게 "이따위 것들 이제 싫어! 치료고 뭐고 다 관두고 집으로 갈래! 돌아갈 거라고!"라고 소리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오우치가 의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원자력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만큼 피폭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러니 무사히 회복될 것이라는 의료진들의 듣기 좋은 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통스런 죽음을 이미 예감했던 듯하다. 오우치는 평소에 화 한 번 낼 줄 모를 정도로 온화한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그조차 저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결국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간호사 나와는 몹시 당황하고 충격을 받았지만, 조금만 더 기운을 내서 치료받자는 말을 꺼내는 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피폭 후 2주가 넘자, 장기의 점막이 소멸해가며 소화장애를 유발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대량의 설사가 유발되어[55] 비교적 장의 점막 상태가 양호했을 때부터 "혈액을 통한 점액 형태의 영양 흡수보다, 위장으로 직접 영양소를 흡수하여야 건강 회복에 좋다"는 마에카와의 조언 아래 위장으로 투여하고 있던 영양액이 거의 소화되지 못하고, 초록색의 물설사 형태인 거의 그대로의 양으로 배출되었다.[56] 물조차도 흡수되지 못하였고, 7주째 되던 무렵 하얀 동그라미 형태로 장의 일부 점막이 소생하기는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진료 초기 이전 방사선 피폭 사망자들의 다발성 장기 부전-사망의 케이스를 통해 담당 주치의 마에카와가 가장 우려하던 증상이 결국 발현되어, 피폭 후 50일이 지나자 출혈 사태가 벌어져 십이지장이 피바다가 되어버렸고, 이 상태가 되자 설사를 넘어 하혈이 시작되었고 이는 멎을 줄을 몰랐다.
또한 가장 심하게 피폭을 당한 팔부터 점차적으로 신체가 부패하면서, 근육까지 손상되었다. 혈액에서는 미오글로빈이 녹아나왔다.[57] 이로 인해 신장의 부담이 커졌다. 방의연의 초청을 받고 일본을 방문한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피폭 의료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조언을 했는데, 이들이 보고서에 쓴 결론은 ''''도쿄대학병원의 의료진은 의학적으로 전례가 없으며 우리 또한 한정된 조언밖에 해줄 수 없는 영역의 치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실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였다. 이 중 러시아의 전문가는 팔을 절단하기를 권했으나, 절단면이 회복될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이 나와 시행하지 않았다. 나중에 부검했을 때는 근육의 선을 발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인터넷에 돌고 있는 피폭자 사진 중 제일 직접적으로 나온 사진들이 바로 이 사고 때 촬영된 것들이다.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지만 상당히 끔찍할 수 있으니 그런 것에 약하거든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다만 이러한 사진들 중에는 오우치나 시노하라의 것이 아닌 사진들이 여러 장 있음을 참고해야 한다.[58]
오우치 히사시와 시노하라 마사토가 피폭 후 7일간은 겉보기엔 멀쩡하다가 순식간에 이 지경이 된 이유는, 심각한 방사능 피폭으로 인체의 설계도인 염색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새 세포를 전혀 생성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염색체 파괴를 건물로 비유하자면 설계도가 유실되어 건물의 유지보수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황. 인간의 신체는 세포들의 약한 전기자극에 의해 연결돼 있는데, 방사선, 그것도 이들이 피폭된 강력한 중성자선은 그보다 무려 10만~100만 배나 강한 에너지를 가졌고, 이것이 신체를 통과하면서 이 전기자극을 뿔뿔이 끊어놓았다. 정상인이라면 오래된 세포가 파괴되면 계속해서 새로운 세포가 재생해야 하는데, 이 세포를 구성하는 염색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려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있는 세포들은 전부 노후하여 떨어져 나가 사라져 버렸는데, 더 이상 세포가 재생하지 않으니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을 비롯해 모든 장기들이 완전히 망가지게 된다. 처음에 멀쩡했던 이유는, 방사능 피폭은 천단위의 시버트를 받지 않은 이상 충격으로 인한 상해가 전혀 없기에 멀쩡했지만,[59] 오래된 세포가 유지되는 기간이 1주밖에 안 되니 바로 망가지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의료진도 이전부터 축적되어 온 방사능 피폭 피해자들의 자료들을 통해 이런 악화를 어느 정도는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고, 새로이 신체에 백혈구 등의 면역력을 되찾아줄 수 있는 조혈모세포 이식에 유일한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세계 최초로 방사능 피폭자로의 세포 이식에 성공도 했고[60] 일시적이지만 백혈구 수치가 다시 정상에 가깝게 상승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61]
그러나 이런 성공조차 의미 없었던 것이, 바로 '''피해자들 자신의 몸속 물질이 방사성 물질로 변해, 스스로 지속적으로 방사선을 방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62][63] 이 때문에 기껏 이식에 성공한 세포의 염색체가 단 8일 만에 손상되어버려, 의료진을 경악하게 했다.[64] 또한 오우치나 시노하라 모두 조혈모세포 이식은 성공했지만 백혈구 중 고도의 면역 기능을 가진 림프구는 미숙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피폭 후 두 달이 넘어갈 무렵엔 그 증가된 백혈구들마저, 방사선으로 인해 기형적으로 증식한 매크로파지로부터 공격받아 결국 대다수가 파괴되었다.[65] 심지어 이 매크로파지의 활동으로 인하여 적혈구 수치마저 같이 줄어들었다.[66]
그렇게 절망적으로 악화되는 가운데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시키려고 의료진들은 애를 썼다. 산소마스크를 씌워도 호흡곤란이 이어지자 폐에 기관을 넣어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지속적인 수혈 및 기계적인 수분 공급, 진정제와 진통제는 물론 임상실험 중인 약물 투여에[67] 피부 이식까지 시도했다.[68] 여러 대학이 보유하고 있었던 70매의 배양 피부를 오른쪽 배와 발바닥에 이식했으며, 12월 경에는 여동생의 피부도 이식했는데, 이것은 피부 손실로 벌어진 체액의 유실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여러 번에 걸친 이식에도 얼마 가지 못해 체액이 새어나와 피부가 들떠버렸다. 실패였다.[69] 결국 고통스러운 시간만 연장시키다가, 오우치는 83일 만에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70]
오우치는 사실 죽기 수십 일 전인 피폭 59일째 날에도 3차례 심장마비와 소생을 겪는 등 위급한 상태에 놓이기도 하였다. 피부 손실로 인한 출혈 및 장 점막의 손실로 인한 장기 출혈은 거의 하루 10리터에 이르렀고, 이에 대해 적혈구와 혈소판 등을 반나절 동안 10회를 넘겨가며 지속적으로 잦은 수혈을 반복한 결과, 심장에 계속 마라톤 선수와 같은 무리가 간 결과였다. 소생에는 성공했지만 3차례나 심장이 멎었던 것 때문에, 안 그래도 엉망이었던 다른 장기와 뇌의 기능이 현저히 저하됐다고 한다.[71] 혈압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어, 혈압을 올려주는 염산도파민, 염산도부타민,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승압제를 써서 혈압을 맞추긴 했으나 이를 줄이자마자 바로 혈압과 맥박이 불안정해졌다. 이른바 '''승압제 의존 상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주변 자극에 거의 반응하지 못하는 혼수상태가 되었다.[72] 그래서 의료진도 3차례 마비 후의 소생 이후 갈수록 악화되어 가는 것[73]을 보고, 83일째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면서 심장이 멎었을 때는 앞서 결정하여 가족들에게 미리 통보한 대로 더 이상의 소생 조치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심장만은 피폭을 덜 당해서, 오우치는 83일 동안'이나' 살아있을 수 있었다. 만약 심장까지 피폭당했다면 1달도 못 버텼을 것이라고 한다.[74] 실제로 부검한 근육 사진에서 근육 조직이 거의 사라진 대흉근과는 달리, 심장의 조직은 대부분 온전하였다. 이에 오우치를 부검했던 의사 미사와 쇼고(三澤章吾)는 '''혼자 빨갛게 또렷하게 남아 있던 심장 조직에서 오우치의 생존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75]
가족으로는 부모와 형제 및 여동생, 아내[76],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 모든 비극을 여과없이 전달받아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오우치의 생존을 기원하며 다들 종이학[77] 접기를 반복했고, 그 중 하나라도 병실 안에 놓이기를 희망했으나, 감염 우려로 거부당했다. 방사능 피폭 우려로 접근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아직 양호한 상태였을 때는 유리벽 등을 사이에 둔 면회 정도는 가능했다고 하나, 폐에 직접 기관을 넣은 인공호흡기 부착 후로는 대화도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그나마 사망 당일날인 83일째에, 아들과 아내가 혼수 상태에 빠졌던 오우치에게 다가가는 게 허락된 정도. 그리고 오우치는 그날 밤 숨졌다.
오우치 히사시는 '''일본 역사상 첫 임계사고 피폭 사망자'''로 기록되었으며, 이 때문에 그의 죽음은 일본 전역은 물론 바다 건너 한국에서까지 대서특필되었다. 한편 오우치 히사시가 피폭 후 83일째 되는 날 죽었다는 걸 형에게 소식을 듣고 시노하라 마사토는 울면서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피폭량이 오우치보단 적었지만 그도 치사량인 건 마찬가지라, 2000년 1월 1일에 공원으로 나가 새천년을 맞이하고 그후 결국 시노하라도 똑같이 끔찍한 몰골이 되어가다 몇 달 뒤 같은 최후를 맞았다.[78]
오우치 히사시의 치료기록은 <83일>이라는 제목으로, 배경이 하얀 표지를 단 책으로 출판되어 나왔다. 궁금한 사람은 참고할 만하나, '''책 중앙에 있는 빳빳한 소재의 종이 부분은 실제 사진을 넣었으므로 유의해서 보기를 권한다.''' 여기에는 시노하라 마사토의 치료기록도 부가적으로 기재되었으며, 당시 오우치를 치료한 의료진의 고뇌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사망 이후 오우치 히사시와 시노하라 마사토의 시신은 이미 그 자체로 방사성 물질이 되어버린 탓에 차폐 차원에서 콘크리트 몇 겹으로 된 석관에 두꺼운 납으로 된 완전 밀봉한 관을 넣어 매장하였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의 희생자들인 '바실리 이그나텐코' & '알렉산드르 아키모프'를 포함한 수많은 피폭 사망자들, 고이아니아 방사능 유출사고의 사망자들, 방사능 물질의 일종인 라듐으로 만든 약인 라디톨을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된 의사로부터 처방받아 3년을 마셔대다 심각한 내부피폭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에벤 바이어스 역시 똑같은 처리를 거쳤다고 한다.
한편 일반 대중들은 의료진을 크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 이전에도 심각한 방사능 피폭을 당한 사람들이 결국 똑같이 고통과 끔찍한 몰골로 변해가다 사망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치료한답시고 오우치와 시노하라에게 죽는 순간까지 격심한 고통을 겪게 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런 방사능 대량 피폭은 사고로부터 24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도 고칠 방법이 없고, 전술했듯 염색체가 부서져 나간 순간 세포분열 자체를 더 이상 못하기 때문에 산 송장이 되기 때문이다.[79] 연구자료 수집을 위해 오우치와 시노하라에게 그런 격심한 고통을 겪게 한 거 아니냐는 의견. 비슷하게 대량 피폭사고를 겪은 루이스 슬로틴과 해리 K. 더그힐란 2세에게, 의료진들이 고통을 줄여주는 방법으로 임종을 맞이하게 했던 사례와 비교된다는 것. 실제로 <83일>의 저자도 "오우치 히사시와 시노하라 마사토에게 의료행위를 한 병원 측에 큰 분노를 느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락사 제도는 그 자체로 상당한 논란거리이며,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의사들이 선뜻 선택하기는 어려웠을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도 안락사에 협조했다가 의료자격이 날아간 의사들의 사례가 있고, 당장 <83일>만 읽어봐도 의료진 본인들 또한 완치 가능성이 없는 치료행위에 대해 "단순한 고통의 연장일 뿐, 의미가 없는 건 아닌가??"라고 크게 고뇌했음이 드러난다. 게다가 오우치와 시노하라가 몸과 마음이 처참하게 무너져가며 죽는 걸 이들은 옆에서 그다지 효과도 없는 치료와 처치를 해가며 생전 처음 목격하는 그 모든 증상들을 일일이 두 눈으로 목도해야 했으니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아니고서야 정신적 고통이 클 수밖에 없었다.[80] 의료진들은 가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스스로가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자 회의 때마다 어떻게든 가능성이 희박한 대책[81]이라도 거론했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마저도 빈도가 낮아지는 가운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체 뭐냐는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었다고 한다.
시노하라 마사토의 사망 이후, 우연인지 치료활동 중의 피폭 영향인지, 피폭환자들의 치료와 연구에 깊이 관여했던 히라이 히사마루도 2003년 5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주요 피폭자이자 사망자들의 상관인 요코카와 유타카는 치료를 받고 퇴원해서 직장에 복귀했고 2004년에 정년 퇴직했다. 위에 언급했듯이 본인 또한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았으며, 스스로도 잘못이 있다고 반성하였다. 2020년 현재 간토 지방에서 살고 있으며, 2개월에 한 번은 시노하라와 오우치의 묘전으로 간다고 한다.[82] 여담으로 오우치, 시노하라와 마지막으로 한 말은 "힘내라"라는 격려였다 그리고 둘은 "당신도요"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3명은 각자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7. 사고 전이나 이후의 사건


2013년 5월 23일에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의 원자력 연구개발기구 가속기 실험시설에서, 방사능이 관리구역 밖으로 유출되고 연구원 4명이 피폭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사에 의하면 늑장보고를 했다고 한다. 1997년 3월11일 도카이촌 JCO전원 원자로 및 핵연료 개발 공사 ( PNC ) (動力炉·核燃料開発事業団)에서 폭발로 방사능이 누출된 사고가 있었다. 37명이 피폭되었다. 이 사고는 도넨 공장에서 사고가 났다 하여 도넨 사고라 한다. 이 사고는 잘 알려지지 못했다.
JCO는 화재와 폭발을 일으킨 작업자의 부적절한 취급 절차와 표준 이하의 교육을 시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인해 2년 후 JCO 공장에서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하고 만다.

8. 관련 링크



[1] 신체는 174cm에 76kg이다 [2] 생일이 늦었기 때문에 피폭될 당시에는 만 39세였으며 피폭으로 투병중에 자신의 40번째 생일을 맞이한 이후 사망했다.[3] 깔때기를 잡고 오우치와 교대하고 난 뒤. 이떄 요코카와는 마침 다른 방에 있었다고 한다.[4] 고이아니아 사고의 피폭자 데바이르 페헤이라가 7그레이에 피폭되고서 간경화로 사망하기까지 7년 간 생존한 것이 현재까지 유일한 사례이다.[5] Shriners Burns Hospital For Children in Galveston, Texas라는 곳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Principles And Practices Of Burn Surgery'라는 책에 나옴.[6] 러시아 의료진이 오른쪽 팔을 절단할 것을 권하기는 했지만, 다리는 아니였다.[7] 롤링베드라 불리는 중환자용 침대다. 전기를 동력으로 삼아 조금씩 움직이며 좌우 55도까지 기울일 수 있다. 욕창 등을 막기 위한 것이다. 환자가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몸 각 부위를 고정시켜주는 두터운 패드가 달려 있다.[8] 일본인이 아닌 백인 의료진이 치료하고 있다. [9] 눈썹까지 없어 알아보기 힘들다[10] 두 사진 중 왼쪽 사진은 확실치 않지만 이보다 더욱 악화된 모습인 오른쪽 사진은 사후 모습이 확실하다고 한다.[11] 의료 저널들에 비교적 자주 나오는 사진들이므로 정확도 높음.[12] 시노하라 마사토와 요코가와 유타카가 인터뷰해서 알아낸 것.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고했다. [13] 일과가 모두 끝난 오우치와 교대하고 투입한 우라늄의 양을 계산하고 있었다[14] 루이스 슬로틴 항목 참조.[15] 상사인 요코카와와 교대해 우라늄 깔때기를 잡고 있었다. 약간의 엇갈린 타이밍으로 요코카와와 오우치의 생과 사가 갈려버린 것.[16] 방사선 중에서도 에너지가 가장 크다.[17] 당시 오우치 히사시의 토사물을 분석한 결과 24Na(나트륨-24)가 검출되어 관계자들이 기겁을 했다고 한다. 체내 나트륨 중에는 안정 동위원소(자연 붕괴하지 않는 동위원소)인 23Na이 존재하는데, 방사능에 대량 피폭된 사람의 몸 속에서 23Na이 24Na 동위원소로 바뀌어버렸다.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면 대량의 중성자선이 발생하는데, 핵분열 연쇄 반응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임계사고'가 발생해 방출된 대량의 중성자선에 사람이 노출되면 체내 혈액 속 23Na이 24Na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를 이용하여 체내 24Na의 비율을 측정하면, 피폭된 사람이 얼마나 중성자에 노출되었는지 알 수 있다.[18] 사실 결과적으로 이런 대비는 과한 것이었다. 방사성 물질이 직접 뿌려진 것이 아니라 '방사선'에 피폭된 임계사고이기에, 피폭자로부터 2차 피폭을 당할 위험은 극히 미미하다.[19] 당시 뉴스 영상을 보면 피폭자들이 방의연에 도착했을 때 구급차에서 내린 오우치는 피폭자가 아닌 것같이 아주 잘 걸어가고 있었다[20] 국립 미토병원 입원 직후 사진이다.[21] 오우치의 영정사진.당시 럭비선수였다. 이때는 아내인 치즈루와 교제했을 때다. (고3 추측)[22] 고등학교 시절 지인이며 이름은 치즈루.[23] 현재 31세[24] 10월3일에 오우치 히사시한테 말초 줄기세포를 이식해줬다[25] 부축받으면서 방의연에 걸어갈 때 모자를 쓴 직원과 방호복을 입은 직원보다 키가 더 컸다.[26] 카츠타 고등학교나 도카이무라 고등학교 중 하나일 것이다.[27] 오우치는 10년 이상 근무한 베테랑이었다.[28] 특히 가장 큰 피폭을 당한 오른 손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9] 20대 중반시절[30] 일부 사이트에서는 '리히토'라 나오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마사토'가 맞다. '理人'는 '마사토'와 '리히토' 두 가지 음독으로 모두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인 듯. 또한, 해당 사건과 관련된 여러 논문도 존재하는데, 모두 'Masato'라고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다.[31] 느린년생 12월~1월쯤에 출생[32] 시노하라는 요코가와랑 달리 오우치처럼 열이 38.5도였다. 그러나 오우치는 카메라를 보면서 얼굴만 살짝 붉어질뿐 오히려 피폭량이 더적은 시노하라는 전신이 오우치보다 더 빨갛게 되고 식은땀을 흘렸다.[33] 얼굴 가죽 '''대부분이 손상되고 있었다.'''[34] 그래서 사후 부검을 할 때 피부에서 과자 부서지듯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부검을 맡은 교수는 생전 단 한 번도 이런 소리를 해부 현장에서 들어본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35] 사망 하루 전[36] 그나마 얼굴이 나온 뉴스 영상.[37] 물병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구급차 안에서 시노하라의 발열을 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38] 의사 간호사한테 "잘 부탁드립니다" "이런 방사능에 노출되면 백혈병 같은 병에 걸리나요?"라고 했다. 나와 준코 간호사는 1달 뒤에 오우치 씨가 퇴원할 거라 생각했다.[해석] 염색체의 현미경사진(엉덩뼈의 골수세포).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어 동정(同定. 생물의 분류학상의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채취일: 1999년 10월 3일(피폭 4일째)[39] 시노하라 역시 저런 손상을 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0] 히라이는 훗날, 방사선 피폭은 고작 영점 몇초 안에 모든 장기의 운명이 뒤바뀌고, 전신 구석구석의 모든 장기가 시시각각 악화 일로를 걸으며 타격을 입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 사진을 봤을 때, '방사선이 이렇게까지 무서운 것이었구나.'하고 생각하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고.[41] 공교롭게도 원자력안전연구협회 피폭의료대책전문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며, 피폭 의료 전문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고 바로 전날 '긴급 피폭 의료에 관한 정보 교환 모임'에 참석했다고. 방사선 사고로 피폭한 환자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한 자리였는데, '''바로 다음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42] T세포, B세포 등을 포함하는 백혈구이다. 또한 로스 앨러모스에서 1958년 원자력 사고를 당한 세실 켈리의 사태에서도 6시간 만에 반응이 온 게 이것이다. 여담으로 켈리는 역대 사고 피해자들 중 지구상 가장 많은 피폭량인 '''120 시버트'''의 피폭을 당했고 이쪽은 피폭량이 상상을 초월해서 백혈구는 말할 것도 없고 적혈구까지 전멸했다. 오우치의 경우 피폭 9시간 만에 1.9%로 감소했는데, 정상 수치는 25~49%이다.[43] 당연히 세실 켈리는 백혈구 적혈구 세포 염색체 가릴 것 없이 모든 것이 짧은 시간 안에 거의 몰살해버렸고 몸안에 있던 나트륨은 실로 어마무시한 방사능을 내뿜는 나트륨이 되어버렸으며 이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 신체가 다발성 장기 부전심부전증을 일으키면서 사망했다. 또 그의 몸에선 실로 어마무시한 감마선이 뿜어져 나왔고 대소변에서도 밀리시버트 단위를 넘는 무려 '''시버트''' 단위로 방사선이 검출되었다. 피폭 6시간만에 림프구가 사라졌고, 골수는 적혈구를 생성하지못해 혈액은 혈장수준의 투명한 혈액이 나왔다고 한다. 장기에 산소를 전달해 줘야 할 적혈구들이 모두 전멸해 더 이상 장기들에게 보내줄 산소와 피가 없어지자 장기가 서서히 망가지고 이후 심장도 작동불능이 되어 더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44]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감염되지 않다가 환경이 바뀌면 감염되는 일. 항생제 처리로 정상 세균총(마이크로 바이옴)이 무너져 특정 세균이 과다증식해 질병을 일으키거나, 후천성 면역 결핍증으로 면역 기능이 떨어져 정상인에게는 드물게 일어나는 감염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오우치는 후자에 가깝다.[45] 보통 실시간 PCR은 '''qPCR'''로 줄이지 RT-PCR이라는 표현을 쓰진 않는다. 왜냐하면 '''역전사 PCR(Reverse Transcription PCR)'''이라는 것도 존재하기 때문.[46] 1달 전인 1999년 8월, 히라이가 이끄는 무균치료부의 한 팀이 민간검사팀과 협력해 개발된 방법이었다. 일반적인 혈액검사에서는 림프구가 만드는 항체를 검출하여 조사하는 '항체검사' 방법을 썼지만, 오우치의 몸에서는 림프구가 이미 사라지고 없었기에 이 방법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기준 최신 기술인 PCR검사를 택한 것.[47] 백혈구 수치가 건강한 사람의 10분의 1 수준인 1세제곱밀리미터당 900개까지 하락하고, 조혈모세포가 생착하기 직전에는 100여개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48] 정상이라면 1세제곱밀리미터 당 12만에서 38만 정도를 보유해야 하며, 3만 이하가 되면 피가 멎기 어려워 위험한 상태다. 오우치는 2만 6,000개 선으로 떨어졌다.[49] 그래서 피폭 10일째인 10월 9일 이후에는 사용이 금지되었다.[50] 다만 손상되지 않은 몸의 뒷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경계인 몸의 옆면의 피부 일부분이 동그란 섬 형태로 재생되는 일이 있었고, 이로 인해 옆면적 피부가 조금씩 늘어나서 여기에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손상이 심한 앞부분까지는 재생이 안 되었다. 후술한 피부이식 역시 이러한 재생 피부의 성장인자에 기대한 것이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성장인자는 정작 피부이식이 정말로 필요한 몸의 앞면부에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51] 통증을 줄이기 위해 대량의 진정제와 진통제를 맞았는데 이 중에는 프로포폴펜타닐(효과가 염산모르핀의 100배인 마약성 진통제이다) 그리고 화상 치료에 필요한 염산케타민 등이 있었다. 다만 이것들이 얼마나 효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52] 간호사는 마치 피눈물 같았다고 회상했다.(눈이 노랗게 말라있어서 저게 사람눈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53] 흉부 X선 사진에는 오른쪽 폐를 중심으로 그림자가 져 있었다. 이럴 때 보통은 폐에 바늘을 찔러넣어 수분을 빼내는 '흉강천자'를 실시한다. 의료진들은 감염 위험과, 피부에 생긴 구멍이 메워질지에 대해 큰 고민을 했지만 결국 흉부에 고인 물을 빼내기로 한다.[54] 백혈구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 뼈에 주삿바늘을 찔러넣어 골수를 채취해야 했고, 감염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코와 목의 조직, 피부의 샘플도 채취했다. 눈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사진을 찍고, X선과 CT 촬영도 해야 했다. 어떤 날은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면서 한번도 자세를 바꾸지 못하기도 했다. 이런 식이니...[55] 피폭 29일째가 되자, 하루치 설사량이 3리터를 넘어섰다.[56] 다만 설사의 이유는 방사성 장애 이외에도 조혈모세포 이식에 따른 이식편대숙주현상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피폭 4주째에 실시한 오우치의 대장내시경에선 죽어버린 흰색 세포조직이 나뒹굴고 있었고 헐어있었으며 일부 부분에선 조직과 대장 내 막이 뜯겨나가 피바다가 되어있었다...[57] 일반적으로 1밀리리터당 60나노그램 선인데 30배나 되는 1,800나노그램에 육박하고 있었다.[58] 컬러로 돼있는 얼굴사진과 전신이 피범벅인 사진은 오우치가 아니다 [59] 1958년 12월 30일 로스 앨러모스 핵 재처리 공장에서 상반신 전체에 120시버트라는 역대 1위의 피폭을 당해 35시간 만에 사망한 세실 켈리도 죽을 때까지 겉모습은 멀쩡해 보였다. 단 이 쪽은 너무 많은 피폭을 당해 바로 혼수상태에 빠지고 신체가 무너지기도 전에 죽었으니 그랬지만.[60] 오우치는 여동생으로부터 조혈모세포를 이식받았다.[61] 가장 높은 피폭을 당한 오우치도, 비록 신체가 엉망이 된 뒤라고는 하나 백혈구 수치가 점차 늘어나 300개 증가를 시작으로 정상인과 다름없는 6,500개를 거쳐 8,000개 선으로 상승했고 림프구 역시 백혈구의 20%로, 적혈구와 혈소판도 증가세를 보였었다. 한편 시노하라는 조혈모세포가 맞는 기증자를 찾지 못해 제대혈 이식을 받았는데, 피폭량이 오우치보다는 좀 더 적었던 탓에 증상 호전이 보다 두드러졌다고 한다.[62] 왜 방사능 물질로 변해 있었냐면 임계사고로 인한 핵분열이 발생하여 중성자선에 피폭되어 20시버트 가까이 되는 방사선에 영향을 받은 영향으로 몸속 나트륨이 나트륨-24라는 '''방사능 물질'''로 변했기 때문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에도 이러한 피해자가 많았었다.[63] 다른 의견도 있다. 나트륨-24는 반감기가 겨우 14.96시간밖에 되지 않아 염색체를 손상시킬 수 없으며, '방관자 효과'라 부르는, 중성자선 피폭 특유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성자선에 피폭한 세포가 방출하는 활성산소는 피폭하지 않은 세포에 손상을 입히고, 체내에서 무차별적으로 유해한 반응을 일으킨다.[64] 여동생에게서 이식받은 골수세포의 검사 보고서에서 30개 중 3개의 세포의 염색체가 망가져버렸다. 당시 도쿄대학병원에서 소유하고 있던 염색체 중 손상된 염색체는 겨우 15만여 개 중 2개에 불과하니, 비교를 불허할 수준으로 높은 확률이다.[65] 혈구탐식증후군이라 불리는 현상으로, 보통은 바이러스 감염에 의해 일어나지만 오우치는 그럴 가능성이 없었다. 간 기능이 떨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지만 원인은 끝끝내 알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백혈구는 점차 수치가 줄어들어 1세제곱밀리미터 중 1만 개 정도의 수치에서 1,000개 전후로 떨어져 그 부근에서 제자리걸음을 할 뿐이었다.[66] 다른 조치와 더불어 매크로파지의 활동을 줄여주는 면역억제제인 스테로이드가 투여되었으나, 효과는 없었다.[67] 비슷한 예로 일본 국내에서 회수된 약인 방사능으로 인한 폐 장애를 예방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 펜톡시필린이라는 약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에는 재고가 없어 태국에 있는 재고를 주사액 형태로 수입해서 사용했다. 또한 한창 임상실험을 하고 있는 단계인 경구투여제 형태의 궤양 치료약인 ‘양성자 펌프억제제’도 점적주사의 형태로 바꾸어 투여했다. 의료진들은 정부부처, 제약회사, 항공회사 등 온갖 곳들과 필사적인 교섭을 통해 긴급수입 절차를 거쳤다.[68] 워낙 심하게 피폭을 당해서, 소화기관 등 내장에는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69] 시노하라의 경우 상술했듯 이식은 성공했지만 피부가 섬유화되어 갑옷처럼 단단해져 버렸다.[70] 루이스 슬로틴이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에 직접적으로 피폭당한 근로자들도 이들과 비슷한 증상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숨을 거두었다.[71] 신장은 기능이 거의 사라져 소변이 전혀 나오지 않게 되었기에 24시간 내내 인공투석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되었고, 간은 간혈류 저하로 인한 간부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72] 그 일 이전까지만 해도 오우치는 의식이 있었다. 피폭 11일째 이후로는 인공호흡기 튜브 때문에 대화는 할 수 없었지만, 말을 걸며 고개를 가로젓거나 끄덕여 대답했으며 스스로 눈을 뜨기도 했다. 피폭 50일째가 되도록 몸을 움츠리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등의 반응을 계속하고 있었다. 물론, 차라리 의식이 없는 쪽이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73] 동공의 빛 반사를 거의 감지할 수 없었고, 자발호흡을 돕는 형태로 이루어지던 인공호흡기도 더 이상 자발호흡을 감지하지 못하여 방식을 바꾸었다. 승압제는 점점 늘어만 가면서, 사망하던 날에는 심정지 직후의 20배가 넘는 양을 투여했다. 혈액순환이 나빠져 항생물질과 항진균제가 제대로 퍼져나가지 못하게 되자, 배어나오는 체액을 영양분으로 삼는 곰팡이가 몸통에서 시작해 팔과 허벅지 쪽까지 퍼졌다.[74] 이 사건 이전의 임계사고 전신 피폭자의 최대 생존 기록은 9일이었다.[75] 앞서 설명한대로 온몸의 근육이 분해되어 붉은빛을 내는 미오글로빈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회백색 근육 속의 붉은 심장은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생존의지와는 별개로, 방사선은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76] 이름은 치즈루이다. 미국기사에 오우치의 관이 집으로 올 때 나왔다.[77] 일본에서는 아픈 사람에게 쾌유를 기원하며 종이학을 접어 선물한다고 한다.[78] 병원 메모지에 `..엄마.제발..`이라 적고 죽었다[79] 위의 조혈모세포 이식을 통한 치료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으나 결국 중성자선에 의한 몸 속의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몸에선 방사선이 나오기 때문에, 세포를 이식해 보았자 방사선에 의해 손상되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고 시도를 했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하는 의견이 없지 않지만, 문제는 그럴 방법이 없다. 현재까지도.[80] 오우치를 돌보던 한 의료진은 병원에서 임계 사고가 발생하고 자신도 그 증상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밀려드는 환자들을 돌보아야 하는 악몽을 꾸었다. 또한 최초의 심정지가 발생했을 때, 이제는 오우치 씨가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의료진도 있었다.[81] 임계사고의 선례 자체가 얼마 안 되는데다 대부분의 사례가 당시 기준 3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치료법은 어떤 전문서적에도 거의 실려있지 않았다. 주치의 마에카와 왈 '해도(海圖) 없는 항해'.[82] 2019년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에 기자들이 취재하려 했지만 아내가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