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파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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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물리학자. 10대 이전부터 물리에 재능을 보여 신동이라 불리고, 70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끊임없이 학문에 대해 연구해 물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양자역학에서의 경로적분, 입자물리학에서 양자전기역학의 정식화와 쪽입자 모형의 제안, 과냉각된 액체 헬륨의 초유동성 연구, 재규격화이론, 헬만-파인만 정리, 파인만-카츠 공식, 양자 교란 등으로 잘 알려졌고, 1958년에 이미 나노머신의 등장을 예견하고 개념을 정립하였으며, 양자전기역학에의 공로로 줄리언 S. 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와 함께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아원자입자의 행동을 지배하는 수학적인 기술을 표현하는 직관적인 도형 표기를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파인만 다이어그램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1985년에 쓴 논문에서는 양자 컴퓨터의 등장을 예견하였다.
매우 유머러스하기 때문에 대중에게도 인기가 많은 물리학자이기도 하다. 문학, 운동, 예술분야에 걸치는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유명하고, 그에 못지않게 사회적인 쟁점이나 비 과학분야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널리 알려 본인의 유명세에 기여하였다.
2. 출생 배경과 성격
뉴욕 퀸즈의 파라커웨이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2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파인만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파인만을 과학자로 만들고 싶어해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한편 자식을 유대교 주일학교에 보내 히브리어까지 배우게 했다. 파인만은 이렇게 주위의 열성적인 의지하에 유대교 학교에 다녔으나 13살 이후로 종교에 대해 거부하고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자라는 선민의식을 버렸다.# 어렸을 적 이후 파인만은 줄곧 무신론자였으며 자신에게 유대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거나 남을 유대인 등의 인종으로 분류하는 것을 싫어했다.
어린 시절[4] 그는 라디오 수리에 많은 관심을 뒀으며 동네의 라디오 수리를 도맡아 하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생각만으로 라디오를 고치는 소년'이라고 불렀다. 기계를 다루는 데에 재능이 있어 초등학교 때 그는 부모님이 집을 나간 사이 집에 강도 경보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는 15세 때 (한국나이 16~17세) 삼각함수, 대수, 무한급수, 해석 기하학, 미분과 적분[5] 을 익힌 상태였으며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스스로 고안해 낸 수학 기호들을 사용하여 문제를 풀었다.[6]
그의 직설적인 화법은 때때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는데, 고양이의 신경계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사서에게 “'고양이 지도'(a map of the cat)에 관한 책이 있으면 빌려주세요"라고 물었다가 큰 웃음을 들었다고 한다. 웬 이상한 생물학과 학생이 고양이 지도를 찾는다는 소문이 돌았다고......[7]
파 락어웨이 고등학교를 1935년에 졸업하고 그 해에 MIT에 입학하여 1939년에 졸업하였다. 그 뒤, 프린스턴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을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8]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일하였으며 이후 코넬 대학교 이론물리학 조교수로 재직하였고, 1950년쯤부터 칼텍의 교수가 되어 계속 재직하였다.
기존의 틀을 깨는 타입인데, 강연을 해주는 조건이 "사인을 열세 번만 하겠다"[9] 라고 말하거나, 노벨상 수상자리에서 왕에게 뒷면을 보이면 안 된다는 관례에 '그러면 뒤로 깡충깡충 뛰면서 입장해야지!'라고 결심하거나[10] , 로스 알라모스에서는 편지 검열제도에 도전하는 등[11] 이런 탈권위적인 태도를 평생 보여주었다. 천재들이 모인다는 멘사도 매우 싫어해서 자신의 아이큐 검사 결과가 125로 나왔을 때[12] 멘사의 가입 권유를 자연스럽게 거절할 수 있어서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반면, 학생들이나 물리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관대했던 듯하다.
또 권위는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평생 가졌다. 이것은 아버지의 직업인 제복 세일즈맨에서 유래한다. '''대통령이나 교황도 결국엔 옷 입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왈, "교황이 평신도와 다른 것은 그가 쓰고 있는 모자뿐이란다." 또한 대학원 시절이나 로스 알라모스 시절 물리학계의 거장들과 '권위따위는 모르겠고'라는 태도로 치고받고 싸우거나, 역시 로스 알라모스 시절에 비밀을 유지하려는 정부나 군에 맞서 노동자나 계산원에게까지 이것이 어떤 프로젝트인지 알려서 근로의욕을 고취시킨 일화가 좋은 예다.[13]
파인만의 업적은 물리학 분야에서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정작 그가 아인슈타인 이후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 중 한 명이 된 것은 그의 유머러스한 성격 덕이 컸다. 사실 파인만의 연구 분야나 주요 업적들은 대중들이 이해할 만한 게, 설명할 만한 게 아니다. 애초에 자신의 연구를 대중에게 설명한다는 것 자체에 파인만 스스로도 부정적이었다.[14][15]
3. 물리학자의 특이한 행적
3.1. 재치
대중들이 그를 유명인사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의 친구 랄프 레이튼이 펴낸 그의 일화에 대한 책과 비슷한 몇몇 책의 영향이 크다. 실로 '''악마적인 장난을 고안해 내는데 천재적인 인물'''인데, 몇몇 일화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줄 때 파인만은 물잔에 물을 가득 채운 뒤 그 안에 동전을 넣고 카드로 물잔을 막고 나서 물잔을 뒤집어 테이블에 세운 뒤 카드를 빼냈다. 그것도 물잔 2개로. 즉, 팁을 얻기 위해서는 물잔을 들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면 물이 쏟아져 나오는 구조를 만든 것이며, 2개를 준비한 것은 하나만 있으면 물이 쏟아지고 끝이지만 2개라면 한 번 당한 뒤 고민할 거라는 계산에서 한 것. 이에 빡친 웨이트리스가 다음 날 따지자, 파인만은 "나 같으면 물바가지를 준비한 후 책상을 기울여 조금씩 조금씩 컵을 움직이고 쏟아지는 물은 물바가지에 받겠다"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그날도 똑같이 뒤집은 컵에 팁이 들어있는 것을 본 웨이트리스는 파인만이 조언한 대로 했지만, 이번에는 빈 컵이었다.[16] 결국 다음 번에 파인만이 그 식당에 갔더니 담당 웨이트리스가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 MIT 학부생 시절, 수학 스터디 동아리의 '문 열지 마시오'라는 경고문과 매번 조금의 소음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부원들의 예민함이 짜증났던 파인만은 아예 그 문을 떼서 숨겨버렸다. 이에 동아리 모임이 소집되었고, 이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 모두가 심각한 회의를 진행했다.[17] 다들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하는 분위기에서 파인만 차례가 되자 "당신은 충분히 똑똑하고 지적으로 우월합니다. 자, 우리가 인정했으니 이제 문을 돌려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연히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동아리 회장은 한 명 한 명에게 '네가 문을 훔쳐갔나?'라고 묻기까지 했다.
>앨런: 아니오, 저는 문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회장: 조지, 네가 문을 훔쳐갔나?
>조지: 아니오, 저는 문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파인만의 차례가 다가오자...
>회장: 리처드, 네가 문을 훔쳐갔나?
>파인만: 네, 회장님. 제가 문을 훔쳐갔습니다.
>회장: 장난치지 마, 리처드! 상황 파악 좀 해. 그럼 다음은... 마이클, 네가 문을......
나중에 진짜 파인만이 문을 훔쳐갔다는 걸 알게 된[18] 부원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따졌지만 파인만은 "난 진실을 말했다."고 주장했다. 단지 자신은 대부분 진실을 말하는데, 사람들이 믿고 싶지 않을 때 진실을 말한다고.
- 로스 앨러모스에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에도 이런 장난은 계속되었는데, 동료 물리학자의 자료가 필요해 방에 들른 그는 친구가 없는 걸 보자 간단히 자물쇠 번호를 유추해 열어[19] 서류를 꺼냈다. 하지만 그대로 나오기 아쉬웠던 그는 살짝 장난을 쳤는데, 첫 번째 서랍부터 세 번째 서랍까지 차례대로 '이것도 다른 것만큼 열기 쉽군 - 현명한 사람', '서류 빌려간다 - 금고털이 파인만'[20] , '번호가 다 똑같으면, 다른 것도 열기 쉽다 - 같은 사람'이라는 세 장의 메시지를 넣어 두었다.
3.2. 개성
- 핵 잠수함의 특허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로스 알라모스 시절 군에서 핵 관련한 각종 아이디어를 수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파인만은 "갖다붙이는 대로 다 가능한데 뭐 그런 걸 특허로 내냐..."며, 원자로를 잠수함에 붙이면 원자력 잠수함이 되고, 로켓에 붙이면 원자력 로켓이, 비행기에 붙이면 원자력 비행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그 아이디어를 그대로 특허신청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원자력 로켓과 비행기의 특허 소유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계기는, 한 기업이 진짜로 원자력 비행기를 만들려 했는데 이에 대해 아는 기술자가 없어서 파인만을 찾아갔기 때문이었다.[22]
- 술집에서 술집 안의 여자들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다면서 싸움질하다가 얼굴이 퉁퉁 부은 일도 있었다.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요>에서 이때의 일화를 서술한 것이 걸작이다
3.3. 재능
취미들 또한 다양하여 봉고 연주, 마야 문자 해독, 회화, 금고따기, 그림 그리기, 춤 추기 등의 취미를 갖고 있었으며, 전부 보통 이상은 한 모양이다.
- 마야 문자 해독에 관해서는 해설서의 오류를 지적하는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맨 처음 마야문자서를 샀을 때 왼쪽에는 마야 문자가. 오른쪽에는 간단한 해석이 있었는데. 파인만은 해석을 보지 않고 풀어보겠다고 생각했다. 몇날 며칠을 생각한 결과 그는 이게 화성의 공전주기와 일치하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오른쪽 해설서를 보니까 수치가 맞지 않는 부분도 많고, 천문학적인 이해력이 떨어진 사람이 작성한 듯했다고 한다. 이 고문서가 천문에 관한 내용이라, 물리학자인 그는 몇몇 수치들의 내용이 천문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유리했다고 한다. 고문서에 기록된 일식이나 월식, 혜성 등의 천문기록들은 과거의 연대 추산에 도움을 주고 있다. 결국 이 고문서와 그 해독에 관한 내용으로 동료 물리학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도 했다. 인문학 강의를 하는데 강사가 과학자인 상황에 이를 계획한 담당자가 인문학 지상주의자였는지 속이 좀 상했다고 한다. 나중에 다른 마야문자책도 해독하려고 샀는데 예전 책하고 같은 수치가 나와서 이게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 금고따기는 취미처럼 즐겼다. 당시 기밀시설이었던 로스 알라모스의 높으신 분의 금고를 열고 보안의 허술함(!)을 지적하는 장난스런 메모를 남기곤 했다. 상세한 장난 내용은 위를 참조. 파인만은 이 금고따는 방법에 대해 한 챕터를 할애해 상세히 말하고 있는데, 내용을 읽어보면 기계적 기본 원리에 인간적인 허술함, 거기에 어중간한 보안의식의 조합이 얼마나 취약해지는지 알 수 있다. 지금 보면 초보적인 수준의 비번 털기처럼 보이지만 당시엔 비밀번호라는 것 자체를 일반인이 사용할 일이 거의 없던 시대였던 것을 감안해 보면...[24]
여기에 더 압권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나중에는 고위직 용으로 훨씬 크고 튼튼한(그리고 파인만의 방법도 안 통하는) 금고가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날 담당자가 없는 사이에 금고를 열 일이 생겨서 연락을 받은 파인만은 그건 열 수는 없다고 했는데 잠시 후 다시 연락이 와서 마침 연구소에서 수리공으로 일하던 사람이 그걸 열었으니 이제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 당연히 어떻게 열었을까 호기심이 동한 파인만은 비법을 알려고 그 수리공에게 몇 달 동안 천천히 접근하여 친분을 쌓았고, 그러던 어느 날 비법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하면서 정체를 밝혔는데, 오히려 수리공은 놀라면서 금고털이로 유명한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고 하면서 자기는 기술 같은 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열었는가 물으니 금고를 구입할 때 맞춰져서 나오는 기본 암호를 썼더니 열렸다는 것이었다. 즉 돈들여 더 튼튼한 금고를 샀는데 정작 비밀번호도 안 바꾸고 써서 금고를 산 의미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더 기절초풍할 사실은 이후 다른 금고도 기본 암호로 열어 보려고 했는데 다섯 중 하나는 먹혔다고...[25]
- 상대적으로 '성취'가 떨어지는 회화도 그림을 팔거나 개인 전시회까지 개최했다. 파인만이 자주 다니는 어떤 술집은 파인만이 판 그림을 걸어두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 그림의 주인이 물리학자라고 하면 술집 주인이 그림을 사지 않을까봐서 가명을 쓰고 화가를 자칭했다고 한다.[26]
- 봉고 연주는 물론 전문적인 음악가와 함께 하긴 했지만 세계 대회에 나가는 무용수의 반주를 맡을 정도였고, 이 무용 팀은 세계 대회 1등을 눈앞에 두고 아슬아슬하게 2위를 했다. 왜 2위를 했는지 공연 팀이 심사위원에게 살짝 물어보니 '음악이 좀 아쉬웠다'라고 답변했다. 파인만은 이 일화에 "파리까지 가서야 발각되었다(Found out in Paris)"라고 제목을 붙였다. 또 브라질에 안식년차 갔을 때는 프리지데이라라는 브라질 전통 악기를 배워 삼바 페스티벌에 나갔다. 연습하는 내내 "또 저 미국인이야!(O Americano, Outra Vez!)"라고 잔소리 듣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웬만한 현지 기수 이상으로 한 모양인지 파인만이 참가한 팀이 삼바 페스티벌을 우승했다. 현지인들에게도 꽤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 삼바 페스티벌에 참여하면서도 당시 내용에 대한 이해 없이 암기에만 치중하는 브라질 과학 교육의 문제를 지적했다.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요'를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에피소드를 읽을 수 있는데, 개깐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사정없이 까댄다.[27] 발표 회장에서 암기에 치중하여 본질적인 의미는 뒷전인 브라질 과학 교육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비판하면서, 그래도 학생 두 명과 교수 한 명은 실력이 있는 것을 보았으니 아주 엉망은 아닌 것 같다고 마무리를 지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그 학생 두 명은 브라질 교육을 받지 않고 외국에서 공부하다 그 해에 브라질에 왔으며[28] , 그 교수는 브라질에서 공부하긴 했는데 책으로 독학한 사람이었다고 한다.[29] 즉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막장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미 국무부에서 '외교 문제가 될 뻔 했다'라고 얘기나왔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로 깠다. 그나마 '이 사람이 정말 과학을, 교육을 사랑해서 까는구나'라고 인식이 되니까 다들 참았다.
- 다만 운동만큼은 재능이 전혀 없었는지 학창시절 운동장을 지나갈 때면 운동하던 사람들이 놓친 공을 주워 던져달라고 부탁할까봐 잔뜩 긴장해서 멀찌감치 돌아갔다고 한다. 자신이 공을 던질 때면 항상 목표점에서 1 라디안 정도[30] 비껴나간 곳을 향했다고 한다.[31]
4. 업적
그의 과학적인 성취도 그의 접근 방식이 특이한 데서 얻어진 것이 크다. 노벨상을 수상하게 한 양자전기역학도 다른 공동수상자들은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접근했지만, 그는 '파인만 다이어그램'이라는 것을 만들어 철저하게 직관적으로 접근했다. 양자 역학 항목에서도 나오듯 골때리는 양자 역학을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라는 듯하다. 그의 접근 방식인 '''경로 적분'''은 '파동성'의 도입 대신 입자의 경로가 모호해지는 것을 '''입자는 가능한 궤적을 모두 동시에 지나간다'''는 것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 창의적인 도구들을 활용하여 세운 업적이 바로 '''양자전기역학(QED; Quantum ElectroDynamics)을 완성'''한 것이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자면 '''양자역학으로 기술되는 전자기학을 완전하게 만들었다'''는 정도. 의외의 사실로, 전자기 상호작용이 제대로 양자역학적으로 기술되기까지는 양자역학이 태동하고나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심지어 처음 '양자화'가 시도된 대상이 빛의 알갱이, 즉 광자인데도 말이다. 사실 막상 알갱이로 놓긴 했어도 이에 대한 이론적인 배경은 굉장히 부실했었다. 일단 '''왜 $$E = h\nu$$가 성립해야 하는가'''하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전자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적 방정식은 슈뢰딩거 방정식, 디랙 방정식이 있긴 해도 막상 '''빛, 혹은 광자를 양자역학적으로 기술하는 방정식'''도 없었다. 사실 후에 밝혀지기로 맥스웰 방정식이 그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긴 하지만 이 방정식에 대한 제대로 된 양자역학적인 접근 방식이 등장하려면 파인만, 슈윙거, 도모나가 등이 QED를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여담으로 파인만과 슈윙거가 처음 QED를 발표하는 장면도 흥미롭다. 슈윙거는 엄청나게 어려운 수학을 동원해가며 발표를 하는 통에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거의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파인만은 자신의 직관이 서린 독특한 방식으로 '쉽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이때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이에 대해 엄청 따졌다고(...).[32] 결국 이 업적을 인정받아 이 세 사람은 196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쿼크 모델이 창안되는 과정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사실 쿼크 모델의 단순화된 모델을 제시한 셈인데, 이 모델에 따르면 양성자를 비롯한 강입자들은 '파톤(parton)'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쿼크 모델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 쪽은 좀 더 뭉뚱그린 느낌.[33] 이 모델을 통해 양성자에 전자 같은 더 작은 입자를 부딪혔을 때 어떤 걸 볼 수 있는지 제시하기도 했다. 나중에 실험으로 양성자가 내부 구조를 가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파톤 모델이 아닌 쿼크 모델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지만 '파톤'이라는 이름은 살아남아 학계에서 여전히 쓰이고 있다. 사실 쿼크와 글루온들을 한데 묶어 부를 일이 많은데, '파톤'이라는 이름이 이럴 때 적절하기 때문에. 실제로 주어진 강입자(거의 대부분의 경우 양성자) 내부에 있는 쿼크와 글루온의 분포를 가리켜 파톤 분포함수(PDF; parton distribution function)이라고 부른다.
또한 나노머신 이론을 최초로 제창한 사람도 이 사람이다. 1959년 12월 29일 디너 모임에서 '바닥에는 풍부한 공간이 있다'며 어떤 책 한 쪽을 2만 5천분의 1로 축소해 전자현미경으로 읽을 수 있게 하는 첫 번째 사람과 한 변이 0.4mm인 정육면체 크기의 모터로 외부에서 제어할 수 있는 회전 전기 모터를 처음 만드는 사람에게 각각 1천 달러를 주겠다고 내기를 걸었다. 내기를 건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1960년 칼텍 졸업생 윌리엄 H. 매클레런이 두 번째 내기에서 요구한 모터를 만들어 상금을 받았고, 25년 후인 1985년 스탠퍼드 대학교 학생 톰 뉴먼이 전자빔으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축소시켜 상금을 받았다.#
또한 양자컴퓨터의 고안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동기도 심히 물리학자답다. 양자역학을 다루기 위해 보통 파동함수를 계산하든가 시뮬레이션을 하든가 하는데, 그 방식은 지금도 그렇지만 슈뢰딩거 방정식 같은 걸 일일이 직접 풀어서 수행하는 식이다. 그리고 파인만이 이 문제를 고민한 1980년대도 그렇고 심지어 지금도 양자역학 문제에서 나타나는 방정식이라든가 확률 분포 문제를 쉽게 푸는 방법은 없다. 파인만이 깨달은 건, 결국 우리가 쓰는 계산기가 고전적인 탓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계산기를 양자역학적으로 구동하도록 만든다면 양자역학 문제들이 훨씬 더 쉽고 빠르게 풀릴 것으로 파인만은 기대했다. 이런 식의 아이디어로 양자컴퓨터가 등장하는 동기 중 하나를 파인만이 마련하게 된 것이다.[34]
본업에서도 좀 무서운 경험을 했는데, 프린스턴 대학 대학원생 때 첫 논문 발표회 때 나타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다. 지도교수가 아인슈타인을 비롯해서 온갖 유명한 사람들이 온다고 했는데, 참석자들의 이름을 듣고 얼굴빛이 심하게 안좋아졌는지 급히 교수가 파인만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다음은 그때의 에피소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파인만은 과학자로서의 명성도 엄청나지만 교육자로서의 명성도 엄청나다. 사실 연구를 이끄는 능력과 강의를 이끄는 능력은 아무리 저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정비례 관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아예 '별개의 관계'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면 대학 시절 강의를 들었던 교수들을 떠올려 보면 된다. 누가 봐도 학력과 경력, 업적은 능력자인데 막상 강의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교수자리에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교수가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특히 프라이드만 강하고 아날로그에만 고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실제로 업적만 따져도 백과사전 수준인 아이작 뉴턴이나 요하네스 케플러도 강의력 자체는 의외로 별로였다고 한다. 그러나 파인만은 연구만큼이나 강의를 이끄는 능력도 뛰어났다.파인만이 자신의 첫 논문을 발표하는 그 자리에는 아인슈타인뿐만 아니라 유진 위그너, 볼프강 파울리까지도 와 있었다고. 그런데 발표가 끝나고 논평이 오가는 와중에;
파울리: 아인슈타인 박사님, 파인만의 저 이론은 여차저차해서 틀린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아인슈타인: 노오오오 ~ (Noooo~.)[35]
-('파인만 씨 과학을 웃겨주세요','파인만 씨, 농담도 잘 하시네!'중에서)
사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이공계의 공부는 딱딱하고 어렵기로 악명 높은데 파인만은 그렇게 생각되는 물리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심도 있을 뿐만 아니라 유머러스하게 학생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강의가 담긴 '''빨간 책'''은 수많은 물리학도와 공학도의 필수요소가 되었다. 파인만 본인도 주입식 교육을 싫어하고 스스로 깨치는 교육을 좋아했다고 한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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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단순한 빨간색 표지는 원래 드럼을 좋아하는 파인만이 자신만의 신조인 과학과 실생활을 결합을 뜻하게 드럼을 그려두고 그 위에 음파나 수식을 뜻하는 여러가지 과학기호 등을 넣고 싶었으나 출판사에서 현재와 같은 표지로 정하고 저자소개란에 봉고를 치는 파인만 사진을 넣어서 '드럼'을 좋아하는 저자의 취향을 조금 살리는 디자인으로 완성하였다.
5. 활동
앞서 말했지만, 로스 알라모스에서 핵무기 개발계획인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가하며 닐스 보어 같은 여러 거장들을 만나게 된다.[37] 파인만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닐스 보어는 이미 물리학의 거두였던 자신의 앞에서 어떤 반대 의견도 내놓지 않는 다른 물리학자들에게 크게 실망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파인만은 그런 권위 따위는 모르는 천성을 지닌 지라 물리학에 대해 토론할 때만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으면서 계속 치고 받았다는데,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보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보어에게 '싸가지 없이' 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보어가 생각(파인만이 보기에 이상한 의견)을 내놓으면 그걸 들은 파인만은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예요!"'''라고 말했다. 이 때 보어는 이름만 동료일 뿐 자신의 권위를 두려워하는 작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이런 파인만의 태도를 아주 신선하고 흡족하게 여겼다. 자세한 건 Richard P. Feynman, '발견하는 즐거움', 승영조 옮김, 승산, 2001 참고
당시 일화. 후에 닐스 보어는 역시 물리학자인 그의 아들(오웨 보어, Aage Bohr)에게 '''"저 녀석은 나중에 정말 크게 될 놈이니 잘 지켜보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그가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기여 안 한 건 아니다. 한스 베테와 같이 현재도 기밀에 속하는 베테-파인만 방정식을 만들어냈기 때문.
파인만은 핵에 대해 죄책감을 가졌던 아인슈타인과는 달리 그다지 죄책감 같은 건 안 느꼈다고 한다. 이 부분은 로스 엘러모스에서 만났던 존 폰 노이만의 영향이 크다고 자서전에서 썼다. 폰 노이만과 함께 산책을 하면서 "자기가 사는 세상에 자기가 책임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폰 노이만의 사상에 물들어 버렸다고 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그의 책에서 나타난 히로시마 원폭 투하 순간의 행동 묘사다. '''레스토랑에 앉아 '지금쯤 터졌을 거야' 짐작하고 신나게 폭발 반경을 계산하면서 들뜨는 것은 물론 봉고도 친다.''' 일부 과학자들이 투하 자체에 정신적 충격을 받거나, 최소한 작전 관련자들이 대규모 파괴무기의 사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
그래도 파인만도 아주 충격을 안 받은 건 아니었는데, 죄책감보다는 대신 허무감을 느껴서 다만 잠시 멍~ 해졌다고 한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전후 복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차피 핵 한 방이면 다 터지는데 다시 만들어서 뭐하나''' 같은 생각이 들었고, 자서전에 따르면 '그것에 대한 생각을 그만 둔' 부류가 되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생각을 더하던 부류는 핵이 성공리에 터지고 연구원들 파티할 때 구석에서 '궁상을 떨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다가 대부분은 반전, 반핵운동으로 빠졌다고 한다. 더불어 아직까지 그런 일(핵폭발 때문에 기껏 전후 복구한 것이 허사가 된 것)이 다시 없어서 다행이라고도 썼다.
그가 이렇게 핵에 대한 태도를 일찌감치 자기완결을 지은 것은 평상시의 캐주얼한 태도와도 연결된다. 파인만은 명쾌한 결론과 끝맺음이(설사 그것이 제3자나 피해자가 보기엔 도덕적 책임감을 외면한 것처럼 보여도) '쿨'한 것을 선호했고, 계속해서 되짚어보거나 큰 판단을 재검토, 재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핵에 대해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동료들을 '궁상'으로 표현한 것을 보아도 그가 신속하게 결론내리지 못하는 행동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았음이 묻어난다.
덤으로 '''맨눈으로 핵폭발을 보면 눈이 먼다'''가 거짓말임을 몸으로 증명했다. 이전까지 높으신 분들은 핵 실험을 참관할 때 모두 이런 모양의 고글을 끼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봤었다. 그러나 파인만은 자동차 안에서 맨눈으로 보았고 정말 멀쩡했다. 이는 핵폭탄이 터질 때 발생하는 빛 중 가시광선보다 자외선이 더 해롭기 때문인데, 이를 알았던 파인만은 자외선만을 막기 위해 차 안에서(자외선은 유리를 통과하지 못한다) 실험을 참관했다.[38] 하지만 남들이 10km 거리에서 얼굴도 못 들고 후폭풍이랑 싸울 때 자신은 30km 밖에서 저 앞에선 머리도 못들고 있겠지~하면서 구경했다고 한다.
만년엔 환각 탱크를 이용한 환각체험을 하거나 하는 등 신비스러운 것들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과학과 합리적인 생각이 그의 습관이기에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맹신하는 말도 안 되는 것은 화물 신앙(Cargo Cult)라고 부르며 별로 안 좋아했다. 그런 사고방식을 고수하면서 철학계의 뻘짓도 깠는데, 이는 당시 상대성이론을 두고 (특히 유럽 쪽) 철학계가 뻘짓한 게 좀 크다. 쉽게 말해서 상대성 이론을 제목만 보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고 생각하여 막 써먹었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에서는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면서 이에 대한 철학계의 오해를 비판하는 데 제법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그룹은 훗날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로도 한방 물을 먹기도 했다.
로스 알라모스 시절에 피폭된 방사능으로 인해 암투병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과학적인 생각은 죽지 않아서 1986년 1월 발생한 STS-51-L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 사고의 조사위원회에 초청되어 활동했으며, 혼자서 나머지 조사위원 11명을 올킬하는 위엄을 보인다. 폭발이 물리적으로는 저온 상태에서 탄성이 저하된 O자 형태의 고무링(줄여서 O링이라 부른다.)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보신주의 문화와 관료체계에 쩔어있는 NASA의 문화에 있음을 밝혀냈다. 이때 조사 결론 발표장에서 간단하게 입증했던 실험이 '''O링 테스트'''다. 고무링을 꼬아서 고정시킨 뒤 얼음물에 넣으면 탄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해보인 것이다. 실험 영상 단, 알려진 것처럼 파인만 혼자서 이 사실을 알아낸 것은 아니다. 파인만 본인이 나중에 말했지만, 이미 나사의 현장 엔지니어들은 O링이 문제였을 거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지만 쓸데없이 입을 열었다가 까이기는 싫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파인만의 자서전이나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챌린저:마지막 비행 등에 다르면 당시 조사위원회는 로널드 레이건의 지시를 받은 위원장의 영향으로 최대한 나사의 입장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 친정부에 속하지 않았던 한 명이었던 공군 소장 도널드 쿠티나에게 샐리 라이드가 비밀리에 O링과 낮은 기온 간의 문제 가능성을 쪽지로 전달했고, 쿠티나는 샐리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의심을 받지 않을 방법을 고심한 끝에 매우 교묘하게 파인만에게 정보를 흘린다. 파인만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아끼는 자동차 보러 오시겠음?' 라는 식으로 넌지시 파인만을 초대했고[39] 파인만에게 '엔진에 쓰이는 o링이 날씨가 추우니까 문제가 생기는지 엔진이 자꾸 새더라' 식으로 암시를 흘렸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파인만은 이후 O링을 붙들고 늘어지며 이게 문제였음을 사람들 앞에서 알리게 된다.[40] 2013년 BBC에서 제작한 TV 영화 <The Challenger Disaster>에서 이 모습이 교묘히 나타난다. 작중 배경을 잘 모르던 사람은 막판 반전을 깨닫고 무릎을 탁 칠 정도.
신장 투석까지 받아가며 사건의 규명에 매달리는 파인만의 모습은 과거 2차대전기 자신이 저지른 과학의 오용에서 비롯된 죄책감과 절실함으로까지 느껴진다는 평.[41] 쿠티나 장군의 조교 행각은, 나쁘게 말하면 파인만을 이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게 보는 건 너무 삐딱한 시각이고,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면서도 친구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까 고민한 사람의 현명한 결정 정도로 생각하자. 파인만 본인 역시 이 장교의 합리적인 사고방식, 검소한 생활 등을 매우 좋아했고 칭찬해서 친하게 지냈다.
여담으로 이 조사위원회 위원 중에는 달 착륙으로 유명한 닐 암스트롱도 있었는데, 파인만은 암스트롱에게 굳이 사인을 얻으려 했다. 주위 사람들은 파인만의 성격을 알아서 파인만이 사인을 딸아이에게 주기 위해 저런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다른 사정이 있었다. 한 택시기사가 파인만에게 암스트롱의 사인을 받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 택시기사는 파인만이 노벨상 받은 슈퍼스타 과학자인지도 모르고 그냥 높으신 분이라고만 알았다. [42]
6. 저술과 구술서 등
그의 이야기를 구술한 책 '파인만 씨, 농담도 잘 하시네요(Surely You're Joking, Mr.Feynman!)'[43] 이나 '남이야 뭐라 하건!(What Do You Care What Other People Think?)'은 물리학자의 일대기를 쓴 책답지 않게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44]
강의를 좋아했지만 그의 강의 관련 자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학부생을 위해 물리학을 정리한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Lecture on Physics)'만 알려져 있는 편이다. 표지가 빨개서 일명 '''빨간 책'''. 원래부터 학부생 대상의 강의록을 편집한 것이고[45] 국내의 모 대학은 1학년 물리 교재로 쓰기도 했으나 첨단과학을 접하기 전에 잡다한 것만 해서 물리에 질려버리는 학부생 기준[46] 이라 일반적인 학부생에게는 쉽지 않은 책.[47] 그가 여기서 사용한 그만의 이론적으로도, 실제로도 의미가 있는 비유들은 현재 사용되는 교재들에도 영향을 줬다. 물론 유머를 제외하고. 본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업적은 바로 저 빨간 책을 낸 것이라고 한다. 칼텍에 가면 파인만의 빨간 책 원문을 무료로 볼 수 있다.1권2권3권
42와 관련된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온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유튜브에 가서 파인만을 치면 실제 강의가 몇 개 나온다.두 개의 전자가 서로 적당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을 때, 전기력은 이들을 서로 밀쳐내고 중력은 이들을 서로 잡아당기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두 가지 힘의 상대적 비율은 전자 사이의 거리와 무관하며, 자연계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상수이다. 중력을 전기력으로 나눈 값은 1/(4.17 X 10^'''42''')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전기력의 세기가 중력의 4.17 X 10^42 배 라는 뜻이다. 이렇게 큰 숫자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것은 벼룩의 부피를 지구의 부피로 나눈 것처럼 우연히 나타난 숫자가 아니다. 우주의 근본을 이루는 전자의 두 가지 성질을 비교하면서 얻어진, 필연적인 숫자인 것이다. 이 환상적인 숫자는 자연에 내재된 근본적인 상수이므로, 무언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훗날 우리가 범우주적인 방정식을 찾아낸다면, 이 방정식의 근들 중 하나가 4.17 X 10^42 일 것이다" 라며 낙관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괴물같은 숫자를 근으로 갖는 방정식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다. 그중 하나는 이 숫자를 우주의 나이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영역에서 엄청나게 큰 숫자를 또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주의 나이를 '년(year)' 단위로 헤아리는 것이 과연 옳은 발상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1년이라는 시간은 오직 지구라는 행성에서만 통용되는 단위일 뿐, 결코 범우주적인 시간 단위가 될 수 없다. 이보다 좀 더 자연적인 시간의 척도로서, 빛이 양성자를 가로지르는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해보자. 이것은 약 10^(-24)초이다 현재 알려진 우주의 나이는 대략 2 X 10^10년[48]
인데, 이 값을 10^(-24)초로 나누면 그 결과 역시 10^(42)이다. 0의 개수가 '''42개'''로 같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력 상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주는 지금도 계속해서 나이를 먹고 있으므로, 우주의 나이를 10^(-24)초(빛이 양성자를 가로지르는데 걸리는 시간)로 나눈 값도 점차 커져갈 것이기 때문이다. 중력 상수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이 변화는 엄청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수십 년 사이에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49]
-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CHAPTER 7 중력
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 크리스토퍼 시케스가 1994년 쓴 ‘No ordinary genius(평범한 천재가 아닌)[50] ’도 괜찮다고 한다. 과학동아의 관련 기사
7. 순정남에서 카사노바로
결혼은 여러 번 했지만, 처음 결혼했던 부인 알린 외의 부인들에 관해서는 비중있게 언급되지 않는다.
첫 아내인 알린은 16살 때부터 파티장에서 만나 사귀었고 대학교 즈음에 결혼했지만, 학사 과정을 밟는 나이 때쯤 로스 알라모스에서 일할 때쯤에 폐결핵으로 사별했다.[51][52]
여동생인 조앤 파인만의 진술에 따르면, 결혼할 때에 알린이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파인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병이 전염될 것을 우려한 파인만의 어머니가 결혼을 거세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결혼에 골인했으나 끝내는 사별했으니, 파인만이 유독 슬퍼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때 남들에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아내는 죽었어. 자, 일이나 하자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변 사람들 역시 파인만이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해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구나' 라는 걸 깨달은 뒤 그 주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의 사망 한 달 후 옷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진열되어 있는 옷 중 하나를 보고 '알린이 저 옷을 좋아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자 길거리에서부터 집에 갈 때까지 미친듯이 울었다고 한다.
-아내가 죽은 지 2년 뒤인 1947년 10월에 쓴 편지“난 여러 여자를 만났고 그 중에는 함께 있고 싶은 멋진 아가씨들도 있었지. 하지만 두세 번 만나면 다들 재가 돼 사라지는 것 같아. 내게는 당신만이 남겨져 있지. 당신만이 진짜야. (중략)
추신. 이 편지를 부치지 못한 걸 용서해 줘. '''하지만 난 당신의 새 주소를 알지 못하는 걸.'''”
그 반동인지 아내 사망 후에는 물리학계의 카사노바로 진화했다.[53] 본인이 스스로 인증했을 정도다. 술집과 카지노에서 라스베가스의 유명 선수와 어떻게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그가 여성을 꼬시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전수해줘서 그걸 몇 번 써 먹었다고 한다.
비결은 별거 없고, 그냥 나쁜 남자가 되라는 것인데, 절대로 같이 자기 전에는 밥 사달라고 해도 사주지 말고, 영화표도 사주지 말고, 뭐 해달라고 해도 거절하면, 너와 잘 거고 그 다음은 니가 알아서 하세요 식 조언. 사실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진짜 있던 일인지도 의심스러운 일화이고, 진짜 있던 일이라 하더라도 파인만의 잘생긴 외모와 사회적 배경을 보고 다가오는 여자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했던 조언이라는 추정도 있다. 파인만의 끊임없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에게 다가간다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누누히 말하지만, 진위가 의심스러운 일화이므로 가볍게 넘어가도록 하자.
나중에 남부 여성에게도 한 번 써먹은 뒤 자신과는 안 맞아서 그만 뒀다고 하지만 12명 넘는 여자에게 프로포즈 받았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다. 뭐 그런데 저 라스베가스에서 선수에게 사사한 일화는 조금 의심스럽기도 한 게[54] 사진을 보고 일화를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잘생긴 외모와 유머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여자 꼬시는 데에 굳이 선수의 가르침까지 얻을 정도로 쑥맥이지는 않았다.
여하간 일단 라스베가스로 여름휴가를 매번 떠나거나 토플리스 댄스 클럽( 한마디로 스트립 클럽)에 자주 가는 등 호색한이 아닐까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55] 그를 존경하는 로렌스 크라우스가 쓴 퀀텀맨이라는 책에서는 아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술과 섹스에 탐닉했다'라고 묘사하기까지 한다. 여하튼 간에 여자 좋아한 건 사실인 듯.
두 번째 아내 메리 루이스 벨과는 결혼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 파인만 스스로 '사람이 외로워지면,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그리워지고, 그 사람을 만나서 몇 번 만남을 가지고 잠을 자고 하다 보면 명백히 성격이 안 맞고 오래 갈 수 없다는 게 분명해도 이 사람과 사는 게 괜찮을지도 몰라 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그녀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라고 말한 걸 보면 어지간히 성격이 안 맞았던 모양이다. 메리 루이스 벨의 이혼 소송 중 발언도 재미있는데 '그 사람은 눈을 뜨자마자 계산을 시작하고, 차를 몰면서도 계산하고, 거실에 앉아 있을 때도, 침대에서도 계산한다' 라는 말을 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보면 당혹스러운 일화는 1954년 엔리코 페르미가 죽은 직후 시카고 대학에서 있었다. 시카고 대학은 마침 빈 교수자리를 칼텍의 파인만으로 채우려고 엄청난 급여를 제안했다.[56] 하지만 파인만은 이렇게 쿨하게 답했다.
처음엔 파인만의 순애보나 성실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일화가 전혀 다르게 읽히는 걸 볼 수 있다. 여하간 아내에겐 비밀로 했다고 한다."그 돈이면 저는 멋진 정부를 하나 얻어서 아파트랑 비싼 물건도 살 수 있겠군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합니다. 밖에선 그 여자를 생각하고 집에서는 아내와 다투겠죠. 그럼 저는 당연히 불행해질 테고, 물리 연구는 전혀 못 하게 되겠죠.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결국 스위스에서 세 번째 아내를 맞았다. 미국에 와서 가정부 해주면 돈 좀 주겠다고 했단다. 마침 세계여행을 계획 중이던 귀네스 하워드는 솔깃한 제의에 혹했고, 그것에 낚여서 가정부 일을 하다 결혼하게 되었다. 처음 왔을 때 옷이 한 가지 종류 밖에 없어서 놀랐다고 한다.
8. 철학에 대한 경멸
파인만은 물리철학(philosophy of physics)에 매우 뛰어났다.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입자와 장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이후 양자장론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반물질이 시간을 역행하는 입자일 수도 있다는 설을 제시하는 등(사차원주의, 시간 여행 등에서 중요한 논제이다) 물리적 실재에 대한 조예가 깊다. 또한 여러 인터뷰에서 교육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는 등 실용주의적 통찰이 있었다. 많은 물리철학자들은 파인만이 물리철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실재론자로서 이들을 제외한 모든 철학을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폄하했다.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요' 나 '물리학 강의' 등의 저서를 보면 파인만이 철학, 특히 형이상학적 탐구에 대한 철학을 거의 경멸에 가깝게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종교에 대한 경멸도 드러내며, 비실용적 가치탐구 전반에 대해 '그까이꺼' 에 가깝게 경시하고 있다. 패러다임이라도 존재는 과학에 비하여 기본적 근간 자체를 항상 재정의하려고 드는 철학은 태생적으로 실용적 혹은 합리주의적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진보되었다' 라고 간주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이는 영미(과학)철학계와 유럽철학계의 성향차이에도 기인한다. 특히 미국은 철학계도 기존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강화, 심화시키는 이른바 '깊이'에의 천착이 현저한 편이라, 일상언어의 재정의를 통한 낯설게하기까지 마구 쓰는 유럽, 특히 프랑스 철학계와는 양극단과도 가깝다.
핵에 대한 입장에서도 이러한 성향이 드러난다. 일본에 핵이 투하되어 도시가 궤멸하는 도중 봉고를 두들겼다는 일화나, 핵무기에 대해 되돌아보았지만 금방 머릿속에서 지우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는 양심의 정리 이야기 등에서 특정 가치 여부를 결정한 후(노력과 지성을 쏟아부은 연구의 결과물이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앞으로는 핵이 사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재고하지 않고, 자꾸만 다시 돌이키는 동료들을 궁상 떤다고 표현한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재적 지식을 생산하지 않는 모든 것을 배척했다.
인문학계에서 소칼[57] 의 경우 충분한 근거와 결정적 열쇠를 쥐고, 비판 대상을 특정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행태로 삼음으로써 인문학자들 충분한 공감대를 불러일으켰지만 파인만의 경우에는 그저 '철학 싫어하는 한 개인' 이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9. 노벨상에 대한 일화
196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는데, 사실 그는 노벨상을 받는 것을 매우 귀찮아 했다. 유명해지는 것과 권위를 얻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노벨상을 안 받으려 했지만, 타임지의 기자에게 오프 더 레코드로 '안 받고 싶은데 어쩌면 좋겠냐'라고 상담하자, 그 기자가 "'''노벨상을 안 받으면 안 받았다고 더 유명해질 겁니다."'''라고 충고해줘서 마지못해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스위스 대사관에서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며 "이번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셨습니다"라고 연락했을 때, '''''지금이 몇 신지 아시오!"'''라며 끊었다. 그 뒤로도 유명세 때문에 갖은 홍역을 치러서 꽤나 피곤했던 듯하다.
노벨상 수상 후에는 학생들을 위한 강연에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죄다 몰려오는 게 너무 싫어 일부러 전혀 유명하지 않은 교수 이름으로 강연회 등록한 후 본인이 나타나서 강의를 하는 방식을 취했다. 물론 나중에 들통나고, 학교에서는 '파인만 선생님이 오시는 거면 더 큰 데를 빌리고 했어야지!' 하며 담당 학생들을 쪼고, 파인만은 결국 학생들을 변호해야 하고... 뭐 이런 후폭풍을 겪은 듯. 후에 BBC 인터뷰에서 자신은 이미 상을 받았으며 그 상은 바로 발견하는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했다.
10. 남은 이야기
9살 연하의 여동생 조앤 파인만은 천문학자로, 태양풍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한때 취미로 일본식 시조인 하이쿠를 짓기도 했다. 하이쿠는 길이가 짧고 영어에 적용가능한 규칙이 있기 때문에 의외로 미국에서도 자주 창작되는 문학 종류다. 의외로 인문 쪽 취미에 발가락 담근 미국 과학자들이 남긴 하이쿠가 많다.
원래는 생선을 싫어했는데, 강연 때문에 일본에 가서도 질색하다가 생선이 맛있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고 생선도 맛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생각한 뒤 미국에 가서도 즐겁게 생선을 먹으려 했으나, 미국의 생선은 여전히 맛이 없었고 파인만은 그제서야 생선은 신선하지 않으면 맛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거의 똑같은 레퍼토리로 굴 이야기도 한 걸 보면 일본에서 신선하고 맛잇는 해산물 맛을 알게 된 듯.
여성운동에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는데, 파인만이 칼텍에서 신입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했을 때 속도에 관한 주제로 얘기하던 중에 강의 중 '과속하던 여성 운전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과 별이 핵융합을 통해 빛을 낸다는 이론이 발표되면서 "지금 내가 별들이 어떻게 빛나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남자야"라며 불필요하게 '남자'라는 단어를 삽입한 것에 대해 여성운동 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하며 파인만을 해직하라며 대학 앞에서 데모를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파인만은 경찰도 여자였다고 맞받아쳤다.# 물론 나중에 덧붙여 '난 내 여동생도 물리학자라고 한 사람이다'라는 나름 진지한 변호를 덧붙이기는 했다.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박사 논문을 심사하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파인만을 지지해주기 위해 한 발언이었는데 그걸 두고두고 써먹었다고 한다.
유언은 '''"두 번은 못 죽겠다. 너무 지루하거든. (I'd hate to die twice. It's so boring.)"''' 말년에 병이 심해져 자리보전하던 무렵에는 가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뜨면서 "나 아직 안죽었어." 하고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
유명한 공감각자이다. 수식마다 색깔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주장을 듣게 되면 근거들이 동그란 공의 표면에 뭔가 솟아올랐다가 모양이 바뀌는 식으로 느끼다가, 마지막에 모양이 영 아니면 틀린 주장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수학자들과 위상기하학에 대해 논쟁하다가 썼던 방식이라고 한다.
큰 수를 가리킬 때 "천문학적"이란 표현을 경제학적으로 바꾸자고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문서 참고.
말년에 친구와 소련 투바 자치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인 키질(Кызыл, Kyzyl)에 영어 모음이 없다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58] 그리고 암에 걸려 그 직후 사망한다.
세상이 멸망하고 모든 지식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딱 한 문장만 전할 수 있다면 무엇을 전하겠냐는 질문에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All things are made of atoms')라는 내용을 전하겠다고 말하였다는 일화가 있다.